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만약 어떤 교회에 설교를 초청받았습니다. 그곳을 섬기시는 목사님께 물어봅니다. “설교하는 자리에 참석하시는 성도님들은 대략 어떤 분들인가요?” 그런데 이렇게 대답합니다. “오늘 오시는 분들은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많고요, 어지간한 이야기는 업신여기며 쌀쌀맞고요, 태도나 마음이 아주 차갑습니다. 또 그중에는 신앙이 있다고 하나 사실상 거짓된 삶을 살고요, 대놓고 나쁜 짓을 하고요,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도 많습니다.” 만약 이런 교회라면 설교하러 가기
엄청나게 부담스럽겠죠. 제가 이렇게 요청합니다. “설교에 앞서서 성도님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니 한번 여러분이 지금 가진 질문이나 하나님께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적어서 저에게 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정리해서 성도님들의 질문을 저에게 보내준 것입니다. 비슷한 것들을 추리니, 크게 6가지 질문이 있었어요. 1) 하나님, 정말 저희를 사랑하시나요? 2) 최선을 다해 예배하는데, 왜 부족하다고 하시나요? 3) 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요? 4) 하나님은 왜 악한 사람들을 그대로 두시나요? 5) 제가 열심히 모은 재정은 저의 것이 아닌가요? 6) 하나님을 섬겨봐야 대체 얻는 것이 무엇인가요? 제가 이 질문들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답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가서, 이 의심 많고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 앞에 서서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책이 ‘말라기’입니다. 말라기서 전체가 이 여섯 가지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라기서의 첫 부분부터 한번 살펴봅시다. (말 1: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말라기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 자체가 ‘하나님의 특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말라기가 진짜 이름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특사를 지칭하는 ‘일반명사’냐의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수의 학자가 말라기를 실제 예언자의 이름으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보겠습니다. 우선 지금 말라기가 사역하는 시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설교로 다뤄왔던 시기의 배경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분열왕국 시대 속에서 북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남유다는 조금 더 나라가 유지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유다도 끝내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살지 않았으므로 바벨론의 침공으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머나먼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다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귀환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죠. 에스라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유다의 총독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함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완전한 도시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귀환의 역사 이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시대가 바로 말라기입니다. 어느덧 귀환 후 100년. 귀환한 땅에서 페르시아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는 유대민족의 삶은 그리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적으로는 오래전 에스라의 종교개혁 기운이 다 빠졌고, 시간이 지나면서 백성들은 다시 영적으로 냉담해지게
되었습니다. 한때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성전을 재건하며 기대했던 예루살렘의 찬란한 회복은 오지 않았고,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비교할 때 큰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점점 백성들의 신앙도 형식적으로 되었고 껍질만 남은 위선적인 모습이 가득했습니다. 백성들에게 신앙은 버릴 수야 없었지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소홀히 했습니다. 구약 내내 지켜왔던 십일조나 율법에 대한 헌신도 해이해졌습니다. 그런데 백성들도 나름 할 말이 있었어요. 당시에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 아래서 백성들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거든요. 이들 딴에는 자신들도 할 만큼 다 해서 힘들게 성전도 재건하고 헌신도 했는데, 여전히 바뀌지 않은 삶의 모습으로 인해서 시험에 들어 있었습니다. 삶의 상황도, 마음의 상황도 그러하니, 이 당시 영적 수준은 바닥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덕적 수준은 당연히 좋지 않았습니다. 사회가 어려우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을과 을의 싸움’이 펼쳐집니다. 거기서 조금이라도 약한 자들은 완전히 무너지게
됩니다. 이렇듯 기본 질서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아이와 여인들이 약자가 됩니다. 여인과 아이들은 희생되고 버려지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진 사회가 당시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깨어진 세상에서는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그나마 잘 사는 듯 보입니다. 악한 자들은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가?” 비웃으며 악한 삶의 길을 열심히 추구하며, 그것이 삶을 사는 지혜라고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은 그런 현실 속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악한 자들이 번영하고
의로운 자들이 고통받는 이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며 신앙에 대해 의심 가득하고 냉소적이고 회의적인 모습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하고 2000년도 더 지난 저쪽 남의 나라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것이 뭐 그리 도움이 된다고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까요?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것이 꼭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었던 것이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신에 대한 여섯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은 다 거기서 거기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던 현실의 어려움, 신앙에 대한 고민, 세상에 대한 불신, 하나님에 관한 질문이 오늘 여러분에게도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말라기서는 이에 대한 답변을 주고 있기에, 저도 오늘 여러분에게 그 내용을 성경이 말하는 그대로 풀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 (말 1:2-5) _ 하나님, 정말 저희를 사랑하시나요? (말 1:2a)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나 주가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랑받고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관해 설명합니다. “나는 야곱과 에서 가운데 야곱을 더 사랑했다.” 여기서 야곱은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고 에서는 그의 후손인 ‘에돔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에서
가운데 야곱을 택하고 사용하신 이유는 에서가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장자를 통해 사명을 이어가시는 것에 대해서 너무 쉽게 무시하고 그것을 가볍게 여겼던 사람입니다. 에서의 후손인 에돔 나라는 그 이후로도 하나님 앞에 교만하게 굴었다가 심판을 당하곤 합니다. 야곱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명이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으로, 이삭에게서 야곱으로 이어집니다. 야곱의 후손이 그 사명을 이어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대상을 ‘언약 백성’이라고
부르죠. 언약 백성은 하나님의 사명 앞에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께 약속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이들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이들의 주가 될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언약 앞에서 누가 더 충실했는가? 질문해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겼고, 하나님은 언약을 어겼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기회를 주기 원하십니다. 사실 히브리 민족은 애굽의 최하층으로 끝나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의 나라가
되도록 이끄신 것이 하나님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각각 당대 최고의 제국인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서 망했을 때는 어땠나요? 사람들은 모두 이제 진짜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역사 속에 그렇게 사라져버린 나라가 한두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유대민족은 귀환하여 다시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현실만 보면 갑갑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 속에 있는 주님의 섭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끝까지 사랑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라기서를 통해서 주신 일성, 첫 번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 앞에 여전히 신실하시고 최선을 다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회심으로 언약백성이 됩니다. 그래서 회심한 자들에게는 맡겨진 사명과 책임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다하는 것이 언약에 신실한 것이고, 하나님은 늘 언약백성에 대하여 자신의 사랑과 권능을 보이시며 돌보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불성실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여러 거친 도전이 있지만, 우리의 삶을 지금까지 이끌어 오신 하나님의 섭리를 묵상해보십시오. 그를 통하여 그분의 일하심을 보십시오. 그분의 사랑이 변함이 없습니다. 내 삶에 보이지 않지만, 일하고 계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2. 예배의 부패 (말 1:6-2:9) _ 최선을 다해 예배하는데, 왜 부족하다고 하시나요? (말 1:6)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인데, 내가 너희 아버지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공경하기라도 하였느냐? 내가 너희 주인이라고 해서 너희가 나를 두려워하기라도 하였느냐?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제사장들아, 너희가 바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너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오죽하면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다른 것은 다 없어도 예배는 있다고 하시겠습니까? 창조 때도 6일 동안 일을 마치시고 7일째 안식하며 하나님 안에서 예배로 교제하자고 말씀하셨던
것을 볼 때, 예배는 하나님께 기쁨이고 우리도 채움을 얻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예배를 싫어하셨던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이 없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왜요? ‘최소한의 의무 이행’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형식만 갖추고 최소한의 모습으로 행했던 예배였습니다. 그래서 예배의 모양은 있었으나 마음이 없었던 것이죠. 그러나 예배가 무엇을 드리는 시간인지 안다면,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 자체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항변했죠.
“우리가 언제 주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는다. 너희가 내게 바친 제물이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보아라. 눈먼 짐승, 병든 짐승, 가치 없는 것을 나에게 바쳤다. 너희는 사람에게도 이런 선물을 주지 않을 텐데, 어떻게 나를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너희 예배는 형식적이고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 나는 이런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 예배에 하나님이 원하는 그 마음을 가져와서
드리고 계십니까? 우리의 예배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마음도 편지에 쓰려면 편지지가 필요하죠. 그런데 편지지만 주고 “내가 편지 줬잖아”라고 말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도 때로는 예배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형식적으로 드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가 형식적이고 진정성이 없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마음입니다.” 3. 언약의 신실함에 대한
배신 (말 2:10-16) _ 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요? (말 2:11) 유다 백성은 주님을 배신하였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땅에서, 추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유다 백성은 주님께서 아끼시는 성소를 더럽히고, 남자들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까지 하였다. (말 2:13) 너희가 잘못한 일이 또 하나 있다. 주님께서 너희 제물을 외면하시며 그것을 기꺼이 받지 않으신다고, 너희가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주님의 제단을 적셨다. (말 2:14)
그러면서 너희는 오히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하고 묻는다. 그 까닭은, 네가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너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이며, 주님께서 이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너의 동반자이며, 네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인데도, 네가 아내를 배신하였다. (말 2:16)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한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나는 미워한다. 나 만군의 주가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명심하여,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라." 이스라엘의 예배에는 눈물과 울음과 탄식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요? 당시 유대 백성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 어떤 불만이 있었냐면? “왜 우리의 예배와 기도를 듣지 않으시나요?” 좀 더 풀어서 말해보면 “아니, 우리가 힘든 중에도 시간도 내고, 그래도 헌금도 하고, 기도까지 하면서 필요한 것을 요청했으면, 피드백이 있어야지, 하나님이 살아계신 거 맞나?”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유다의 모습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배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부 사이의 언약을 깨뜨린 것에 대해서 지적합니다. 이혼에 관한 말씀을 다룰 때는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혹시 이혼에 대한 저의 목회적 입장을 알고 싶은 분은 2020년 8월에 작성한 ‘이혼과 재혼’에 관한 글을 읽어보시면 잘 다뤘습니다. 또한 말라기서의 이혼은 현대적 이혼과는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앞서 배경 설명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당시의 이혼은 일방적인 남편의 주도하에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 시대보다 몇백 년 뒤의 사회였던
예수님 당시의 시대에도, 단순하게 남자가 여자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면 이혼을 했고, 여자가 요리를 하다가 빵만 태워도 이혼의 사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사회에서는 남자들이 여자를 버리는 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요새는 다르죠. “형제들이여, 이제는 우리가 버림받을 수 있기에 잘해야 합니다.” 말라기 말씀에서 이혼과 함께 ‘아내를 학대하는 것’, ‘아내를 배신하는 것’과 연결되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말씀으로 읽은 것처럼, 너희의 삶을 보면 이것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백성이 맞느냐? 너희가 나를 섬긴다고 하고, 너희는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느냐? “너희의 삶을 내가 다 보고 있다. 서로를 속이고, 언약의 아내를 배신하며 나를 불명예스럽게 하고 있다. 나는 너희가 언약 관계를 지키기를 원한다.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사람들 사이의 관계까지 신실함이 없다면 너희 예배는 나에게 올바로 들려지지 않는다.” 우리가 예배는 삶 속에서 완성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좋은 것을 주고 싶으세요. 그러나 잘못된 삶에 좋은 것을 주면, 그 삶을 고치지 않기 때문에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정의롭고 사랑으로 행동하길 원하십니다. 기도의 응답은 우리의 태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며 이웃을 사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4.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불만 (말 2:17-3:5) _ 하나님은 왜 악한 사람들은
그대로 두시나요? (말 2:17) "너희는 말로 나 주를 괴롭혔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괴롭게 해 드렸습니까?' 하고 묻는다. 너희는 '주님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신다. 주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 하고 말하고, 또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한다." 하나님이 괴로워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프레임을 씌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의 번성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고 하고, 하나님이 공의롭지 않다고 하고, 이런 이야기들이 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모르는 우리의 시선에서 하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듯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그냥 느끼는 대로 그것이 맞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도 악을 처단해 오셨습니다. 저는 어떤 때는 공의가 없는 세상인 것 같아도, 가끔 세상에도 ‘공의’가 발휘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결국 악한 것이
드러나고 선한 것이 또 드러나고. 그래서 대중의 평가, 역사의 평가가 뒤바뀌는 일들도 종종 벌어집니다. 성경의 역사를 보더라도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영원할 것 같았던 그 모든 제국들도 모두 그 수명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금세 없어져 버릴 것 같은 유대인들이 믿는 소수 종교였던 여호와 신앙은 오히려 그 안에서 영원한 진리로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에 대한 심판을 묻기 전에, 먼저
그 질문을 하고 있는 유다 백성들 안에 있는 악을 돌이키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며, 반드시 심판의 날에 악을 다스릴 것이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 전에, 나는 너희를 정결케 하기 위해 연단 할 것이다. 너희도 회개하여 내 앞에 올바로 서라.” 하나님은 악을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이루어지며, 그 과정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준비시키십니다. 공의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완성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동일하게 그 시간 속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코람데오. 주님 앞에 우리가 늘 서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불신 (말 3:6-12) _ 제가 열심히 모은 재정은 저의 것이 아닌가요? (말 3:8) 사람이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되겠느냐? 그런데도 너희는 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는구나. 십일조와 헌물이 바로 그것이 아니냐! (말 3:9) 너희 온 백성이 나의 것을 훔치니, 너희 모두가 저주를 받는다. 안타깝게도
저는 한국교회가 헌금에 대한 설교를 너무 엉터리로 해왔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감으로 오늘날 목회자들이 헌금설교를 하기 어려워하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저는 과거의 한국교회에 많이 있었던 헌금 문화나 방식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과거에 여러분이 경험했으나 지금 저희교회에서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대부분 그런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것을 비판하고 부정한다는 핑계 속에서, 우리가 비판했던 윗세대 성도들의 모습보다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여러 부분에서 약화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비판은 쉽습니다. 우리는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더 바른 방향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추구해야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말라기는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체계가 무너진 근본적인 원인으로 ‘헌금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약백성에게 가르쳤던 가장 기초적인 삶의 방식이 이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십일조는 단순한 헌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선 십일조의 가장 큰 사용목적은 레위인의 헌신을 책임지는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땅에 거주한 이후부터는 땅에서 일을 하여 거둔 소산물로 살아갑니다. 다만, 레위인은 성전에서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일을 했습니다. 대신 열한 지파가 십일조를 내면, 그것으로 레위인은 삶을 살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헌물을 드리지 않게 된 말라기 시대에 어떤 일이 일어났느냐? 레위인이 생계 보장이 안 되어, 성전을 떠나서 일하러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다른 연쇄작용으로 이어집니다. 레위인들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의
십일조를 드리거든요. 바로 십일조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십일조를 멈췄고, 레위인도 십일조를 드릴 수 없으니, 제사장에게 가는 봉헌물도 없게 됩니다. 당연히 제사장의 기반도 다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일부 제사장들은 부패하게 되었고, 일부는 생계를 위해 자기의 직분을 성실히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교회가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 혹은 겸직 문제로 시끌시끌합니다. 저는 이중직 목회를 하며 시작했지만,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꽤 많은 경우, 일과 목회를 모두 망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교회의 사례를 소개할 때, 이런 길과 방법도 가능하다고 말해주면서도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 모두에게 맞는 방식일까에 대해서는 고민이 여전히 많습니다. 저는 5년 반 정도의 시간을 목회와 일을 병행했습니다. 목회 첫 4년 동안은 사례비가 없었고, 5년 차부터 생활비를 보조해주었고, 7년 차 때부터 생활을 온전히 의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거쳐서 생존한
것이 다행이죠. 그러나 제 주변에서 우리교회의 케이스는 매우 매우 드문 케이스로 꼽힙니다. 실제로 주변 목사님들을 만나면, 이중직 목회를 해서 자립을 경험하고 목회만 하게 된 케이스는 교단에서 저희교회 밖에 없다고 말할 정도로 이 상황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전적인 은혜이지만, 지금 한국교회의 개척 상황을 보면 한편으로는 걱정도 됩니다. 그래서 저는 개척목회자들을 돕는 일을 지금은 매우 소중히 여깁니다. 목회자가 무너지면, 교회가 무너지는 것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생계가 어려운 목회자들이 생각보다 유혹에도 잘 넘어집니다. 주변에서도 의외로 많이 빠지는 것이 ‘다단계 사기’입니다. 당연히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부끄러운 일인지 모른다면 목회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탓할 것은 탓할 것이고, 구조적인 문제는 고민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목회자들이 양성되지 않으면, 또한 버티어낼 수 있는 구조가 되지 않으면, 교회가 건강하게 세워지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이중구조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십일조’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3년에 한 번 드리는 ‘구제의 십일조’를 포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약자, 대표적으로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에 사용된 십일조입니다. 3년에 한 번은 이 십일조를 추가하여 드리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는 원래 헌금이 아닙니다. 사회 복지를 위한 구제 기금이며, 이스라엘처럼 신정일치의 사회에서는 구제세였습니다. 그래서 ‘세금 조(租)’를 써서 십일조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보던 분열왕국 시대. 그 시기에 우상숭배로 부패했어도 헌금에 대한 부분이 흔들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 시대에는 이 근간조차 흔들리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십일조로 삶을 살던 레위인과 제사장, 그리고 구제를 받던 약자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에 대한 도둑질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번 너희가 내 명령대로 살아보고, 그 삶을 내가 어떻게 책임지는지
시험해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시간과 물질과 에너지를 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회심한 자의 실천이라고 저는 종종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도 아니 어느 시대에나 우리의 물질은 내가 사용해야 할 것과 비교하면 늘 부족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고민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는 담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최근 몇 분이 저에게 여러 상황 속에서 핑계하고 있던 부분이 있었는데, 헌금 생활을 시작해보겠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교회 헌금이 늘어난다고
제가 더 유익을 얻고 이러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가 성과제로 이뤄지는 사업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어야 하고요. 다만, 저는 우리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때, 그 일에 순종한 사람들도 하나님이 책임지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을 믿고, 또 우리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필요가 있는 곳에 우리가 힘을 다하여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6.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의심 (말 3:13-4:3) _ 하나님을 섬기면 대체 얻는 것이 무엇인가요? (말
3:14)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 (말 3:15)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하는구나." 저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가장 큰 문제인 ‘죄’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고,
무엇이 ‘구원’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죄’가 자기중심성, 즉 하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그것, 지금 우리의 삶에 가장 큰 문제를 초래한 그것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죠. 그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누리던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단절을 경험했다가, 다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영생은 그래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 그분과의 사귐을 누리고 관계를 회복한 것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다시 주시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십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복음에 응답한 사람에게 ‘복’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복을 받는다.” 하나님을 섬기며 얻는 가장 큰 보상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길 때, 하나님은 우리를 특별히 기억하시고 그분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말씀을 보면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자가 번성한다고 말하며 부러워합니다. 이것이 복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다른 것이 부러워지고,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흔들릴 때면, 지금 내 신앙이
공격받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내가 만난 하나님을 소홀히 여기게 하는 사탄의 공격일 것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딱 하나, 다른 것을 잡겠다고 하나님을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자, 그들의 깨어진 인생을 마음을 공허함을 주님은 회복시키고 채우십니다.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아시겠지만,
말라기가 구약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이 예언을 끝으로 하나님은 400년간 침묵하십니다. 그 400년간의 삶은 말라기를 통해 주신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는 자와 여전히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뒤섞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여전히 믿을 마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보다 우리가 유리한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말라기의 마지막은 어떤 한 일을 예언하며 끝이 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언자
엘리야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이고, 그가 한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400년 뒤에 가장 먼저 쓰인 복음서, 마가복음은 이렇게 복음을 소개합니다. (막 1: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막 1: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막 1: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우리에게 말라기서가 예언한 그 예언자로 세례 요한이 왔고, 바로 그가 준비한 구원의 길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라기 시대의 사람들보다 유리한 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말라기의 약속이 성취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다른 모든 말라기서의 말씀은 신실한 하나님의 거짓 없는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예배자 여러분. 우리의 삶에도 말라기
시대와 같은 어려움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믿음은 평안함 가운데 나타나기보다는 그런 어려움의 자리에서 드러나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지금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고 계시며, 어떤 순간에는 우리의 믿음이 발휘되길 기다리시고, 어떤 순간에는 우리의 흔들림을 굳게 잡아주려고 하시며, 어떤 순간에는 혼도 내시고, 어떤 순간에는 그저 사랑으로 품어주시는 그런 분입니다. 제가 다 설명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분은 살아계시며 신실한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포기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통해, 그리고 이 시대에는 예배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말라기 시대의 성도들처럼 우리의 의심과 냉소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삶 속에서 그 사랑에 응답하는 길을 찾아가십시오. 오늘 그 하나님 앞에 다시 우리의 삶의 운전대를 내어 맡기며, 찬양과 기도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