욥기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욥기의 첫 설교를 통해 우리는 욥기의 신학적 배경을 다룬 바 있습니다. 그 배경을 이제는 다시 한번 기억해야 합니다. 욥기는 하나님과 사탄의 천상의 이야기에서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욥을 아끼고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욥의 마음에 대한 의심을 갖고 하나님께 욥에 대한 시험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믿었기에 욥에게는 사탄이 주는 고난이 시작되는 아이러니가 욥기의 배경입니다. 욥기가 이 아이러니 속에서도 강조하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하나님과 사탄이 급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에게 욥을 시험하고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그 시험의 범위와 한계를 정해주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사실 사탄은 독자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나옵니다. 그래서 욥기 저자는 사탄에게 정관사를 붙여서(the satan), 사탄을 비인격적인 존재로 격하시킵니다. 사탄은 ‘그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적어도 우리에게 생각의 전환을 가져오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에서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관점에 따라서 다릅니다. 욥의 고난은 사탄의 비뚤어진 시기심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고난을 허용하신 것에 대해서는 맞습니다. 하나님은 악의 제한적 활동을 허용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악과 씨름하기로 결정하십니다. 악을 제거해서 선에 머물 수밖에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함을 선택하지 않음으로 하나님이 선택받으시는 방법을 취하십니다. 이로써 사랑의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에
의해서 자신이 기쁨을 얻으실 수도 있고, 상처를 받으실 수도 있는 가능성을 활짝 열어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도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과 악에 대항하여 씨름하고 투쟁하는 주체로 한 인간을 내세우셨습니다. 욥은 그 일을 위해 부름을 받은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와 자존심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위탁하시고 의존하시는 모험을 하십니다. 이것이 천상의 싸움이라면, 그 싸움의 대리자는 세상에서 현실에 뿌리를 박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죠. 신앙은 현실에 저항하는 이상적인 몸부림이지만, 결국 그것이 현실 안에서 작동될 때만 울림이 됩니다. 하나님을 대신하여 악이 주는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욥. 그를 찾아온 다양한 ‘악함’ 속에서, 그는 ‘신앙’으로 이 현실을 돌파해낼 수 있는가? 어쩌면 욥기가 주목하고 있는 초점은 그것에 있습니다. 욥기가 보여주는 현실의 싸움은 무엇입니까? 저마다 자기가
진리라는 사람들이 내뱉는 비진리의 향연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갈 참된 진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를 진짜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적습니다. 문제는 저마다 진리를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욥기는 욥의 친구들이 말하는 자기들 나름의 ‘지혜’를 보여주면서, 다분히 의도적으로 그들이 실상은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줍니다.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욥이 왜 고난 당했는지 전혀 모르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떠들어댑니다. 결국 욥의
세 친구의 지혜는 욥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구세대의 논쟁을 보다 못해서 끼어든 MZ 세대인 엘리후의 지혜 역시 구세대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며, 인간의 지혜가 가진 한계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저마다 다 자신이 옳다고 여기고 지혜 있다고 하지만, 그들은 사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떤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참된 지혜는 무엇인가? 지금 나는 세상의 책과 대중매체를 통해서 참된 지혜를 배울 수 있는가? 저는 우리에게도 이런 근원적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저를 가르치던 전도사님이 이런 류의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너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옆으로 걷기 시작하면, 앞으로 걸을 수 있겠니?” 우리의 존재가 앞으로 걸을 수 있도록 창조되었지만, 세상 모두가 옆으로 걷고 있는 상황에서 존재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이 점점 나이가 들수록 쉽지만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이거 해야 해, 저거 해야 해.” “이렇게 안 살면 바보야, 이렇게 안 살면
살 수 없어.” 우리는 정말 ‘그것이 답인가?’ 고민하는 일이 너무나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그래야만 나는 왜 다르게 살 것인지 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것을 따라가지 않는지, 나는 왜 옆으로 걷지 않고, 앞으로 걸으려고 하는지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점점 우리의 다음 세대들에게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는 일로 삶의 너무나 많은 것이 결정되는 이 피라미드 구조의 입시 경쟁사회가 싫습니다. 저는
놀아야 하는 아이들을 놀지 못하고 그 경쟁사회 속으로 밀어 넣도록 만드는 이런 악순환의 고리가 싫습니다. 점점 더 양극화되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돈을 모아서는 집 한 채 사기 힘들어진 이 불안정함이 싫습니다. 외모가 권력이 되고, 몸에 두른 것, 타고 다니는 것이 등급이 되어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 소홀해지는 풍조가 싫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경우, 그것에 대한 문제점을 느끼고 싫어하면서도 그 안에서 별수 없이 살아갑니다. 저는 ‘대안’이라는
표현을 좋아합니다. 저는 복음이 어느 시대에나 가장 필요한 이야기로 존재하는 이유는, 세상에 역행하여 살아갈 힘과 용기, 그것을 지켜줄 수 있는 공동체는 하나님 안에서만 주어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시대에나 복음을 진짜 받아들인 사람은 그 시대의 부조리함을 벗어나서 살아갈 용기를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인 ‘참된 진리’를 맛본 사람들은 그래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함’을 누립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살아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살지 않을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그 자유함 속에서 우리는 대안적 삶을 꿈꾸게 됩니다. 그리고 점점 더 그 꿈을 현실로 경험하며 더욱 소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 의심도 필요합니다. 과연 성경이 말하는 것은 진짜인가? 세뇌는 아닐까? 교회는 혹시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보다 오히려 무너뜨리는 곳은 아닐까? 저는 여러분의 삶을 정말 소중히 여긴다면, 세상에 대해서도, 교회에 대해서도 질문하며 답을 찾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책 가운데
<스크루테이프의 편지>가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쓴 매우 유명한 책이죠. 스크루테이프는 하나님의 원수인 사탄입니다. 그의 임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원수인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스크루테이프는 그러한 일의 전문가가 되어 있고, 이제 막 그 일을 시작한 조카에게 자신의 경험을 전수하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보면 이제 사탄으로의 역할을 막 시작하는 조카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의 임무는 환자(크리스챤)의 곁을 지키며 그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성’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발견하길 기대하시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질문은 타당하고 옳습니다. 욥은 계속 질문합니다. 자기 고난의 원인에 대해서 그는 친구들과의 씨름에 그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그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다만 욥이 기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욥기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욥기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내 생각의 틀 안에 가둘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욥 38:1) 그 때에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대답하셨다. (욥 38:2) “네가 누구이기에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지혜를 의심하느냐?” 하나님의 지혜란 하나님이 하시는 일,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잘못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반론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 입증해주시는
자기의 증언자가 되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요구대로 움직이시지 않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은 이유에 관해서도 설명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하나님은 욥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대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은 하나 같이 욥이 대답하기 힘든 하나님만 알고 있는 영역의 것들입니다. 즉, 욥의 존재적 틀 밖에 있는 것에 대한 물음들입니다. 먼저 4~11절까지는 인간의 시간적 한계 밖에 있는 요소들입니다. (욥 38:4)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거기에 있기라도 하였느냐? 네가 그처럼 많이 알면, 내 물음에 대답해 보아라. (욥 38:5) 누가 이 땅을 설계하였는지, 너는 아느냐? 누가 그 위에 측량줄을 띄웠는지, 너는 아느냐? 창조의 때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사실 우리의 인식 이전의 일은 믿는 것 외에는 답이 없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여러분이 태어난 날에 대한 것도 여러분은 그냥 믿는 것 아닙니까? 부모님이 내 생년월일이 언제이고, 몇
시에 태어났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을 우리는 그냥 믿는 것이죠. 그 시간을 우리는 스스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는 하나님만이 그때를 아시고, 우리는 그냥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믿는 것뿐입니다. 과학 또한 더듬어 그 시간을 유추할 뿐, 사실 증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과학은 그저 자연세계 안에 있는 일들을 정리하며 발견해나갈 뿐이죠. 어떤 크리스천 천체 과학자가 자기 동료를 전도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동료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고 말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논리와 이론으로 무장하여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스스로 생겨났다고 믿는 그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래서 어느 날 자기 집으로 동료를 초대합니다. 집 현관에 너무나 멋진 우주에 관한 천체 조형물을 가져다 놓습니다. 예상대로 그의 동료는 조형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걸 누가 만든 거야?” “만든 사람이 없어. 그건 아무도 만들지 않았어.” “아니
만든 사람이 없다니 그게 말이 되나?” “그럼, 자네는 그런 조형물 하나에도 만든 사람이 있다고 믿으면서, 이토록 정교하게 돌아가는 우주와 세상을 보면서 이것이 우연히 스스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가? 우주를 만드신 분이 있다네. 바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시라네.” 하나님은 욥에게 이어서 질문하십니다. 12~30절까지는 인간의 공간적이고 능력적인 한계 밖의 일입니다. (욥 38:12)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여, 동이 트게 해 본
일이 있느냐? 새벽에게 명령하여, 새벽이 제자리를 지키게 한 일이 있느냐? (욥 38:16) 바다 속 깊은 곳에 있는 물 근원에까지 들어가 보았느냐? 그 밑바닥 깊은 곳을 거닐어 본 일이 있느냐? (욥 38:19) 빛이 어디에서 오는지 아느냐? 어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아느냐? 여러분, 이 질문이 어렵나요? 아닙니다. 사실 대답이 정해진 답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대답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질문들을 통해서 욥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모르는 것,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의 존재적이고 인지적인 한계에 대한 진술입니다. 여러분. 저도 목회를 하면서 가끔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도 많이 해 보고, 다양한 경우의 수와 대안도 다방면으로 검토해볼 때가 있습니다. 이제 어느덧 인생의 반을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로 살게 되며, 배움과 경험을 통해 최선의 답을 찾는 일도 조금씩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한참을 고민하며 어떤 결정을
해도, 누군가는 단번에 ‘왜 그렇게 하느냐?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중에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도 있지만, 대체로는 제가 먼저 검토해보며, 어떤 이유가 있어서 포기한 길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그 주장에는 어떤 모순이 있는지, 왜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해야 하는지, 또 교회 전체적인 것을 봤을 때 왜 이런 결정이 필요한지를 설명해주는 일이 많습니다. 모든 결정에는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이 일터나 삶의 영역에서도
많이 겪는 일이 아닐까요? 여러분도 직장에서는 부사수와의 관계에서, 또 여러분의 전문적인 분야에서는 전문가의 식견으로 여러분이 행하는 일들 속에도 이런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사실 이런 행동과 결정뿐 아니라, 따지고 보면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강대상이 이 모양인 것에도, 여기 놓여 있는 것에도 이유가 있고,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이 교회 안에서도 하나하나에는 다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어서 현재의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그 과정이 있고, 그 이유와 답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던지는 자연 만물에 관한 질문의 답은 욥은 모르고 하나님만 아는 것들입니다. (욥 38:33) 하늘을 다스리는 질서가 무엇인지 아느냐? 또 그런 법칙을 땅에 적용할 수 있느냐? 욥기는 이렇듯 인간의 지혜가 가진 한계를 명확히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아는 듯 떠들던 욥의 세 친구와 엘리후가 오더라도 이것에 대하여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모릅니다’만 반복하게 되는 질문들이죠. 그럼,
그 대답을 계속하면서 이들이 오히려 알게 되는 것들이 하나 생길 것입니다. “아,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구나.” 그렇습니다. 이것이 욥기가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르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왜 내게 이런 고통이 생겼는지만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우리의 삶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일투성이입니다. 그냥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사실 다 우리가 모르는 것입니다. 과학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사실 과학자들은 절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과학은 가치의 문제를 이야기해주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당위의 문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것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런 것들은 과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욥기는 놀랍게도 우리를 그런 질문 앞에 세우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근원은 결국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이런 질문들이 이어지거든요. (욥 38:25) 쏟아진 폭우가 시내가 되어서 흐르도록
개울을 낸 이가 누구냐? 천둥과 번개가 가는 길을 낸 이가 누구냐? (욥 38:26) 사람이 없는 땅, 인기척이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는 이가 누구냐? (욥 38:30) 물을 돌같이 굳게 얼리는 이, 바다의 수면도 얼게 하는 이가 누구냐? (욥 39:19) 욥은 대답해 보아라. 말에게 강한 힘을 준 것이 너냐?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달아 준 것이 너냐? (욥 39:27) 독수리가 하늘 높이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네 명령을 따른 것이냐? 결국
어느 시대에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며 살아갈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선악과 사건은 인류 내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존재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을 지혜롭게 살아가면 된다고 말합니다. 지금도 세상은 우리에게 우리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예배하면서도 때로는 우리는 내 삶에서 주님이 주인 되시는
것은 결정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도권을 내가 갖고 싶은 것이죠. 어쩌면 하나님이 주인 되는 삶은 가장 쉬우면서 가장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 모든 만물을 다스릴 능력을 주셨지만, 그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서고자 하는 욕심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세상을 다스리는 지혜와 능력이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구별된 특별한 존재로 지으셨다는 근거도 되지만, 동시에 유혹도 되는 것입니다. 39장에는 하나님께서 인간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세계 안에 있는 피조물도 돌보신다는 것이 잘 표현됩니다. 모든 자연세계를 창조하고 돌보며, 그 질서를 세우시고 섭리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욥이 고백하도록 만드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사를 가진 어린이 찬양이 있습니다. 뼝뼝뼝뼝 병아리는 알고 있나 봐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하하하하 하나님 감사합니다 물 한 모금 물고도 하늘을 보네 저는 어린 시절에 병아리를 자주 키웠는데, 병아리는 물을 먹고는 하늘을 보거든요. 이 찬양을 지은
분은 그것에서 병아리가 창조하신 분께 순응하는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진실은 모르죠.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태도가 이것임을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경외’라고 표현합니다. 경외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함’을 의미합니다. 나보다 크신 존재에 대한 전적인 인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만 경외함 가운데 사랑하는 것입니다.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설명하는 이 부분에는 제가 예전에 꽂혀 있었던 창조과학회의
재미있는 주장이 나옵니다. 바로 ‘리워야단’과 ‘베헤못’이죠. 쉽게 말해서, 창조과학회는 성경 안에 공룡이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그 근거로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말합니다. 그리고 저도 한 때는 그 주장을 신봉하고 빠져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서신학을 더 깊이 공부해보면서 지금은 그 주장들을 따르지 않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베헤못은 ‘하마’ 계열의 동물이고, 리워야단은 ‘악어’, 특히 나일악어 계열의 동물입니다. 개역한글에서는 ‘하마’와 ‘악어’로
번역했으나, 개역개정에서는 성경의 음절대로 ‘베헤못’과 ‘리워야단’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욥 40:15) 베헤못을 보아라. 내가 너를 만든 것처럼, 그것도 내가 만들었다. 그것이 소처럼 풀을 뜯지만, (욥 40:16) 허리에서 나오는 저 억센 힘과, 배에서 뻗쳐 나오는 저 놀라운 기운을 보아라. 구약의 배경이 되는 이집트 나일 문명권에서는 하마와 악어는 가장 곤란한 동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하마는 농사를 망쳐놓기에, ‘혼돈’을 의미하는 동물로 인식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대의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들이 하마를 사냥하는 것을 ‘악’을 무찌르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욥 41: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으며, 끈으로 그 혀를 맬 수 있느냐? (욥 41:2) 그 코를 줄로 꿸 수 있으며, 갈고리로 그 턱을 꿸 수 있느냐? 나일강을 근원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악어’의 위협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창조과학회에서는 성경이 기록하는 베헤못과 리워야단의 모습이 하마나 악어보다 훨씬 더 포악하고 위협적이므로
이것이 ‘공룡’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극히 현대적인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동물원에서 하마나 악어를 보고, 사진으로 그들의 모습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죠. 만약 고대세계에서 살다가 밀림이나 늪에서 처음으로 하마나 악어의 공격을 받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사진이 없고, 관람하는 동물이 아니라 삶에서 마주하는 위협적인 동물로서 그들을 인식하고 있다면, 말 그대로 이것은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을 것입니다. 성경을 이해하려면 늘 이것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이 동물들을 통해 질문하실까요? 베헤못과 리워야단을 소개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바로 인간의 존재가 피조세계 안에 있는 것조차 감당하기에 버거워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도록 하시려는 것입니다. 당시 구약의 세계에서 인간은 하마나 악어를 감당하는 것도 버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분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네가 비를 부릴 수 있느냐?’와
같은 논리입니다. 악의 존재 이유를 말하는 욥기의 관점에서 보자면, 리워야단과 베헤못과 같은 인류에게 해가 되는 동물들이 왜 이 세계에 존재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의 일부입니다. 추위와 더위가 공존하고, 어두움과 빛이 공존하고, 죽음과 생명이 공존합니다. 실패가 없이 성공의 기쁨도 없고, 사랑하지 않는 마음들을 알기에 참된 사랑이 소중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베헤못과 리워야단이 인간에게는 악영향을 주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을 통제하고 다스릴 능력이 있습니다. 욥기는 그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이 결론부의 이야기를 잘 보신다면, 하나님은 철저하게 욥을 작게 만드십니다. 왜냐하면 욥기 전체는 인간이 서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경쟁하며, ‘하나님 나와 보세요’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썰전에 하나님도 참여해야 하는 같은 등급의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이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 질문들을 하시는 것이고, 욥이 이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욥의 문제들이 하나님의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랑 이 문제를 놓고 따져봅시다”가 아니라, “하나님 이 문제를 맡아 주십시오”가 지금 욥에게 필요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욥도 친구들과 논쟁하면서 나름 친구들의 논리를 잘 방어해냈고, 그로 인해 논리적 교만함에 빠져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하나님께도 ‘나와 보세요’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시는 질문들을 받았습니다. 이제 여기서
욥의 결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 순간이 욥이 자신의 존재를 하나님께 속한 자로 고백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과 다투어 논쟁하는 동급으로 여길 것인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욥 40:3) 그 때에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 40:4) 저는 비천한 사람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주님께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입을 막을 뿐입니다. (욥 40:5) 이미 말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질문들 앞에서 자신의 무지함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초월적인 존재임을 되새긴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이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해주셔야죠. 하나님, 이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우리의 생각과 상식의 틀 속에 가둬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인간에 대해서도 다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인데, 하나님을 어떻게 다 알 수 있을까요? 내 뜻과 생각과 기준 안에서
다 이해되고 예측되고 통제할 수 있다면, 그순간 그 존재는 신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통제당하는 신은 신이 아니며, 그런 신에게 우리가 우리의 삶을 기대어 맡길 필요가 무엇에 있겠습니까? 욥기는 리워야단과 베헤못도 통제하시며 그 안에서 사람도 돌보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능력 안에 살아가야 한다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악한 것을 다 처단하고 싶어 하고, 그 위협 받음을 못 견뎌 하지만, 우리에게 그것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악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욥은 바로 그 자리로 나아갑니다. (욥 42: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욥 42:2) 주님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욥 42:3)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 42:4)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들어라. 내가 말하겠다. 내가 물을 터이니, 내게 대답하여라" 하셨습니다. (욥 42:5)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욥은 자신이 경험한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하여, 더욱 깊은 하나님을 향한 이해와 믿음 안으로 한걸음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삶을 통해 배운 것이죠. 욥의 마음을 받으신 하나님은 이제 욥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행하십니다. 욥의 친구들을 꾸짖으시고, 그들의 무지함도 깨우치십니다. 그들 앞에서 욥의 편에 서주시며, 그들이 욥에게 행했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도록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 맡겨진 일은 하나님이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욥기는 구약 시대의 책입니다. 구약의 시대적 관점은 자식을 많이 낳고, 부를 누리고, 장수하는 것이, 하나님의 복 안에 거하는 상태에
대한 표현 방식입니다. 욥기의 결론은 ‘구약의 틀 안에서 보여주는 최상의 상태’로 욥을 회복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이 결론이 보여주는 과시적인 열매보다, 이것을 통해 성경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 욥의 고난이 하나님 안에서 온전히 해결될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 회복되었음을 말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욥기는 결국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회복한 욥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그의 삶에 있었던 모든 문제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그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6주간 동행했던 욥기를 정리해보겠습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 세계에서 자주 언급되는 말이, 신학대학원 시절이 가장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굴고, 신학전문 석사로 올라가면 조금 고개가 숙여지고, 박사까지 공부하면 먼저 공부한 분들을 존경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학생 시절에는 신앙에 대해서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다가, 점차 부교역자로 사역하고, 담임목회를 하면 할수록 내가 아는 것이 작고,
부족하고, 모르는 것투성이임을 깨닫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저도 그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삶은 이해되지 않는 것도 많고, 규정되지 않고, 제 능력의 한계는 더 많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를 두렵게 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 존재의 작음이 하나님의 작음은 아님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욥기라는 책이 주는 메시지가 참 좋습니다. 이해되지 않는 우리의 삶에서 어쩌면 진짜 필요한 것은 ‘이해’가 아니라, ‘신뢰’와 ‘인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는 욥의 고백처럼, 하나님은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디 앤서. 제가 매우 좋아했던 한 농구 선수의 별명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팬들이 승리를 원하는 그 순간에 늘 ‘답’으로 존재하는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욥기에는 수많은 질문이 존재하고 결국 욥이 정말 궁금했던 자신의 고난의 이유에 대한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가장 필요한 답이고, 결국 욥에게 아내도 친구도 주지 못했던 참된 위로와 해답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가장 필요한 ‘답’, 그분의 존재 자체가 우리에게 그런 분으로 인정되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