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의 3번째 설교입니다. 저의 우려와 달리, 욥기 설교가 재미있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리고 준비하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욥기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너무 종교적인 사고방식에 갇혀버리기 쉬운 우리에게 그 생각에 균열을 내고, 틈을 내고, 예외적인 경우에 대한 이해함을 갖게 하는 소중한 책이기도 합니다. 욥기는 큰 틀에서 보자면 샌드위치 구조로 이뤄진 책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2장과 마지막 42장은 산문체의 이야기 형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사이에 들어가는 3~41장은 운문체입니다. 운문이란 언어의 배열에 일정한 규율이 있는 글을 의미합니다. 시가 그 대표적인 운문이죠. 욥기의 대부분은 이런 운문체입니다. 그래서 시가서로 분류되는 것이죠. 우리가 지난주에 운문체로 구성된 부분의 첫 부분을 같이 나눴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래도 이야기로 구성된 산문 부분을 잘 이해합니다. 그래서 1~2장의 내용은 마치 전래동화를 읽듯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3장부터 일종의 연극과
같은 느낌으로 등장인물들이 서로 대사를 주고받게 됩니다. 그러나 구조의 특성만 잘 이해하면 욥기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제가 오늘 제목을 <썰전>이라고 지었는데, 예전에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의 이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했던 프로그램입니다. 썰전은 정치를 필두로 해서 각종 시사 문제에 대해,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을 대표하는 논객이 나와서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형식입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서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과 사상이
어떤 사안들에 대해서 어느 지점에 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사실 언론에는 다양한 관점이 있습니다. 언론기관마다 표방하는 노선이 대체로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신문을 예로 들면, ‘조선-중앙-동아(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이 있고, ‘한겨레, 경향’ 등으로 대표되는 진보 언론도 있습니다. 기독교 언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매체는 굉장히 보수적으로 사안을 다루고, 어떤 매체는 진보적으로 사안을 다룹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다양성을 모른 채, 그중
하나의 틀에서만 계속 교육받고,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관점만이 전부이고, 그 관점만이 옳은 것처럼 생각이 고착화 됩니다. 저도 신앙적으로 보자면 그런 틀이 굉장히 강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제가 자랐던 배경은 ‘부흥회’가 가장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약간의 기도원적 영성이었죠. 그러니 당연히 저도 그런 신앙적 색깔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한얼산 기도원 철야 집회를 가기도 하고, 여러 집회를 다니고, 소위 불같은 영성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엄청난 교단의 특성대로 엄청난 보수주의자였죠. 청년이 되어 선교단체에 들어가 훈련을 받게 되면서, 기존의 신앙적 관점과 ‘부딪히는 부분’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제 신앙관으로는 고난주간이 되면 일주일간 하루 한 끼 금식하고, TV 시청은 금기시되었으며, 그 기간에는 슬픔 가운데 보내야 했고, 성금요일은 장례식 수준으로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는데, 거기는 고난주간에도
전혀 금식 같은 것도 없고, 기쁨의 찬양을 막 부르는 것입니다. 기존의 제 신앙관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거기서도 홀로 묵묵히 금식하면서 조용하게 고난주간을 보내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선교단체에서 또 열과 성을 다하며 함께하다 보니, 이제 그곳의 분위기와 신앙관에 영향을 깊이 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생 상태였는데, 더 이상의 신학공부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마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보다 이성을 의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메마른 이성주의자가 되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학교 졸업장도 필요 없고, 그냥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며, 당시 방문했던 선교지에 그냥 남아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엄청 감정적인 신앙적 태도를 갖게 된 것입니다. 지금 돌아보면 선교단체의 강점은 그런 열정이지만, 어떤 부분들은 신학적으로 보자면 옳고 그름의 애매한 경계에 있는 부분도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그곳이 너무 좋았기에
객관적으로 분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선교단체의 훈련을 마치고 신학교로 다시 복학하니, 이번에는 신학교의 분위기가 다시 적응이 안 되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공부에 전념하며 살다 보니, 진리가 선명해지고 성경의 가르침이 명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선교단체가 가진 자유로운 영성에 대해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선교단체의 신앙관을 ‘무모하고 천박한 감성주의’처럼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저는 여러 다른 특성을 가진 종교 공동체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거치면서 때로는 혼란을 겪기도 했었습니다. 그 다양성을 적절히 균형있게 수용하여 정리할 능력이 당시로서는 없었고,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 비로소 균형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쉽게 예를 든다면, 여러분이 ‘더불어민주당’ 가서 이야기를 듣는 것과, ‘국민의힘’에 가서 이야기를 듣는 것과, ‘정의당’에 가서 이야기를 듣는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혼란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 입장이 가진 특성을 이해하고 그 다양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 입장과 관점을 지혜롭게 정립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다행히 하나님이 저의 삶의 다양한 경험 속에서 저를 잘 지켜주셔서, 제가 경험한 그 신앙의 온도 차가 다양성에 대한 이해로 점차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제가 만난 한가지 입장을 단호하게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수용성과 다양성에
대한 이해를 갖고, 각 관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 안에서 내 입장을 정리하여 지켜나가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많이 배웠습니다. 흔히 ‘책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이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길 수 없다고 표현했지만, 그런 사람과는 소통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소통불가 수준으로 그것만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책을 여러 권 읽고, 이쪽저쪽의 입장을 다 살펴보고, 그 후 내 입장을 가지게 될 때, 우리는 완고한 고집이 아니라, 지혜로운 소신으로서
우리의 입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썰전에서 제가 좋았던 부분은 특정 주제에 대해서 단순하게 뭐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각 입장이 가진 다양성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언론도 하나의 입장만을 계속 보게 되면, 알게 모르게 내 입장도 한쪽으로 쏠리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입장에 대해서는 깊이 알 수 있으나, 수용성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제가 설교를 할 때, 성경의 어떤 부분에 대한 여러 견해를 소개하고 ‘그중에 저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라고 말씀드릴 때가 많습니다. 다른 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견해의 해석도 가능하고 일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는 그중에 이 사안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욥기 안에서도, 그리고 지혜서를 두루 볼 때도 이런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욥과 엘리바스의 입장을 살펴봤습니다. 저는 욥기 안에서의 전후 관계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욥의 편’을 들어주며 설교했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상황이 정말 무고한
것임을 저와 여러분이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이야기가 다 틀렸냐? 아닙니다. 엘리바스의 이야기가 맞는 상황도 신앙생활 중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욥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단순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추구하고 신앙을 잘 지킨다는 이유로 어떤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은 어떠셨나요?
저는 예수님에게 정말 목회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감탄하게 되는 일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정치적으로 양극단에 있던 것은 세리와 열심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출신의 마태와 그런 세리를 죽이기 위해 조직된 열심당 출신의 시몬을 모두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을 ‘형제’로 살게 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래서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 시대, 사도 바울이 강력하게 외쳤던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우리의 고백입니다. 욥과 친구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제가 이들의 이야기를 ‘썰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마치 100분 토론처럼 욥과 친구들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논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총 3라운드로 진행되는데, 라운드 구분은 학자마다 좀 다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끊느냐의 차이일 뿐, 욥 한번 친구들 한 번의 형식이 끝까지 유지됩니다. 1라운드를
3-14장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시발점 : 욥(3장) 엘리바스(4~5장) - 욥(6~7장) - 빌닷(8장) - 욥(9~10장) - 소발(11장) - 욥(12~14장) 저희가 지난 설교에서 본 것처럼, 일주일간 위로하며 함께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욥이 침묵을 깨고 탄원합니다. 그것이 3장이죠. 그런데 그 탄원시의 어떤 내용이 친구들이 기지고 있는 신학적 입장과 부딪힌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가 그것에 대해서 욥에게 반론을 제기한 것이 4~5장입니다. 그러자
욥도 지지 않습니다. 다시 엘리바스의 입장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이 6~7장입니다. 그 이후 빌닷과 욥이, 다시 소발과 욥이 논쟁합니다. 여기까지가 1라운드입니다. 사실상 친구들의 신학은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속성과 맥을 같이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잠언의 관점입니다. 분명히 욥의 상황도 잠언으로 해석되기 쉬웠을 것입니다. 우리도 욥기 1~2장의 내용이 없었더라면 욥의 친구들 말에 공감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까?” 이것이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의 신학과 욥기의 신학이 충돌하는 것이 욥과 친구들의 설전, 썰전이 발생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에서는 잠언보다 욥기가 앞에 있죠. 욥-시편-잠언-전도서-아가 순이니까요. 그래서 잠언과 욥기의 관계를 연결시켜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배치된 이유는 저자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욥을 제일 먼저 배치하고, 다윗과 관련된 시편을 그다음, 솔로몬과 관련된 잠언과 전도서를 그 후에 배치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만약 의미와 이해의
관점에서 성경을 재배치해본다면, 잠언이 끝나는 곳에 욥기가 왔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두 편의 책을 상호보완적으로 읽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잠언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잠언의 가르침은 대체로 맞는 말이지만, 욥과 같은 예외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며, 그 신학이 어떤 상황에서나 휘두를 수 있는 무적의 칼이 아님을 경고하는 것이죠. 우리가 한 권의 책에 빠져 모든 것을 쉽게 평가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막는 것입니다. 2라운드는
15~21장입니다. 엘리바스(15장) - 욥(16~17장) - 빌닷(18장) - 욥(19장) - 소발(20장) - 욥(21장) 3라운드는 22-31장입니다. 엘리바스(22장) - 욥(23~24장) - 빌닷(25장) - 욥(26~31장) 그리고 3라운드 이후에는 또 다른 친구 엘리후의 발언과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우선 라운드를 구분 짓는 것은 쉽게 말해서 한 바퀴 발언권이 돌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엘리바스가 한 번 더 말하게 되면 ‘라운드
2’ 시작, 그다음에는 ‘라운드 3’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 구조 속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욥과 친구들이 1:3으로 논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잠언의 관점이 훨씬 더 보편적인 이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잠언의 신학은 ‘규범적 지혜’에 근거합니다. 규범적 지혜는 하나님이 정하신 일종의 ‘패턴’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경험하는 반복적인 패턴 말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이 오고 나면 저녁이 오고, 가을이 지나면
겨울이 오는 것이 ‘규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드신 패턴을 잘 이해하고 그것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잠언이나 욥의 세 친구는 바로 이런 관점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한번 2라운드에 나오는 세 친구의 발언을 살펴봅시다. ① 2라운드 _ 엘리바스의 발언 (15장) (욥 15:20) 악한 일만 저지른 자들은 평생 동안 분노 속에서 고통을 받으며, 잔인하게 살아온 자들도 죽는 날까지 같은 형벌을 받는다. (욥 15:31) 그가 헛것을
의지할 만큼 어리석다면, 악이 그가 받을 보상이 될 것이다. ② 2라운드 _ 빌닷의 발언 (18장) (욥 18:5) 결국 악한 자의 빛은 꺼지게 마련이고, 그 불꽃도 빛을 잃고 마는 법이다. (욥 18:6) 그의 집 안을 밝히던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환하게 비추어 주던 등불도 꺼질 것이다. (욥 18:21) 악한 자의 집안은 반드시 이런 일을 당하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사는 곳이 이렇게 되고 말 것이다. ③ 2라운드 – 소발의 발언 (20장) (욥
20: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밝히 드러내며, 땅이 그를 고발할 것이다. (욥 20:28)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날에, 그 집의 모든 재산이 홍수에 쓸려가듯 다 쓸려갈 것이다. (욥 20:29) 이것이, 악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을 몫이며, 하나님이 그의 것으로 정해 주신 유산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규범적 지혜는 욥기에서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 되는 사탄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욥 1:9) 그러자 사탄이 주님께 아뢰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이와 다른 것이 ‘반성적 지혜’입니다. 반성적 지혜는 규칙에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거나(욥기), 규범적 지혜가 말하는 패턴을 다른 시각,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전도서)입니다. (전 1:18)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고, 아는 것이 많으면 걱정도 많더라. 대부분의 삶에 규범적 지혜의 패턴이 적용되지만, 그 패턴에 어긋나는 예외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욥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에게도 불행과 고난이 닥치는 경우도 존재하므로,
하나님의 운행하심과 창조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을 인과응보의 원리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욥기의 반성적 지혜입니다. ① 2라운드 _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반박 (16~17장) (욥 16:4) 너희가 내 처지가 되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너희에게 마구 말을 퍼부으며, 가엾다는 듯이 머리를 내저을 것이다. (욥 16:12) 나는 평안히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나를 으스러뜨리셨다. 내 목덜미를 잡고 내던져서, 나를 부스러뜨리셨다.
그가 나를 세우고 과녁을 삼으시니, (욥 16:17) 그러나 나는 폭행을 저지른 일이 없으며, 내 기도는 언제나 진실하였다. (욥 16:18) 땅아, 내게 닥쳐온 이 잘못된 일을 숨기지 말아라! 애타게 정의를 찾는 내 부르짖음이 허공에 흩어지게 하지 말아라! ② 2라운드 _ 빌닷에 대한 욥의 반박 (19장) (욥 19:5) 너희 생각에는 너희가 나보다 더 낫겠고, 내가 겪는 이 모든 고난도 내가 지은 죄를 증명하는 것이겠지. (욥 19:6) 그러나 이것만은
알아야 한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그물로 덮어씌우신 분도 하나님이시다. ③ 2라운드 – 소발에 대한 욕의 반박 (21장) (욥 21:7)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욥 21:8)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욥 21:9)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결국 욥기 전체에 나타난 썰전의 두 축이 규범적 지혜와 반성적 지혜의 대립입니다. 모든 행위나 현상에는 분명한 원인과 까닭이 있다고 주장하는 측과, 모든 일에 반드시 원인과 까닭이 있는 것은 아니거나 혹은 있다 하더라도 인간은 그 원인과 까닭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측의 대립입니다. 실제로 제가 목회자로 살아가며 저에게 성도님들이 던지는 수많은 질문들이 이것과 관련이 깊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매우 실제적인 측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김
형제님>이 이렇게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하는 일마다 잘 안되는 것을 보니, 지금 제가 뭔가 하나님 안에서 잘못한 부분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이 맞는 말일까요, 틀린 말일까요? 제 대답은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무조건 ‘이도 저도 아니다’라고 주어서는 안 됩니다. 규범적인 틀에 얽매이지 않으려다가 규범성을 아예 벗어나면 그 또한 진리에 대한 올바른 접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기능은 기본적으로
규범적입니다. 성경의 유익함도 여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딤후 3:17)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을 유능하게 하고, 그에게 온갖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고, 어긋났을 때 책망을 받고, 다시 바르게 하는 깨달음을 얻고, 바른 삶을 끝까지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는 규범적 지혜를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나에게 맞을 수도 있고, 안 맞을 수도 있다는 태도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김 형제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형제님이 생각하시기에 하나님 안에서 잘못한 부분은 무엇입니까? 만약 내 잘못한 부분이 생각나고 그것이 내 마음에 떠오른다면, 우선 그것을 회개하고 바르게 하셔야 합니다.” 그 성도님이 겪는 고난이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만약 내가 하나님 앞에 부끄럽게 행하고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우선 그 부분에 대해서 바로잡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원인은 단정할 수 없다고 했으니, 이것 때문은 아닐 거야’ 생각하며 그저 내 잘못을 회피하기만 한다면, 그런 사람은 신앙적으로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때로는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갈 때, 우리를 돌이키시려 고난을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방식을 내 신학으로 가로막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다면 우선 정직하게 대면하여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또 한 가지 기억하고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개’를 믿지 않는 태도입니다. (사 1:18)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빛과 같다 하여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며, 진홍빛과 같이 붉어도 양털과 같이 희어질 것이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어떤 사람은 진실한 회개와 회심 앞에서 우리가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받아주셨는데도 불구하고, ‘나 같은 것을 주님이 어떻게 용납하시겠어.’ 생각하며 여전히 어둠에 머물거나, 여전히 죄악 된 삶을 반복하곤 합니다. 왜 믿지 못할까요? 내 감정으로 믿음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감정을 느껴야 뭔가 해결된 것 같은데, 내 감정에 그런 기분이 들지 않으면 회개하고도
믿지 못하고 찜찜해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내 삶의 태도를 고치고 새롭게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에게 말씀하시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용서받았으면 다시 죄를 반복하지 않고, 용서받은 사람답게 이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나 다시 <김 형제님>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본인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 앞에서 고민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성도님을 향해, “아닙니다. 성도님. 분명히 성도님의 고난은 성도님이 지금 잘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자꾸 교만하게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합니까?”라고 말하면 제가 바로 욥의 세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욥의 고난이 무죄한 자의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우리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느끼는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후의 문제는 이제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욥의 문제가 욥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라는 것이 욥기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는 것이 욥기의 신학입니다. 사실 우리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후, 그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가 해야 할 몫도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내팽개침’ 혹은 ‘핑계와 변명’에 불과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옳음과 최선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고 알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면, 그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저는 그것이 믿음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적용하기 위해 정리해봅시다. 잠언과 성경 전반이 가르치는 규범적 지혜는 중요합니다. 그것은 신앙의 입문 단계로서 마치 초중고 과정처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일반적인
현상과 규범을 배우는 단계입니다. 규칙은 필요합니다. 규칙이 있을 때 예외도 이해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잠언의 지혜는 ‘일상의 규칙이고 일상의 지혜’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사랑과 미움, 전쟁과 평화, 부지런함과 게으름 사이에서 규범적 지혜는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기준과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그러나 부탁드리기는 그 규범적 지혜를 선용하십시오. 특별히 신앙이 좋고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규범적 지혜를 다른 이를 위한 판단의 기준으로 남용하기 쉽습니다. “이래서
그래.”, “그럴 땐 이렇게 해야지.”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말일 수 있지만,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고민과 아픔에 대하여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차라리 침묵하고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아픔과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서 내가 한발 다가가 실제적으로 섬겨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을 언제나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처럼 규범적 지혜를 벗어나는 문제가 있음에 대해서 이해가 어렵고,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지 여전히 의문도
남을 것입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이해 이상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규범적 지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가 행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죄로 인해 마땅히 죽어야 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신 결정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규범적 지혜를 넘어서서 일하고 계신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고, 저는 그 하나님의 이유를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저는
욥기를 보면서 거칠어지고 날 선 욥의 모습을 봅니다. 지금 그가 마주한 상황, 또 그 상황에서 자신을 몰아세우는 친구들의 눈빛,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까지... 어쩌면 욥기를 통해 ‘인간’에 대해서 또 ‘인생’에 대해서 성찰해봅니다. 그런데도 제가 욥기를 읽어 내려가며 눈에 띄는 욥의 고백들이 있습니다. 논쟁하고 항변하는 와중에 툭툭 튀어나오는 그의 신앙의 뿌리. 욥 안에 깊이 남겨진 믿음입니다. 우리 그 욥의 고백을 읽으며 나아갑시다. (욥 16:19) 하늘에
내 증인이 계시고, 높은 곳에 내 변호인이 계신다! (욥 17:3) 주님, 주님께서 친히 내 보증이 되어 주십시오. 내 보증이 되실 분은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욥 19:25)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내 구원자가 살아 계신다. 나를 돌보시는 그가 땅 위에 우뚝 서실 날이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다. (욥 19:26) 내 살갗이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내 육체가 다 썩은 다음에라도, 나는 하나님을 뵈올 것이다. (욥 19:27) 내가 그를 직접 뵙겠다.
이 눈으로 직접 뵐 때에, 하나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