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하나님 나라 신학이란,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 / 강정규 목사

2022-11-18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하나님 나라. 저는 아직도 제가 처음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누린 기쁨과, 그것을 교회에서 전했을 때 경험한 반응을 잊지 못합니다. 제가 깨달은 기쁨이란, 얼마 전 설교에서 다뤘듯, 구원이 단순히 죽음 이후에 천국 가는 것으로 이해하던 저에게, 삶은 너무나 허무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 갖고 있던 구원론은 이런 도표이죠. 하나님 나라를 죽음 이후 가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삶이 허무해집니다. 이미 난 구원이 확정되었으니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때론 반대의 이해를 가지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만 이해하는 것이죠. 그럼 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는데 내 삶은 세상의 고통 가운데 있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정론적 오류에 빠져 버리기 쉽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론은 이것입니다. 저는 성결대학교를 다니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조금씩 듣게 되었고, 에스라성경대학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학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성경을 이해하는 저의 눈이 달라졌고, 무엇보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이러한 구원론 뿐 아니라 복합적인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요. 너무 기쁜 나머지, 이것을 빨리 교회에 전해주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맡은 청년부에서 전하게 되었습니다. 2013년에 처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공부를 시작했을 때, 청년들은 거의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만 하더라도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 신학을 거의 가르치지 않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2015년쯤

새로운 사역지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때도 청년부였는데, 그들이 보이는 반응들이 참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듣고 집에 가서 부모님들과 논쟁하기도 하고, 더 심한 경우는 제가 이상한 것을 가르친다고 생각해서 다른 교역자에게 이것이 이상한 것이 아닌지 확인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는 제가 굉장히 독특한 가르침을 전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분위기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라는 키워드는 한국교회의 유행처럼 되었습니다. 한국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책들이 소개된 것은 1980년대 중반부터이니, 한국에서 자리 잡기만 30년 정도가 걸린 셈입니다. 이제는 도리어 하나님 나라를 빼고 이야기하면 뭔가 없어 보이고, 하나님 나라를 넣어서 강의를 개설해야만 사람들이 듣습니다. 기독교 서적들, 성경공부 프로그램들도 점점 ‘하나님 나라’를 강조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를 너무 광범위하게 사용하면서 오히려 그 의미가

혼탁해지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너나 할 것 없이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만, 과연 저들이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2017년부터 18주 동안 주일설교를 통해 <하나님 나라와 제자도>에 대하여, 그리고 2019년에는 7주 동안 금요예배 특강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다뤘습니다. 그러나 그때 잘 참여하지 못했거나, 그 이후에 등록한 사귐 가족들도 많이 있기에, 이번에 다시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여러분과 나누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제가 예전에 했던 자료를 보니 강의안 첫 부분에 이렇게 적어놓고 시작했더라고요. “가르치는 자에 대한 신뢰가 중요하다. 그러나 사람을 믿지 못해도 괜찮다. 궁금하고 의심이 나면 그 마음을 갖고 성경에서 답을 찾아라. 그러한 궁금증이라도 제공해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로 이끄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감사하다.” 오죽 제가 이것을 가르치다가 다양한 반응을 경험했으면 이렇게 적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나라 신학에 대한 오해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질문하는 신앙의 태도를 갖고 이 설교를 잘 듣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 말씀을 읽어봅시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사람들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 믿게 된 사람이 많이 생겼다. (행 17:11-12) 1) 하나님 나라 신학이란? 구속사적 관점이란 죄와 구원의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틀린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 좀 과격한 표현으로 예전에 많이 사용한 전도 구호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입니다. 구원에 대해 집중하여 다루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됩니다. “구원받는 것이 우리 삶의 목표인가?”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서 사는가?” 그럼 구원을 이미 확신하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삶의 목표를 다 이룬 것인가요? 저는 많은 사람들이 죄인으로 살다가 교회에 와서 의인으로 잠시 되었다가 다시 세상에 나가서는 죄인이 되었다가 다시 교회에 와서 의인이 되는 이런 신앙생활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죄인인 내가 의인이 되기 위한 수단, 즉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로 예배하고 헌금하고 헌신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경우도 봅니다. 즉, 여기에는 몇 가지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첫째, 구원을 죽음 이후에

천국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 둘째, 구원을 받았다는 완료형으로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표현들 자체가 서로 충돌하는 것이죠. 구원이 죽음 이후 천국 가는 문제인데,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표현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무엇을 받은 것이냐? 나중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받은 것이냐? 그럼 그것은 언제나 유효한 바뀌지 않는 것이냐? 유효기간이 있느냐? 심한 경우는 이전의 복음전도 방식은 복음에 대해서 설명한 후, 그것을 고백하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해주니까, 교회 한번 나가지 않은 사람이 ‘예수를 믿는다’라는 고백 하나로 구원의 문제가 이제 완전히 해결된 것인가? 우리는 여러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답은 성경은 그럼 무엇을 말하는데? 이것입니다. 구속사적 관점도 맞지만, 성경은 그 이상의 것을 말하고 있고, 구원이 죽음 이후 천국에 가는 것도 맞지만 죽음 이후의 것만이 아닌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한 것이며, 과거형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받고 있다는

현재형과, 받을 것이라는 미래형 표현도 성경에는 나타나 있습니다. 코끼리를 만졌던 장님들의 이야기를 기억해보십시오. 어느 한 부분을 만지고 말하는 것이 거짓은 아니지만 일부이며, 그것이 코끼리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착각이며 오류입니다.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영국의 한 유명한 신학자가 학교에서 퇴근하는데, 한 청년이 담대하게 전도를 하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때

그 교수님은 씩 웃으며, “에베소서 2:8에 따르면 있네. 그런데 고린도전서 1:18에 따르면 지금 그냥 진행 중이지. 그리고 디모데후서 4:18에 따르면 아직 못 받은 게 확실하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바울은 구원을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과거시제이죠. 많은 사람들도 교회에서 말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다.” 때로는 손들고 고백하게 하죠. (고전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 구절에서는 ‘구원을 받는’, 영어로 보면 ‘to us being saved’라고 하여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에게는’이라는 의미입니다. 현재진행형입니다. 이미 받았다고 했던 바울이 구원의 확신이 조금 사라진 것일까요?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죽음이

임박해서 기록한 디모데후서에는 ‘구원하시리니’라는 미래시제를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보다도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당당히 말하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도대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가요, 받고 있다는 것인가요, 받으리라는 것인가요? 어떤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보고 코끼리는 기둥과 같은 모양이구나 말하고, 어떤 사람은 꼬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뱀과 같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코끼리를 잘 이해하거나 잘 설명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은 그 전체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저는 구원에 대해서 적어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오류가 없게 표현하려면,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라는 말보다는, “우리의 구원은 시작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이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구원을 나의 개인적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기존의 주된 가르침이었다면, 사실 성경은 우리의 개인적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비전으로서 다룹니다. 즉, 나의 관점에서 바라보기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나 한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가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 온 열방이 하나님 나라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신학은 우리가 추구하던 개인적 차원의 신앙생활과, 단순히 구원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을 수 있도록, 더 깊고 넓은 하나님의 뜻과 성경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로 우리를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 관점으로 볼 때, 성경을 이해하는 것에도 도움이 되며, 성경을 부분적으로 각기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통전적으로 볼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2) 하나님 나라의 설계도 성경은 성경 전체의 첫머리에서부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은 창조에 관한 기사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에덴동산 이야기입니다. 에덴동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비전을 담아낸 최초의 세계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죠. 그리고 성경은 성경 제일 앞과 뒤에서 대칭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알파와

오메가이신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 2:10) 강이 에덴에서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계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 22: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계 22: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창세기 1장이 첫 창조라면, 계시록

마지막에는 새창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창세기 1~2장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의 모습, 하나님 나라의 원형 혹은 설계도라고 표현합니다. 에덴의 설계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그 나라의 백성이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와 하나님/우리와 세상의 관계가 어떠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 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경의

가장 첫 구절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주체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혼돈 가운데(창 1:2) 질서를 세우시고(6일 창조),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십니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유일한 피조물입니다. 창조된 다른 피조물과 구별되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가 됩니다. (창 1: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고대 세계에서 왕들은 자신의 통치권이 직접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먼 지역에 자신을 닮은 석상을 세우고, 그것으로 자신의 주권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그들이 땅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드러내는 대리자와 부왕의 역할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도록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신 사명도 창세기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중요한 포인트가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남자만 형상으로 창조하고, 여자는 갈비뼈로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두 개체 모두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창조되었습니다. 보통은 뒤에 만든 것이 더 정교하고 발전된

모델입니다. 남자가 더 단순하게 만들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우리에게 맡기신 일은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만들어진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풍삶초를 하신 분들은 ‘경영하는 것’으로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는 다스리라는 말도 한가지 전제를 덧붙이면 좋다고 생각합니다. ‘섬김으로 다스리기’ Servant Leadership. 우리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세계를 유지하고 돌봐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우리에게 맡겨진 고귀한 사명이 이것입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새번역) 주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 동산에 두시고, 그 곳을 맡아서 돌보게 하셨다. 죄짓기 전에는 아무것도 안하고 그저 존재만 했던 것이 아닙니다. 사명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 세상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도록 형상을 따라 창조 받은 그 목적대로 말입니다. ‘죄를 짓고 구원받는

일’보다 먼저 이 사명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죄가 없었더라도 우리는 이 사명 안에 거하는 것이고, 구원의 문제보다 이 사명의 문제가 우선합니다. 구원이 필요하지 않은 하나님과의 온전한 상태에서도 우리가 하는 일은 이 사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기 전, 하나님의 첫 세계의 모습 속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러분, 믿음이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충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따르는지 확인할 수 있는 표지입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드러내는 표상이었습니다. 아담은 그 나무를 볼 때마다 에덴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신이 아니라, 자신과 에덴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이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 실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는 것,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수 있다는 것. 인간은 그 말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차이를 부정하고, 인간 스스로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죄였고, 그 결과는 에덴의 상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뜻과 법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에덴에서도 그러했고,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덴에서 하나님과 나의 존재적 자리가 유지되고 법에 대한 충성이 있을 때, 그곳은 하나님과 내가 함께 교제하며 머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우리를 통해서 그 세상의 모든 것이 다스려지는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동역하며 다스려 나가는 것이죠.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온 세계와 피조물을 다스리고, 생육하고 번성함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온 세상에 확장시켜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에덴이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고 비전입니다. 에덴은 왕과 백성, 살아갈 땅, 지켜야 할 법 등 모든 요소를 갖춘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자 설계도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의 가장 앞에는 그 모든 일에 대한 이야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꿈꾸시는 나라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죄 이전에 주어진

사명, 죄 이전에 우리에게 허락하신 세상, 하나님의 꿈과 비전들이 있었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습은 ‘구원받았으니 끝’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우리의 잃었던 사명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여 다시 하나님의 꿈을 함께 꾸는 시작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꿈을 꾸는 주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되기를, 그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금요 기도회 찬양 / 주의 나라 이루시리라 / 낮은 곳으로 / 이 땅에

오직 주 밖에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