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말 그대로 ‘거룩한 탄생’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세계를 초월하여 계신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구원하고자 독생자를 이 세계에 보내주신 날입니다. 우리는 ‘독생자’라는 말을 오해할 때도 있습니다. ‘외아들’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이 단어는 ‘모노-게네스(μονογενής)’입니다. 모노(μόνος)는 ‘유일한, 하나뿐인’을 의미하고, 게네스(γενής)는 ‘탄생, 종류, 본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아들이
하나라는 의미보다는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나뿐인 독특한 존재’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특별히 성경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말하는 생물학적인 관계의 표현보다는, 그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독특한 성품과 권위를 지닌 유일한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낳거나 창조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 본질의 일부분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좋은 표현입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자기 세계를 버리고 오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자기 세계에 존재하며 삼위일체적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그 연결성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사명의 연결성)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초월적인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성을 우리 수준으로 격하시켜서, 왜 아들이냐 딸은 안 되냐? 혹은 왜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냐?
어머니 하나님도 필요하다, 이런 소리는 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지 못한 착오들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어느 날 지구라는 세계가 완전히 망가져서 더 이상 자체적으로 정화할 수 없는 망가진 행성이 되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이 지구를 망가뜨린 그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어떤 자원이 우주에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지구 자체적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이고, 어느 누구도 우주에 가서 그것을 가져올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아는 우주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것을
지구 밖으로부터 지구 안으로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때, 특별한 모습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평범한 모습 정도가 아니라,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를 망친 것이 바로 ‘힘의 논리,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세계, 성공 주의’ 이런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우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이 세상에 알려주기 위해서 그분은 가장 높은 분이지만, 이 세계에서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그의 탄생 자체가 그러므로 매우 역설적입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왕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본질이 하나님 나라의 왕이고 우리의 창조주인 것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으로 오셔서 이 세계에 보여주신 모습은 겸손의 왕이고 섬김의 왕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은 가장 섬기는 자이고, 왕을 따르는 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임을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내어주지 않는 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아무런 희생도 하지 않은 채, 온 인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셔서 오셨고, 사랑하기에 자기를 내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탄절에 대해서 여러 논쟁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성탄절을 교묘한 말장난으로 의미를 상실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도 바르게 알아야 할 것은 ‘오늘’ 예수님이 탄생한 날은
아닙니다. 그런데 원래 생일이 꼭 탄생한 날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 탄생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성탄절 문화를 퍼뜨린 것은 사실 교회가 아닙니다. 산타클로스는 교회와 상관없는 음료 회사의 작품이고, 순록과 눈썰매도 서양 문화의 잔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것들이 주인공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성탄의 의미를 놓치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세상은 너무 타락해서 성탄절은 1년 중에 숙박업소를 잡기 가장 어려운 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날인데,
왜 지들이 그것을 어떤 기념일로 삼으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감히 사탄의 문화가 정복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성탄의 의미를 우리가 높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왜 오셨고, 무슨 일을 하셨고, 내가 그분의 어떤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송축해야 하는지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에 대한 찬양과 감사, 그리고 예배를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성탄절을 바르게 보내는 것입니다. 우선 오늘 설교는 금요일에 했던 설교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저의 목표는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최대한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의 시작이 왜 족보인지에 대해서 다뤘습니다. 마태복음의 시작은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로, 이는 창세기의 "세상의 시작"과 "사람의 시작"을 연상시키며 예수님의 "복음의 시작"을 나타냅니다. 위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족보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형태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설명하고자 굉장히 애쓴 장치입니다. 족보는
숫자 14를 통해 다윗을 강조합니다. 이유는 다윗의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그 성취로 예수님이 오셨음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또한 족보 속 여성들이 의미심장하죠.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같은 여성들이 족보에 포함된 것은 유대인에게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모두 구약성경에서 이방인이었고, 메시아의 계보에 속한다고 보기에는 세상의 눈으로 다소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세상의 기대와 다른 방식으로 메시아가 준비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들은 부족함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존재를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신 이유는 바로 깨어지고 망가진 사람들을 구원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의 족보는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족보의 끝은 예수님의 부모 이야기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 그런데 족보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족보가 16절에
이르러서 이전과 다른 소개형식을 취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이전까지 족보의 기록형식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 혹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서 아들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왔습니다. 그러면 마지막 부분도 ‘요셉은 마리아에게서 예수를 낳았다’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16절
후반부를 보면 ‘요셉’의 이름은 빠지고, ‘마리아에게서 예수가 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상하죠? 우리는 이런 이상한 부분이 어떤 의미를 담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는 왜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요셉의 이름을 뺀 것일까요? 요셉이라는 인물은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일까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이 1:18-25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의 이름이 족보에서 빠졌다고 하여, 그를 멀리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특별한 이야기를
제대로 소개하려고 남겨둔 것처럼 성경은 요셉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신비는 성령에 의한 잉태, 즉 동정녀 탄생입니다. 결코 누구에게도 있을 수 없었던 특별한 탄생이죠. 이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에 있어서 우리는 요셉을 가까이 두기 보다 멀리 두는 것이 편합니다. 왜냐면 그래야 동정녀라는 것이 더 안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철저하게 요셉 중심으로 이야기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참 재미있습니다. 인간이 인위적으로 신화를 만들고자 했다면 하지 않았을 법한 기록의 형태들, 우리의 예상을 깨는 이러한 부분들이 저는 성경이 가진 매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예수 탄생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우선 그는 예수님에게 사회적이고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줍니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요셉의 호적에 올라가게 됩니다. 오늘 족보의 기록형식에서 ‘요셉’이 생략되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족보는 요셉 집안의 족보라는 사실입니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우리는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이러한 표현은 요셉이 ‘다윗의 자손’임을 기억할 수 있도록 밝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의미입니다. 만약 요셉이 없다면 예수님은 다윗의 언약을 이루는 메시아가 되지 못합니다. 요셉이 성취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것을 그냥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이 일이 일어났던 2000년 전의 마리아와 요셉의 상황으로 좀 더 다가서서 그들의 마음으로 생각해 봅시다. 1:18에 보면 마리아와 요셉은 무슨 관계를 맺죠? ‘약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바뀌기 전에 개역 한글 성경에서는 무엇이었는지 혹시 기억나시나요? ‘정혼’입니다. 개역 : 정혼 _ 정혼하는 순간 법적 부부이다. 다만 둘 사이의 육체적 관계는 결혼 때까지 불가이다. 개정 : 약혼 _ 이건
법적인 아무런 구속력 없다. 이건 잘못된 해석이다. 마리아와 요셉은 약혼이 아니라 정혼한 것입니다. 정혼은 결혼 1년 전에 합니다. 지금 18절은 두 사람이 정혼한 부부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혼한 상태는 성적인 관계는 금지되어 있지만, 법적으로는 부부입니다. 만약 정혼 기간에 남자가 죽으면 여인은 과부가 되는 것이 유대인의 법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왜 정혼 기간을 두느냐? 정혼의 기간을 두는 중요한 이유는 여자의 정결함을 확인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기간 부정함이 드러나면 돌로 쳐 죽이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유대인은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죽이는 것은 총독에게만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취할 방법은 ‘이혼’입니다.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요셉이 율법에 충실한 유대인이라면, 지금 마리아가 정혼 기간에 임신했으면 뭘 해야 해요? ‘이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19절에 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로운’이라는
헬라어 ‘디카이오스’는 2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 앞에 바로 선’(신 22:13-21) or ‘착한’/‘좋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요셉에 대해서 성경이 어떻게 보고 있는가. 우선 그는 첫 번째 해석과 같이 율법 앞에 바로 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혼’을 통해 율법을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혼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 이혼을 하거나, 두 사람의 증인만 세워서 조용히 이혼하는
것입니다. 요셉에게 유리한 방법, 즉 자기 이혼의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공개적인 편이 좋습니다. 대신 마리아는 사회적으로 힘들어지죠. 그러므로 요셉은 이 상황에서 조용히 이혼하는 것을 선택합니다. 요셉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부끄럽게 하지 않으려 했고, 마리아는 나이 어린 소녀로서 믿음과 용기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습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요셉에게 주의 사자가 현몽합니다. 어쩌면 마리아에게 수태고지가 있고 난 뒤, 마리아는 요셉에게 그 사실들을
털어놨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전까지 성경에서조차 성령의 잉태는 없었으므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혼하려고 하는 그때, 요셉에게 하나님의 비밀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순종했던 것처럼, 요셉도 마리아와 같이 하나님의 뜻 앞에 순종합니다. 이 당시 유대인 여성은 12년 반이면 결혼합니다. 한국 나이로 14~15세 정도에 불과합니다. 연소한 나이였지만 그들의 믿음도 연소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마리아가 임신하고
얼마 안 되어 두 사람은 결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는 전문용어로 ‘허니문 베이비’로 태어난 것으로 사람들에게 보였을 것입니다. 천사는 수태고지와 함께 아기의 이름을 정해주었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이죠. 마리아에게도, 요셉에게도 알려줍니다. 예수는 천사가 알려준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외의 이름이 하나 더 있죠.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이후의 성경의 기록을 살펴보면, 실제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임마누엘로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 예수님은 완전한 임마누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현존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여러분. 마태복음의 가장 마지막 부분이 어떻게 끝나는 줄 아십니까? 1장의 임마누엘이 마태복음 서론의 끝이라면 결론의 끝을 한번 봅시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자주 보게 되는 <인클루지오>입니다. 마태복음 전체는 ‘임마누엘’ 인클루지오입니다. 그렇다면 그 안에 담겨있는 마태복음의 전체 내용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예수님의 임재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1장이 임마누엘의 예언이었다면, 28장은 임마누엘의 성취입니다. 그런데 잘 보면 인상적인 것은 1장의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고, 28장 끝에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예수님이라는 육체로 오신 것이고, 성령은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영으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즉 삼위일체 신앙 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누구시다?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태가 그가 전하는 복음서 마태복음 1장을 통해서 전하고 싶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가 성탄에 왜 모였습니까?
이 고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것이 말도 안 되는데,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일을 기꺼이 행하신 그분의 겸손, 섬김, 사랑, 희생에 대해서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성육신의 사건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계셨던 2000년 전, 그때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는가? 그렇지 않죠. 그분이 만약 예수님 시대에만 그것이 가능했다면 우리가
오늘 그분께 예배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백성과 함께하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대에는 성막/성전을 통해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2000년 전에는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몸을 입은 예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가시고 영으로 오신 하나님, 성령의
시대가 되면 임마누엘의 역사는 더 강력하게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임마누엘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더 강력하게 성취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아멘. 또 하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메시지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요셉을 만나서 사랑할 때, 그가 다윗의 후손인지 그런 것이 그들의 관심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마리아는 자기가
예수를 탄생시키는 통로가 될 줄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만남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수님의 메시아적 탄생에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들을 충족시킵니다. 마리아가 없어도 안 되고, 요셉이 없어도 안 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만남은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모른 채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합니다. 신앙인이라면 더욱 그러하죠. 그런데 정작 일상의 삶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며 시간을 보내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크고 위대한 일에 삶을 드리는 것은 귀하게 여기지만, 내 삶에 찾아오는 수많은 시간과 선택에 대해서는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뜻을 우리의 작은 삶, 그 안의 순종을 통해 이루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찾고 발견하고 동행하기를 꿈꿀 때,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해주실 줄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