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마태복음 1장 1~17절 / 강정규 목사

2024-12-20 · 마태복음 1장 1~17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점점 성탄절이 성탄절 같지 않은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시기에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증언을 본문 삼아 설교함으로 조금 더 예수님의 오심에 대해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볼 것은 신약의 문을 여는 마태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네 편의 복음서가 주어져 있습니다. 복음서는 각각의 저자가 성령 안에서 자신이 이해하고 있는 복음을 누군가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이 세상에 꼭 전해주고 싶은 복음, 바로 복음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을 각각 최선을 다해서 기록하여 전하였습니다. 그중 마태복음은 구약과의 연관성이 가장 높고,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이신 예수님을 설명한 책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말라기 이후 400년간 말씀을 주지 않으셨던 하나님께서 어떻게 침묵을 깨고 일하셨는지를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1. 족보가 지닌 신학적 메시지 마태복음의 시작은 헬라어로 ‘비블로스 게네세오스’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번역하면 ‘계보’입니다.

왜 뜬금없이 마태복음은 계보로 시작할까요? 여러분이 어떤 글을 쓴 작가라고 생각해보세요. 누구나 그 글의 첫 도입을 어떻게 시작할지는 고민하게 되는 부분입니다. 마태가 성경을 기록할 때도 이 장엄한 이야기의 시작을 어떻게 시작할지 고민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까지 기록된 긴 족보는 단순한 이름의 나열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학적 선언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창세기의 어떤 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문구입니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을 70인역이라고

합니다. 예수님도 이 70인역을 가지고 구약에 관해 설명하기도 하셨습니다. 창세기의 헬라어 번역본을 보면, 창세기 2:4과 5:1에 공통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비블로스 게네세오스’입니다. (창 2:4) 하늘과 땅을 창조하실 때의 일은 이러하였다. 주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실 때에, (창 5:1) 아담의 역사는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창세기 2:4은 ‘세상의 시작’이고 5:1은 ‘사람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복음의 시작’이며, ‘예수님의 시작’에 대해, 마치 창세기의 그 위대한 서사의 시작처럼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왜 복음인지’를 설명해주고 싶은 것이죠. 그러므로 마태복음의 첫 부분에서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이 족보는 유대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족보니까요. 지금 제가 설명했듯이 한국어 성경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 족보를 헬라어로 보면 더 풍성한 메시지가 드러납니다.

제가 몇 번 설명해 드린 ‘인클루지오’ 측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인클루지오는 어떤 글에서 가장 처음과 가장 마지막에 같은 표현을 기록해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내용의 핵심이 바로 그것으로 축약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한글 성경으로 족보를 보면 처음과 마지막 절이 이렇죠.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처음에는 아브라함,

끝에는 예수님의 이름이 나오니 인클루지오가 아닌 것 같습니다. 1절에는 우리에게 유명한 이름 3개가 등장하죠. ‘아브라함 – 다윗 – 예수’입니다. 이것이 한글의 순서입니다. 그러나 헬라어로 마태가 썼을 때의 순서는 전혀 다릅니다. 마태가 기록한 족보에는 가장 첫 이름과 가장 끝 이름에 ‘예수 그리스도’가 위치하게 됩니다. 이 족보가 말하고자 하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마태는 표현해둔 것입니다. 또한 복음의 시작인 복음서의 가장 앞에 예수님의 이름을 기록함으로써

복음의 주인공인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아)로 오신 분임을 선언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등장하는 ‘다윗’은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온다는 것에 대한 성취이고, ‘아브라함’을 거론함으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시작하신 그 구원 사역의 성취로 오셨다는 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그냥 읽으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사실 구약과 대조해서 읽으면 의문점을 갖게 하는 족보입니다. 쉽게 말해서 편집된 족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족보를 가져와 놓고 사실과 다르게 편집해놓으면 어쩌자는 것입니까? 그런데 그것이 의도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이라면 알 수밖에 없는 편집을 함으로써 의도적인 강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계보는 3부분으로 끊어져 읽도록 의도되어 있습니다.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a)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마 1:6b)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들을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을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 1:17)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족보가 끝난 후, 마태는 14대 단위로 3묶음의 족보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진짜 족보가 14대는 아닙니다. 다윗부터 바벨론까지의 왕은 18명인데, 4명을 삭제해서 고의로 14대를 맞춘 것입니다. 그러니까 14대를 맞추기 위해서 몇 명을 빼버린 족보라는 의미입니다. 왜요? 14를 통해서 부각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우선 성경은 숫자를 중요시하죠. 3은 ‘완성’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3은 완성입니다. 삼위일체는 완성입니다. 부활도 3일 만에 완성됩니다. 7은 ‘완전’을 의미해요. 7일 창조로 세상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14는

7x2로 완전을 두 번 더한 것입니다. 최상의 완전이죠. 그리고 그것을 3번 곱한 형태의 족보로서 이것은 최상의 완전함이 예수님에 의해서 완성되고 종결되었다는 메시지를 같습니다. 또한 왕족의 계보입니다. 다윗과 바벨론이 3개 족보의 구분 점인데, 다윗은 왕국의 시작이고, 바벨론 포로는 왕국의 끝입니다. 왕의 족보를 통해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보여주죠. 그리고 무엇보다 이 족보는 ‘다윗’을 부각하는 것입니다. 1, 6, 17절까지 무려 다윗이 5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리고 다윗 게마트리아가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럼 14가 왜 다윗인가? 히브리어는 자음이 곧 숫자의 기능을 합니다. 다윗(דוד)을 쉽게 영어로 이해하면 DAVID이죠. 자음이 DVD입니다. 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렛(daleth)’이 4이고 V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와우(uau)’가 6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4-6-4입니다. 더하면 14이죠. 우리는 단번에 이해를 못 하지만,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로 사용하는 당시의 사람들은 14가 다윗을 상징하는 것을

금방 알았을 것입니다. 다윗이 왜 중요한가요? 그 유명한 구약의 다윗언약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다윗언약은 하나님이 그의 후손을 통해 영원한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 성취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드러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윗과 아브라함을 강조하고, 왕의 계보를 통한 구원 계획의 완성을 보여줍니다. 다윗의 후손을 기다렸던 유대인들에게 이 족보는 응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다!” 2. 족보

속 여성들의 의미 족보가 지닌 이상함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이 족보는 매우 노골적인 냄새가 납니다. 이 족보에는 굳이 필요하지 않은 여성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특징을 아시죠. 여성을 숫자로 세지 않습니다. 당연히 유대인의 족보에는 여성이 들어가는 경우가 없습니다. 그냥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하면 됩니다. 그런데 여성들을 마태는 일부러 넣었습니다. 뭐, 굳이 넣은 것에 대해서는 그런가 보다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이 여성들이 어떤 여성들이었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하나가 의미 있는 이름들이기 때문입니다. 족보에는 총 5명의 여인이 나옵니다. 그중 마리아는 신약의 인물이니, 구약의 족보로 보면 4명의 여인입니다.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이 4명은 교회를 오래 다녀보신 분이라면, 대부분 이름을 알고 있는 여인들입니다. 구약을 어려서부터 배우는 유대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이름이죠. 이들의 공통점이 혹시 뭔지 아십니까? 제가 간단히 이 4명의 여인에 대한 성경의 기록이 어떤지 짧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첫째,

다말은 ‘가나안’ 출신입니다. 가나안 출신이라고 하면, 히브리 민족이 아닌 이방여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말은 창세기 38장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12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가 다말입니다. 남편이 악하여 죽고, 동생이 책임을 맡게 되는데 그 책임에 불순종하여 심판당하여 죽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셋째에게 이 며느리를 맡기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다말은 과부로 방치된 것이죠. 다말은 하나님이 주신 법에 따라 대를 잇고자 하는데, 유다가 인위적으로

막는 상황이 계속됩니다. 시간이 지나, 유다는 아내가 먼저 죽고 홀아비가 됩니다. 다말은 잊힌 존재가 되었죠. 이에 다말은 과부의 옷을 벗고, 얼굴을 가리고 유다에게 접근하여 하룻밤을 보냅니다. 그리고 임신을 합니다. 석 달 후, 유다는 이상한 소문을 듣습니다. 과부가 되어 홀로 지내는 자신의 며느리 다말이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에 화가 나서 다말을 처단하려고 합니다. 그때 다말이 유다와 하룻밤을 보내며 받은 담보 물품을 내어놓습니다. 유다가 그것을

보고 깨닫죠. 그리고 자신의 행위가 옳지 않았음을, 그리고 다말의 행위가 옳다고 인정합니다. 그 후 다말과 다시는 관계하지 않습니다만,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기, 그것도 쌍둥이를 자기 아들로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마 1:3a)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아마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들으면, 이 집안을 뭐라고 말할까요? 마태는 사실 다말 이야기를 빼고, ‘유다는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이렇게 넘어가도

될 부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말에게서’를 굳이 굳이 넣습니다. 보통은 이런 일은 어쩔 수 없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감추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참 재밌습니다. 마태는 오히려 쌍둥이의 이름을 다 기록하며 이 일을 드러냅니다. 유다가 베레스를 낳았다고 해도 되지만, 다말의 이름과 쌍둥이의 이름까지 모두 드러내며 족보의 틀을 깨며 주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여인은 ‘라합’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그 라합이죠. 그녀는 여리고에 살았던

가나안 출신의 이방 여인입니다. 성경은 조금 순화시켜 ‘기생’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원어는 ‘창녀’의 의미가 더 정확합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여리고 정탐꾼들을 숨겨주고 대신 목숨을 구제받게 됩니다. 그 후에 라합은 유대인들 무리 안에 들어와 살게 되었고,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습니다. 이방 출신, 그리고 창녀 라합. (마 1:5a)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이것도 살몬이 보아스를 낳았다고 해도 되지만, 굳이 창녀로 구약에 알려진 라합의 이름을 족보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여인은 ‘룻’이죠. 아시겠지만, 룻도 이방 여인입니다. 룻기를 보시면 알겠지만 룻은 모압 여인입니다. 그의 남편 말론은 일찍 죽습니다. 후에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온 룻은 재혼을 합니다. 보아스와 결혼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 1:5b)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렇게 재혼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살게 된 모압 여인 룻이 이 족보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네 번째가 재미있는데, 우리는 다 이 여인을

압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인의 이름은 쓰지 않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씁니다. 우리는 이름을 알죠. 밧세바입니다. (마 1:6b)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밧세바는 출신이 분명치 않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성경이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다윗이 자기 아내 아닌 다른 남자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아이를 낳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다윗 인생 최대의 치부를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둘째로 우리야의 출신 때문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는 헷 사람입니다. 이방인이죠. 즉 밧세바의 출신도 이방적임을 드러냅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을 통해서 마태복음이 우리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분명한 것이죠. 아브라함의 혈통이고, 다윗의 혈통으로 예수님이 오셨는데, 이 집안이 장난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성경의 이야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어떤 모르는 집안 이야기라고 한다면, 거의 막장 아침 드라마 수준입니다. 뭐, 인간사에

별일이 다 있죠. 어느 집안에나 숨기고 싶은 과거가 혹시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소개한다는 성경이 이런 치부를 감추기는커녕, 오히려 더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족보를 통해 드러내고 싶은 메시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마태는 왜 예수님을 모든 인류를 구원할 왕으로, 가장 위대한 탄생을 소개하고자 하는 마태복음의 첫머리에서, 이처럼 문제투성이의 족보를 기록해야만 했을까요? 3. 예수님이

오신 이유 이 족보는 이중적 의미의 강조가 있습니다. 한쪽에서 족보는 예수님이 구원자요, 왕의 후손이요, 구약 예언의 성취요, 다윗 언약의 1000년의 약속을 이루는 결정판으로서 오신,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마태복음 전체의 메시지와 잘 어우러집니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는 어떤 메시지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족보는 이방적 혈통이 섞여 있으며,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사람들의 삶을 거쳐서 완성되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라면, 예수님의 혈통은 결코 고귀하지 않습니다. 깨어진 세상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족보입니다. 실수투성이, 실패투성이 인생을 거치고 흘러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조상들도 모두 연약하고 악한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은요, 모두 약점과 한계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연약함을 사용하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내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특정한 민족이나 완벽한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 속에서도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으로 오셨지만, 유대인에 의해서만 예수님의 족보가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족보를 보여준 후, 마태복음 1:21이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가 알다시피 ‘죄’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모든 모습을

의미합니다. ‘죄’에 속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삶 속에서 구원이 필요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있을 때, 다시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지 모른 채, 그것이 꼭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저 그 안에서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면, ‘죄’ 된 모습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 우리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깨어진 삶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자손을 여자의 자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 여자의 자손은 너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여자의 자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그 순간,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약속했고, 어쩌면 족보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우리에게 오셨음을 더욱 힘써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가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모든 죄 가운데서 구원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이 족보는 구약 전체를 걸쳐서 하나님이 행해오신 일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인간은 수없이 실패하고 무너지고 한계를 보여줬지만, 하나님은 변함없이 신실하게 구원에 대한 약속을 성취해 오셨고, 바로 그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태복음의 족보는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이 족보는 하나님께서 약속을 성실히 이루시고, 연약한 인간을 통해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도 우리의 모습은 그리 만족스럽지도, 그리 하나님 앞에 내세울 만한 것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남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와 부끄러운 모습들, 과거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과거가 우리를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저 용납하시고, 이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새롭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다시 찾기를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성탄을 앞두고 주님이 우리에게 오신 의미를 잘 기억해봅시다. 우리에게 무엇을 주고 싶으셨는지, 우리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지 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가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시며, 주님의 자녀로 사랑 안에 살아가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신 그분의 그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가 오늘도 주님께 찬양과 기도로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