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위기가 묻고 진리가 답한다" / 강정규 목사

2022-12-2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사람마다 생각하는 좋은 설교의 정의가 다를 것입니다. 저는 늘 입이 아프도록 말합니다. ‘좋은 설교는 성경과 여러분을 이어주는 것이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분이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에게 있어서 좋은 설교는 말씀이 드러나고, 말씀이 남겨지는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이며, 결론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하고 성경이 꿈꾸는 것을 향해 끝까지 헌신합니다. 제가 목회를

해나가며 교회에 대해서도 성경 구절을 늘 되새깁니다. 특히 이 구절을 많이 되새깁니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교회는 성도의 것도 아니고, 목사의 것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며, 주님의 몸입니다. 이것이 제가 2주 전에 민주적 교회가 성경적 교회가 아니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교회, 다수가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을 가진

교회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믿으면,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닌 성경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어떤 교회를 이뤄가야 할지, 어떤 신앙인이 되어야 할지 잘 배우고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답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선배 목사님이 이번주에 저에게 전화를 주셨습니다. 저보다 앞서서 성결대, 에스라, 하나복 사역을 경험하신 분이고, 제가 가끔 고민 상담을 하는 선배님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는 자료가 있느냐고 물어서, 우리가 최근에도 하지만 이미 2017년과 2019년에 다룬 자료가 있어서 7회로 만든 강의안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연락을 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성도들과 이 정도 수준의 특강을 나눴다는 것이 놀랍고, 우리 교회가 너무 기대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맞다. 이것이 감사다. 제가 부교역자 때 정말 열심히 가르쳐 봤는데, 불려가서 혼나며

들은 소리가, “똑똑하고 공부 많이 한 것 아는데, 여기선 나한테 맞춰” 였거든요. 지금은 우리가 성경에 대해서만큼은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공동체로 세워졌다는 것이 참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곳에서 설교하는 것보다도 이 교회에서 이렇게 설교를 하는 시간이 제일 좋습니다. 삶의 예배를 어느샌가 우리가 많이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강조합니다. 그러나 잊으시면 안 됩니다. 삶을 채우기 이전에 앎도 중요합니다. 바르게 알아야 바르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해설교를 따라오는 것이 어려울 때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회를 놓치면 배울 기회는 더 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주 한주는 소중합니다. 제가 요즘 외부에서 강의를 할 때 많이 하는 이야기가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할 때, 무엇 위에 세울 것이냐가 중요하다는 점입니다. 때로는 그냥 열정으로만 시작합니다. 어떤 교회가 될 것인지 고민 없이 시작부터하거나, 혹은 담임목사가 가진 개인의 목회철학 위에 교회를 세우려고 합니다. 저는 어떤 교회를

해야하는지는 사실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교회. 말씀 위에 세워야 하고, 말씀을 정리한 신학 위에 세우는 것이 성경적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저희가 지난 5년간 방향을 잃지 않았던 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도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 신학이 성경의 중심주제이므로 우리는 성경이 꿈꾸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써왔던 것이죠. 목사 한 사람의 개인기나, 혹은 공동체의 열정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없습니다. 결국 그 모든 것이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도 그렇죠. 저는 제가 항상 옳다고 확신하지 않습니다. 저는 얼마든지 잘못된 선택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연약한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이고 우리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항상 성공하고 항상 옳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보는 목표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돌아갈지언정 다른 길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분명한 목표, 그것을 향한

끊임없는 충성을 다하면 됩니다. 성경으로부터 배우고 성경에서 제시하는 교회를 추구한다면, 우리는 실수하더라도 실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도 교회에 관한 이야기로 설교의 문을 여는 것은 오늘 우리가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큰 어려움으로 상처 입은 한 교회의 이야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날 교회는 <위기의 교회>입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서신을 받게 되는 초대교회의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여러분에게 생소한 배경을 가진 이야기일 확률이 높습니다.

서신서는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서신서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시 이 교회와 시대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요한’이라는 이름이 붙은 성경책이 5권이 있습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요한복음이죠. 그리고 요한계시록이 가장 마지막에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계시록 앞쪽에는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라고 부르는 요한서신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2주에 걸쳐 살펴보려고 하는 책이 요한서신

3권입니다. 요한서신은 3편의 책이지만 모두 같은 배경 속에서 연결성을 갖고 있습니다. 일단 요한서신을 다룸에 있어서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요한이 누구인가? 이 문제입니다. 요한은 당대에 흔한 이름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몇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요한복음과 요한서신 모두 예수님의 제자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썼다는 견해입니다. 그 외에는 열두 제자 가운데 포함되지 않았지만, ‘장로 요한’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요한서신의 저자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요한서신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밝히기에 이 의견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사도 요한이 자신을 장로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장로란 연장자를 향한 호칭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베드로전서에서 자신을 ‘장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 의견을 종합해서 보아도, 요한서신을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속했던, 또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된, 사도요한이 썼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혹

다른 의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자가 지금 노년의 인물로서, 지금의 터키 지역에 속한 에베소 도시 주변에 위치한 여러 가정교회들을 감독하는 인물이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 생겨난 교회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여러분, 제가 가끔 초대교회 이야기를 해드리죠.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어떤 특별한 예배 형식을 갖고 모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부활의 증인들, 복음의 증인들이 함께 모이는 영적 가족, 제자 공동체적 모임이었습니다.

모여서 예수님의 사역과 부활 사건, 그리고 자신들이 경험한 것들을 함께 나누며 기뻐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자신들이 경험했던 것을 전하여 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제자에게서 복음을 전달받은 제자의 제자들이 생겨납니다. 그들도 자신이 들었던 이야기를 또 나눕니다. 교회 공동체는 ‘모여서 우리 예배하자’ 하고 모인 모임이 아니었죠. 그보다는 복음에 대한 특별한 경험과 소중한 이야기를 함께 간직한 사람들이, 때를 정하여 모여서

아주 단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 옛날에는 예배당도 없었죠. 오늘은 이 집에서 모여서 교제 나누고, 다음 주에는 저 집에서 모여서 교제 나누고.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밥도 먹기 시작합니다. 그런 복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역할을 나누어서 이것저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모임이 흔히 말하는 초대교회의 모임입니다. 즉 에베소 도시에는 이런 가정교회들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죠. 가정교회는 가정에서 모이므로 가정교회인 것이죠. 말 그대로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도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모였던 모임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라고 하면, 오순절에 3000명, 5000명이 베드로의 복음설교를 듣고 모였던 예루살렘교회도 있지만, 곳곳에 복음을 나누는 작은 가정교회들도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예루살렘교회는 박해로 나중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곳곳에서 모임을 시작한 초대교회가 더 보편적인

모습의 교회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모이는 곳’, ‘함께 하는 곳’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모이고 함께 하다 보면 반드시 생겨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갈등입니다. 갈등은 사랑을 위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친밀함을 추구하다 보면 갈등을 마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저 잘 모여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목표를 둔 것입니다. 조직 운영은 관계적일 필요도 없고, 관계적일수록 불편합니다.

어느 순간 선택을 하게 됩니다. 조직으로 갈 것인가, 공동체로 갈 것인가. 성도들은 교회를 택한다면, 목회자는 방향성을 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잘 판단해야 합니다. 조직 운영을 가족이라는 공동체에 적용해보면 이렇습니다. 자녀가 둘이 서로 싸우면, 그 싸움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 둘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만듭니다. 그래도 안 되면 다른 가족과 바꿔 옵니다. 목표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에 있으면 이렇게 하는 것이 탁월한 조직운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가족은 그럴 수 없습니다. 갈등이 없는 가족이 어디 있습니까? 갈등이 없는 부부가 어디 있습니까? 부부는 원래 좀 싸워봐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다름도 알고, 내 뜻대로 상대방을 끌고 갈 수 없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 다름 속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서로 맞추어가게 됩니다. 저랑 아내도 결혼 13년 정도 됐는데, 확실히 10년 이하일 때랑은 갈등을 이겨내는 방법이 달라졌어요. 부부도 갈등이 있지만, 결혼은 서로가 그 갈등 속에서도

함께 연합하기 위한 노력을 끝까지 하겠다는 약속인 것이죠. 그래서 루터는 결혼의 성품의 학교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도 그래야 합니다. 교회에 갈등이 없다면, 그것은 탁월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조직 운영하듯 다루고 있어서 일지도 모릅니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바닥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면과 가면을 쓰고 비즈니스적으로 이곳에서 잠시만 마주치도록. 바닥이 드러나고 내면의 것이 드러나면 서로 피곤하니까. 이렇게 이끄는 것이 조직 운영에 탁월한

리더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조직운영하듯 하려면, 문화센터 다니듯이 교회 와서 강좌를 듣듯 설교를 듣고, 지하철에 내 옆에 앉은 사람처럼 옆사람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럼 안 피곤해요. 관계 싸움도 없습니다. 대신 잃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에 속해있어도 하나님이 주고 싶은 진짜 교회를 누리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어도 진정한 형제 자매를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만나는 당신의 어려움과 아픔에 함께 달려와 위로하고 도와줄 그런 가족을

얻지는 못할 것입니다. 즉, 이 외롭고 적막한 세상을 이길 힘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을 보면 알죠. 예수님은 그렇게 사시지 않으셨어요. 제자들끼리의 갈등, 제자들의 배신. 그분도 다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분은 갈등 많은 우리의 삶에 스스로 찾아오신 것이죠.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 거주지를 바꾸신 분입니다. 편리함보다는 수고로움을 택하셨죠. 그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의 역사, 행위이죠.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 우리의 믿음 소망 사랑이 진짜라면, 거기에는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등을 넘어가며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함께 성장해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사탄은 그 틈을 항상 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의 최대 관심은 여러분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교회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으면 모이지 못하게 힘쓰고, 모이면 흩어지게 하려고 힘씁니다. 공동체를 깨기 위해 사탄이 가장 잘 사용하는 것은 거짓으로 인한 분열입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사탄의 공격은 반드시 있습니다. 언제까지요? 죽을 때까지요. 여러분의 영성이 어느정도 수준이 되면 공격이 없을까요? 예수님도 사탄의 공격 앞에 늘 서 계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사탄의 공격이 죽을 때까지 있을 것입니다. 없으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지극히 둔감하거나, 나를 공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가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거나. 초대교회, 그 복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모임에도 사탄의 공격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모양의 공격이 있었겠으나, 가장 위협적인 것은 복음에 대한 본질적인 공격, 진리에 대한 공격이었습니다. (요일 2:19) 그들이 우리에게서 갔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었더라면, 그들은 우리와 함께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은 모두 우리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요일 2:22) 누가 거짓말쟁이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고 누구겠습니까?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이 곧 그리스도의 적대자입니다. 일부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에 부합하지 않는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며 교회를 깨뜨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이단 혹은 분쟁주의자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절대 혼자 죽지 않습니다. 교회를 떠나더라도 마지막까지 뒷발차기라도 해서 흠집을 남깁니다. 그리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분란을 일으킵니다. 특별히 초대교회 시대에는 지금과 같이 말씀이 정리되어 전해진 상태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폭넓게 정리된 이해가 부족했죠. 그래서 더 거짓된 속삭임에 취약했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자신들을 진리 안에 묶어두기 쉽지 않은 시대적 환경이 있었죠. 이로 인해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인들이 선포한 복음을 듣고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들 안에서도 여러 혼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요일 2:24)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것을 여러분 속에 간직하십시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것이 여러분 속에 있으면, 여러분도 아들과 아버지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작년에 <요한복음>이라는 뮤지컬을 교회에서 함께 가서 단체 관람을 했죠. 그 뮤지컬 첫 부분을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처음 부분을 다시 보여드릴 예정인데, 내용을 알고 보면 이제야 이해가 되는 노래의 내용들이 있을 것입니다. 뮤지컬에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썼던 사도요한이 제일 먼저 등장하죠. 그는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며, 우리를 위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신이시며 동시에 인간, 신성과 인성이 모두 온전하신 분입니다. 실제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로 ‘폴리갑’이라는 유명한 인물이 실존했는데, 뮤지컬에서는 그가 요한에게 찾아와 에베소 지역에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등장했다고 알립니다. 신성을 부인하는 이단들은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 부분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에게 더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 ‘영지주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영적 세계를 선한 것으로 여기고, 인간의 몸을 비롯한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일부는 몸을 가혹하게 다루는 금욕주의로 빠졌고, 일부는 몸의 행위가 영적인 삶과 구원에 무관하다고 믿어 난잡한 성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이것이 큰 영향을 끼칩니다. ‘막 살아도 돼. 괜찮아. 육체의 행함은 구원과

상관 없어.’ 이런 거짓 교리를 전파했으니까요. 영지주의는 물질세계가 악하다고 믿었기에, 예수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사실도 부인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자들은 그리스도가 인간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가현설). (요일 4:2)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음을 시인하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난 영입니다. (요일 4:3) 그러나 예수를 시인하지

않는 영은 다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은 영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적대자의 영입니다. 여러분은 그 영이 올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영이 세상에 벌써 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 혹은 인성을 부인하면,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복음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신일 뿐 사람이 아니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사람이기에 그분을 따라서 살 수 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반대로 그분이 사람일 뿐 신이 아니었다고 믿는다면, 왜 우리가 신도 아닌 한 인간을

믿고 따라야 하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하나를 부인하게 되면, 결국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거짓된 공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를 향한 이단의 공격 앞에 진리를 붙들고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 요한복음과 요한서신을 쓰게 됩니다. 그 내용을 한번 영상으로 보시죠. <요한복음 뮤지컬 영상 : 태초에> 실제로 요한2서와 요한3서는 이 갈등에 대해서 더 분명하게 다룹니다. 요한2서의 경우, 한 가정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교회를 분열시킨 무리들이 분명 너희 교회로 찾아올 것인데, 그들에게 어떤 인정이나 후원도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향이 다르고 성격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것은 복음이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 몸인 것은 머리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는 없으므로, 요한은 그들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이 1:10) 누가 여러분을 찾아가서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마십시오. (요이 1:11)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그가 하는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요한3서는 에베소의 한 가정교회에 소속된 ‘가이오’라는 한 사람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에베소의 가정교회들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무리들에 의해 상처를 입은 후, 외부인에 대해서 지나치게 벽을 쌓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에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순회 선교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을 환대하고 도울 교회의 섬김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요한3서를 가이오에게 보내어, 그가 건전한 순회 설교자들에게 환대를 베푼 일에 대해 칭찬하고 격려합니다. 물론 사도 요한도 목회적 고민이 많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요한의 영향력 아래 있는 교회의 지도자 중 한명인 ‘디오드레베’는 좋지 않은 영향을 받아서, 요한이 보낸 사람들을 거절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가이오’에게는 디오드레베를

따라 행하지 말고, 다른 모습으로 행할 것을 가르칩니다. (요삼 1:5) 사랑하는 이여, 그대가 신도들을, 더욱이 낯선 신도들을 섬기는 일은 무엇이나 충성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요삼 1:7)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기 위하여 나선 사람들인데, 이방 사람에게서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요삼 1:8)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돌보아주어야 마땅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진리에 협력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한1서는 이런 <위기의 교회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붙들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고민하며, 모든 교회 공동체가 읽을 수 있도록 쓴 편지입니다. 제가 앞서 저희교회를 성경의 신학적 토대 위에 세우기 위해 힘써왔고, 그것이 우리를 지켜줄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토양이 결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교회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원하는 교회나 목회자가 원하는 교회가 우리의 꿈이 아닙니다. 우리가 꿈꾸는 교회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성경에 근원을 둔 교회에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도

어느날 위기, 분열, 갈등, 이단의 공격이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무엇을 붙잡고자 했을까요? 위기를 맞이한 교회가 회복되기 위해 요한이 전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그 마지막 가르침을 되새기며 가장 중요한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위기가 답을 물었다면, 이제 진리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 그래서 요한1서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공생애의 마지막에서 열두 제자에게 가르쳤던 가르침, 즉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전하여 준 말씀이 담긴 요한복음 13-17장의 이야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 자신의 어떤 가르침이나 새로운 계명이 아닌,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를 되새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요한1서가 선택한 단어는 ‘사귐’입니다.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우리는 여러분도 우리와 서로 사귐을 가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입니다. 사귐. 즉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맺은

사람들은 서로 안에서도 사귐을 갖습니다. with God, with Neighbor이죠. 그리고 그러한 사귐 가운데 거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동반되는 모습이 있습니다. (요일 1:6) 우리가 하나님과 사귀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대로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일 1:7) 그러나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사귐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십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질수록 우리는 세상의 어둠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진리와 가까워지고 거짓과 멀어집니다. 죄로부터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언약 안에 속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유언, 마지막 부탁이 무엇이었느냐 물으면 주저 없이 이 말씀을 떠올립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은 제자들을 향해서, “서로 사랑하라. 그래야 너희가 내 제자이다.” 이 말씀을 하십니다. 만약 누군가 내가 내 옆 사람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이렇게 묻는다면,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하죠. 말씀에 나와 있잖아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이 하셨던

사랑처럼, 그와 같이, 그런 모습으로, 예수님을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 그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간혹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르거든요. 늘 사랑을 이야기하고, 요한1서는 사랑으로 도배되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요한이 원래 사랑을 잘하는 사랑 전문가였는가? 전혀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가장 사랑과 거리가 먼 사람의 이미지를 혹시 떠올려보신다면, 바로 그 사람과 닮은 모습이 요한의 모습이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붙여준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보아너게’ (막 3:17) '천둥의 아들'을 뜻하는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덧붙여 주신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과, 요즘 버전으로 하면 뭡니까? 토르. 그런데 왜 요한이 ‘보아너게’였을까요? 천둥의 아들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입니까? 성격이 급해요. 잘 흥분합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곳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그랬더니 옆에서 바로 나서서 잔뜩 화내는 사람이 있죠. 베드로였을까요? 아닙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이죠. (눅 9:54) 그래서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이 이것을 보고 말하였다. "주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 버리라고 우리가 명령하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저것들 싹 죽여버리죠.” 이것이 요한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의 만행이 이것 뿐인가요? (마 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청하였다. (마 20:21)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물으셨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자가 대답하였다. "나의 이 두 아들을 선생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선생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주십시오." 이게 우리처럼 무슨 사역지원에 헌신한 것이 아니죠. 청탁입니다. 대표적으로 제자들 사이를 분열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이 젊은 날 요한에게 있었던 그의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예수님 안에서

다듬고 다듬고 다듬어져 갑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변화만 주목하지만, 요한 또한 베드로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삶이 달라지고 변해가기 시작합니다. 누군가 우리 성도 중에 이런 고백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저는 예전에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가장 믿기 힘든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사람이 변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사람이 언제 변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표현대로 말하면 ‘진정한 회심’을 하면 변합니다. 그럼 왜 변할까요? 회심이라는 말 자체가 내가 내 삶의

주인을 이제 예수님으로 진짜로 받아들이고 따르기로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추구하고, 내 방식대로 살았으나, 이제는 내 마음대로가 아니라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로 다짐했으니 변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적 설교의 키워드는 2개였는데,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변할 수 있는 이유가 우리의 힘에 의한 것이라면 그것은 한계가 명확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로 회심한 자들에게 함께 하시며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2:27) 여러분으로 말하자면, 그가 기름 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 속에 머물러 있으니, 여러분은 아무에게서도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기름 부어 주신 것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참이요, 거짓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으십시오. 회심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모시는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믿으며 나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자 늘 힘쓰는 사람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신의 어떠함을 다 내려놓고 나의 안에 계신 하나님을 따라 살고자 애쓰고 힘쓰는 사람이라면 저는 정말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를 수도 있죠. 그런데 우리의 영이 한분이니 결국에는 우리를 하나로 만드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 17: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제가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런 그림을 종종 보여드립니다. 제가 생각하는 진짜 교회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른 삶을 살다가 만나 있습니다. 우리가 진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표가 정확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 우리는 그리스도를 날마다 기억하고, 날마다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기억하고, 그분의 모습을 기억하고,

그분이 원하는 삶을 따라서 살고자 해야 합니다. 그 아름다운 결단을 성령께서 돕는 것입니다. 목사가 이 중심에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목사 또한 그리스도를 닮아가되, 좋은 목사란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힘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인제사장이라고 말하면서 이럴 때는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되겠죠. 좋은 성도란, 먼저 예수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요한처럼, 베드로처럼, 그분 안에서 먼저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닮아가는 변화를 경험하고 고백하고 누리는 사람입니다. 교회에도 위기가 올 수 있죠. 초대교회도 그랬습니다. 우리도 크고 작은 위기를 만날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그때에도 우리가 위기를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내 감정, 내 생각, 내 방식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내는 것.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주님 안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가는 것. 무엇보다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주님처럼

사랑하기 위해 힘쓰는 것. 그것에 있다고 믿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은 아시다시피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성육신 하신 날입니다. 사실 오늘 설교로 다룬 요한1서는 그 성육신에 대해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는 지점이 많죠. 우리가 성탄의 은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것은 초대교회에 있던 이단의 공격 앞에 우리가 어떤 진리를 붙들고 있는지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세상 밖에 거하셔도 되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음을

정말 믿고 있는가. 우리 또한 예수님의 신성을 잊고 있거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셨음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설교 중에도 나눴지만, 그분은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자리를 버리고 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랑하기 위해 거주지를 바꾸신 분입니다. 기꺼이 자신의 존재를 낮추셔서 우리 안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그 성탄의 은혜를 다시 한번 되새기며, 우리 안에 찾아오셨고, 이제는 성령으로 거하시는 그분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찬양하며 나아가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