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에 대한 두 번째 설교입니다. 우선 지난 설교 후 받았던 한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니엘이 왕궁의 음식은 거부하면서 왜 바벨론의 교육은 거부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대하며 고민이 필요한 중요한 초점이 여기에 있으므로 이 질문은 좋은 질문입니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일반적인 사람들의 이해로 보자면,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한 사건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이 일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징계는 결국 유다를 돌이키고자 하는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것이죠. 바벨론이 유다를 세 차례 침공하고 세 번 포로로 잡아갔다는 이야기도, 달리 말하면 세 번의 돌이킬 기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는 바벨론의 침공을 받으며, 한 번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옆 나라 애굽을 의지하기 바빴습니다. 끝내 그들은 돌이킴 없이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에스겔과 같은 선지자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였고, 다니엘과 친구들처럼 신실한 믿음을 가진 자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들 모두 유대 땅에 살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사람들입니다. 그럼 다니엘의 신앙은 언제 시작되었을까요? 아마 유대에서부터 있었겠죠. 그 시절부터 하나님을 알았고 신앙을 갖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게 볼모가 되어 끌려가는 일을 겪으며, 이러한 일들이 어떤 의미인지를 다 알지는 못했겠지만,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과 신뢰가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신뢰가 없이 하나님이 단순히 바벨론에게 패배한 신으로 여겼다면, 왕궁에서 보이는 믿음의 결단은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유대에서 신앙을 시작했고, 바벨론에 온 이후로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면서, 어떤 것은 거부했고, 어떤 것은 수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구별해보자면, 신앙적 양심과 충돌하는 몇 가지 부분은 완전하게 거부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 것, 오늘 다룰 우상 신상에 절하는 문제 등이 그들이 거부한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수용한 것도 있었습니다. 바벨론의 학문을 배우고 교육을 받는 것이나, 후에 바벨론의 관직을 받아서 일하는 것은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세상과 환경을 받아들이되, 그 안에서 지켜야 할 신앙을 고수했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삶과 유사한 모델이 그보다 먼저 성경에 있죠. 바로 요셉이 그러합니다. 요셉은 어디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을 거부하거나, 그 일에 충실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분명 요셉의 외형적 모습은 애굽 사람들의 외형과 같고 그들과 같은 옷을 입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하나님을 경외함을 잃지 않았죠. 모세 또한 그러했습니다. 유모로 들어온 친모를 통하여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신앙적 정체성을 배우지만, 애굽의 왕자로 교육받기를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그 왕궁에서의 시간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한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세상을 살 때, 우리가 세상의 것이라고 하여 무조건적으로 적대시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세상 교육을 거부하거나, 세상 직장을 거부하거나, 남자들은 군대를 거부해서는 안 됩니다. 정치 지도자를 거부하고, 정부를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반면 우리의 삶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의 가치 안에서 우리에게는 지혜로운 분별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산다고 내가 세상에 속한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세상 밖에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구별을 통해 나의 내면까지도 구별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저와 같은 목회자들이 이 문제 앞에서 가장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 속한 일을 한다고 그 직책이 내 마음의 신실함을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심하지 않은 목사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며, 목사의 가운을 입고 있더라도 속에서 하나님은 밀어낸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 가장 멀리 있는 삶을 살기도 얼마나 쉬운지요. 반면 세상에 속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신실함으로 그 삶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요셉도 다니엘도 그들의 복장, 언어, 그들이 받은 교육은 모두 세상의 것이며 이방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들이 채워져 있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의 가장 중심에, 그들의 가치관에 가장 정점에, 그들의 순종의 엎드림 그 바로 앞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두 번째 이야기는 다니엘서 2~3장입니다. 2장과 4장은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하는
장면으로 나오고, 3장은 다니엘의 친구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가 지난 1장에서 다니엘과 친구들이 교육받는 장면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들의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삶의 자리가 무엇인지 조금 더 깊이 설명해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서에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39:7)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 이것은 유다 왕 히스기야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즉, 왕족 가운데 몇 사람이 바벨론에 사로잡혀가서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다니엘과 세 친구는 환관장 밑에서 교육을 받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벨론과 세친구 또한 지금 바벨론 땅에서 환관이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사극에서 보듯이 거세당하고
왕궁에서 일하는 ‘내시’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에게 가족이 끝까지 없습니다. 학자들은 다니엘이 바벨론의 환관으로 살아갔을 가능성을 높게 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환관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무척이나 좋아하는 삼국지의 시작은 중국의 십상시라는 권력을 장악한 환관들의 횡포에 대한 의분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환관들은 자녀와 가족이 없기에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권력입니다. 그들은 왕의 가장 옆에 있기에 왕을 흔들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대나 지금이나 지도자와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곧 권력이기도 했죠. 그런데 환관은 왕의 가까이서 가장 중요한 조언을 해야 할 위치이기도 했습니다. 바벨론 제국은 포로들 가운데서도 환관이 될 후보생들을 뽑았고, 뽑힌 사람들은 왕궁에서 3년의 훈련을 받으며 다시 걸러냅니다. 이들에게 3년간 익히도록 했던 것은 바벨론의 학문이었습니다. 그럼 이들이 공부한 바벨론의 학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12개의 별자리를 정리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별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의 천문학의 기원은 바벨론의 천문학입니다. 바벨론의 천문학은 오랜 세월 별자리를 연구하고 그 축적된 데이터를 체계화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그 결과 날씨와 계절의 흐름을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농사를 하기에 필요한 것, 군사를 일으키기에 필요한 지식들입니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공명이 적벽대전이라는 큰 전투에서 ‘동남풍’을 예측하는데, 그것도 이러한 기상에 관한 지식을 공부한 덕분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요즘 좋아하는
MBTI 같은 것이 무엇입니까? 결국은 빅데이터와 같이 오랜 시간 행동양식을 데이터화 해서 체계를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16개의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것이죠. 오늘날의 일기예보도 데이터를 기반으로 예측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벨론의 천문학은 당시 미래를 예측하고, 날씨를 예측하고, 그로 말미암아 농경 생활을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있는 가장 중요한 정보이고 지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은 자신들의 유익과 영원한 속국의 통치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인재들을 양성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당대에 가장 뛰어난 과학자요, 역사학자요, 미래학자로 훈련받는 것이었고, 능력에 따라 왕의 옆에서 조언하는 지혜자로 활동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니엘과 친구들은 포로 가운데 뽑혔음에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3년의 교육과정을 가장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합니다. (단 1:19)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니, 그들 가운데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그들로 왕을 모시게 하였다. (단 1:20) 왕은
그들에게 온갖 지혜나 지식에 관한 문제를 물어 보고서, 그들이 전국에 있는 어떤 마술사나 주술가보다도, 열 배는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이들이 왕을 보좌하는 지혜자 그룹에 들어가게 됩니다. 2장은 그런 상황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보통이 아닙니다. 어느 날 심란한 꿈을 꾸었습니다. 분명 일반적인 꿈이 아님은 확실했습니다. 그래서 지혜자들을 부릅니다. 아마도 이미 중요직책을 감당하고 있는 중진급 지혜자들을 불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박수와
술객 점쟁이와 갈대아 술사라고 말하지만, 오늘날로 말하면 과학자, 역사학자, 미래학자, 정신분석학자 등을 부른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종종 꿈을 해석했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결국 점성술도 데이터를 체계화하여 설명하고 예측하는 것이었기에, 꿈도 그런 오랜 데이터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해석을 할 수 있었겠죠. 그런데 느부갓네살이 만만치 않습니다. 일단 의심이 많습니다. 해몽이야 누가 못합니까? 그런데 그런 시답잖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합니다. 느부갓네살 : 애들아, 내가 꿈을 하나 꾸었는데, 그 꿈을 알 수 없어서 마음이 답답하다. 점성가 : 왕이시여, 그 꿈을 종들에게 말씀하여 주시면, 해몽하여 드리겠습니다. 느부갓네살 : 해몽? 그럼, 너희가 그 꿈의 내용부터 말하고 해몽을 나에게 말해봐라. 안 그러면 너희의 몸은 토막이 날 것이며, 너희의 집은 쓰레기 더미가 될 것이다. 점성가들이 지금까지 해온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왕께 말하죠.
“왕께서 그 꿈을 종들에게 말씀하여 주시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확고합니다. (단 2:9) 너희가 그 꿈을 나에게 말해 주지 못하면, 너희는 모두 같은 벌을 받게 될 것이다. 너희가 시간이 지나면 사태가 바뀌겠거니 하면서, 내 앞에서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하기로 함께 모의한 줄을, 내가 모를 듯 싶으냐? 이제 그 꿈을 나에게 말하여라. 그러면 너희가 나에게 해몽도 하여 알려 줄 수 있을 것으로 알겠다. 왕의 이러한 명령에 지혜자들은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며 항변합니다. 그러자 느부갓네살은 그 말에 화가 나서 바빌론의 지혜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그리고 왕의 시위대장이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동합니다. 시위대장의 군대는 지혜자 그룹에 속해있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기 위해 찾습니다. 그것을 듣고 다니엘이 그에게 먼저 나아가서 말하죠. “제가 왕의 꿈을 해몽할 수 있으니 시간을 주십시오.” 진짜 그럴 능력이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다니엘은 1장부터 보면 늘 먼저 나서서
일을 저지릅니다. MBTI로 보면 P성향입니다. 즉흥적입니다. 그렇게 말을 해놓고 집으로 가서 그의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단 2:18) 그 친구들에게 말하였다. "너희와 나는 다른 바빌론의 지혜자들과 함께 죽지 않도록, 하늘의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이 비밀을 알게 해주시기를 간구하자." 그런데 어차피 가만히 있어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하나님께서 혹 긍휼을 베푸시어 살려주시길 간구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날 밤에 다니엘에게 그 꿈과 해석을 환상 가운데 보여주십니다. 그러한 경험을 하며 다니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단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권세의 근원도 하나님이요, 지혜의 근원도 하나님이요, 지식의 근원도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느부갓네살이 꾼 꿈은 그 이후에 역사에 나타날 제국의 변천에
관한 미래적 예언인데, 결국은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에 이런 이야기가 여러번 나옵니다. 지금은 바벨론의 세상이지만, 그 바벨론의 때도 하나님이 정한 때까지 일 뿐이며, 그 이후의 역사 또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 우리가 이후의 설교들을 통해 이러한 꿈에 대해 자세히 다루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포인트는, 다니엘은 이것을 왕에게 고할 때,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임을 높인다는 것입니다. (단
2:45b) 임금님이 보신 것은, 위대하신 하나님이 앞으로 일어날 일을 임금님께 알려 주신 것입니다. 이 꿈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이 해몽도 틀림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은 자신이 말해 주지도 않은 꿈을 그대로 말하고 해석하는 다니엘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말 그대로 다니엘에 대한 무한신뢰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이 고백하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단 2:47) 왕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 가운데서 으뜸가는
신이시요, 모든 왕 가운데서 으뜸가는 군주이시다. 그대가 이 비밀을 드러낼 수 있었으니, 과연 그대의 하나님은 비밀을 드러내는 분이시다." 그대들의 하나님. 즉, 다니엘과 세 친구의 신일 뿐, 아직 자신의 신은 아니지만, 여호와라는 신이 대단한 능력이 있는 신이라고 여기게 됩니다. 무엇보다 다니엘에게 그 하나님이 함께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 중요합니다. 왕은 이 일로 바벨론의 모든 땅을 통치하는 제국의 2인자 자리를 다니엘에게 맡게 됩니다. 또한 바벨론 지혜자
그룹의 지도자 역할도 하게 됩니다. 결국 이 일을 통해 다니엘이 바벨론 제국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니엘의 부탁으로 그의 세 친구는 바벨론의 지방 관리 직책을 받습니다. 바로 3장은 그 세 친구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앞선 꿈속에서 느부갓네살의 왕권을 표현하는 것이 ‘금’이었는데, 3장에서 그는 금으로 된 신상을 바벨론 땅에 세웁니다. 이 신상은 자신의 형상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섬기는
바벨론 신 마르둑의 형상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자신의 권력과 위세를 나타내는 신상을 세웁니다. 이것이 3장의 배경입니다. 느부갓네살이 직접 신상 봉헌식을 주관하는데, 이는 곧 왕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해보는 무대가 됩니다. 바벨론 땅에는 수많은 지역에서 잡혀 온 포로들이 있었을 텐데, 그들에게도 이렇게 명령이 하달됩니다. (단 3:4) 그 때에 전령이 큰소리로 외쳤다. "민족과 언어가 다른 뭇 백성들은 들으시오. 뭇 백성에게 하달되는 명령이오. (단 3:5)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나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시오. (단 3:6) 누구든지, 엎드려서 절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즉시 불타는 화덕 속에 던져 넣을 것이오." 우리가 알다시피 우상이나 형상을 만드는 행위나 경배하는 행위는 율법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 즉, 모든 신실한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세상의 법을 따를 것인지에 대한 엄청난 도전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세 친구는 늘 하던 선택을 합니다. 신상에 절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에 대하여 갈대아 사람들, 즉 바벨론 지혜자 그룹들에 의해서 고발당합니다. 아마도 다니엘과 세 친구가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에게 밀린 바벨론 출신의 점성가들이 이들을 제거할 빌미로 고발한 것으로 보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고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부릅니다. 그리고 추궁하며 심문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충성심을 직접 확인할 기회, 어쩌면 그
고발에 대해서 이들이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단 3:14) 느부갓네살 왕이 그들에게 물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들어라. 너희가 참으로 나의 신을 섬기지 않고,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을 하지 않았느냐? (단 3:15) 지금이라도 너희가 나팔과 피리와 거문고와 사현금과 칠현금과 풍수 등 갖가지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내가 만든 신상에게 엎드려 절을 할 마음이 되어 있으면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즉시 불타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다.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이러한 느부갓네살의 호의 섞인 심문 앞에서 세 친구는 대답합니다. “왕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는 줄 압니다.” 이 표현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으면 “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는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라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어서 그들의 굳건한 믿음의 고백이 나옵니다. (단 3: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우리가 지난 설교에서 보았던 이들의 믿음은 먼저 패를 내놓는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패를 내놓으면 하나님이 응답하시리라는 믿음이었죠. 그것이 17절의 고백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택하면, 하나님이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 책임지시리라는 것이죠. 그런데 사실 우리를 정말 도전하는 것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간 이들의 고백입니다. 18절입니다. (단 3: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것은 내가 패를 내놓으면, 하나님이 그에 응답하시는 패를 내주실 것이라는 것, 즉 선행하는 믿음의 수준을 뛰어넘은 고백이죠. 하나님이 설령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기대하는 패를 내주시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여러 가지 모습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건의 해결자’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길을 내시는 분으로 기대하며 그분을 바라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해주시는 분, 바다를 가르시고 인도하시는 분으로 그분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8절의 고백은 그보다 더욱 신실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판단과 결정이 항상 옳음을 믿는 것’입니다. 설령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시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주님의 뜻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일하실지라도,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음을 믿으며, 그분이 이 순간 내게 원하시는 것이 죽음일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을 신실하게 드리겠다는 고백이죠. “반드시 내 기도를 응답하실 것이다”라는 고백도 귀하지만, “내 기도대로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조차 그분의 뜻하심을 믿고 신뢰한다는 이 고백은 더 귀합니다. 말 그대로 사탄이 더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흔히 말하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일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단호함은
느부갓네살 왕의 분노를 일으킵니다. 성경을 보면 그의 얼굴빛이 변합니다. 그리고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풀무불 자체가 일반적으로 강한 불인데, 그것에 완전수 7배를 더한 것은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최대치로 불의 온도를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결박하여 그 불 가운데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그 불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이들을 결박하여 던지려고 다가선 바벨론 용사들도 불꽃에 의해 타버립니다. 그리고 그 불 가운데 세 사람은 던져집니다. 그러나
곧 느부갓네살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자리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불 속에 보이는 형상은 셋이 아니라 넷이었는데, 그중 한 사람은 신들의 아들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천사’와 같은 이 세상에 없는 어떤 존재를 표현합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사람은 아닌 존재가 그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겪은 왕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단
3:26) 느부갓네살이 맹렬히 타는 풀무불 아귀 가까이 가서 불러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종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나와서 이리로 오라 하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불 가운데에서 나온지라 세 사람은 머리털 하나 그을리지 않고 걸어 나온 것입니다. 저에게 만약 이 사건을 증명하라고 한다면 제가 드릴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기적’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이고, 이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세상에는 우리가 때로는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있음을 우리가 다 알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이 세상 속으로 침투하여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섭리이고, 만약 그 섭리를 보이시지 않더라도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변치 않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의 고백을, 이러한 이들의 마음을 받으셨고, 이들의 이 믿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단 3:28)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설교의 제목을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을 계시하시는가?” 느부갓네살의 말처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들의 신앙, 그들의 삶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만약,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바벨론 왕의 명령을 따라 신상에 절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이 느부갓네살에게 자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낼 기회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들 또한 우리에게 지금과 같이 전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들의 신앙이 유다의 왕궁에서 빛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황무지와 같고, 적대심과 위협이 가득한 이방 땅에서 이들의 신앙은 꽃피고 있습니다. 환경이 여러분을 지배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의 신앙과 마음의 환경이 황무지와 같더라도,
거기서 승부하십시오. 다니엘과 친구들. 우리는 이들이 유다에 살고 있을 때, 삶이 더 좋았을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삶은 세상의 관점으로 보자면 점점 추락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유다의 왕족과 귀족으로 살다가, 강대국 바벨론에게 공격을 당하여, 머나먼 땅에 포로로 끌려오고, 그곳에서 10대에 거세를 당한 환관이 되어, 전혀 예기치 않고 바라지도 않았던 삶을 살았던 이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해보아도,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는 바벨론의
신 마르둑과의 대결에서 자신들을 보호하지도 지켜주지도 않고 도와주지도 않았습니다. 결국 자신들이 포로로 끌려오게 되었고, 이 이국땅에서 여호와는 있는지 없는지도 혹은 힘을 정말 발휘할 수 있을지도 모를 신입니다. 바벨론에 끌려와서 이들은 자신의 본래 이름은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원래 이름과 빼앗긴 이름 사이에는 매우 큰 의미적 차이가 있었습니다. 다니엘 : 하나님은 나의 재판관 벨드사살 : 벨 신이여 당신의 아들을 보호하소서 하나냐 :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 사드락 : 태양신에게서 배운다. 미사엘 : 하나님과 같은 자가 누구냐? 메삭 : 욕망의 신과 같은 자가 누구냐? 아사랴 :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다. 아벳느고 : 너는 느고신의 종이다. 하나님이 나의 재판관이 되어 지켜보신다는 고백, 여호와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고백, 하나님과 같은 자가 없다는 고백, 여호와가 나의 도움이시라고 고백하던 그들의 이름은 더이상 바벨론 땅에서 부를 수 없습니다. 대신 그 자리는 온갖 바벨론의 신들의 이름으로
채워졌습니다. 바벨론은 이들의 이름을 지우고, 이들의 신앙적 정체성도 바꾸려고 강요합니다. 여호와에 대한 신앙고백들을 남유다의 패배와 함께 매장하고, 이제는 바벨론의 종교와 가치관, 더 나은 선진문화와 학문을 따라 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끝났다.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이들에게 세뇌합니다. 그 세상의 공격 앞에 순응하며 살면, 이들에게는 포로 중에서는 가장 괜찮은 삶이 보장될 수도 있습니다.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요? 그냥 바벨론에 속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이들을 흔들지 않았을까요? 깨어진 세상에서 그나마 괜찮은 것을 누리며 사는 삶을 유혹합니다. 이 상황 가운데서 다른 것을 소망하는 것은 무모하고, 대책 없고, 비현실적이라고 이들의 하루하루 현실은 이들에게 가르칩니다. 어쩌면 이들을 가르치는 바벨론의 이데올로기는 오늘날 우리를 동일하게 흔들어댑니다.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잊어버리게 만들고, 교회 밖의 세상은 그런 삶으로 살아낼 수 없다고 우리에게 세뇌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사탄은 에덴에서부터
우리에게 거짓으로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바벨론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삶으로는 결코 바벨론보다 크신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경험하게 된 것은 이들이 바벨론의 이데올로기에 무릎 꿇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바벨론의 왕이 여호와를 이들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였던 것처럼,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하나님이 될 수 있는 삶을 사십시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바벨론보다 쉬운가? 저는 결코 그렇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겠다고 결정한 순간 거센 세상의 도전 속에 역행하여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또한 바벨론에 살고 있습니다. 말씀을 마치며 솔직한 고백을 나눕니다. 다니엘서 말씀을 예전에는 굉장히 쉽게 전했습니다. 이런 엄청난 믿음의 사람들이 있다고. 이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그저 멋있게 느껴졌고, 그래서 그것을 더욱 영웅적으로 설교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은
더욱 많은 고민 가운데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믿음을 강조할수록 그러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더욱 위축되고 주눅 들고, 너무 큰 믿음의 간격 앞에 자칫 포기해버릴까 도리어 두렵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전하는 저조차, 저 상황 앞에서 저들과 같이 행동하는 것이 아무리 봐도 자신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니엘과 같을 자신이 없고, 풀무불 앞에서 세 친구와 같을 자신이 없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는 마음까지 나아가기에는
여전히 두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안을 바라보면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소망을 보기에, 이 말씀 앞에서 자신 없는 내 마음조차도 내어드리고, 주님으로 더욱 채우고 싶습니다. 모두가 여호와는 패했다고, 여호와는 이제 마르둑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외쳤던 시대. 그러나 다니엘과 세 친구를 통해 지극히 높으신 존재로 역사하셨던 것처럼... 신이 없다고 말하고, 신을 의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정작 깨어진 내면의 모습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공허함에 허덕이고, 마음이 메말라 서로를 상처 내며, 끊임없이 절망하고 한탄하는 이 시대에... 부인할 수 없는 참된 빛과 생명과 능력으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려면, 그분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분은 주님께 마음을 내어드릴 사람을 찾으실 것입니다. 모두 교회는 쇠퇴하였다고 말하는 이 시대에, 그럼에도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않은 채 살고자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찾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흐름에 돌아서서 하나님 앞에 섰다면, 여러분의 믿음의 결단을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시고, 이 세상에 하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 하나님의 편이 되어 살아갈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그 하나님이 드러나길 소망합니다. 저는 우리의 수없는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며, 하나님의 필요라고 생각합니다. 능력이 하나도 없지만, 그럼에도
그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여기며 따르고 싶기에... 더욱 주님을 구하는 진실하고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함께하셔서, 먼저 우리를 바꾸시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분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소망으로 물들 수 있도록 만드실 것입니다. 그 주님을 구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