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송구영신예배 & 사무연회 / 여호수아와 갈렙 (수 1:7-9) / 강정규 목사

2022-12-30 · 여호수아 1:7-9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 2년간 송구영신 예배는 코로나로 인하여 줌으로 참여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20년에는 대부분이 집에서 참여했고, 2021년에는 청년공동체와 일부 사람들만 교회에서 예배하고 나머지 성도님들은 집에서 줌으로 참여를 했었죠. 그리고 올해는 현장에서 합니다. 물론 하루 앞당겨서 합니다. 송구영신예배가 올해 있나요? 몇몇 분이 물으셨습니다. 평소라면 12월 31일 10시 정도부터 예배해서 12시에 새해를 맞이하며 마무리했습니다. 이번에도 한해의 마지막 날이

토요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비슷한 방식으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토요일 밤에서 주일 자정까지 예배를 드리는 것이 주일예배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이번에는 금요기도회와 송구영신예배를 겸하여 드립니다. 저는 송구영신예배가 12/31에서 1/1에 걸쳐서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시간을 통해 어떤 마음을 되새길 것인가, 그것이 더 중요하겠죠. 여러분도 들어보셨을지 모르겠지만, 한국교회 안에는 송구영신 예배를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송구영신이라는 말의 유래는 기독교적이지 않은 측면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송구영신 예배가 어떤 의미로 드려야 할지를 잘 알 필요는 있습니다. 원래 이 단어는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원래는 관리가 바뀔 때, 즉 이취임식에 관해 썼던 표현인데,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섣달그믐날 잠을 자지 않고 신령을 맞이하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일 년 동안 운수가 좋다고 믿었던 무속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문제 제기도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예배는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입니다. 자칫 우리의 송구영신 예배도 소원성취를 위한 목적으로 채워진다면, 우리는 마땅히 송구영신예배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적인 것이 나쁜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는 분명 한국의 토속적 종교성에 따라서 매일 아침 신에게 기도하던 것이 대상이 바뀐 것이라고 볼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잘 사용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드릴 때, 소원을 적어서 그것을 성취하려는 그런 무속신앙의 마음과 구분하고, 한해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새해를 더욱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면 이 예배는 선하게 사용하시는 주님의 시간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성도들에게 자칫 오해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씀 뽑기와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물론 비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자칫 그것이 성도들 안에서 점괘나 오늘의 운수와 같이 작용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 시간만이 아니라, 말씀을 대할 때도 그런 마음으로 대하는 태도를 만들게 된다면 치명적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중에 나와 있는 말씀 뽑기가 문맥을 무시한 채 해석되어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다른 의미로 작동하는 것을 볼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심하고자 합니다. 그럼 본질을 찾아야죠. 오늘은 송구영신예배와 사무연회를 겸하여 드리는 금요기도회로서, 다른 무엇보다 한 해 동안 우리가 지나온 길에 있었던

은혜를 나누고, 내년을 위한 더욱 선한 결단을 하는 예배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제가 최근에 ‘성경적 교회’에 대한 키워드로 설교를 나눴습니다. 사실 늘 마음속에 있는 키워드입니다. 제가 그 설교 이후 나눔을 몇 분과 가져보니 ‘민주적 교회’가 성경적 교회가 아니라고 하는 부분이,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그러하다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저도 같은 깨달음입니다. 사실 그러면서 얻게 된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이 많아지면서 너무 각기 다른 필요들과 피드백이 들려오다보니

개인적으로 고민되는 일들이 참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맞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원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노력에 나의 최선을 다하고, 함께 그것을 나누면 된다는 마음을 다시 얻으니, 제 마음에 안개가 조금 걷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성경에서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무리 중 다수보다 소수인 경우가 더 많습니다. 다수결이 항상 나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한계와 어느 때에 사용하고 어느때에는 조심해야 하는지를 잘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좁은 문, 좁은 길이라고 성경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리는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 안에서 늘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바뀌길 바라기보다, 늘 말씀 앞에 나를 세워서 나를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참 좋습니다. 그들로 인해 우리는 종종 용기를 얻죠. 성경은 그들이 얼마나 보편적인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으나 예수님께 쓰임 받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승천 후, 초대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핵심적인 리더들로 우뚝 서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일이죠. 그때 베드로 같은 사람은 지금으로

따지면 총회장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가톨릭에서는 초대 교황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죠. 제가 베드로 사도를 존경하는 이유는 그가 변화되어 성령의 능력을 멋들어지게 행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의 모습 가운데 가장 멋지게 생각하는 장면은 늘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 부분을 읽을 때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기에 모든 유대인이 생각하는 사고의 틀을 그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유대인을 선택하셨다는 생각입니다. 이방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견고한 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베드로의 생각을 바꾸기 시작하시죠. 고넬료라는 이방인의 집으로 그를 부르신 후, 고넬료가 회심하고 성령이 그에게 임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아마도 베드로의 삶 안에 엄청난 가치충돌이 생겼을 것입니다. ‘마땅히 기독교는 이래야 해’라는 그의 틀이 완전히 깨어지는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기독교일 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아니었음을 깨닫고, 자기의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는 기존의 교회에 비하면 이미 많은 부분에서 틀을 깨어 왔습니다. 그러나 틀을 깨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진짜 이 시대를 위한 하나님의 필요가 무엇인지, 보다 본질적인 것을 얻기 위해, 비본질적인 것은 버릴 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래 저희교단은 이중직이 허용이 되지 않았습니다. 모든 교회는 목회자의 생계를 책임질 것을 서약하고, 목회자는 다른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교단의

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중직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거든요. 교단에 못 들어가더라도 말입니다. 그렇다고 몰래 하기는 싫었습니다. 그래서 지방회에 연락을 했죠. “우리가 이러이러한 상황이라서, 이중직 목회를 해야 하는데, 만약 이 부분이 허락이 안 된다면 우리는 교단에 가입하지 않겠다.” 다행히 교단에서 허락을 해줘서 올 수 있게 되었죠. 그리고 다행히 이제 교단에서도 이중직 목회가 허용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희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먼저 시도했던

것이죠. 무엇이 더 중요한가. 진짜 중요한 것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 고민이 필요한 때가 많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의 문제로 이방인이 그리스도를 못 만나게 되는 상황에서 그들은 결정해야 했습니다. 누구 뜻대로 해야 할까요? 그때 다른 것이 아니라, 그들은 성령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성령께서 그 공동체 안에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를 나눕니다. 영적 분별이죠. 그리고 여기서 베드로와 야고보의 역할이 컸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아무리 얘기해도 그것을 함께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초대교회의 리더들은 자신들의 고집과 생각을 내려놓고 모두 한 마음으로 결정합니다. 목회를 하면서 정말 필요한 것이 동역자입니다. 특히 성도 동역자들입니다. 세상의 흐름이 다들 오른쪽으로 가고자 하는데, 목회자가 왼쪽으로 가자고 하면 사람들은 목회자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왼쪽으로 가기 시작할 때, 나도 그렇게 살아봐야겠다는 진짜 도전을 받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외침이 외로운 외침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함께 같은 꿈을 꾸고 그렇게 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늘어갈 때입니다. 제가 열정이 많은 사람임에도 첫 교회의 슬로건을 ‘SLOW CHURCH’로 걸고 기다렸습니다. 무엇을 기다렸냐면, 내가 뭔가 하자고 할 때, 기꺼이 함께 해줄 사람 10명이 생기길 기다렸습니다. 10명이 생기지 않았는데 뭔가를 앞서서 끌고 가기보다 동역할 수 있는 성도를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그 10명을 얻은 것이 개척 3년 차가 될 때쯤입니다. 그러면서 성경공부도 열고, 예배도 더 늘리고 할 수 있었죠. 저는 여러분이 저의 방향에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 개인에게 순종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기도하시면서 우리 교회가, 목회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자 한다는 마음을 깨닫는다면, 여러분은 그 일에 저를 지지해줄 뿐만 아니라, 저와 함께 그 일에 삶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설 것입니다. 만약

제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믿는다면, 그때는 저를 지지하고 따라주시며 함께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함께 아직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함께 더욱 사랑하고, 함께 돌보며, 한 공동체로 교회를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교회의 성패는 저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에 함께할 사람들이 늘어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목회자 혼자서 교회를 바꿀 수 없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저에게 말씀하시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며 꿈을 보여주시고 동참하게 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호수아를 좋아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제 삶의 몇몇 순간, 제가 여호수아와 같은 마음이 들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제 앞에 모세와 같은 인물이 있었고 그 뒤를 이어 내가 어떤 것을 감당해야 하는 사명 앞에 서 있다고 느낀 순간들이 있었는데, 너무 두렵고 떨리는 마음, 부담감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모세처럼 할 수

있을까? 그때 여호수아서를 묵상하며 담대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수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수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 그 뒷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의 꿈이 성경적 교회라면 우리는 그것에 충실하면 하나님이 하신다는 말씀이시죠. 제가 이번에 ‘성경적 교회를 꿈꾸다’라는 설교를 하면서, 어떤 장면이 떠올랐냐면, 열두 정탐꾼 이야기였습니다.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옵니다. 와서 보고합니다. 10명의

보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가라고 하신 그 땅에 갔는데, 그곳은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기골이 장대하고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저히 그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 앞에서 메뚜기 같을 뿐입니다.” 백성들이 12명 중에서 10명의 소리를 듣고 억장이 무너져, 밤새도록 통곡합니다. 그러면서 모세를 원망하며 말합니다. “네가 왜 우리를 이 땅으로 끌고 와서 죽게 하는가?” 그러면서 말하죠. “우리가

다시 우두머리를 세우자. 그리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그 모습을 보고 슬픔에 겨워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그 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의 이야기를 들은 백성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10명의 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수결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음을 대표하는 사건이죠. 다수결은 어쩌면 그만큼 사람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이었냐면, 그의 고별설교에서도 나오지만, 이미 자신의 삶을 하나님꼐 결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너희도 오늘 택하라. 저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는 일에 제 삶을 헌신하였습니다. 제가 세습을 마다하고 개척을 한 것은, 제가 기존의 교회의 그 모습을 답습하게 되면 새로운 교회를 꿈꿀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먼저 눈에 보이는 안정감을 포기하고 진짜 교회를 향해 헌신할 때, 저의 목소리와 저의 설교가 진실한 외침이 될 것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목소리의 명분을 잃지 않기 위해 개척을 했고,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서 약속합니다. 저는 늘 여호수아가 되기 위해 힘쓰겠습니다. 여러분은 그와 함께하는 갈렙이 되기 위해 힘써주십시오. 여호수아와 갈렙.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만이 출애굽 1세대

백성 가운데, 가나안 땅을 밟은 단 두 사람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를 감당하며,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이 주는 위협과 두려움, 불안함을 다 이기고 주님의 뜻에 매달린 여호수아와 갈렙이 될 때, 세상과 다른 길을 기꺼이 걷겠다고 결단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 일을 이루어가시리라 믿습니다. 2022년도 그 일을 위해 헌신한 여러분의 모습을 저는 다 기억합니다. 아마도 주님은 더욱

기억하실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이 일로부터 가나안 땅을 밟기까지 38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한 믿음으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 속에서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세상에 물들지 않은 세대를 길러내고 있었고, 결국 출애굽 2세대와 함께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내년을 이제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사귐의교회 안에 보내어주시는 모든 사람들이 ‘출애굽 2세대’와 같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세대가 되어, 함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고, 복음으로 이 땅을 물들여갈 수 있도록, 우리가 그 일에 함께 끝까지 충성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