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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모험" / 강정규 목사

2022-11-06 · 다니엘 1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11월 매일성경 묵상본문은 다니엘서입니다. 아마도 교회를 다니시는 많은 분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 다니엘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매우 유명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니엘서를 잘 아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질문해볼까요? 다니엘서는 몇 장일까요? 정답은 12장입니다. 하나 더 질문해봅시다. 다니엘서는 어떤 언어로 쓰였을까요? 정답은 히브리어와 아람어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의 매우 독특한 특징입니다. (1장 : 히브리어 / 2~7장 : 아람어

/ 8~12장 : 히브리어) 다니엘서를 가장 간단히 한눈에 살펴보고 오늘 1장을 들어가 보도록 합시다. 1장 여호야김 3년 왕궁에서 교육을 받는 다니엘과 세 친구 2장 느부갓네살 2년 느부갓네살의 꿈과 다니엘의 꿈 해석 3장 느부갓네살 금 신상 숭배와 다니엘의 세 친구 4장 느부갓네살 느부갓네살의 두 번째 꿈과 다니엘의 꿈 해석 5장 벨사살 [마지막 해] 벽의 글자와 다니엘의 해석 6장 다리오 사자 굴의 다니엘 7장 벨사살 1년 네

짐승의 환상과 그 해석 8장 벨사살 3년 숫양과 숫염소의 환상과 가브리엘의 해석 9장 다리오 1년 가브리엘에 의한 예레미야의 ‘칠십 년’ 해석 10-12장 고레스 3년 마지막 날의 큰 전쟁 다니엘서는 정확하게 반으로 잘라서 주제를 이해하면 됩니다. 1~6장까지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7-12장은 다니엘이 본 환상에 관한 기록입니다. 다시 질문 하나 다시 던져봅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 이름은 무엇일까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사실 다니엘과 세친구라고 우리가 부를 때, 다니엘은 히브리식 이름이고, 친구들의 이름은 바벨론식 이름으로 부른다는 점은 통일성이 좀 없기는 합니다. 이들의 원래 이름은 다니엘, 하나냐, 미사엘, 아사랴 입니다. 그들이 바벨론에서 개명된 이름이 벨드사살,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입니다. 왜 이들에게 히브리식 이름과 바벨론식 이름이 주어지게 되었느냐?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중대한 한 사건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배경이기 때문에, 잠시 역사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참 절묘한 곳에 두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지리적 위치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 모이는 중심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서 각 대륙에서 발흥한 강력한 제국은 늘 이스라엘을 짓밟고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곤 했습니다. 물론 저는 목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곳에 두신 것이 선교적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모든 대륙으로 퍼져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 우리가

지도에서 이스라엘과 관련이 깊은 몇 개의 제국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밑에는 아프리카의 강자 ‘애굽(이집트)’. 위쪽으로는 북방의 최강자 ‘앗수르(아시리아)’.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페르시아만 근처의 ‘바벨론(바빌로니아-이라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면, 다윗 왕 시대가 지나가고,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분열됩니다. 이 당시에 최강대국은 앗수르였습니다. 앗수르가 내려옵니다. 북왕국이 먼저 멸망합니다. 다윗의 후손들이 다스리는 남왕국 유다도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가 침공하여 나라가 멸망할 위기를 겪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고 하나님이 앗수르 군대를 치십니다. (사 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역사적 기록에는 어떻게 나와 있을까요?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1]에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인용하여, 이 사건을 쥐들이 전염시킨 ‘페스트’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역시 [유대고대사]에서

전염병이라고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앗수르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앗수르는 더는 전쟁을 지속하지 못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갑니다. 이 사건은 주변으로 삽시간에 퍼집니다. 강대국 앗수르가 남유다를 치러갔다가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퇴각한 놀라운 일이죠. 그런데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며 앗수르 제국은 서서히 지고 있었고, 앗수르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여러 나라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중 메디아(메대)라는 나라는 앗수르의 동맹국이었는데, 메디아가

앗수르를 배신하고 새롭게 떠오르는 바벨론과 동맹을 맺습니다. 그리고 함께 앗수르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는 수도 니느웨를 빼앗기고 하란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바벨론이 근동의 패권을 차지해버린 것입니다. 이때 애굽이 움직입니다. 애굽과 앗수르는 동맹관계였고, 앗수르의 잔여 세력들과 힘을 합쳐서 떠오르는 강대국인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 북쪽으로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이 올라오자 유다 왕 요시야는 군대를 일으켜 막아섭니다. 애굽 왕 느고가 유다

왕 요시야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나는 너와 싸울 마음이 없다.” 그는 이 편지에서 3번이나 하나님을 언급하며 이 싸움에 끼어들지 말라고 경고를 합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무시하고 전쟁을 하다가 죽게 됩니다. 그리고 근동지역의 패권은 바벨론이 완전히 잡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서진을 하죠. 그러면서 유다는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강대국 사이에 낀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유다를 심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바벨론이라는 회초리를 드신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해 유다를 심판하기로 하셨다.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 정해진 심판 앞에 덜 고통당하는 길이다.” 그러나 유다 왕조는 대체로 친 애굽 정책을 펼쳤습니다. 바벨론의 공격 앞에 그들은 애굽과 손을 잡고 맞서려고 합니다. 바벨론에 항복하자는 예레미야는 매국노 취급을 당합니다. 그렇게 바벨론의 공격 앞에 유다가 서게 됩니다. B.C 605년의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이 승리하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침공하여 포로를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첫 번째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은 남유다의 귀족들이었는데, 1차 포로 가운데 속했던 것이 ‘다니엘’과 친구들입니다. (왕하 24:1) 여호야김이 다스리던 해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쳐들어왔다. 여호야김은 그의 신하가 되어 세 해 동안 그를 섬겼으나, 세 해가 지나자, 돌아서서 느부갓네살에게 반역하였다. (왕하 24:2) 주님께서는 바빌로니아 군대와 시리아 군대와 모압 군대와 암몬 자손의

군대를 보내셔서, 여호야김과 싸우게 하셨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그들을 보내신 것은, 자기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서 하신 말씀대로, 유다를 쳐서 멸망시키려는 것이었다. 이러면서 유다는 바벨론의 속국의 위치에 놓입니다. 바로 이렇게 바벨론에 끌려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니엘서>가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단 1:1) 유다의 여호야김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서 성을 포위하였다. (단 1:2) 주님께서

유다의 여호야김 왕과 하나님의 성전 기물 가운데서 일부를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셨다. 그는 그것들을 바빌로니아 땅, 자기가 섬기는 신의 신전으로 가지고 가서 그 신의 보물 창고에 넣어 두었다. (단 1:3) 그 때에 왕은 아스부나스 환관장에게 명령하여, 이스라엘 백성, 특히 왕과 귀족의 자손 가운데서, (단 1:4) 몸에 흠이 없고, 용모가 잘생기고,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지식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왕궁에서 왕을 모실 능력이 있는 소년들을

데려오게 하여서, 그들에게 바빌로니아의 언어와 문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각 제국은 나름의 통치 철학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앗수르 제국은 ‘혼혈 정책’을 펴서 그 나라의 민족성을 훼손시킵니다. 바벨론 제국의 특징은 ‘포로’와 ‘교육’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 지배하에 있는 각 나라의 인재들을 끌어와 바벨론을 세계 최고의 나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유다는 이러한 바벨론의 침공을 3번 당합니다. 1차 포로 : B.C 605년 / 남유다의 천재 소년들

_ 다니엘과 친구들 2차 포로 : B.C 598년 / 1만 명의 기술자들 _ 에스겔 & 여호야긴(여고니아) 왕 3차 포로 : B.C 586년 / 완전한 멸망 _ 성전 파괴 / 시드기야 & 대부분의 사람들 포로 훗날의 기록에 의하면, 바벨론의 국력은 전 아시아의 1/3에 해당했다고 하니, 그만큼 막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닥치는 대로 침공하고 그곳에서 포로로 사람을 잡아 옵니다. 그들을 이용하여 산 위의 요새가 아닌 드넓은 평지 위에 최고의 성을

세운 것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바벨론 성은 광대한 평야 한가운데 있는 대도시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한 변의 길이가 22km에 이르는 큰 성이었습니다. 바벨론 성 둘레에는 100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모두 청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아름답게 정비된 도시로 성 주변에는 물이 두르고 있었고, 아스팔트도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시 중앙에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성 둘레 : 90.16km. 참고로 수원 화성의 둘레는

5.7km)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은 제국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노동력으로 활용하였고, 포로 중 선발된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 교육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 정책으로 바벨론식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바벨론 언어와 바벨론 교육을 시키며, 바벨론의 모든 속국들을 영원히 자기네 발아래 두려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정책은 후에 로마 제국과 대영 제국이 비슷한 형태로 시행하기도 했습니다. 3~4절에는 왕궁의 교육생이 된 이들의 조건이 등장합니다. 우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들 중에 왕궁과 귀족 출신을 찾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입니다. 몸에 흠이 없고 용모가 잘생겨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조건입니다. 이것은 왕을 옆에서 보시기에 충분한 건강함과 반듯한 외형을 갖춘 것을 의미합니다. 마지막 조건은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으며, 지식이 있고, 통찰력이 있고, 왕을 모실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육받을 내용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갈대아 사람의 방대한 종교적 전통과 학문, 언어 등입니다. 갈대아 사람의

언어란 ‘아카드어’를 의미하는데, 점쟁이를 위한 전문적 문헌을 읽을 수 있을 만큼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혜택도 있습니다. (단 1:5) 또한 왕은 왕궁에서 날마다 일정한 양을 정해서 음식과 포도주를 그들에게 공급하도록 해주면서, 삼 년 동안 교육시킨 뒤에, 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단 1:6) 그들 가운데는 유다 사람인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있었다. (단 1:7) 환관장이 그들에게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는데,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라고

하고, 하나냐는 사드락이라고 하고, 미사엘은 메삭이라고 하고, 아사랴는 아벳느고라고 하였다. 바로 이곳에 있었던 이들이 다니엘과 친구들입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10대로 추정됩니다. 청소년기에 그들은 강대국의 이데올로기에 자신들의 가치관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로 결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며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평안해야겠죠. 아닙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지키고 살아서 여러분의 삶이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때도

앗수르는 어김없이 침공해왔고, 믿음을 지키고 살아도 다니엘과 친구들은 낯선 곳에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 때, 하나님은 앗수르의 침공으로부터 유다를 보호하셔서 구원하셨지요. 그럼 바벨론 땅에 끌려온 다니엘과 친구들은 어떤 하나님을 경험했을까요? 바로 5절에 나온 저 이야기 자체가 이들에게는 고민이 되는 지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제공되는 음식은 그들의 신에게 드려졌던 음식이므로, 그것을 먹는 것이 율법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타협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럴 마음이 없습니다. (단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단 1:9) 하나님이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지라 이 말씀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우선 주목해야 할 표현은 ‘뜻을 정하여’라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삶을 살다가 옳지 못한 일을 마주할 때, 상황 봐가면서 그 일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될 대로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은 이미 음식으로 율법을 어기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나는 나를 지키겠어”라는 마음의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경험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죄송해요. 제가 다른 예화를 쓰고 싶은데, 그래도 이것이 가장 이해가 쉬워서 말씀을 드립니다. 목회 세습의 문제에 대해서 저는 그 길을 가지 않기로 25세에 이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때는 제가

미래에 무엇을 할지, 그런 것은 전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그 문제가 나를 넘어뜨리지 않도록, 타협하지 않겠다고 결정해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마음의 준비와 결정이 없는 채로, 제가 부교역자로 마흔다섯 정도가 되어 앞길이 막막한데, 그런 제안이 오면 솔깃하지 않았을까요? 이런저런 합리화 할 핑계를 만들고자 하는 욕구가 저를 많이 괴롭혔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유혹이 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리 선을 긋고 선언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끔

아직 술과 친한 성도님들 가운데, 금주 선언을 하시는 경우도 있죠. 저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더이상 술에 나를 내어주지 않겠어.” 뜻을 정하는 것이죠. “나는 예배를 빼먹고 불금을 즐기러 가지 않겠어.”, “나는 주일은 무조건 하나님 앞에 예배하겠어.” 이렇게 우리는 마음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들을 관리해주는 환관장에게 요청합니다. 그런데 9절에는 이런 표현이 나오죠. 하나님이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신 지라. 뜻을 정한 것은 다니엘의

의지입니다. 이것까지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자유의지 개념’을 모르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일을 돕습니다. 어떻게 돕습니까? 환관장에게서 호의와 동정을 받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아마도 호의가 없었다면 다니엘의 이 제안이 무례하다고 하며 처벌을 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관장이 그럴 마음은 없었어요. 그러나 환관장으로서 그가 다니엘의 요청을 들어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말씀을 보시죠. (단 1:10) 환관장이 다니엘에게

말하였다. "너희가 먹고 마실 것을 정해 주신 분은 나의 상전이신 임금님이시다. 임금님께서, 너희의 얼굴이 너희와 같은 나이의 젊은이들보다 더 상해 있는 것을 보시게 될까 두렵다. 그렇게 되면, 너희 때문에 내 목숨이 임금님 앞에서 위태롭게 될 것이다." 즉, 다니엘에게 호의와 동정이 있었지만, 그의 위치에서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몸을 사리는 것이죠. 다니엘이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부탁이 이들에게는 무리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다니엘은

환관장에게 거절당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습니다. 이번에는 환관장 밑에서 자신들을 직접 관리하는 감독관을 찾아갑니다. (단 1:11) 다니엘은 감독관에게로 갔다. 그 감독관은 환관장이 임명한 사람으로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를 감독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다. 다니엘이 그 감독관에게 요청하였다. (단 1:12) "부디 이 종들을 열흘 동안만 시험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채소를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단

1:13) 그런 다음에, 우리의 얼굴빛과 왕이 내린 음식을 먹는 젊은이들의 얼굴빛을 비교하여 보시고, 이 종들의 요청을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단 1:14) 그래서 감독관은 그 말을 따라서, 열흘 동안 시험해 보았다. 즉, 이번에는 다니엘이 자기의 입장에서 주장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여 설득이 가능한 제안을 던집니다. 임상실험 해보자는 것이죠. 저는 이것이 다니엘이 던진 ‘믿음의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믿음의 모험을 종종

해야했습니다. 이중직으로 목회를 시작한 것도 믿음의 모험이었습니다. 5년 차에 사례비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만약 그로 인해 교회의 재정이 부족하면 제 사례비부터 반환하기로 했었지요. 결과는 아슬아슬한 적은 있었지만, 사례비를 반환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만큼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말이 되면 매년 믿음의 모험을 합니다. 어떤 모험입니까? 사역지원입니다. 아시겠지만 저희교회의 모든 사역은 1년직으로 현재 임명합니다. 1년이 지나면 새롭게 헌신합니다. 이

일은 목회적으로는 매우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여러분이 지원을 안 해서 사역의 공백이 생기면 그것을 책임지고 수습하는 일도 저와 사역의 리더들이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이 우리교회에 꼭 필요한 일이면, 어떻게든 채워주실 것이다. 우리는 사역을 구걸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부르셔서 채워주실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 믿음의 모험이 흔들림 없이 우리교회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먼저 패를 보여주시면 나도

패를 낼게요”라는 마음을 종종 갖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부터 하세요’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히브리서의 믿음장에서 말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아직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내가 먼저 패를 내놓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홍수 심판을 준비합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나아갔습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도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장의 고백입니다. 결과를 보장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음으로 일단 해보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어요. 저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어요.”라는 질문에 가장 많이 드리는 대답은, 마음에 주시는 생각에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난 일이 아니라면 “일단 해보세요”라는 대답입니다. 해봐야 알고, 해봐야 경험합니다. 예전에는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어요. ‘첫 월급은 십일조가 아니라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제가 해봤을까요, 안 해봤을까요. 해봤죠. 물론 안 해도

누구도 아무 말 안 합니다. 그런데 저는 진짜 물질의 주인이 하나님인 삶을 살고 싶었고, 그래서 저희 윗세대분들처럼 저도 그냥 제 믿음으로 드렸어요. 뭘 바라고 드린 것도 아닙니다. 그냥 “하나님이 이렇게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나를 굶겨 죽이시지야 않겠지.” 제 삶에서 그것을 경험하리라고 확신하며 하고 싶어서 했어요. 그리고 저는 제 삶에 그러한 간증이 넘쳐난다고 생각합니다. 해봤기에 간증이 있는 것이죠. 아마도 제가 목회의 길을 가야 하기에, 특별히

재정의 문제는 제가 통과해야 하는 믿음의 허들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습의 유혹을 이겨내고, 자비량으로 사역하고자 결단하고, 이런 것들이 당연히 한순간에 나오지 않습니다. 믿음이 간증으로 쌓이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확신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선택하면, 옳은 길을 선택하면 실패하지 않는구나.” 다니엘서를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다니엘의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뒤에 있을 풀무풀 이야기, 사자굴 이야기의 믿음의 승리가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순간에 자라지 않습니다. 양육을 하면 이 표현을 많이 쓰거든요. “생각이 행동을 바꾸고, 행동이 습관을 만들고, 습관이 인격이 되고, 그것이 인생을 바꾼다.” 모두가 믿음으로 통과하고, 믿음으로 지켜가야 할 영역들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제가 부디 말씀드리기는 믿음으로 이기십시오. 행동하는 믿음. 믿음으로 행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지금 내게 하고 계신 일을 기억하면, 하나님이 내게 하실 일을

기대하며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이방 땅에서 믿음의 모험을 합니다. 고기를 먹지 않고, 채소와 물만 먹은 상태로 10일을 보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단 1:15) 열흘이 지났을 때에 보니, 그들의 얼굴빛이 왕이 내린 음식을 먹은 젊은이들의 얼굴빛보다 좋고 건강하여 보였다. (단 1:16) 감독관은 그들에게 지정된 음식과 마실 포도주를 주지 않고, 채소를 계속 주어서 먹게 하였다. 이것이 다니엘이 맛본 믿음의

결과입니다. 믿음의 승리이죠. 감독관도 이제 OK. 임상실험이 끝났잖아요. 이것이 단순히 이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나겠습니까? 적어도 감독관은 다니엘의 삶을 눈여겨 보게 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야, 세상이 우리를 주목해서 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복음으로 설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런 것이 아니셨을까요? “드디어 찾았다.” (단 1:17) 하나님은 이 네 젊은이들이 지식을 얻게 하시고, 문학과 학문에 능통하게

하셨다. 그 밖에도 다니엘에게는 환상과 온갖 꿈을 해석하는 능력까지 주셨다. 저는 하나님이 늘 찾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세상을 담대하게 살아갈 사람. 담대하게 살아갈 교회. 그래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위하여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단 1:18) 왕이 정하여 놓은 삼 년 동안의 교육이 끝나는 날, 환관장은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을 모두 느부갓네살 앞으로 데리고 갔다. (단 1:19) 왕이 그들과 말하여 보니, 그들 가운데서

다니엘과 하나냐와 미사엘과 아사랴가 가장 뛰어났으므로, 그들로 왕을 모시게 하였다. (단 1:20) 왕은 그들에게 온갖 지혜나 지식에 관한 문제를 물어 보고서, 그들이 전국에 있는 어떤 마술사나 주술가보다도, 열 배는 더 낫다는 것을 알았다. (단 1:21) 다니엘은 고레스 왕 일년까지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님이 이방 땅에서 그들을 사용하기로 하셨습니다. 우리가 설교 초반에 이야기했지만, 하나님의 백성도 고난을 만납니다. 포로로 끌려왔어요. 다 끝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 땅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들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그 고난 속에 있었기 때문이죠. 오늘 설교의 핵심이 ‘뛰어난 지식’이 아닙니다. 자꾸 우리는 다니엘을 이상하게 배워서, 우리 자녀를 어떻게 다니엘처럼 지식적으로 뛰어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합니다. 그래서 <다니엘 학습법> 이런 이상한 책들이 유행합니다. 이 설교를 그렇게 적용하면 세속적인 삶에 편승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지식을 주신

것은 그것이 이들의 하나님의 도구로서 사용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육체의 힘을 주시고, 누군가에게는 언어의 능력을 주시고, 누군가에는 큰 사랑을 주시고, 누군가에게는 인내와 순종을 주실 수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주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때, 그것이 삶을 가장 아름답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마지막 절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고레스 왕은 바벨론

이후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즉, 다니엘이 이때부터 바벨론 제국이 망하는 그때까지 왕궁에 머물러서 하나님을 위해 일하였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이 후에 메대에게 정복되는데, 다니엘은 메데에서도 총리직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즉, 제국의 흥망성쇠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고대의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지만, 그 안에서 포로들의 지혜를 의지해야 할 만큼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들이 아니면,

바벨론도 운영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변방의 작은 나라, 유다는 바벨론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종교도 바벨론의 종교에 비해서 너무 초라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크신 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품는 믿음이 이것이길 바랍니다. 세상을 살아갈 지혜와 세상을 이길 능력이 내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세상을 이기시고 다스리시고 운영하시는 분이 바로 내가 의지하고 내 안에 머무시는 하나님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거기에 거십시오. 믿음의 모험. 신앙인의 삶은 바로 믿음의 모험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허상이 아니라, 진리에 뿌리박힌 강력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사귐의교회 성도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