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 월요일에 교단에서 주최하는 <작은교회를 위한 예전적 예배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그 세미나에 참여했던 이유는, 그전에 있었던 예전적 예배학교에 다녀오면서 저에게 많은 도전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희교회에서 진행하는 매월 첫 주 성찬예배는 그 세미나에서 제가 깨달은 것을 적용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나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중에 두 번째 강의에서 다뤘던 최주훈 목사님의 <예배란 무엇인가>의 내용이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그분이 그러면서 각 교회의 주보를 놓고 성도들과 예배신학을 나누어보라고 하셔서, 저는 오늘 이렇게 여러분과 설교로 예배에 대해서 함께 메시지를 나눕니다. 제목 그대로 ‘우리가 추구하는 예배’가 무엇일까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제가 참석했던 세미나는 ‘예전적 예배학교’입니다. 예전이라고 하는 것은 흔히 말하면 저희의 성찬예배와 같은 스타일의 예배입니다. 성례전이라고 하고, 그것을 다른 말로 예전적 예배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히 성공회의 예배 스타일, 조금 더
확실하게 와닿는 표현으로 하면 마치 가톨릭의 미사와 같은 형태의 격식있고 전통적인 예배가 예전적 예배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예전으로 대표되던 교회의 예배는 말씀 중심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하게 되었죠. 그래서 최근의 예배 스타일을 지칭하는 것은 미국의 윌로우크릭 교회의 예배입니다. 흔히 ‘열린 예배’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들어왔고, 온누리교회로 한국에서는 대표되기도 했습니다. 격식이 거의 없는 자유로운 스타일의
예배입니다.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입고 예배 인도하는, 강대상은 없는 그런 예배 스타일입니다. 예전적 예배와 열린 예배. 누군가는 이것을 ‘예배 전쟁’이라고 표현합니다. 둘 다 예배인데 너무 다른 스타일의 예배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죠. 그럼 무엇이 옳은 예배인가? 다른 예배는 모르더라도 가장 중심이 되는 주일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맞는 것이냐? 다른 사람들 이야기는 그들 문제고 그럼 우리만 하더라도 둘 중에 무엇이 표준이냐? 오늘 우리가 던지고 찾아갈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
그럼 우리는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 어디에서 답을 찾아야 할까요? 구약의 제사와 달리, 기독교 예배의 원형은 성경에 없습니다. 만약 이것이 있었다면 우리의 답은 쉽습니다. 성경적인 예배가 무엇이냐? 그것을 따르면 되기 때문이죠.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시다. 초기 기독교 예배. 기독교 예배는 부활의 증인들, 복음의 증인들이 함께 모이는 영적 가족, 제자 공동체적 모임이었습니다. 모여서 예수님의 사역과 부활 사건, 그리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목격했지요. 그들은 복음을 전하며 자신들이 경험했던 것을 전하여 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에 대한 간접 경험자들이 생겨나는 것이죠. 예수님의 제자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은 또 그 제자들 말입니다. 그들도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또 서로 나눕니다. 교회 공동체는 ‘모여서 우리 예배하자’ 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한 모임이 아니었죠. 그보다는 복음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소중한 이야기를 함께 간직한 사람들이 때를 정하여
모여서 아주 단순하게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예배당도 없었죠. 오늘은 이 집에서 모여서 교제 나누고, 다음 주에는 저 집에서 모여서 교제 나누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밥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런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역할을 나누어서 이것저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철수는 모이면 노래를 인도해주고, 영희가 오늘 알고 있는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주고, 순희는
오늘 간식을 준비하고, 영수는 다음 모임에 대한 광고를 합니다. 이런 모임이 흔히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임입니다. 그런데 양주에서 모이는 모임과 서울에서 모이는 모임, 수원에서 모이는 모임에서 진행하는 방식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각 지역마다 모인 사람마다 다 다른 방식으로 그것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을 나누는 것이 말씀이 되고, 그 안에서 함께 식사하는 것이
성찬으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찬이라는 두 개의 예배 축이 기독교 예배의 핵심 요소로 공유되지만, 그것이 진행되고 이루어지는 방식은 모두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제사법은 있지만, 예배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에는 제사장의 역할이 있다면, 신약에서는 모두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모여서 그리스도의 삶을 나누고. 모임 시간이 길어지며 자연스럽게 길어지며 식사를 포함한 모임이 되고. 그러면서 그 식사에도 의미를 부여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성찬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같이 다짐하고 헤어지고. 그래서 예전적 예배가 옳은가, 아니면 현대적 예배가 옳은가? 이 교회는 이렇게 예배하고, 저 교회는 저렇게 예배하는데 어떤 예배가 더 옳은가. 더 나아가 예배 때 사도신경을 해야 하느냐, 주기도문을 해야 하느냐. 성시교독을 해야 하느냐. 축도로 끝내야 하느냐. 종을 쳐야 하느냐. 이러한 모든 문제는 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정답이 없다.” 반면에 이것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예배가 정답이다.” 조금 더 풀어서 이야기하면, “예배란 각 교회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이다.”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배의 형식이 무엇이 맞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각 교회 공동체 안에는 다양한 모습과 형식의 예배가 존재하는 것이 다양하고, 그 다양한 예배들은 모두 나름의 정당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좋아하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목회하면서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개신교는 왜 이렇게
하나 되지 못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특히 이것을 가톨릭의 모습과 비교해서 많이 비판적 질문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최근에 그 질문 앞에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저는 가톨릭과 달리 각 교회마다 각 교파마다 다양성을 갖고 공존하는 것이,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우리를 다양하게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 좋고, 그 다양성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면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양성의 산물인 성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순복음, 구세군, 성공회 등의 모든 개신교 교파들이 각자의 신학적 색깔을 드러내며 존재하는 것이 저는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도원의 영성과 수도원의 영성이 모두 좋습니다. 뜨거운 불과 같은 예배나 침묵으로 드리는 예배나 모두 좋습니다. 저는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창조를 문자 그대로 6일로 보는 사람이나, 하나님께서 진화도 사용하셨다고 믿는 사람이나, 그것이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저는 함께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모여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묶여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공동체의 예배란 기준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우리의 공적 예배는 우리 안에서의 역사, 우리 안에서 공유된 신학 안에서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약속이자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와 다른 교회의
예배를 비교할 필요도 없고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의 역사와 신학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예배의 의미를 잘 기억하고 이해하고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형식을 놓고,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여기가 정통이다. 저기가 이단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의 예배를 잘 이해하고 늘 최선의 예배가 될 수 있도록 함께 다듬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만, 이런 다양한
기독교의 예배 안에서 어느 곳에나 늘 존재하는 공통분모가 있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기억을 나누고, 떡을 떼는 것’입니다. 초기 교회 예배에는 ‘그리스도의 기억’(말씀)을 나누는 것과 ‘떡을 떼며 교제하는 것’(성찬)이 항상 있었다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 공동체의 모임이 여타 사교모임과 차이를 만들 수 있는 요소는 수다를 떨고, 밥을 먹더라도 거기에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기억이 늘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기억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교회의 예배가 추구하는 신학을 우리가 먼저 잘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한번 목회자로서 우리의 예배신학을 나눠보겠습니다. 일단 주일예배를 보면, 저희는 기본적으로 젊은 세대가 많으므로 ‘열린 예배’를 드렸습니다. 우리교회만큼 예배 순서가 심플한 경우도 없죠. 그래서 많은 목사님들이 우리교회 예배를 보면 ‘청년부 예배’ 같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예배 순서를 많이 생략했습니다. 대신 몇 가지를 이 안에서
분명히 지키기 위해 노력합니다. 첫째. 우리는 준비찬양을 하지 않습니다. 찬양에는 준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정시에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찬양을 대하는 태도를 바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둘째. 설교는 강해설교를 합니다. 이것은 성경 66권을 모두 설교하기 위한 우리의 결단이며, 새벽예배를 하지 않지만 매일 묵상하는 삶을 함께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입니다. 셋째. 결단의 찬양을 부릅니다. 설교는 말씀을 받는 시간인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 후에는 결단하는 시간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다짐하며 기도합니다. 넷째. 복장이 가볍습니다. 저도 가능하면 예배 때 풀 정장을 하지 않습니다. 지난주처럼 청바지를 입기도 합니다. 헌금 가운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모습은 저희가 ‘열린 예배’와 같이 조금은 친근하고 자유한 예배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입니다. 성경책을 가져오지 않아도 예배할 수 있는 것 등도 그렇습니다. 다섯째. 반면 저희가
예배를 대하는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를 대충 때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순서를 줄이거나 뺄 수는 있지만, 어느 하나도 대충하는 법은 없습니다. 저는 예배의 형식보다 중요한 것은 예배를 대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예전에 예배에 지각하지 않는 교육을 하기 위해서, 예고하고 한동안 예배가 시작하면 예배당 문을 잠갔던 적도 있습니다. 늦게 오는 사람은 교육관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죠. 저는 언젠가 필요하면 또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정말
제 마음을 잘 이해해줄 사람이라면 설교 때 조는 사람을 깨우기도 합니다. 그것은 제가 여러분을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의 예배는 심플하고 현대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대신 매월 첫 주 저희의 예배는 일반적인 교회보다 더 순서가 많은 ‘예전적 예배’입니다. 이때는 주보 속지까지 나가서 그대로 읽고 고백하고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합니다. 우리가 성찬을 2부 순서로 하지 않고, 아예 한번의 예배를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드리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현대 예배에서 성찬이 너무 약화되고 말씀이 너무 강화되어 불균형이 심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저희교회는 성찬을 가장 많이 하는 교회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매월 1회씩 하니까요. 물론 매주 성찬을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모든 예배를 예전적으로 하는 교회들의 특징이죠.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가 현대적 열린 예배와 예전적 예배 안에서 잘 균형을 잡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둘째. 성찬예배
때는 꼭 찬송가를 부릅니다. 우리교회는 주일예배임에도 거의 찬송가를 부르지 않습니다. 저는 예배 인도자의 콘티에 거의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찬예배는 꼭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약속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찬송가에 있어서도 현대적 찬양이 주는 공감성과 찬송가의 찬양이 주는 특유의 전통 안에서의 깊음을 함께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성찬예배 스타일이 일반적인 교회와 굉장히 다릅니다. 제가 성찬예배 때마다 그 의미를 잘 설명해 드리며 진행하려고 애씁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그 성찬예배 안에 담긴 신학을 이해하고 누릴 수 있기를 원해서입니다.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습니다. 우리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예식을 추가하여 성찬을 좀 더 길게 진행합니다. 성례전은 보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성찬예배가 어떤 의미가 있는 예배인지를 꼭 나눕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식탁에 참여할 수 있는 주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누리는 자리임을 깨닫고, 성찬에 참여함으로써 내가 받은 은혜, 내가 받은 구원, 내가 얻은
하나님 자녀의 지위를 기억하고 고백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찬예배에는 가능한 풀세팅을 합니다. 물두멍까지 놓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건반 이외의 악기도 일부러 사용하지 않습니다. 조명 시스템도 바꿉니다. 성찬대에 무대 중앙을 내어줍니다. 제가 오히려 빗겨서 설교합니다. 그리고 저도 아무리 더워도 가운을 입습니다. 이것은 성찬예배가 지닌 특유의 철저한 준비와 양식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무조건 현대의 담이 낮은 예배만을 선호하지 않으며, 전통적 예배의
고유한 특성과 장점을 누려가기 위한 마음입니다. 아마 지금 제가 설명한 이 예배에 대한 저희의 노력, 그리고 다듬어온 과정, 그리고 담긴 신학을 이미 잘 알고 계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부분은 이제야 아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마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공동체의 예배 신학입니다. 저희가 금요기도회를 올해 절반은 기도회로, 절반은 소그룹 예배로 바꿨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 공동체가 추구하는 신학을 담은 것입니다. 우리는 소그룹
공동체의 예배를 단순한 모임이 아니라, 진정한 예배 모임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수요예배를 없애고 대신 성도들이 성도들을 일대일로 양육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성도 모두가 제사장이며, 복음을 전수하는 교회가 되기 위한 우리의 신학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우리의 신학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 어떻게 하는 것이 옳고 그르냐.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왜 그렇게 하는지를 이해하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우리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우리교회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지금 우리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나라 신학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곳에서 작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 - 모든 성도의 삶에 그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도록 회심을 돕는 것. -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성도를 양육하는 것. -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어, 세상 모두가 원하지만, 세상에는 없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 - 세상 사람들에게는 물음표를 던지고, 이곳에 속한 사람들에는 느낌표를 안기는 시대를 품고 세상을 감당하는 진짜 교회가 되는 것.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사귐의교회의 목표입니다. 누군가가 물으면 저희는 ‘우리는 이런 것을 추구하는 교회야’라고 이야기 해주십시오. 그런데 저는 이번 예배학교에서 다시금, 우리가 추구하는 이 길에 대한 확신을 얻었습니다. ‘사도전승(210-230년경)’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교회에 대한 박해가 심했기에, 교회 모임에는 검증된 사람만이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첩자나 밀고자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교 후 세례받은 사람만이 모임에 참여하여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지금 성만찬의 유래입니다. 그런데 교인이 되는 것도 되고 싶다고 다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인이 되고 싶은 사람은 우선 매우 깐깐한 문답 과정이 필요했고, 직업이 합당하지 않으면 퇴짜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문답 심사를
통과하면 그 사람에게는 후견인이 세워집니다. 1:1 매칭이죠. 그로부터 3~5년간 거의 매일 아침 후견인과 함께 교회에서 말씀 공부를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했습니다. 교육 기간이 끝났다고 다 세례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세례 예비자 심사를 통해 두드러진 삶의 변화가 없다고 판단되면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변화가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었고, 그 후 정식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예비자들은 금요일부터 금식하였고, 모든 교인은 토요일부터
세례자를 위해 함께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주일 새벽이 되면, 세례 예비자는 모든 옷을 다 벗고 세례를 받습니다. 이 의미는 세속의 옷을 벗고, 세속에 대한 관심, 가치와 충성이라는 오랜 세월의 축적물들을 제거하는 의미였습니다. 세례식 이후,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혀 교회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면 모두가 이 사람을 가족으로 맞이했습니다. 이제 세례받은 이들은 신자들과 성찬을 함께 나누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공인되기 전까지의 기독교 공동체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의 자료에 의하면, 로마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던 313년 당시 로마제국 총인구의 10%가 교회 소속이었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엄청난 박해의 시대를 겪었던 것을 생각하면 10%라는 수치는 매우 놀라운 것이죠. 예수님의 승천 이후, 통계상으로 매 10년마다 평균 40%씩 교인이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면 예비 사형수가 되는 것인데, 그들이 이렇게 부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만큼 교회 공동체가 로마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밤에 모였고, 식사 자리엔 상류층이나 로마인들 눈에 가증스러운 하층민이나 동석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도저히 함께 어울리기 어려운 공통점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그런데도 이들의 결속력은 놀라울 정도로 끈끈했습니다. 즉, 로마인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인들은 남녀가 형제애/자매애로 똘똘 뭉친 매우 이상한 모임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기독교를 두고 한쪽에서는 비난과
험담, 박해를 아끼지 않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자발적으로 그 안에 들어가 순교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니까 교인들에게서 느껴지는 특별한 매력이 강했다는 것입니다. 그 매력이 무엇인가? ‘변화’였습니다. 신념의 변화, 소속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변화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굉장한 매력이 있었고, 그것이 박해 속에서도 교회를 부흥시키는 요소였습니다. 이러한 세상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겠다는 진정한 회심이 그들의
삶을 당시 로마시대의 계급화 되고, 분열된 모습과 다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계급과 상관없이, 성별과 상관없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가족으로 하나 되어 살게 한 것입니다. 신념이 변하고, 소속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고, 삶이 변하였습니다. 그것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더욱 큰 미움을,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 자신도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말입니다. 결국 우리의 예배의 최종 목표는
삶에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그 삶은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변화에서 나옵니다. 그 변화는 무엇에서 시작됩니까? 내 삶의 주인을 바꾸는 진정한 결단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인 되시며, 자리를 바르게 잡으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셔서, 이 예배 공동체 안에서 함께 주님을 닮아가며, 세상을 향해 파송되어 주님의 자녀답게 맡기신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초기 교회의 역사에서 배울 것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특별한 예배로 교회 부흥을 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보다 우리에게 언제나 중요한 것은 이곳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며 변화되어 가는 것. 그리고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가 가진 문화, 역사, 가치관, 그리고 예배, 무엇보다 여러분이 좋습니다. 우리가 예배당 입구 문 앞에 써놓은 글처럼, 우리의 예배가 이곳에서 최선으로 드려지고, 돌아가서 흩어진 자리에서는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사람다운
거룩한 삶의 흔적을 남길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