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무식하고 용감하게 이루는 꿈" / 강정규 목사

2024-12-08 · 아모스 1~9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은 아모스서에 대해 다루는 설교입니다. 아모스라고 하면 ‘최초의 문서 예언자’라는 타이틀이 붙습니다. 무슨 이야기냐면, 문서로 남겨진 예언서 가운데 아모스서가 첫 번째 책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모스보다 먼저 사역했던 예언자가 있죠. 우리에게 유명한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그러나 ‘엘리야서’나 ‘엘리사서’가 없잖아요. 그들은 예언을 글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아모스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예언서의 저자들이 그 이후에 예언을 남긴 것입니다. 이

아모스라는 인물이 흥미롭습니다. 우선 북이스라엘에서 예언 사역을 했지만, 아모스는 원래 남유다 사람입니다. (암 1:1) 유다 왕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보통 예언서 처음에는 예언자의 활동 시기와 출신 등이 나옵니다. 그의 활동 시기에 남유다 왕은 ‘웃시야’였고, 북이스라엘 왕은 ‘여로보암2세’였습니다. 이 시기가 어땠는지는 이따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는 ‘드고아’ 목자였다고 나오는데, 예루살렘 남쪽 약 15km 떨어진 지역입니다. 구약의 예언자 16명 중, 예언자로 부름을 받기 전의 직업을 밝히고 있는 것은 아모스가 유일합니다. 우선 여기에 ‘목자’라고 나와 있고요. 7장을 볼까요? (암 7:14)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오. (암 7:15)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 내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소. 개역개정에는 ‘뽕나무’라고 나오는데, 정확히는 돌무화과나무입니다. 목자이며 나무를 재배한다고 하니, 우리는 아모스가 하층민 계급에 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가 부자나 상류층을 비판할 때, 노동자로서의 억울함과 울분을 담아낸다고 보는 견해도 과거에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금 더 성경에 관한 연구가 이뤄지며, 그가 최소 중산층 이상으로 상당한 부를 가진 농장주이자 목축업자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무식하니까 용감하게 가서 예언했다기보다, 그는 당시 세계정세를 읽을 수 있을 만큼의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제사장이나 예언자 학교에서 훈련받은 사람이 아닌, 오늘날로 보면 소위 평신도를 하나님의 메신저로 부르신 것은 주목할만합니다. 아모스서에 보면, 당시 종교인들은 너무나도 부패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모스를 하나님의 메신저로 삼아서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모스서에는 뛰어난

문체, 문학적 표현, 사회를 바라보는 높은 식견, 국제 정세에 대한 바른 안목 등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모스가 가진 여러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도록 하십니다. 아모스가 예언하던 시점은 북이스라엘이 가장 번영을 누리던 시기입니다. (왕하 14:2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영토를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쉽게 말해서 북왕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소유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다윗-솔로몬 시대를 ‘황금시대(Golden Age)’라고 부르고, 여로보암2세 시대를 ‘은의 시대(Silver Age)’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 시기에 이스라엘의 경제적인 부와 번영 또한 막강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제 무역은 활발했으며, 많은 궁전을 짓게 됩니다. 건축물은 당시 사회의 수준을 보여주죠. 이스라엘의 궁전들은 고가의 상아로 장식하였습니다. (암 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잡아서 먹고 (암 6:5)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 다윗처럼 자기를 위하여 악기를 제조하며 (암 6: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자신들을 잘 살게 해준 대통령을 가장 선호합니다. 우리 사회가 무엇에 가치를 두는지 보여주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은 당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연스레 여로보암2세는

백성들 사이에 신격화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라가 부유해지는 과정에는 언제나 그림자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이 부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나라도 경제가 발전하면서 전체적으로 예전보다 잘살게 되었지만, 사실 그 사이에서 빈부의 격차는 훨씬 더 커졌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가 산업화 이후 발전을 거듭했고, 모든 발전에는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는 인간이 가진 욕심 때문입니다.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에 ‘적당히’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맞았고,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하는 데 몰두합니다. 그래서 이 시기는 ‘재산 증식’이 모든 이들의 꿈이었고, 하나님과 돈이 두 마리 토끼라는 지난 설교의 표현처럼, 이 시대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이들이 적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고 싶으셨던 원대한 비전을 생각하면 참담한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꿈꾸셨던 세상은, 어떤 세태 속에서도 의연히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다른

추구점, 다른 지향점을 가진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백성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서 나그네와 떠돌이로 살던 그들을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정착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의 나라를 왜 세상 가운데 세우려고 하셨을까요?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알 수 있습니다. (벧전 2: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은 제사장처럼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거룩한 민족으로 세상과 다른 삶의 방식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어둠에서 빛으로 우리의 삶을 바꿔주신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선포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이 꿈은 죄로 망가진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한 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비전이 있었죠. 원래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며 하나님은

사람이 서로 연대하고 서로를 돕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망가진 이후, 사람들은 연대하기보다는 갈등하고 분열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질투하고 경쟁하고 서로의 것을 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의 삶은 더욱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세상의 논리가 지배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런 세상을 그냥 포기하고 버리셨다면 아무것도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일으키십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가나안 땅에 세울 계획을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계획입니다. (창 15:7)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주다. 너에게 이 땅을 주어서 너의 소유가 되게 하려고, 너를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었다." (창 15:8) 아브람이 여쭈었다. "주 나의 하나님, 우리가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을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창 15:9)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삼 년 된 암송아지 한 마리와 삼 년 된 암염소 한 마리와 삼 년 된 숫양 한 마리와 산비둘기 한 마리와 집비둘기 한 마리씩을 가지고 오너라." (창 15:10) 아브람이 이 모든 희생제물을 주님께 가지고 가서, 몸통 가운데를 쪼개어, 서로 마주 보게 차려 놓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반으로 쪼개지 않았다. (창 15:17) 해가 지고, 어둠이 짙게 깔리니, 연기 나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갑자기 나타나서, 쪼개 놓은 희생제물 사이로 지나갔다. (창

15:18) 바로 그 날, 주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세우시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 땅을, 이집트 강에서 큰 강 유프라테스에 이르기까지를 너의 자손에게 준다. 이 약속이 성취됩니다. 훗날 출애굽 시대에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서 성취된 것이죠. 아브라함에게는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는데, 이제 정말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의 나라가 이 세상에 정말 등장한 것입니다. 그것도 애굽의 가장 하층민으로 살던 무리들이 떠돌이로 살다가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 국가를 세운 것 자체가,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꿈은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고 땅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목적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이지만,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가는 모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이렇게 사는 것이구나.” 보여줄 수 있는 그런 나라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고민이 있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면 깨닫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대로 세상을 살려고 생각하면 겁이 나요. 왜냐하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 이득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다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려고 하는데, 말씀대로 나는 정직한 일을 행하고 이득을 탐하기보다는 더 내어주고 양보하고 살면, ‘내가 살 수 있을까...?’ 세상에서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은 겁이 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말씀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선명합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이런 말씀을 읽을 때 우리가 이 세대 가운데 무엇을 분별하여 본받지 말고 거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이 시대 가운데 어렵고 힘들어도 따르지 말아야 할 세상의 모습은 무엇인가? 이 고민이 치열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세상의 거센 흐름 속에서 거슬러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세상의 방식을 따라 살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위협

속에 있지만 믿음으로 살아보겠다고 용기를 내는 자.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이었죠. 그들은 하나님을 택하여 세상의 원리를 버리고 하나님을 따랐고, 하나님은 그들의 삶을 지키셔서 세상에 역행하며 빛나는 삶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독특성은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적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 자체가, 그 민족 자체가 그런 부르심을 받은 것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보여주고자 했던 삶의 모습이 그것이었습니다. 세상은 힘의 논리로 돌아가기에 하나님은 가장 약한 족속, 주변에 비하여 너무나 약하여 자신의 생존도 지켜낼 수 없는 민족을 택하십니다. 만약 힘 있는 민족이 생존한다면 그것은 그들의 힘 때문으로 자신들도 주변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의 가장 낮은 계층에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히브리 민족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 이 세상에 새로운 삶의 길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울 때까지 몇 번의 실수와 실패도 있었지만, 어쨌든 하나님의 첫 번째 목적은 성취됩니다. 가나안 땅에 언약 백성의 나라가 세워졌어요. 이제 이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그런데 세상과 다른 방식으로 살아서 세상에 물음표를 던지고 느낌표를 안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어떻게 되었냐면, 오히려 가나안의 다른 나라를 보면서 물음표를 던지게 된 것입니다. 세상을

집어삼켜야 할 거룩한 야성을 가져야 할 언약 백성들이, 세상의 문화와 방식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것에 마음을 뺏긴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부요한 삶을 살아가나 질문합니다. 그리고 느낌표를 얻습니다. ‘바알이다!’ 마치 지금 우리로 따지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으로 독특하게 살아내서 세상 가운데 물음표를 안겨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역으로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갖고 연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방식에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역시 ‘부동산이다’. 아니다 ‘주식이다’, ‘코인이다’. 제가 모든 것을 다 거부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것을 추구하는 삶이 맞을까 우리는 고민이 필요하죠. 우리의 정체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 썩어가는 세상에 우리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뭐 하러 두셨겠습니까?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다른 삶의 방식, 특유의 맛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괜찮았는데 가나안 땅에서는 흔들린다는 점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니 생존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삶이었고, 서로가 비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사는 삶은 가진 것도 있어요. 그러다 보니 더 서로 경쟁하고 비교하며 더 빠르게 망가집니다. 우리를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정말 ‘무엇이 없음’ 때문인가? 아니면 ‘더 있기를 원하는 마음’ 때문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그런 흔들림을 손 놓고 방치하신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과 계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을 주셔서 이미 기준을 분명히 하셨어요. 그것을 더 선명하게 깨닫게 하시려고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셨고, 오늘 우리에게는 설교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물론 구약이나 지금이나 말씀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에 힘쓰는 거짓 예언자들이 있다는 점도 동일합니다. 성경의 편이 아니라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자들이 우리의 신앙을 망치는 적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도 유튜브에서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는 설교를 찾아다니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 맞는 말씀을 찾다 보면 신앙은 약화되기 쉽습니다. 말씀이 원하는 것에 나를 맞춰나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원리와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무식하고 용감하게 지키고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의 삶을 지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신 28:1)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이것이 제가 가진 신앙의 가장 근본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무식하고 용감하게. 그저 말씀이 가르치는 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완벽하겠어요. 그러나 적어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주님이 아시는 나의 최선만큼은 힘써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에 정말 답이 있는지 확인하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살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하나님께서 이미 가나안 입성 전에 가르치셨습니다. (신 28:58)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신 28:63)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선을 행하시고 너희를 번성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시던 것 같이 이제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망하게 하시며 멸하시기를 기뻐하시리니 너희가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뽑힐 것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그들은 망하고, 땅에서 뽑힐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이기에 하나님이 내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디테일 합니다. 하나님은 상황마다 요구하시는 것이 다릅니다.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 요구하지 않으세요. 광야에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그냥 돌보셨어요. 하나님이 먹이셨어요. 그러므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던 시절에는 빈부의 격차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을 때부터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어가길 기대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모스 시대에 가장 원하고 계신 것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아모스서에서 가장 유명한 말씀이죠. (암 5:24)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여기에 나오는 ‘공의’는 ‘체다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두를 동등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는 ‘미쉬파트’입니다. 이것은 불의를 바로잡고

공의를 구현해 내는 구체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공의를 맛보게 하기 원하세요. 광야에서는 똑같이 음식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땅도 모두에게 나눠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 모든 지파와 자손 별로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래서 성실히 일하면 모두 땅의 소산으로 먹고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하셨어요. 그런데 왕정 사회와 농경사회에서는 계급과 여러 환경에 의해서 동일한 노력이 동일한 보상으로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력으로 불가능한 다른 결과들이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빈부의 격차가 됩니다. 예를 들어, 솔로몬이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망친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솔로몬이 강제노역을 오랫동안 시키면서, 제때 농사를 짓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여로보암2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여러 국가 정책의 실패로 특정한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 안에서 발생하는 안타까운 문제입니다. 어떤 해의 농사를 망친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돈을 빌리겠죠. 이때 돈을 빌리기 위해서는

자기 가족 소유의 땅을 담보로 걸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사회에는 존재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각자에게 다르게 있는 것입니다. 왕에게는 뭘 원하실까요? ‘욕심을 버려라. 네가 가진 것을 먼저 나눠줘라.’ 꾸어줄 수 있는 자에게는 뭘 원하실까요? ‘거저 줄 수 있는 것은 거저 주라. 담보를 낮춰줘라. 빚을 못 갚으면 선처를 해라.’ 빌린 자에게도 원하는 것이 있으실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빚을 갚기 위해 힘써라. 너를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면 고마움을 잘 표현해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상황은 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기이든 기회이든, 호재이든 악재이든. 그러나 그 모든 상황에서 각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각기 다르게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에 대해서 이미 하나님은 광야에서부터 가르쳐오셨습니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광야에서

하나님이 공평하게 주셔서 모두 공평한 수준으로 삶을 살아갔던 때도 있지만,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실천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조금 더 뭔가를 가지게 되어, 조금 더 나눌 수 있다면, 나누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해서 부족한 사람의 어떤 부분을 채워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교회도 사실 모두가 공평하게 수고해서 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모든 것은 누군가의

헌신과 돌봄, 수고로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누군가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시간, 에너지, 물질을 의미 있게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는 신앙이 자랄수록 더 수고하고 헌신하며 자신을 내어주기 시작하는 것이라 생각해요. 저희 집에서도 가정교회로 모일 때면, 저희가 최선을 다해 음식을 요리해서 먹이고 섬기려고 합니다. 제자들을 먼저 섬기신 예수님의 본을 따르고 싶은 것이죠. 군림이 아니라 섬김.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내 것 나누기를, 내가 더 헌신하기를 요구하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마음은 어떨 때 가능한 것이냐면, ‘나는 주님의 종이다.’, ‘내 것은 주님의 것이다.’ 이 마음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라는 고백, 회심의 고백이죠. 회심한 자답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안에서 작동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작동되고 있을 때, 그 나라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고,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인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해주시길 원합니다. 너무 든든하죠. 그런데 반대로 ‘내 것은 주님의 것이다’ 말하기는 싫어합니다. 내 어려움의 순간, 하나님이 날 도와주시길 바래요.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어려움을 도우시려고 하나님이 내 것을 쓰는 것은 싫어합니다. 그런 일 앞에서는, 늘 “나는 없어요. 부족해요. 나도 힘들어요. 저는 능력이 없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신의 요구가 없겠죠.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내가 어떻게 함께할까를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하나님의 기대 안에 세워졌던 것이죠. 예언자 아모스가 고발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하나님의 백성이 어쩌다가 이방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가고, 아니 더 심하게 추구하게 되었느냐? 이 고발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 이익이 되는 순간에는 이익을 도모하고, 하나님의 뜻이 정한 기준을

자기 멋대로 침범하며 살아갑니다. 다시 말하지만, 저는 신앙은 정말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성경의 가르침에 단순하고 무식하게 나를 맞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마 많은 분들이 순종하기 위해 한 번쯤 넘어야 하는 허들이 물질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성경이 엄청나게 많은 부분에서 이것을 가르쳐요. 왜냐면 이것이 바르게 세워지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하거든요.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헌금 생활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신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갑니다. 물질의 주도권을 내어드리지 못하면 사실상 아무것도 내어드리고 싶지 않은 것이거든요. 이 이야기를 듣고 여러분이 목사님이 헌금을 강요한다, 부담을 준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아끼는 사람에게는 꼭 헌금을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내 몫은 내가 일단 다 하고, 그다음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시는가를 봐야죠. 개인적으로 제가 지키며 살고자 하는 몇 가지 신념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드리죠. 애초에 이것은 제 권한

밖의 돈이라고 여깁니다. 또한 십일조를 임의로 다른 헌금이나 구제 등에 사용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헌금의 사용에 대해 저의 결정권이 들어가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몫은 하나님께 우선 드리고, 다른 구제나 헌금은 별도로 진행합니다. 그리고 정해진 월급 외의 수입이 생겼을 때, 저는 그것을 혼자 쓰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누구와 이 돈을 나누어 써야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누군가 하나님께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청해요. 그럼, 하나님이 그걸 누구를 통해 채우실까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묻는 자를 통해서 하시지 않겠습니까? 제가 누군가에게 저의 돈을 조금이라도 나누는 훈련을 청년 때부터 꽤 오래 해왔어요. 근데 가끔은 억울하더라고요. 내게서 나가는 것만큼 안 오고, 하나님은 맨날 나보고 주라고만 하는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20년 정도 그렇게 살아보니, 나도 모르게 하나님은 나의 필요는 늘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고백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살면, 내게 필요한 것은 그가 채우신다는 것을 절로 고백하게 됩니다. (마 6: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것은 아무것도 안 하는데

뭔가 채워진다는 그런 요행이 아닙니다. 나에게 일할 곳을 주시고, 일할 건강 주셔서 내가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책임지고 살아가도록 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저를 돌보시는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의식을 갖고 살지 않았어요. 오히려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더욱 화가 나는 것은, 차라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며 살고 있다는 것에 이스라엘 백성들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그랬다면 모르겠어요. 이스라엘은 너무

뻔뻔한 것입니다. (암 2:6) "나 주가 선고한다. 이스라엘이 지은 서너 가지 죄를,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암 2:7)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여자에게 드나들며,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 서너 가지 죄라는 것은 완전수 7을 만들기 위한 표현법입니다. 즉, 이들의 죄가 하나님의

임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현주소가 어떻습니까?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았습니다. 이것은 뇌물을 받고 불의한 재판을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형제를 종으로 부리지 말라고 했지만, 돈이 된다면 이제 율법의 기준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돈이라는 것이 신발 한 켤레 값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펴라는 말씀은 작은 이득 앞에서도 무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힘의 논리가 이스라엘을 지배합니다. 세상의 논리이죠. 힘없는

자들을 짓밟고 연약한 자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는 것은 더 큰 어려움에 빠뜨렸다는 것이죠. 또한 아들과 아버지가 젊은 여자를 취하는 이야기인데, 경제적 어려움이 있는 여성을 부자들의 욕망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고발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이 분사나 미완료형이라는 점은 그들의 죄가 반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죄악 가운데 있으니,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악은 악에게, 죄는 죄에게 용기를 주기 때문입니다. (암 2:8) 그들은 전당으로 잡은 옷을 모든 제단 옆에 펴 놓고는, 그 위에 눕고, 저희가 섬기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마시곤 하였다. 신명기 율법에 보면, 옷은 저녁에 돌려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겉옷은 이불입니다. 담보로 잡아도 저녁이 되면 돌려줬다가 아침에 다시 받아서 담보로 사용하도록 율법이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소한의 기본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버젓이

그것을 제단 옆에 펴 놓고 그 위에 누웠다는 것 또한 하나님에 대한 무시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성전에서 벌금으로 거두어들인 포도주를 자기들 마음대로 마시고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 아니 최소한의 의식조차 없었다는 것이죠. 이토록 하나님은 그들의 삶에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 화나는 것은 예배 앞에서 달라지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매주 예배 시간만 되면, 이들은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열정적인 예배자처럼 돌변합니다. (암 5:21)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암 5:22)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암 5:23)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하나님이 온 몸으로 예배를 거부하고 계십니다. 왜요? 위선 된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예배 이후에 그들의 삶에서

다시 자행될 하나님에 대한 무시, 무너진 정의와 공의의 모습들을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배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이것이 어찌 예배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삶도 보시는데...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예배자처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예배의 결단이 삶에서 공의가 물처럼 흐르고,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우리의 일주일로 흘러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 강이 마르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여러분을 통해 누군가의 어려움이 채워지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기 원하시는 메마른 곳으로 나아가 회복시킬 수 있어야 하는 것이죠. 하나님의 기대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삶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줄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모스의 고발에도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합니다. 그럼, 이 하나님의 기대는 이제 가능성이 없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모스서 9장 마지막 부분은 심판당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며 끝이 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바라보는 회복된 이스라엘의 환상은 전쟁과 약육강식의 법칙이 사라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언약 백성에게 기대하신 그 깨어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품고 살아서 모델이 되는 삶은 불가능한 것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놀랍게도 신약에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 안에 바로 그 모습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 4:32)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행 4:33)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행 4:34)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행 4:35)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고백. 체다카와 미쉬파트는 불가능한 비현실적인

꿈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기중심성, 우리의 죄악 된 이기심으로는 절대 불가능하겠으나,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진 존재들, 성령으로 거룩해진 사람들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담아가야 할까요? 제가 다 정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아니라 주께서 여러분의 몫을 정해주시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대단한 것을 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소그룹 모임을

하면서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내가 어떤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제 팸이 개편되고 조금씩 신선함을 지나 갈등기로 가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람들의 가면이 벗겨지면서 실망하고 서로의 미성숙함을 보게 되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뭘 말씀하실까요? 성숙함이 무엇인지 내 섬김과 사랑으로 보여주기를 말씀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걸 하는 것이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 왜 이래?”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먼저 사랑하고 섬겨서 우리 모임이 더 좋은 모임이 되도록 해야겠다.” 주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그것뿐이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이번 한주, 우리나라는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뭐가 옳으냐? 무엇이 정의인가?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모든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의 마음은 무엇일까?' 우리는 고민하고, 그에 맞는 모습으로 반응하는 것이 저는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러분, 그리스도인이 침묵하고 있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고 계신 것은 아닙니다.

필요한 행동이 있다면 하셔도 돼요. 다만 제가 여러분께 바라는 것은 어떤 정치의 진영 논리나 감정에 따라 분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정의에 기준 삼아 잘못된 것이 있다면 분노하십시오. 분노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그 마음 앞에서, 그분의 편에 서서 아모스처럼 무너진 사회를 보고 분노하고, 주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에서 용기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모든 우리의 삶의

문제를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국가의 대의부터, 내 옆에 있는 사람과의 관계까지. 하나님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사람들을 통해서 그 뜻을 이루려고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은 일부터 큰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세밀한 마음을 따르고 반응하며 실천해 나가도록 영적 감수성을 갖고 깨어 있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꿈을 가장 잘 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내가 어떻게 행해야 하실지 알려주실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오늘 날선 아모스의 말씀을 듣고도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망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모델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이라고 믿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꿈에 동참하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단순하고 무식하고 용감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바로 그런 자들을 통해 현실이 됩니다. 오늘도 이 말씀 앞에서 나의 삶을 다해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을 통해 우리의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흐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