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하던 대로" / 강정규 목사

2022-11-20 · 다니엘 4-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 두 편의 설교를 통해서, 1장에서 그들이 왕궁에서 교육받았던 이야기를 나눴고, 2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는 이야기를 나눴고, 3장에서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 던져졌다가 구원받은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다니엘서의 독특한 특징으로 언어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니엘서는 2~7장까지는 구약에서 유일하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는 부분입니다. 전체가 아닌 2~7장까지만 아람어로 기록했다는

것은 이 부분이 하나의 메시지를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2~7장은 구조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지상의 네 왕국과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 도래 예견 (2장) B. 우상숭배에 대한 저항과 기적적 구원 이야기 (3장) C.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비참해질 것 (4장) C’. 바벨론 왕 벨사살이 비참해질 것 (5장) B’. 비겁한 신앙에 대한 저항과 기적적 구원 이야기 (6장) A’. 지상의 네 왕국과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 도래 예견 (7장) 이렇게 3가지

주제가 대칭적인 구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가장 바깥 부분은 지상의 왕국 변천에 대한 예언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음 설교로 다룰 것입니다. 그 안쪽은 다니엘과 친구들이 그 세상 나라에 살면서 겪는 위기,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칭구조의 가장 중심부에는 가장 힘 있는 제국의 왕이 비참하게 되는 모습을 다룹니다. 아무리 지상의 위대한 왕이라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설교의

메인 본문은 6장입니다. 먼저 그 앞에 위치한 4~5장의 내용을 간단히 보겠습니다. 4장은 느부갓네살 시대의 이야깁니다. 느부갓네살이 다시 한번 꿈을 꾸고, 그 꿈을 다시 다니엘이 해석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번 꿈은 느부갓네살의 운명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단 4:24) 왕이여 그 해석은 이러하니이다 곧 지극히 높으신 이가 명령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라 다니엘은 이 해석이 하나님의 계시라며 전달합니다. 느부갓네살이 왕궁에서 쫓겨나 고립된 야인으로

지내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곧 가장 낮은 자리로 떨어지게 될 텐데,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분의 뜻에 의해 권세도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라 말합니다. 만약 그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고 인정하면, 다시 하나님이 왕을 회복시키리라는 말씀하시죠. 그리고 1년 후 느부갓네살에게 이 계시는 현실이 됩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함이 심판당한 것인데, 그는 왕궁에서 쫓겨나 가장 비참한 삶을 경험합니다. 성경은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고 표현하는데, 학자들은 그가 광인이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정신적 어떤 이슈가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죠. 왜냐하면 회복되는 이야기에서 ‘정신을 되찾았다’라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깨닫습니까? 아무리 권세 있는 왕이라고 할지라도, 본인이 지킬 수 있는 것이 있고 지킬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세상에서 뭔가를 이루면 다 지킬 수 있고 영원할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죠. 부유함이 최고라고 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인간은 지킬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근심 하나라도 지킬 수 있나요? 아닙니다. 때가 되어 하나님은 왕의 자리로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4장의 마지막은 이러한 고백으로 마무리됩니다. (단 4:37) 이제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고 높이며,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과연 그가 하시는 일은 모두 참되며, 그의 모든 길은 공의로우니, 그는 교만한 이를 낮추신다. 이어지는 5장은 벨사살 왕의 이야기입니다. 역사적으로 벨사살의 아버지는 ‘나보니두스’입니다.

그러나 개역개정은 벨사살의 부친이 느부갓네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새번역의 각주에 나온 것처럼 ‘부친’이 아닌, ‘조상’ 또는 ‘선왕’이라는 의미가 옳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느부갓네살은 강력한 왕권을 갖고 43년간 통치하지만, 그의 아들 마르둑은 2년간 다스리다가 살해를 당합니다. 그 후에도 신하들에 의한 암살이 일어나며 바벨론은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왕권은 느부갓네살 집안이 아닌 하란 출신의 ‘나보니두스’가 차지합니다. 본래

느부갓네살이나 바벨론 백성 대부분은 ‘마르둑’이라는 신을 섬겨왔습니다. 그런데 하란 출신의 나보니두스는 그의 어머니가 섬기던 달의 신을 섬기기 시작하며, 바벨론 최고의 신을 바꾼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바벨론 백성들의 불만이 발생합니다. 심지어 나보니두스는 그가 믿는 신을 위해 사우디아라비아 지역에 있는 테이마에서 머물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의 아들 ‘벨사살’을 바벨론 지역의 통치자로 세웠습니다. 공동집권기입니다. 한마디로 바벨론의 왕권이 어수선한 상황이었는데,

철없는 벨사살은 바벨론에서 귀족 1,000명을 초대하여 성대한 파티나 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벨사살이 이 잔치에서 갑자기 무모한 짓을 벌입니다. 바로 과거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기물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아무리 점령지에서 약탈한 것이어도 성물을 잔치의 술잔으로 쓰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것을 바벨론 신전 보물 창고에 보관했는데, 벨사살은 그것을 가져와 술잔으로 쓰겠다고 객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단 5:3) 그래서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집 성전에서 가져 온 금그릇들을 꺼내서, 왕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셨다. (단 5:4) 그들은 술을 마시고서,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 바로 그때, 예루살렘 성전 기물의 주인이신 여호와께서 반응하십니다. 사람의 손과 같은 것이 나타나더니 벽에다 글씨를 쓰는 것입니다. 왕은 그 광경에 얼굴이 창백해지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무릎을 서로 부딪치며 떨었습니다. 그는 곧바로 주술가들과 점성가들을

불러서 벽에 쓰여진 글씨를 해석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글을 읽거나 뜻을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왕의 어머니가 다니엘을 떠올렸고, 다니엘이 그 자리에 오게 됩니다. 왕은 다니엘에게 이것을 해석해준다면, 자색 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걸어주고, 셋째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셋째 통치자란, 실제 왕인 나보니두스와 공동통치자인 자신에 이은, 가장 높은 자리입니다. 다니엘은 그런 벨사살의 제안에 대하여, 예물과 상급은 필요하지 않다며, 이 뜻이

무엇인지는 해석해주겠다고 말합니다. (단 5:25)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메네와 데겔은 히브리어 므나와 세겔에 상응합니다. 즉 무게 단위와 화폐입니다. ‘우’는 ‘그리고’에 해당하고 ‘바르신’은 세겔의 절반입니다. 즉, 해석해본다면 ‘한 므나, 한 므나, 한 세겔, 그리고 반 므나들/반 세겔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무게 또는 화폐 단위를 나열해 놓은 글자입니다. (단 5:26) 그 글자를 해석하면, 이러합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임금님의 나라의 시대를 계산하셔서, 그것이 끝나게 하셨다는 것이고, (단 5:27) '데겔'은, 임금님이 저울에 달리셨는데, 무게가 부족함이 드러났다는 것이고, (단 5:28) '바르신'은 임금님의 왕국이 둘로 나뉘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이 예언을 하였음에도, 벨사살은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앞서 느부갓네살이 보였던 인정이나 회개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23절에서 다니엘은 이런 표현을

씁니다.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 왕권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벨사살은 다니엘이 알려주어도 그 하나님을 바라볼 생각이 없습니다.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에 메대 왕 다리오가 바벨론을 침공하여 왕권이 끝장납니다. 벨사살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5장의 내용입니다. 영원할 것 같은 바벨론 제국이 문을 닫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간판은 ‘메대’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 51:11에 이미 예언된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이번에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6장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메대의 통치로 바뀌었고, 내용은 3장과 대칭되는 이야기이죠. 3장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불에 던져졌던 이야기라면, 이번에는 다니엘이 마주하는 고난과 죽음의 위기입니다. 6장의 왕으로 나오는 것이 메대 왕 다리오입니다. 그가 이제 바벨론 땅을 통치합니다. 학자들 사이에 다니엘서의 다리오가 누구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것은 2가지 견해인데,

첫째는 페르시아의 고레스와 같은 인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고레스가 메대 왕국을 그의 제국으로 편입시켜서 메대와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죠. 당시에 한 왕이 두 가지 이름으로 두 나라를 다스리는 관행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메대 왕 다리오가 곧 페르시아의 고레스일 확률이 높습니다. 둘째 견해는 만약 고레스가 아닐 경우, 고레스의 위임으로 바벨론을 다스렸던 메대의 통치자였을 것입니다. 역사적 자료에 근거하여 이 사람을 바벨론 총독으로 임명된 ‘구바루’라는

인물로 특정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바벨론은 페르시아 고레스의 손에 넘어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바벨론을 다스리는 인물을 ‘메대 왕 다리오’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그가 고레스이건 아니건, 성경에서 부르는 이름대로 우리는 ‘메대 왕 다리오’라고 부르겠습니다.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린 다리오는 120명의 고위 관리를 임명하고, 그들 위에 총리 세 명을 둡니다. 이때 다니엘이 중용됩니다. 바벨론의 시대나 메대 시대나 다니엘은 나라의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죠.

왕은 세 명의 총리 가운데서도 다니엘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깁니다. 그러자 다른 두 명의 총리들과 다른 관료들은 다니엘에 대해 시기와 질투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의 뒷조사를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일 처리나 도덕성에서 어떠한 고발 거리도 찾지 못합니다. 흠이 없는 것이죠. (단 6:5) 그들이 이르되 이 다니엘은 그 하나님의 율법에서 근거를 찾지 못하면 그를 고발할 수 없으리라 하고 다니엘이 왕의 뜻에 어긋난 일을 하도록 만들려면, 결국 다니엘의

신앙을 이용해야겠다는 계략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찾아가서 이렇게 청합니다. 30일 동안 특별법을 만들어서, 왕을 제외한 다른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왕권이 들어섰으므로, 왕권 강화의 차원이라는 빌미를 가져다 붙이지 않았을까 합니다. 거기에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단 6:8) 바라옵기는, 임금님이 이제 금령을 세우시고, 그 문서에 임금님의 도장을 찍으셔서, 메대와 페르시아의 고치지 못하는 법을

따라서,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메대와 페르시아는 연합군 형태로 있다가 결국에는 페르시아로 통합이 됩니다. 제국의 이름은 페르시아가 되지만, 그들은 법을 만들 때마다 ‘메대와 바사의 변치 않는 규례’라는 문구를 넣습니다. 즉, 30일간 시행되는 특별법도 이러한 조항을 넣어서 왕조차도 함부로 바꿀 수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왕도 법 아래 있으므로 이 법이 시행되면 함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 법을 어기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처벌 요건까지

붙어서 법이 공포됩니다. 다니엘이 지금 바벨론 땅에서 가장 높은 직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히 지금 돌아가는 일의 상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그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을 노린, 자신을 죽이기 위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죠. 만약 30일간 기도 금지라는 소나기를 피해간다면, 그다음은 60일이 되고 100일이 되고 3년이 될지도 모릅니다. 다니엘은 이것이 물러설 수 없는, 물러서서는 안 되는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30일 동안 기도를 쉬거나 몰래 기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보시죠. (단 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다니엘은 언제나 예루살렘 쪽으로 창문을 열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삶을 살아왔습니다. 기도를 금지하는 특별법이 시행된 때에도 변함없이, 전에 하던 대로 창문을 열고 기도합니다.

‘하던 대로.’ 저는 이 표현이 너무 와닿았습니다. 하던 대로. 언제나 그래 왔듯이. 변함없이. 제가 신앙생활을 해나가고 목회를 해나가며 가장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하나 있다면, ‘꾸준함’입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꾸준함이 실력’인 경우가 참 많습니다. 제 마음을 울렸던 성도님의 기도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때로는 하나님을 위해 죽는 것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든 것임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청소년, 청년 때는 수련회에서

뭔가 뜨거운 감정을 느끼고 은혜를 받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것처럼 고백하고 행동합니다. 그때 정말 목숨을 내놓아야 할 상황이 벌어지면 그렇게 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은혜를 평생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는 더 어렵고 힘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수련회, 혹은 부흥회 같은 곳에서 받은 은혜와 도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는가? 그 은혜의 유통기한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말했습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도마도 말했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그런 그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위기 앞에 서야 하는 그 순간에 어디 있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주일 예배마다 결단의 찬양을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예배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연극에 비유하자면 예배 안에서 ‘배우’는 여러분입니다. 제가 아닙니다. 예배의 ‘관객’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죠. 그래서 설교 시간이 단순히 우리가 듣는 시간이나, 우리의 지적충족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리는 시간이므로, 우리의 결단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 결단들이 예배 후 여러분의 삶에도 기억되고 적용된다면, 그 결단의 마음은 여러분의 행동을 바꿀 것입니다. 그 행동의 변화가 모이면 습관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습관이 지속되면 그것이 여러분의 성품과 인격이 될 것입니다. 인격은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고,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은 영성은 좋은 인성으로 열매 맺습니다. 좋은 인성이란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성령이 그 과정을 돕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성령의 은사를 가진 사람보다 성령의 열매를 가진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은사는 있다가도 없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실제적 모습입니다. ‘사랑, 기쁨, 화평, 인내, 친절, 선함, 신실, 온유, 절제.’ 그런데 여러분 아시나요?

성령의 열매는 아홉 개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가 이 아홉 가지 성품을 포함한 것입니다. “나는 인내는 있는데 기쁨은 없어.”가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갈 때, 우리 안에 저 모든 것들이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다니엘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니제이 굽타’의 <바울과 믿음 언어>라는 책에 보면, 성경에서 ‘믿음’을 의미하는 헬라어 ‘피스티스’ 안에는 믿음(belief), 신뢰(trust), 충성(faithfulness)의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 그 하나님에 대해 신뢰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라는 것이죠. 다니엘이 첫 설교 때부터 지속적으로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는 근거는, 그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믿음, 신뢰, 충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던 대로 하루 3번씩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비록 이방 바벨론 땅에 있었지만, 다니엘의 신앙 안에서 그곳은 하나님의 성소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여러분의 삶의 자리도 하나님의 성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고 함께하시는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 하나님 나라. 저는 우선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 나라이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 나라이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직장과 학교가 하나님 나라이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이길 축복합니다. 다니엘이 믿음을 지키며 기도하던 그때,

사람들이 들이닥칩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기도한 것에 대해 목격자를 세우고 왕께 고발합니다. 왕은 그제야 이것이 다니엘을 노린 계략임을 알았지만,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반포했기에 뒤집을 수 없어서 근심합니다. (단 6:15)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께서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고치지 못할 것이니이다 하니 (단 6:16) 이에 왕이 명령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이르되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 여러분. 왕도 지켜주지 못합니다. 다니엘을 지키면 다른 신하들을 잃게 되니 말이죠. 그는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합니다. 저는 결국 이것이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말하는데, 저는 16절의 표현을 주목하여 보게 되었습니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적어도 다리오 왕이 보기에 다니엘이 항상 섬기는 다니엘의 하나님이 있는 것 같은데, 그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다니엘은 ‘하던 대로, 항상 섬기는’ 신앙의 모습을 갖고 있었기에, 다리오도 그 하나님을 언급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그토록 의지하는 그분. 저는 여러분의 삶을 누군가 돌아봤을 때, 이런 표현이 여러분을 수식하는 표현이길 바랍니다. “저 사람은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야. 저 사람은 늘 하던 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하는 사람이야.” 적어도 그래야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인정할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러분,

여러분 주변에 누가 아주 위급한 상황을 당해서 자신은 안 믿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도를 요청하고 싶을 때 누구를 찾겠습니까? “너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신실하고 꾸준하게 살아가던 그 사람에게 요청할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보아도 다 알기 때문입니다. 혹시 내 삶이 너무 이런 다니엘과 멀게 느껴지는 분일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믿음의 한 걸음부터 용기 내어 걸어보십시오. 지금껏 내 뜻대로 행했던 부분에서 결단하여 이전과 다른 한 걸음부터

시작해보십시오. 그 걸음이 쌓이면 방향을 만들고, 돌아보면 그것이 내가 주님께로 나아간 길이 될 것입니다. 언제나 신앙의 결단은 이전과 다른 한 걸음의 용기부터 시작됩니다. 설교 후 변화는 그 한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사자 굴에 결국 던져진 다니엘. 굴의 입구는 큰 돌로 막힙니다. 죽은 목숨이죠. 왕은 다니엘에 대한 미안함과 걱정 속에 한숨도 자지 못합니다. 새벽 동이 트자마자 사자 굴로 향하여 나아가서, 굴 앞에서 외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종 다니엘은

들으시오, 그대가 늘 섬기는 그대의 하나님이 그대를 사자들로부터 구해 주셨소?" 다니엘이 말합니다. (단 6:21)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었다. "임금님의 만수무강을 빕니다. (단 6:22) 나의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셔서 사자들의 입을 막으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해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에게는 죄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임금님, 나는 임금님께도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3절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단

6:23) 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리도록 명령하니, 사람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끌어올렸다. 그가 자기 하나님을 신뢰하였기 때문에, 그에게서는 아무런 상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다니엘서는 소유격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자기 하나님을 신뢰하였다.” 성경은 이 믿음의 승리의 원인을 다니엘이 자기 하나님을 신뢰한 것에 두고 있습니다. 믿음의 모험이 다시 한번 승리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어떻게 하나님과 한편처럼 살 수

있을지 알고 있습니다. 옛적부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은 내 편, 나의 수호천사가 있기를 기대했습니다. 각기 다른 신앙과 모습과 성향을 갖고 하나님이 모두가 자기 편이라고 말하는 듯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편이 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면 됩니다. 하나님이 내 편을 들어주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하나님의 편이 되어 살아가기로 결정하면 됩니다.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편이 되어 살아가면, 하나님이 그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의 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은 주제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저는 우리의 모든 상황이 나를 괴롭게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니엘의 나라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하여 사라졌고, 바벨론의 이방 종교는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앙을 늘 위협하며,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계속 그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나요?’라고 해도 될만한 상황이 다니엘서에는 계속 펼쳐집니다.

그런데 그것을 이기는 힘은 무엇입니까? 언제나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을 물러섬 없이 해나가는 그들의 신실함입니다. 저는 성경 속 인물들이 우리와 다른 특별한 사람이어서 그들만 하나님을 삶에서 누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성경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계시느냐 안 계시느냐가 아니라, 내가 다니엘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태도일 것입니다. 늘 변함없이... 하던 대로... 신실하게.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도 ‘기적 이야기’입니다. 다니엘서의 많은 기적이 있죠. 아니 성경 전체에 많은 기적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나누시다가 밥때가 되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인 오병이어 사건도 있으시죠. 여러분, 만약 지금 이 현장에서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쑤욱 올라갈 것 같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배 후, 제가 기적을 맛볼 수 있는 곳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나 익숙한

기적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기적의 밥상입니다. 하나님은 돌과 모래와 흙에서 과일과 곡식을 만들어냅니다. 심지어 저희 테라스가 인조 잔디인데, 그곳에 생명을 품은 식물이 자라나 꽃을 피우곤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모든 것이 그의 돌보심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는 것이 대단하다면, 매년 돌과 모래와 흙에서 과일과 곡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더 대단한

일이 아닐까요? 만약 만나가 매일 같이 내리는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도 아마 자연법칙처럼 여기지 않았을까요? 같은 의미에서 지금 우리가 자연법칙으로 여기고 있는 모든 것들도 그 현상을 처음 봤을 때, 그 감격은 어떠했을까요? 계절을 따라 나무의 색깔이 변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고. 곡식이 익고 과일이 열리고 떨어지는 그 모든 일들이 기적이지 않았을까요? 기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일상이 기적입니다. (수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 하나님의 공급을 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시고, 그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첫 땅의 공급을 받은 다음 날, 만나가 그칩니다. 왜냐하면 만나이든, 땅의 곡식이든 하나님이 주시는 공급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때마다 감사할 것이고,

이것을 자신의 삶에 대입할 수 있는 사람은 일터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공급과 돌보심을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초막절이 추수를 마친 후 하나님께 감사했던 예배였고, 오늘 우리가 드리는 추수감사절 예배는 우리가 비록 농경사회와 같이 추수한 곡식으로만 살지는 않을지라도, 내 삶을 지키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바벨론과 페르시아의 세상 속에서도 살아 역사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도 지금도 우리의 예배 가운데 함께

하시며, 여러분이 믿음으로 결단한 삶 가운데 동행하실 것입니다. 이 예배를 마친 후, 돌아가는 여러분의 삶의 모든 자리가 주님께 신실한 여러분의 고백으로 채워져서, 모든 삶의 자리에 하나님이 드러나는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