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교회란 무엇인가?" / 강정규 목사

2024-12-15 · 마태복음 16장 18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여러분과 이렇게 설교를 나눌 수 있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제가 매일성경 본문을 벗어나서 여러분과 교회에 대해서 설교하는 그런 날입니다. 보통 이때 사역에 대한 설교나 교회에 대해 설교하는데, 오늘은 좀 더 집중해서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눠보려고 합니다. 1. 회심에서 사귐으로 성경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사용된 곳이 어딘지 아십니까?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이 본문은 5,000명을 먹이신 기적, 4,000명을 먹이신 기적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기적은 메시아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었죠. 그러나 기적을 봤다고, 기적에 놀랐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지역으로 향하십니다. ‘가이사랴’라는 지명은 로마의 황제인 ‘카이사르’를 뜻합니다. 즉, 이 도시는 황제의 도시인 것입니다.

이곳에는 황제를 높이는 여러 건축물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니?”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기도 하고, 엘리야라고 하기도 하고, 예레미야나 다른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당대의 사람들도 예수님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이제 다 알았어요. 왜요? 기적을 봤으니까요. 그러니까 분명히 하나님의 선지자급은 된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죠. 그런데 기적을 본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을 잘 아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범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과 구원자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죠. 흔히 교회 밖에서도 예수님을 4대 성자, 성인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합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정작 예수님을 자기 삶을 구원할 구원자로 여기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의 핵심 질문이 이어지죠.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죠. “주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십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이 고백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자기와 같이 있는 어떤 분을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시기면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보통이면 인간미를 느끼는 타이밍이죠.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 안의 신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베드로를 칭찬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베드로야, 너의 그 대답은 책이나 교사들에서 나온 것이 아니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친해 네게, 그

비밀을 알려주신 것이야. 그리고 이제 반대로 내가 네가 누구인지 알려줄게. 베드로, 너의 이름은 바위이지. 이 바위 위에 내가 나의 교회를 세울 것이다.” “그 교회는 악한 세력들이 막아서지 못할 힘을 갖고 있어. 그리고 너는 하늘의 열쇠를 받아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 삶을 살게 될 것이야. 땅에서 ‘예’가 하늘에서도 ‘예’가 되고, 땅에서 ‘아니요’가 하늘에서도 ‘아니요’가 될 것이야.” 이게 성경에서 제일 처음 ‘교회’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입니다. 우선 이

말씀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하죠. 가톨릭은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해석하며, 그가 하늘의 열쇠를 가진 특별한 존재라고 해석합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베드로를 1대 교황의 자리에 올리고, 그 이후 교황이 그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톨릭에서는 나중에 ‘교황 무오설’이라는 인간이 성경의 권위보다도 위에 서는 상황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그럼, 기독교의 신학적 해석은 무엇인가? 우선 이 권위가 베드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인지 성경을

통해서 살펴봐야겠죠. 마태복음 안에서 방금 등장한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는 표현이 한 번 더 등장합니다. (마 18: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8: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권처럼 나옵니다. 즉, 베드로에게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 무엇입니까? 교회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즉, 교회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매우 독특한 영적 정체성과 신비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개인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했던 그 신앙의 고백.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신다는 그 회심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의 그 고백을 반석 삼아 그 위에 주의 교회가 세워진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교회는 ‘회심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그 믿음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가 되므로, 교회는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죠. “내가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반석은 큰 바위이죠. 이는 문맥상 흔들림 없는 굳건한 믿음의 고백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기초입니다. 믿음의 고백을 가진 사람을 교회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데, 이 교회는 모두 ‘주님의 교회’입니다. 한 사람도 교회이죠. 회심자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의 소유격은 주님입니다. “야, 이 교회가 누구 거야?”라고 물으면, 지금 이 시대는 “우리 교회 등기가 누구 앞으로 되어 있지?” 이런 생각을 할 것입니다. 혹시 이 질문에 꼬리의 꼬리를 물고 다른 세계로 확 가시는 분이 있을까봐 설교에 몰입하시라고 제가 답을 드릴게요. 우리 교회는 종교 법인입니다. 개인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아요. 그것은 이 교회를 개척한 제가 어떤 개인의 권한을 갖고 있지 않기 위해서 일찍 취한 조치입니다. 제가 저를 지키기 위해서죠.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교회가 무슨 건물이란 것이 있습니까? 그냥 당시의 교회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두세 사람의 모임. 신약성경에 나오는 원어가 헬라어인데, 헬라어로 ‘에클레시아’가 교회이죠. 이 에클레시아가 무슨 뜻입니까? 이 단어는 ‘에칼레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에칼레오의 뜻은 ‘불러 모으다’라는

뜻이었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사람들이 “저거 에클레시아야”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성경에서 교회라고도 번역되고 ‘민회’라고도 번역됩니다. (행 19:39)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면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정할지라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민회’는 시민 총회였습니다. 그리스 시민들을 소집하여 모은 것이 민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유추해보자면, 기독교 에클레시아는 예수님이 주인이라는 고백과 그분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을 불러 모은 것이 ‘교회’인 것이죠. 중국을 통해서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에클레시아’를 풀어서 ‘교회’라고 번역합니다. ‘가르칠 교 + 모일 회’라는 한자를 여기에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를 어떻게 생각하냐면 ‘가르침을 주는 곳’이라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완전히 나쁜 번역은 아니죠. 진리를 배우고 말씀을 배우고 하니까요. 그런데 이 덕분에 우리는 교회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기도 합니다. 교회가

단순히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오해입니다. 교회에서 가르침이라고 하면 ‘설교 시간’이니, 누군가는 설교 시간에만 맞춰서 교회를 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설교 전에 있는 찬양이 뭐가 됐어요? ‘준비 찬양.’ 교회가 목사님이 가르치는 말씀을 들으러 가는 모임이 됐어요. 물론 교회를 잘 몰랐을 때는 다 그럴 수 있어요. 설교를 ‘강연’이라고 표현하고, 헌금을 ‘회비’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그런데 교회를 다닌 지 오래되었는데도, 여전히 교회가 설교를 듣기

위한 곳이라고만 여긴다면 교회를 ‘문화센터’처럼 다니기 쉬울 것입니다. 설교 맞춰서 오고, 설교 끝나면 예배를 다 드렸다고 생각하고 가버리는 것이죠. 그것은 교회에 대한 오해, 예배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라는 단어를 조금 더 성경에 맞는 언어로 이해하려면 한자를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저는 이에 동의하는데요. 그들의 주장이 좀 더 성경이 말하는 에클레시아와 가까워지려면, ‘가르칠 교’가 아니라 ‘사귈 교’를 쓰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사귐의 모임’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그 삶을 추구하고 영적 가족이 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니 ‘사귐의 공동체’가 성경이 꿈꾸는 교회의 어원을 더 잘 담아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신학에 동의해서 제가 개척하면서 ‘사귐의교회’로 이름을 짓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처음 세워질 때부터, 우리의 정체성, 우리의 방향성, 우리의 이유, 그 모든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대로 따라가고자

했던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하는 모임이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가는 공동체가 ‘참된 교회’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교회는 섬유지원센터 401호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예배 공간이 우리가 교회이냐, 아니냐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모여있는 사람들의 신앙고백이 무엇이냐가 그 공동체가 교회이냐, 아니냐를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해보니, 공간이 주는 힘이 있고 중요합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도 이 공간이 있기에 더 원활히 모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런데 아무리 번듯한 교회로 보여도 그 안에서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 그 안에 모인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교회일 수도 있고, 전혀 교회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제가 올해 원형 가정교회 식구들을 데리고 영종도에 한 카페로 소풍을 갔었어요. 무려 120년 된 교회가 그곳에 있는데, 이 교회가 얼마 전에 운영을 더 이상 못해서 건물을 내놨고, 그것을 누가 인수해서 카페로 개조한

것입니다. 외형은 아주 멋진 교회입니다. 그런데 안에는 카페입니다. 우리가 가면 다 보여요. “저기가 설교하는 곳이었고, 저기가 방송실이었겠네.” 외형은 저희보다 더 교회로 보이는 곳이지만, 이제 더 이상 그곳은 교회가 아니죠. 그럼, 교회 안에 사람이 있다고 다 교회인가? 성경적으로만 보자면, 그냥 교회에 있는 사람은 모호해요. 그곳에 어떤 사람이 있어야 합니까? 베드로의 그 고백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 황제의 도시에서 황제가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당당히 고백하고 살아갈 수 있는 자. 그들이 모여있을 때, 그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이 어떠하다고 한들,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이 가장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님을 따라 살겠다고 고백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라는 단어가 참 좋은데, 거룩한 무리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된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는 세상과 삶을 이해하고 바라보고 추구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다를 때, 우리가 교회입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비판할

때, 그 모든 것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다르기에 받아야 하는 비판이 있어요. 그것은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교회로 살아가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양보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무엇입니까? 교회라고 모여서 주일에 이렇게 예배하는데, 이 모임에서 추구하는 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자기 계발이나 성공과 다를 바가 없거나, 아니면 그저 교제하는 것에만 집중된 사교모임이나 커뮤니티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교회겠습니까?

그거 교회 아닐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진짜 교회입니다. 그리고 진짜 교회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진짜 성도들이 모여있는 것입니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교회는 진짜 교회입니다. 교회의 질은 어떤 건물, 어떤 프로그램, 어떤 시스템이 아닙니다. 어떤 성도들이냐가 중요합니다. 2. 사귐에서 헌신으로 그렇다면 우리가 ‘교회를 세워간다’고 말할 때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뭐가 도대체 교회를 세우는 것이겠습니까?

수백 명이 모여도 그 안에 세상과 구별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면, 그것이 교회를 세운 것이겠습니까? 기독교 문화를 공유한 사교 집단입니다. 종교서비스 집단입니다. 종교서비스가 불가능할 것 같으세요. 가능합니다. ‘종교적 열심’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해야 양심이 편해요. 누군가는 신앙생활을 종교심을 채우는 만족으로 합니다. 또 누군가는 일주일 동안 살면서 자기가 봐도 조금 자기의 모습이 별로예요.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세상적이고, 욕심

가득하고, 자기가 그렇든 주변이 그렇든 어쨌든 한 주간 좀 매연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고요. 그런데 교회에 딱 와서 앉아 있으면 정화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피톤치드 숲을 가듯이 내 마음과 정신을 ‘리프레시’하려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어요. 힐링하려고 오는 것이죠. 저는 어떤 형태로든 교회에 오는 것은 환영합니다. 시작은 무엇이든 좋아요. 여기에 심심해서 왔든지, 누가 마음에 들어서 왔든지, 신천지가 교인 꼬시러 온 것만 아니면 괜찮아요. 그래서 중요한

것은 교회 안에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진짜 신앙인을 잘 보고 그런 사람들을 내가 배워갈 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진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을 잘 보셔야 해요. 다 섞여 있거든요. 진짜를 보고 배워가고 따라가야 해요. 처음에는 누가 진짜인지 잘 몰라요. 뭔가 열심히 앞에 나서서 하는 사람이 진짜인가? 그 열심의 동기가 뭐냐에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헌신일 수도 있고, 자기만족일 수도 있어요. 예배 때마다 신나게 찬양하고

눈물을 쏟는 사람이 진짜인가? 그것도 몰라요. 어떤 사람은 클럽에 가도 더 신나게 놀고, 슬픈 노래 한 소절만 들어도 눈물이 날 만큼 삶이 힘겨워서 그럴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이 신앙의 중요한 본질은 아닙니다. 결국은 진짜 신앙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에 계시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 삶이 점점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와서 그저 내가 그리스도와 무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 쉽게 말해 구원에 속하여 있고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고만 합니다. 죄인으로 한 주간을 살고 교회에 와서 내 죄가 용서받았다, 의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구원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 줄 착각합니다. 그 확신 가운데 세상으로 나아가 한 주간 또 펑펑 죄 가운데 살다가 주일에 오면 감격이 있죠. “이런 나도 사랑하신다니….” 이것은 신앙이 뭔지를 모른 채 교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귐이 무엇입니까?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일주일 내내 바람피우고 제멋대로 살다가 한 번씩 와서 반성문, 각서

열심히 쓰고, 또 나가서 그 삶을 반복하고 또 각서를 쓴다면, 그 관계에 ‘사귐’이 있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쇼윈도 부부 정도로 겉모습만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회심이 무엇입니까? 방향을 바꾼 것이죠. 세상의 다른 것을 주인 삼던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주인 삼은 삶으로 결단한 것입니다. 제가 정말 많이 받는 질문이 제가 ‘회심과 변화’를 이야기하니까, “저는 변화가 없는데 그러면 회심 안 한 것인가요?” 묻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그때면 오늘 말씀에

나온 ‘베드로’ 생각해보세요. 베드로가 16장에서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하고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감정대로 행하다가 계속 혼도 나고, 주님을 향한 충성의 고백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치기도 합니다. 회심했다고 완벽하지 않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진짜 회심했다고 제가 느끼는 것은, 그가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진짜였기 때문에, 따르는 데 실패한 자기 모습을 아파합니다. 그게 회심한 자의 모습입니다. 회심을 아직 못한 사람은 그리스도를 내가 따르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지

않습니다. 당당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고, 한 주간 삶 속에서 그렇게 못한 것 때문에 죄송하고,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하고 애쓰는 그 마음이 있는 분은 제가 봤을 때, 회심한 분들입니다. 아직 너무 신앙이 어릴 뿐이죠. 그래서 이제부터 잘 성장해가면 됩니다.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에게 교회 공동체를 준 것입니다.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을 아시죠? 어떤 동물은 태어나자마자 혼자 막 걸어 다니고 몇 시간 지나면

뛰기도 해요. 그런데 인간은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만 생존할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그래서 가족 혹은 공동체가 필요해요. 그런데 이것은 영적으로도 같습니다. 영적으로 우리가 태어난 것이 육신의 나이와는 상관이 없어요. 그런데 영적으로는 거듭남, 그 회심의 순간 이후가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동체를 주신 것입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혼자 힘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냥 저절로 되는 것이면 혼자 신앙생활 해도 되고, 유튜브로

혼자 믿어도 됩니다. 그런데 신앙은 지식을 쌓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체득해 가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교회는 회심 공동체이자, 회심이 생명의 탄생이니까, 영적 생명이 탄생하여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형제자매’라고 부르는 것이죠. 여기에 영적 어린이들도 있고, 여기에 청소년도 있고, 영적으로 청년도 있고, 부모와 같은 사람들도 있어요. 적어도 청년부터는 자기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지켜낼 정도입니다. 교회의

가장 무서운 귀신인 ‘섭섭 귀신’이 와도 맞짱 떠서 자기를 지켜낼 수 있는 사람들이 영적 청년입니다.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우선순위가 흔들리지 않는 정도가 되면 저는 청년이라고 봐요. 부모는 이제 내 신앙을 넘어 다른 누군가의 신앙을 품고 함께 아파하며,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죠. 교회의 신비는 어린아이였던 그 사람도 잘 도와주면 어느새 자라서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사람도 어느새 자라서 이제 나를 위로하고

누군가를 돕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어린 신앙인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원하는 삶을 감당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은 엄밀히 말하면 ‘교회를 세우는 사역’을 한 것이죠. 바울이 한 일을 생각해봅시다. 어떤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합니다. 그래서 그 세계에서 추구하는 것과 다른 삶이 있음을 가르쳐요. 우리로

따지면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이 깨어진 세상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그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거기에 진짜 당신이 찾던 그 소망이 있었습니까? 참된 만족이 있었습니까?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원래부터 세상에서 가르치는 그것이 없기에 불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삶에 가장 필요했던 당신이 잃어버리고 살았던 그것을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이러면서 복음을 전했어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거부하고 불편해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진지한

삶의 고민을 갖고 있거나, 너무 갈급해 있던 사람들이 반응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성경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과 진리를 잘 설명해줘요. 그러면 그 과정에서 ‘회심’을 결단하는 사람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신앙고백을 점검하여 세례를 줍니다. 신약시대에 세례를 받는 것은 때때로 목숨을 걸어야 한만큼 위협과 마주하는 일이었기에, 그들의 세례는 진지한 삶의 결단이고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겨나면, 이제 진짜 성도들이 생겨난 교회가 된 것이죠. 그들이 생겨나기 전까지 그 모임은 교회로 탄생해가는 가능성의 모임인 것이죠. 이제 그런 사람들이 생겨나서 예수님을 추구하며 함께 살아가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제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 적어도 복음을 전해서 그들 중에 영적 아이가 영적 청년, 영적 부모가 되어가는 것을 보다가, 그 사람을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 바울은 또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러 간 것이죠.

교회를 세우러 간 것입니다. (골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골 1: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은 그 일에 자신을 드렸습니다. 교회를 세워가는 꿈. 그 일에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이 수고를 알고 이 일에 헌신하는 사람은 귀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를 위해 예배사역에 헌신합니다.

예배는 우리 모두가 회복하는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이 일을 위해 목양사역과 양육사역에 헌신합니다. 누군가의 신앙을 돕는 것은 값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교육사역에 헌신합니다. 복음의 전수가 중요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뿐입니까? 교회에 존재하는 모든 사역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지만, 그 모두가 나의 헌신으로 누군가를 세우기 위해 나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고가 있죠. 사랑은 수고가 있으니까요. 그러나 이 일이 가진 의미를 안다면 그 수고는 기쁨의

수고입니다. 교회를 저도 계속 배워왔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조금 일찍 교회 사이즈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저도 예전에 사역자로서 나름대로 야망이 있었어요. 그래서 모교회를 떠나서 “강남으로 가자”라는 마음으로 서초구에 있는 교회에 갔습니다. 열심히 사역했어요. 그리고 그다음에는 더 지경을 넓히려고 찾았습니다. 5,000명 되는 교회에도 이력서를 넣었어요. 몇 군데 넣고 기다리는데, 나름 큰 교회, 청년들만 100명이 넘는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주에 5,000명이 모이는 그 교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의리상 먼저 연락이 온 곳으로 갔습니다. 사실 큰 교회가 궁금하기도 했고, 거기에 뭔가 더 있을 것 같은 기대심도 있었어요. 그런데 아니었어요. 깨달음이 되었죠. 교회의 진짜 힘은 모이는 숫자로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청년 30명이 있어도 거기에 정말 주님을 따르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 20명이 있으면, 그 교회는 진짜 성도 20명이 있는 교회입니다. 진짜 성도 20명이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12명이 세상을 바꿨는데요. 그런데 100명이 넘어도 그 교회도 진짜 성도는 20명일 수도 있어요. 그러면 20명이 80명을 끌고 가느라 에너지를 다 써서 힘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30명이 모인 교회보다 100명이 모인 교회가 더 크고 좋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니까요. 그런데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거든요. 교회의 단단함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성장하는 것에 있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잖아요.

그러면 한 사람 한 사람이 근육입니다. 근육이 성장하면 이 교회는 힘을 가져요. 그럼, 세상을 감당하고 하나님이 맡기신 힘든 일도 해냅니다. 교회의 크기는 하나님이 주시는 달란트와 같아요. 1, 2, 5달란트. 달란트의 크기는 주인이 정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없나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신 상황 가운데 주인이 원하는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교회의 크기가 아니라, 교회의 건강함, 교회의 신실함,

교회의 교회 됨. 저는 그것이 우리의 꿈이라고 믿습니다. 3. 헌신에서 충만으로 교회는 머리 되신 주님께로 향하여 세상으로부터 모여드는 것이고, 그 안에서 점점 성숙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에도 동심원 구조가 있었습니다. 가장 바깥에 ‘무리’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제자’가 있습니다. 제자의 폭은 다양했어요. 500명의 제자, 120명의 제자, 70명의 제자. 그리고 가장 안쪽에 ‘사도’가 있었습니다. 가장 바깥쪽의 무리는 예수님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며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있어요. 그래서 따라는 다녀요. 이 마을 가면 무리가 따라오고 저 마을 가면 따라옵니다. 그런데 무리의 특징은 무엇이냐면, 뭔가를 받고 싶어만 합니다. 기적의 현장에서 수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따라다녀요.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제자’라고는 안 해요. 무리와 제자는 겉으로 보기에 구분이 안 됩니다. 그런데 같이 있으나 다릅니다. 제자는 스승을 따르기로 결단하고, 그 방향에 자기를 맞추어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무리는 방향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목적과 자기 삶의 방향이 각자에게 주도권이 있어요. 그 방향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관심도 두지만, 예수님 때문에 자기를 바꿀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무리는 회심 이전의 단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말씀을 듣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리까지 와 있는 것이 기회입니다. 바로 이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을 때에 그 사람들이겠죠. 예수님께 관심을 갖고, 말씀도 듣고, 기적도

보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잘 모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백이 없습니다. 무리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 건너야 할 그 한걸음이 누군가에게는 바다보다 넓습니다. 무리가 제자가 되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일이죠.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자기 삶에서 소중한 시간을 내어 예수님을 따라다니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자기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들 안에서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어요. 회심 후에도 성장하는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한번 회심했다고 끝이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받은 자와 구원받지 않은 자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은 신앙을 잘 이해하지 못할 때 갖는 기준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제자들은 500명이었는데, 그중 예루살렘에서 성령을 기다리며 기도하던 사람들은 120명이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어도, 언제 올지 모르는 약속을 기다리며 무모하고 용감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고요. 우리가 알다시피 그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과

삶을 일치시켜 살아갔던 사람들이 12명의 사도였습니다. 이 사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이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각자의 인생에서 사도로 부르셨을 때, 자신의 것을 버리고 예수께 삶을 의탁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막 1: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막 1: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막 1: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막 1: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막 1: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또 밑에는 품꾼들까지 있는 것을 보면 꽤 부유했던 것 같은데, 아버지 옆에 있으면 물려받을 그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라갔습니다. 그러니까 사도들은 시작부터 어떤 결단들이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리고도

계속 주님 곁에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훈련받아 성장해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다시 태어나게 하는 생명력이 있죠. 생명이 있는 것은 자라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삶은 바로 그 시간을 주님 안에서 부여받은 것입니다. 나의 세계에서 주의 세계로, 나 중심의 세계에서 하나님 중심의 세계로 넘어오는 것이 회심이죠. 회심은 이제 주님 앞에 선 것입니다. 끝인가요? 아닙니다. 그곳에서 내가 바라보는 그분, 주님의 모습을 본받고 그분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회심을 하는 것이 자기중심성에서 하나님이 주인 된 삶으로 넘어온 것입니다.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나 중심의 세계가 깨어진 세상이고 거기에 참된 만족이 없음을 고백하며 그리스도를 향해 내 삶의 중심을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면서, 이제 주님께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삶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모습이 주님 닮은 모습으로 하나씩 바뀌어 갑니다. 그래서 회심 이후의

삶에는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그 삶이 평생에 걸쳐 필요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삶도 우선 그들의 세계가 바뀌었어요. 그들의 삶의 추구점이 바뀐 것이죠. 고기를 낚는 사람에서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삶은 깨어진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사용됩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다 알고 따라갔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들은 예수님 곁에서 따라가다 보니 깨닫게 됐어요. 그래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맞군요. 주님이 단순히 내 스승이 아니라, 나의 구원자, 그리스도, 메시아라고 저는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진짜 ‘교회’가 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통로. 땅에 속해 있으나 하늘에도 속해 있어서, 주가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있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그 삶이 된 것입니다. 오늘날 진짜 교회가 되는 것은 불가능할까요? 진짜 교회가 되는 것은 그 시대에만 허락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불러내어 교회로 살게 하십니다. 저는 성경의 역사는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고 믿어요. 어떤 부분은 더 강력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충만함을 잃어버린 모든 세계를 다시 회복하고 충만케 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엡 1:23)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입니다. 놀랍게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며 변해가는 그 모든 일이, 세상의 충만함을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내가 회심하여 성장합니다. 내가 주를 닮아갈수록 내가 주님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면 내 옆이 변하고 주변이 변하면서 함께 회복된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그 공동체가 모여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의 회복은 교회를 건강케 합니다. 회복된 교회 공동체는 이제 세상을 바꿀 힘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가 모여서도 교회이고 흩어져서도 참된 교회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사귐의교회가

주일에 이렇게 예배하며 충만함을 경험하고, 평일에 각각의 삶의 자리로 흩뿌려졌을 때, 그곳마다 교회답게 살아가면 우리가 있는 곳마다, 그 세상의 깨어짐이 회복되고, 특별히 그 안에서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돌아오는 영혼이 생긴다면 그것이 세상을 충만케 하는 놀라운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충만케 하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주신 가장 강력한 도구. 그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남기셨는가? 그분의

사역을 통해서 이 땅에 남기고 간 것은 ‘교회가 된 제자들’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 하나 남겨놓지 않았어요. 왜요? 그것이 메시아가 이 땅에 주고 싶은 가장 소중한 열매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교회를 통해, 이 땅에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바로 그 교회가 복음으로 또 다른 교회를 낳고 세워가며 깨어진 이 세상을 충만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세상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고 업적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성도는 죽어서 무엇을 남기는가? 우리도 우리 주님처럼 교회를 남깁니다. 바로 교회로 살아가는 사람을 남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의 삶에 하나님은 주님을 알아갈 기회를 주셔서 우리를 깨어진 세상 속에서 불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주인 삼아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셨고, 그 새로운 삶을 우리 가운데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인이신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었고, 우리의 이 모임은 주님이 주인 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교회는 함께 계속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이 성장은 세상에서 말하는 수적인 증가가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회심하도록 사랑으로 초청하고 복음으로 양육하는 일이며, 회심한 우리 각 사람도 더욱 주를 닮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임인 이 교회가 그렇게 주님 안에서 충만케 될 때, 주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로 함께 성장해갈 때, 주님은 이 시대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실 것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려내는 교회, 복음으로 회심을 돕고 진리로 양육하며 함께 자라가는 교회. 주님의 일하심에 함께 참여하여, 생명을 낳고 복음을 전수하고 세상을 치유하며 참된 성도를 세워가는 그런 교회. 이것이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주님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런 교회 합시다. 우리가 그런 교회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