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미가서까지 설교를 하면 저희는 성경 66권을 드디어 모두 설교하게 됩니다. 내년부터는 매일성경 묵상은 더 열심히 해나가려고 합니다. 다만 이제는 수요일을 매일성경 메시지를 나누는 시간으로 활용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설교가 우리가 주일에 진행해 왔던 매일성경 일독 첫 번째 여정을 마무리하는 설교입니다. 성탄절 설교를 통해 미가서를 맛보기로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조금 더 전체적인 부분을 다뤄보겠습니다. ‘미가’는 예언자의 이름이죠. 우리는 예언자라고
하면 미래의 어떤 일을 예측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자들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나님과 연결된 사람들로, 하나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스피커’의 역할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의 이야기를 전하시면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고, 현재면 현재, 미래의 일이면 미래의 일을 전할 뿐이죠. 그러므로 스스로 어떤 예언을 하는 오늘날 예언자들과 의미가 많이 다릅니다. 그래서 당대의 설교자였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과 그 시대마다 하나님의 도구가 되었던 예언자가 함께 하나님의 공동체를 바르게 세워가는 일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가’ 예언자의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냐”라는 의미입니다. 말 그대로 질문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 하나님 같은 분이 계시냐는 것이죠. 보통 우리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경우는 하나님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 말고 다른 것들이 더 커 보이고, 더 세 보이고, 더 의지하고 싶어질
때, 우리가 조금씩 신앙에 흔들림이 생기죠. 그때 미가가 묻는 것입니다. “너에게 누가 하나님이냐?” 이게 그 이름의 뜻이기도 하고, 미가서 전체가 처음부터 끝까지 붙들고 가는 중심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의 삶에서도, “하나님이 진짜 계신 것 맞나?” 혹은 “하나님이 정말 이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을까?”와 같은 마음이 찾아온다면, 오늘 미가서가 그런 여러분에게 답을 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미가는 어떤 시대를 살았는지 이제 그의 시대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미가가 활동했던 기원전 8세기의 유다는 겉으로 보면 꽤 괜찮았던 시절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다윗과 솔로몬의 ‘황금기’에 이어 ‘은의 시대(Silver Age)’라고 불릴 만큼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대일수록 들어가 보면 그림자가 짙은 법인데, 당시에도 두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선 늘 우리가 이야기하듯,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하나님을 부정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버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신은 ‘돈’이 되어버렸습니다. ‘돈’이 사회 전반을 지배하는 힘이고 권력이고 모든 것인 듯 보였던 것이죠.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돈’을 더 사모하고 갈망하고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고, 목회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것이 있다면 ‘돈’의 힘입니다. 제가 생각한 것보다 힘이 더 세더라고요. 사람들에게 더 영향력이 있더라고요. 실제로 없으면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면 ‘평안’을 주는 것이 하나님보다 돈이 되기
쉽더라고요. 돈은 죄가 없습니다. 돈은 도구일 뿐이니까요. 돈을 잘 쓰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되기도 하고, 돈을 잘 쓰면 사랑을 전하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잘 쓴다는 것은 내가 돈보다 위에 있어야 하는데,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돈에 끌려다니고 돈에 붙들려 살기가 쉽습니다. 미가 시대에도 ‘돈’이 더 힘이 셌어요. 그래서 나를 풍요롭게 해줄 신을 최고의 신이라고 여기고, 그런 신에게 투자해서 풍요를 보답받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저에게 ‘돈’을
얼마나 주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이 저에게 이 세상 최고의 ‘풍성함’을 주신다고 믿거든요. 결국 이 문제는 우리가 꿈꾸는 ‘풍성함’ 혹은 ‘풍요’의 근원과 모양이 무엇이냐? 이것이 핵심이 될 것입니다. 미가 시대에 하나님이냐 돈이냐에 대한 우선순위의 문제, ‘경배의 대상’에 대한 문제, 쉽게 말해서 우상숭배의 문제가 있었다면, 여기서 파생된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돈이 우상이 된 사람들 안에서 시작된 탐욕이 공동체를 망가뜨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탐욕은
관계에 영향을 줍니다. 사람들이 장사를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사업을 하려면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갑니다. 사람들이 사기를 치려고 해도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갑니다. 결국 부에 대한 욕심은 사람을 대하는 관계의 문제로 연결되는 것이죠. 결국 탐욕은 남들보다 내가 조금 더 가지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모든 인류가 먹을 만큼의 식량이 공급됩니다. 그러나 모두에게 그렇게 분배가 되지는 않습니다. 집 문제도 그렇습니다. 수도권의
주택 보급률은 94%입니다. 이론상 100가구 중 94가구가 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주택 가구 비율이 40%가 나옵니다. 누군가는 여러 채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은 내가 충분히 가졌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상 탐욕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실 하나님은 이 부분에 대해서 이미 우리에게 가르쳐 오셨던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공공재가 ‘땅’입니다. 그래서 땅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빌려주셨다’라는 것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인 신학적 기초입니다. 실제로 제가 2007년에 몽골에 두 달 동안 있었는데, 몽골은 수도를 빼고는 땅의 소유권이란 것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그냥 말타고 가다가 울타리 치면, 그것이 내가 살아갈 집이 되는 때였어요. 땅이 그러니 집에 대해서도 정말 딱 주거의 가치 외에는 없었죠. 이스라엘도 땅은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쓰도록 허락해 준 것이고, 이에 대한 주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마치 선악과 명령처럼 하나님이 명하신 법들이 있어요. 안식년
제도가 그렇죠. 땅을 6년 동안은 마음껏 경작해서 그것으로 내가 이득을 취해도 됩니다. 그런데 안식년에는 하나님을 믿고 땅을 쉬게 해야 합니다. 어쩌면 이익을 탐하는 것을 제한하고 멈추게 하는 하나님의 원리이죠. 광야에서 행해졌던 만나의 원리와 유사합니다. 이때는 농사를 지을 수 없고, 자생적으로 나는 것은 먹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대한 소유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그것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만나의 원리처럼 안식년
직전 해에는 3년 치의 수확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7년 차에 먹어야 하고, 8년 차에 농사를 시작해도 그해에도 먹어야 하니까요. 안식년이 되면 이웃 사이의 빚도 면제해 줘야 합니다. 빚을 누군가 내게 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연약한 자이고 나는 꾸어줄 것이 있는 자라는 이야기이기에, 연약한 자의 어려움을 감당해 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원리에서 교육받고 개인주의적 삶 안에서 경제 울타리를 치고 살아가는 우리의 생각으로는 쉽지 않죠? 부동산이
삶의 거의 모든 것이 되어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는 성경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뜻과의 틈새가 더 커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에는 50년이 되면 희년이라고 해서, 땅의 소유권이 처음 하나님이 정해주신 대로 리셋이 되니, 자본주의가 대대손손 이어질 수 없는 구조로 하나님이 경계선을 세우셔서, 자기 백성이 세상의 원리에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교육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한 여적 시스템을 만들어 주신 것이죠. 영적인 시스템은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지켜내기 위한 것입니다. 언제나 이런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약자 혹은 가난한 자는 부담이 없습니다. 문제는 상대적으로 강자, 권력자, 부자, 능력 있는 사람의 태도와 모습에 달려 있습니다. 미가 시대의 유력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뜻보다 ‘돈’이 되는 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성전도, 예배도, 공동체의 윤리도 ‘돈’이 되는 방식으로 개편합니다. 자기합리화도 필요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새로운 질서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움켜쥔
손을 펴야, 하나님이 내가 미처 다 계획하고 세팅하지 못한 그 부분을 어떻게 채우시는지 볼 수 있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이 가진 욕심 혹은 불안이 손을 더 세게 움켜쥐게 만든 것입니다. 결국 ‘불신앙과 불순종’이죠. 믿음이 없고, 순종의 마음이 없었던 것이 구약이 말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돈이 우상이 된 사회는 손을 펼 수 없게 우리의 마음을 만듭니다. 이 문제는 현대사회에서 우리에게 자동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이를 꽉 물고 때로는 싸우고 떨쳐내야
할 만큼 우리에게 꽉 붙어 있는 부분입니다. 미가 시대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이 부에 대한 욕심입니다. 이로 인해 공동체의 연대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힘 있는 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합니다. 점점 더 그들은 견고해지고, 누군가는 점점 더 힘겨워집니다. 잘 사는 사람은 점점 더 잘 사는 구조로 갑니다. 부는 위로 쌓이고 고통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이 문제로 하나님도 잃고 이웃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깨어지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함몰되어 있으면 우리는 내 삶뿐 아니라 주변의 관계들도 그렇게 해석해 버리게 됩니다. 경쟁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경쟁상대입니다. 최근에 유행했던 <김부장 이야기>가 그런 단면을 너무 잘 드러내었죠. 저는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이 이야기가 ‘구원’ 이야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드라마는 아니지만, 분명히 어떤 한 세계관에 꽂혀서 그것과 자신이 완전히 일치되어, 그렇게 자기
인생, 자녀의 인생, 동료의 인생 등 모든 것을 바라보며 살다가... 극적으로 거기서 벗어나서 다시 인생을 바라보게 된 이야기. 저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삶의 측면에서는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 이스라엘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그들은 땅만 보고 살다가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정도 주변의 다른 나라와 비슷한 구조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근동의 최강대국으로 떠오른 앗시리아는 무자비한
정복 전쟁을 벌이며 주변 국가들을 위협했습니다. 유다의 아하스 왕은 북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 공격을 받자, 예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앗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합니다. 그 결과 유다는 위기를 모면하는 듯했지만, 결국 앗시리아에 막대한 조공을 바치는 속국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선택을 자꾸 하는 것이죠. 경제적으로는 이전 시대부터 이어진 번영을 누렸지만, 앗시리아의 군사적 위협은 힘의 논리에 이스라엘을 극단적으로 끌어들였고,
이스라엘은 군사적으로 강해지기 위한 방법을 모색합니다. 그 결과 대대적인 국가 요새화 작업이 진행되었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강제 노동, 희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가는 이런 이스라엘을 향해 매우 노골적으로 일침을 가합니다. (미 3: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우리가 잘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의 방식은 종종 과정보다는 결과입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됩니다. 개 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쓰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놓인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의 중심, 왕궁과 성전이 함께 상징하는 그 ‘거룩한 중심’입니다. 성전이 있어서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그곳이 피로 이루어졌다고 말해요. 세상의 방식이 그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죄악으로 건축되었다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과만 주목했어요. “우리 예배 잘하고 있잖아.” 그들 딴에는 “내가 열심히 벌어서 나 예물 많이 드리잖아.”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요. 저는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정직한 헌금 하는 것, 한편으로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열심히 번 것인데,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거나 헌금으로 드리는 것, 그것조차도 한 번의 싸움을 이겨낸 것이니까요. 또 없는 가운데서도 아껴서 드리고자 하는 것도 대단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드려진 액수로 차별할 수 없고,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는 늘 종의 마음, 청지기의 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제가 내년에 십일조로 드리는 우리의 헌금을 ‘청지기 헌금’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십일조가 성경적인 표현은 맞는데, 자칫 이 시대에 ‘세금’ 내듯 할 우려가 있기에, 우리가 이거 ‘청지기’라는 마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이름을 바꾸려고 합니다. 청지기는 주인이 맡긴 것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죠. 주인의 뜻에 나는 언제나 따르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에 함께 드리고자 하는 것은 봉헌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수고가 담긴 그 과정에서의 신실한 마음까지입니다. 과정도 청지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예배하는
자로 살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이라면 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일들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미 3:11)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고 판결을 뒤집었습니다. • 제사장들은 삯을 받아야만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
예언자들은 돈을 주는 이들을 위해 거짓 평화를 예언했습니다. 정치, 종교, 사법의 지도자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간 것이 아니라, 사실상 돈의 노예가 되어 공적 책무를 저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맘몬’에 갇혀 버린 것입니다. 저는 신앙에 있어서 점검과 성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지 않고, 고민이 멈추면 부패한다고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그런데 왜 이들은 이토록 하나님을 떠나 있으면서도 돌이키지
못했던 것일까요? 왜 고민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점점 더 나아갔을까요? 바로 그들의 방지턱을 무력화했던 한가지 신학이 너무 크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악을 은폐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장치가 된 것이 바로 ‘시온 신학’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므로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이 신학은, 현실의 죄악을 직시하지 못하게 만드는 종교적 마취제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개념 뒤에 숨어 자신들을 방어하고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얼마 전
유튜브에서 한 신학자가 이야기하는데, 신학자의 가장 큰 라이벌은 주일학교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사람들은 주일학교 시절에 배웠던 어떤 것을 끝까지 고수하려고 해서, 자신이 신학자로서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Teachable mind’가 있는 것이 우리를 지키는 데 있어서 너무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지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시온 신학을 붙들고, 자신들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은 우리를 지켜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왜곡시킨 것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외칩니다. 미가는 힘써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심판을 받아 멸망할 것입니다.” 그는 16명의 예언자 중 최초로 “예루살렘이 멸망하여 폐허가 될 것”이라고 외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외침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미가서 2장을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 보겠습니다. “그런 설교 하지 마라. 우리에게 그런 나쁜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어떻게 야곱 가문에게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나님이 화를 터뜨리신다니? 그분이 그러실 분이냐? 그분은 선량한 사람들 편이 아니시더냐? 그분은 스스로 돕는 자들을 도우시는 분이 아니시더냐?” 이에 하나님께서 미가를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선량한 사람들’이라니! 내 백성의 원수인 너희가 말이냐? (중략) 여기서 나가라, 너희 떼거리여. 여기는 너희가 있을 곳이 아니다! 너희는 이곳을 오염시켰고 이제 너희가 오염되었다. 몰락했다! 너희는, 미소 띤 얼굴과 기름칠한 혀를 가진 자가 나타나서, 아침부터
밤까지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더 많은 돈과 최고의 포도주를 하나님에게서 얻어 낼 수 있는 법을 설교해 주겠다’고 하면, 너희는 그 자리에서 그를 설교자로 고용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듣기 좋은 이야기, 시온 신학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설교자를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지자들은 거짓 선지자였습니다. 아마도 추측건대, 하나님의 진리를 외치는 미가는 백성들로부터 심한 비난과 위협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미 죄에 눈이 먼 사람들은 예수님이
와서 외쳐도 듣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1:33) “다른 비유를 하나 들어보아라. 어떤 집주인이 있었다. 그는 포도원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멀리 떠났다. (마 21:34) 열매를 거두어들일 철이 가까이 왔을 때에, 그는 그 소출을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다. (마 21:35) 그런데, 농부들은 그 종들을
붙잡아서, 하나는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또 하나는 돌로 쳤다. (마 21:36) 주인은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냈다. 그랬더니, 농부들은 그들에게도 똑같이 하였다. (마 21:37) 마지막으로 그는 자기 아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하였다. (마 21:38) 그러나 농부들은 그 아들을 보고 그들끼리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이고, 그의 유산을 우리가 차지하자.’ (마 21:39) 그러면서 그들은
그를 잡아서,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다. (마 21:40) 그러니 포도원 주인이 돌아올 때에, 그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마 21:41) 그들이 예수께 말하였다. “그 악한 자들을 가차없이 죽이고, 제 때에 소출을 바칠 다른 농부들에게 포도원을 맡길 것입니다.” (마 21:4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마 21:43) 그러므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아서,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사실상 이 예수님의 말씀이 미가와 같은 선지자의 사역, 그리고 이어진 메시아의 사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으로 대항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시온 신학이 그들을 지켜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제가 늘 말하지만, 이것은 행동의 완벽함이 아닙니다. 마음의 진실함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의 진실함도 없는 사람, 그 최소한의 노력도 없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자입니다. 무관한 자입니다. 당연히 열매가 없습니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삶에 나타나는 열매 맺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매우 많지만, 정작 그 복음의
진리이신 예수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었습니다. 미가가 하나님의 뜻을 전해도 그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당시 백성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돈 아래 자기가 있고, 자신 아래 종교를 두어, 종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충족하는 도구로,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는 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뒤집힌 가치관 속에 이스라엘은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뒤집혀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위에 있고,
그 아래 내가 있고, 내가 나의 삶의 모든 것, 그것이 돈이든, 관계든, 욕구든 하나님의 뜻 안에 새롭게 정렬하여 다스리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나를 끌고 갈 수 없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날마다 패하여 따라간다.” 미가서는 시대의 아픔을 보고 외쳤고, 절망적인 현실을 바라보며 외쳤습니다. 안타깝게도 그가 전해야 하는 예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예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가를 통해 소망도 주십니다.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날 놀라운 구원의 약속을 함께 주셨습니다. 만약 예언서가 심판만 이야기했다면 끝없는 비관주의에 빠졌을 것이고, 구원만 이야기했다면 근거 없는 낙관주의가 되었을 것입니다. 미가는 이 두 가지를 조화롭게 선포함으로써, 절망적인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결코 소망을 잃지 않는 건강하고 튼튼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미 2:12) 야곱아, 내가 반드시 너희를 다 모으겠다. 남아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다 모으겠다. 내가 너희를 우리로 돌아오는 양 떼처럼
모으겠다. 양 떼로 가득 찬 초장과도 같이, 너희의 땅이 다시 백성으로 가득 찰 것이다. 이 말씀은 심판이 있겠으나, 심판으로 끝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시리라는 말씀입니다. (미 4:6) 나 주가 선언한다. 그 날이 오면, 비틀거리며 사는 백성을 내가 다시 불러오고, 사로잡혀 가서 고생하던 나의 백성을 다시 불러모으겠다. (미 4:7) 그들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비틀거리며 살고 있으나, 거기에서 살아 남은 백성이 강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 때로부터 영원토록, 나 주가 그들을 시온 산에서 다스리겠다. 성탄절에도 베들레헴을 택하여 사용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가장 작기 때문에 하나님이 베들레헴을 사용하십니다. 모세가 야생마와 같을 때는 내버려두셨다가 야생마가 길들어서 온유해졌을 때 하나님이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도 나타나는 미가서의 희망은 강한 나라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포로로 끌려가서 깨닫고 돌이킨 상처 입은 자들이 다시 모으십니다. 예루살렘에서 기고만장했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꺾여서 포로지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에 초대받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시온은 망하지 않는다?” 구원을 이미 받은 ‘소유물’처럼 여기고 간직만 해놓은 신앙은 위험합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시온은 망하지 않을 것이며, 망해도 하나님이 다시 일으키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 오늘도 자신을 청지기로 인정하고,
내 삶을 다해 주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넘어질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을 찾아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간절히 원하시며, 우리의 길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넘어진 우리를 일으키시고, 방황하는 우리를 찾으시며, 잘못된 우리를 꺾으시고 다시 회복시켜 오늘도 부르고 계십니다. 끝으로 미가서의 결론 메시지, 구약
전체를 요약했다고 평가받는 말씀을 함께 붙들고 나아갑시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정의(미슈파트), 인애(헤세드), 겸손(차나)’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동사’입니다. 정의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야 합니다. 인애를 가지고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겸손의 마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관념이 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내 마음속을 고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찢어 내 삶을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저 나를 구원한다는 ‘예수’를 입으로만 고백하는 값싼 구원을 벗어나, 그리스도가 원하는 그 삶이 나를 통해 우리의 삶과 가정과 일터와 교회 안에 나타날 수 있도록 나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진짜 예배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 원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미가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에게 누가 하나님이냐?” 미가 시대에는 돈이 하나님이 되었고, 그 결과 예배는 드려지고 있었지만, 삶은 하나님과 멀어졌고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습관적 예배를 반복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정의를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겸손히 나와 함께 걸어라.” 정의: 약자의 권리를 빼앗지 않고 정직하게 이윤을 남기는 일상. 인애: 상대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으로
기회를 주는 관계. 겸손: 내가 거둔 성공이 내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며 걷는 걸음. 이 이야기는 하나님 때문에 내가 날마다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이익, 내 욕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지는 것은 비참한 패배가 아니라, 사실은 주님의 품에 안기는 가장 안전한 승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소유가 아니라, 열매입니다. 내가 주님께 뿌리내린다면, 열매는 주님이 맺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시 정렬해야 합니다. 돈이 나를 끌고 가지 못하게, 세상의 방식이 내 가정을 지배하지 못하게, 내 욕망이 내 신앙을 이용하지 못하게. 그리고 그 정렬의 맨 위에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사랑합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섬깁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변화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