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서 마지막 설교입니다. 여호수아서는 21장까지로 해서 땅 분배의 이야기는 종결이 됩니다. 19장까지 열한 지파의 땅 분배 이야기가 나오고, 20장은 도피성 이야기가 나오고, 21장은 레위 지파의 분배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장 마지막이 마치 여호수아서의 모든 이야기가 종결되는 것처럼 마무리됩니다. (수 21:45)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제가 원래 23~24장이 여호수아의 고별
메시지라서 그것에 대해서 결론부로 다룰까 생각했는데, 22장도 땅 분배로 보기보다는 땅 분배 이후에 주어진 독특한 공동체적 메시지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먼저 22장의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번째 선택 : 갈등의 상황 속에서 (22장) 가나안 땅은 보통 요단강을 건너서 시작되는 요단 서편 지역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요단 서편에만 정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정착한 지파들이 있었어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 동쪽을 유업으로 받은 지파들입니다. 므낫세 지파는 절반은 요단 동편에 남고, 절반은 요단 서편으로 분할하여 정착했기에 반 지파라고 칭합니다. 요단 동쪽 땅은 모세 시절에 이미 정복했습니다. 광야 40년의 방황을 마무리하던 시점이죠. 원래 모세는 요단 동쪽 땅을 정복한 후, 그곳을 기업으로 달라고 요청하는 지파들의 요구를 거절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향후 가나안 정복 전쟁에 함께 참여하겠다고 서약하였기에, 그것을 전제로 요단 동편 땅
분배를 허락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1장에는 이들에 대한 명령이 나와 있습니다. 요단강 건너기 전에 주어진 말씀이죠. (수 1:12) 여호수아는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쪽 지파에게 말하였다. (수 1:13) "주님의 종 모세가 당신들에게 이르기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요단 강 동쪽의 이 땅을, 당신들이 편히 쉴 곳으로 주실 것이라고 하였으니, 당신들은 이 말을 기억하십시오. (수 1:14) 당신들의 아내들과 어린 아이들과 집짐승들은,
모세가 당신들에게 준 요단 강 동쪽 땅에 머물러 있게 하십시오. 그러나 당신들의 모든 용사들은 무장을 하고, 당신들의 동족들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도와주십시오. (수 1:15) 주님께서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당신들 동기들에게도 편히 쉴 곳을 주실 때까지, 그리고 그들도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땅을 차지할 때까지 그들을 도우십시오. 그런 다음에 당신들은 당신들의 소유지 곧 주님의 종 모세가 당신들에게 준 요단 강 동쪽 해 돋는 땅으로 돌아가서, 그
곳을 차지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니까 요단 동편에 유업을 받은 두 지파 반의 경우, 그곳에 가족들과 가축은 남겨 놓고 전쟁에 참여해야 하는 20세 이상의 남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7년 동안 요단 서편 정복을 위해 함께 싸운 것입니다. 땅 분배가 시작되는 여호수아 13장을 보면, 여호수아가 모세와 했던 약속을 다시 확인하며 요단 동편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기업으로 선언합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일종의 의리를 지킨 것이죠. 약속을 지킨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이들이 함께하는 전쟁이 끝났기에, 요단 동편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름답게 이제 해산합니다. 이러는 과정 중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사건의 발단은 22장 10절입니다. (수 22:10) 르우벤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 요단 언덕 가에 이르자 거기서 요단 가에 제단을 쌓았는데 보기에 큰 제단이었더라 요단 동편 지파들이 돌아가다가 ‘제단’을 세운 것입니다. 이게 왜 문제가 되었냐면,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하나입니다. 사귐의교회가 하나라고
여기는 것처럼 하나의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다만 열두 지파로 나뉘어 있는 것이죠. 우리가 팸을 나눠서 모임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예배 처소도 하나였고, 거기서 함께 예배하는 것이 하나의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두 지파 반이 요단 동쪽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마치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예배당에서 우리만의 예배를 드릴 거야”라는 의미처럼 받아들여진 것이죠. 그래서 요단 서편에 남은 아홉 지파 반은 이 일에 대하여 듣고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요단 동편과 서편 사이에 ‘내전’의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수 22:12) 이스라엘 자손이 이 말을 듣고, 온 회중이 동쪽 지파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려고 실로에 모였다. 여기 나오는 ‘실로’가 이스라엘이 정한 가나안 땅의 유일한 예배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동편 지파가 여기에서 함께 참여하지 않으려고, 아무런 상의도 없이 “우리는 이번 주부터 누구네 집에서 모여서 예배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처럼 나머지 사람들은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일에 대하여 요단 동편 지파들의 배신 혹은 우상숭배가 시작된 것이라고 느낀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 서편 지파가 군사를 모아서 요단 동편 지파를 치러 가기로 결정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여호수아서를 보고 있지만, 출애굽 2세대는 굉장히 모범적인 신앙의 세대였습니다. 비록 이들도 아이성 전투처럼 부족한 모습도 있었고, 아간처럼 불순종한 사람도 섞여 있었지만, 이들이 보인 믿음의 모습들은 구약에서 가장 빛나는 세대였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뭐가
있어요? 갈등이 있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가장 달라진 태도 가운데 하나가 ‘갈등’에 대한 이해입니다. 저는 갈등에 대한 극한의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목회자의 자녀로 자라면서 갈등의 상황을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에 비해 많이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모교회는 제가 지금 봐도 갈등이 정말 없던 교회에 속합니다. 그래도 그 몇 번의 갈등 상황에서 힘들어하시는 부모님을 봤기에 저는 갈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부교역자 사역을 했던
교회들은 유독 갈등이 많았던 교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교회의 갈등 상황에 대해서 피로감도 상당하고 트라우마도 컸습니다. 그 모습들을 보면서 ‘이게 교회인가?’라는 생각을 가졌고, 그 마음들이 새로운 교회를 추구하는 개척의 마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개척한 이후, 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목회를 배워가면서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이 ‘갈등’입니다. 물론 갈등이 없다면 좋겠죠. 갈등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어떤 부부가 둘 사이에 갈등이 한 번도 없다고 한다면, 그것이 정상일까요? 어쩌면 둘 다 지나친 회피 성향이라서 갈등이 내재되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둘이 관계를 적당히 맺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갈등을 겪지 않으면 성장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교회도 비슷합니다. 갈등이 없는 사람들이 있죠. 만약 교회에서 예배만 드리고 집에 가는데 갈등이 있으면 그것은 아주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면 누구와도 갈등이 없어요. 예배 안에서 다 축복하고 다 사랑한다고 얘기하고 할 수 있죠. 그러면 그 사람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 아닙니다. 아직 진짜 관계를 안 맺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등의 피곤함을 알기에 교회에서 관계 맺기를 최소화하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가 한 몸의 일부분으로 살아가고 가족이 되어 살아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우리는 고민해 봐야 합니다. 팸을 우리가 이제 반년 좀 넘게 했습니다.
팸 전체가 갈등을 겪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누군가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을 가져본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아직 모두가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원래 밑바닥을 보고도 옆에 있을 수 있을 때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베드로의 밑바닥을 봤어요. 자신을 저주하며 버렸던 베드로의 그 모습을 봤습니다. 주님은 그 베드로가 가진 연약함을
수용하고 그를 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부족함도 용납하시려는 예수님으로 인해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로 인해 베드로는 자신의 단점과 연약함을 극복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서로에 대한 용납, 상대방을 다치게 하는 내 모습의 발견, 그리고 그것을 바꾸려는 진실한 애씀. 이 모든 것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갈등은 ‘참된 사랑’에 대한 도전입니다. 바꿔 말하면 갈등이라는 도전을 이겨내고 품을 때, 진짜 사랑인 것입니다. 갈등으로 인해 사랑에
실패하면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가장 모범적인 모습을 보였던 출애굽 2세대. 이들에게도 갈등이 생겼습니다. 엄청난 갈등이죠. “아니, 저것들이 지금 교회를 쪼개서 나가자는 건가?” 거의 이런 문제입니다. 요단 서편 지파들은 동편 지파들이 자신들을 무시한 행동으로 느꼈습니다. 자, 그러면 이들이 이 갈등을 어떻게 다루는지 보십시오. 우선 요단 서편 지파들은 감정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동편 지파들과 대화를 시도합니다.
여기에 지도자 여호수아와 대제사장 엘르아살은 빠집니다. 아직 소통 단계이기에, 그들과 함께 소통해 왔던 각 지파의 대표들이 모여서 갑니다. 대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이들과 동행합니다. 그들은 요단 동편 지파를 찾아가서 정확하게 의도를 묻습니다. 이런 것이죠. “우리가 보기에 너희의 행동에서 우리는 이러이러한 감정을 받았고, 우리가 보기에 이 행동은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 너희가 이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 왜냐하면 요단 서편에서는
이 사건을 ‘우상숭배’ 혹은 ‘예배 장소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그런 의도인지 요단 동편의 입장을 들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단 서편 지파들의 이야기를 들은 요단 동편 지파들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의도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행동이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에 대해서 사과하고 설명합니다. “우리는 제사를 따로 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증거하려고 세운 좋은 의미였다. 우리는 이 제단을 ‘증거’라고
이름 짓고, 예배는 오직 실로에서만 우리도 너희와 함께 드릴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사건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요단 동편의 지파들은 ‘좋은 의도’로 어떤 행동을 했습니다. 이것이 오해가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다른 지파들이 보기에는 ‘큰 오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죠. 우리의 삶에도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작은 오해를 방치했다가 커지기도 합니다. 그 전에 얘기를 나눠보고, 가진 생각을 소통해 보면, 많은 경우 오해가
풀립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 ‘갈등 해결하고 화합하기 위한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저는 회심하고 주님을 묵상하고 그분을 따르고자 애쓰면 우리 모두가 조금은 더 선한 사람이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안에 악한 모습들이 남아 있어요. 우리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발동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우리는 나 중심적으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또한 사탄은 이런 갈등의 상황을 제일 좋아해요. 부채질을 잘 하면 교회를 깨버릴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사탄은 우리가 계속 오해하고 더 나쁜 생각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사탄이 여러분의 생각 안에 들어와서 조작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 옆에서 속삭일 수는 있습니다. 한번 오해가 시작되면, 모든 행동이 다 안 좋은 것으로 해석될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나쁜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계속 오해하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는 대화 한번 해보지 않고, 이미 내 마음의 블랙리스트에 올려놓거나, 다른 사람에게도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야’라고 내가
규정한 모습대로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마 요단 서편에서도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은 벌써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요단 동편, 저 우상숭배자들. 내가 쟤네 저럴 줄 알았다.” 그러나 그때에도 성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겠죠. “우선 가서 그들의 입장을 들어보고 판단합시다. 우리가 직접 가서 들어봅시다.” 여러분, 저도 무척이나 훈련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건너서 듣게 된 이야기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말했어요.” 이것이 누군가의 귀를
거치고 다시 입을 거쳐서 저에게 올 때까지는 원래의 의도와 다른 수많은 불순물들이 껴서 전혀 다른 의도로 제게 전달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보다 이 부분에서 훨씬 나아졌어요. 이것은 여러분도 모두 훈련하셔야 합니다. 건너서 들은 것은 사실이 아닐 수 있습니다. 또한 대화로 오해를 푸는 과정도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나쁜 태도는 무엇입니까? 남 탓하는 것입니다. “네가 오해하게 행동했잖아.” 이게 뭐예요? 이게 죄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서 벗어나 자기 고집을 부리는 것이 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때로는 대화를 해봐도 오해가 아닐 수 있어요. 정말 서로의 생각이 다른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서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결정을 해야 할 수도 있어요.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님’이 우리의 주인 되시는 것을 인정하고, 각 사람이 그 뜻 앞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못 하면 안 풀리는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가 옳다고 하고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내 주인이 아니오’ 하고 있는 것이죠. 한 번에 되지는 않더라도 될 때까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는 있어야죠. 그분 앞에서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시간이 필요할 수 있죠. 그런데 하나님 앞이 아니라, 내 감정과 기분 앞에서 무릎꿇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만약에 이 상황에서도 요단 동쪽 지파들이 정말 자기들만의 제단을 세우고 따로 갈라서겠다 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럼, 뭐해야 합니까? “하나님,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저들이 따르지 않고 다른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 이 상황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뜻이, “저들 안에 교만한 자들이 다른 뜻을 갖고 선동했다. 가서 그들을 쳐라.” 말씀하시면 싸워야죠.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내가 그들의 그 행동을 통해 할 일이 있다. 너도 내 뜻에 따르고 참아라.” 그러면 참아야죠. 이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도 이러한 태도로 해왔잖아요. 그런데 가나안 정복뿐 아니라, 우리 삶의
영적인 여정도 이렇게 걸어가는 것입니다. (수 22:30) 제사장 비느하스와 회중의 대표자들 곧 그와 함께 간 이스라엘의 천천만만 백성의 가문 대표들이,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자손의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다. (수 22:31)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동쪽의 므낫세 자손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이번 일로 주님께 반역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심을 알았소. 이제 당신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님의 손에서 건져 내었소." 갈등 상황에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한 행동이 전쟁을 막았습니다. 오해가 풀렸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마음을 알고 굳건해졌습니다. 이것이 사탄을 이긴 것입니다. 저는 우리교회가 나아가는 여정에 크고 작은 ‘갈등’이 무수히 많을 것이란 것을 알아요. 특히 저희처럼 수직적이기보다 수평적이고, 관계적인 공동체는 이 부분에 더욱 취약합니다. 또한 교회 안에서 예배 외에도 자주 모이고, 특히 그 모임이 말을 많이 하는 곳은 문제가 잘
생겨요. 그래서 예전 어른들이 “성가대를 없애야 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모든 안 좋은 소문의 근원이 성가대다.” 그런데 우리도 함께 모여서 뭔가를 ‘말하는 모임’이 많습니다. 우리교회는 다 말하는 모임들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공격에 우리는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는 교회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더 깨어 있어서 잘 분별하고 사탄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내가 사용되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모든 사람과 거리를 둘
거야.” 가장 사탄이 좋아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에 실망해서 진짜 교회 됨을 꿈꾸지도 못하는 상태. 그러므로 여러분, 이 시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도 갈등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놀라지 마십시오. “어, 이 교회도 갈등이 생겼네. 역시 이 교회도 별수 없어.” 이것은 성숙의 과정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어떻게 성숙했는지를 조금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내 성숙에도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을 사용하셨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갈등을 피하면 성장하지 않습니다. 갈등을 피하면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합니다. 물론 갈등을 계속 일으키기만 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어요. 갈등을 일으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갈등이 주님의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사랑하려고 애쓰고, 섬기려고 애쓰는데도 갈등은 생길 수 있어요. 그러므로 갈등이 생기는 관계, 갈등이 생기는 교회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갈등을 이겨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해요. 내 사랑과 섬김을 하나님은 그
갈등의 상황 너머에서 열매로 받으실 것입니다. 여러분, 저하고도 갈등 겪으실 수 있습니다. 저는 갈등 안 겪는 법 너무 잘 알죠. 제가 여러분을 만나질 않으면 됩니다. 우리 집에도 아무도 못 오게 하고, 예배 시간에만 멀리서 거룩하게 좋은 말만 하는 저를 보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저는 안전합니다. ‘불가근, 불가원’ 너무 가깝지도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에서 ‘허허허’ 하고 있으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관계인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부딪혀 살아가면서 엄청나게 혼내셨어요. 제자들도 서로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왜요? 가족이 되려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서로를 ‘하나의 공동체’라고 여기니까 싸운 것입니다. “요단 동편은 남이지.” 이랬으면 무엇을 하든 상관이 없죠.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갈등이 없는 문화센터 같은 만남이 아니라, 갈등을 이겨내며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기억하십시오. ‘갈등을 일으키는 자’가 아니라, ‘갈등을 풀어내는 자’가 되십시오.
중요합니다. 갈등을 일으키기만 하고 풀어내지 못해서, 여기저기 사방에 오해를 뿌리고 다니고, 말만 만들어내고, 적을 만들고 다니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입니다. 성숙함은 갈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갈등 해결을 선택하고, 갈등을 넘어서는 사랑을 선택하십시오. 그것이 주님의
주인 됨을 선택한 자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2. 두 번째 선택 : 여호수아의 죽음 앞에서 (23~24장) 여호수아 23~24장은 이제 출애굽 2세대의 지도자인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입니다. 우리는 모든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성경의 고백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집주인이고, 우리는 세입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땅을 주신 것입니다. 아무에게나 준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백성에게 약속대로 주신 것입니다. 동일한 의미로 저는 하나님이
제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은 삶은 망가지고 깨어진 삶이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시고 저에게는 새로운 삶을 주셨으니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삶의 주인이고, 제가 새로운 삶을 허락받아 누리며 살아갑니다. 아무에게나 준 것이 아니라, ‘언약’을 맺은 사람에게 약속대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계약해도 집주인과 세입자가 계약서를 씁니다. 계약의 내용이 ‘돈의 지급’과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특약’들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계약을 위반한 사람이 그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왕이신 삶,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고 우리가 종이라는 ‘회심의 고백’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제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도 동일합니다. 회심의 고백 가운데 저는 하나님이 주신 거듭난 삶, 새로운 삶, 구원과 영생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겼을 때, 땅에서
쫓겨나는 것은 당연하고, 제가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살지 않았을 때, 다시 깨어진 삶을 사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정의에 어긋난 태도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앙을 오해합니다. 내가 개판으로 살아도 하나님은 날 사랑하신다고 믿거나, 사랑하셔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 성경 구절을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명드린 이 원리는 성경에 가득합니다.
이것을 이해해야만, 우리는 언약에 충실하지 않은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용납하여 주시는 하나님 앞에 진짜로 마음 다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예배에 대한 감격이 없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왜 예배의 감격이 없는지 아십니까? 예배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내가 예배할 수 있게 된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주어진 기회이며, 나의 부족한 예배 앞에서도 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게 되면, 우리는 예배 안에서 감읍(감동하여 눈물을 흘림)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 앞에 감읍하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우리가 여호수아 1장에서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첫 지도자가 되었을 때 가졌던 두려움을 알지 않습니까? 이제 그 삶을 마무리할 시점이 된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삶과 지금까지 경험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하나님은 진짜 대단하시다.”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은 너무
감사한 일이죠. 그러나 거기에도 시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어떤 일이 잘 되면 거기에 자기를 살짝 걸치곤 합니다. “이거 내가 한 거야.” 그런데 사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그 일에 충성되게 헌신한 사람의 노고를 다 알아요. 그래서 우리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영향을 주죠. 다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잘 섬기고 겸손하게 섬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사람들이 대부분 다 압니다.
자기를 드러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좋은 공동체는 좋은 사람을 알아봐요. 그러나 한번 우리는 잘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를 통해서 선한 일이 일어났다고 할 때, ‘그것은 내가 한 것이겠는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아니죠. 내 안에 주께서 주인 되셔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은 스스로에 대해서는 자랑할 것이 없어요. 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만을 자랑할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여호수아는 이 부분에
대해서 정말 철저한 종의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이성 한번을 빼고 31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했고 31개 도시를 차지했습니다. 전쟁으로 봐도 영웅 중의 영웅입니다. 그뿐입니까? 요단강 사건이나, 여리고성 사건이나, 해가 멈췄던 사건이나. 하나님의 도구로 아주 멋지게 사용된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늘 하나님이 하신 일 앞에 종의 태도로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죽음을 앞두고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죽은 이후에 백성들이 변질될 것에
대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지도자들을 부릅니다. (수 23:2)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 곧 장로들과 우두머리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나이가 많이 들었고, 이렇게 늙었습니다. (수 23:3)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편이 되시어 이 모든 이방 나라에게 어떻게 하셨는지, 그 모든 일을 잘 보셨습니다. 과연 주 당신들의 하나님은 당신들의 편이 되시어 싸우셨습니다. (수 23:4) 보십시오. 요단 강으로부터 해
지는 지중해까지, 아직 남아 있는 모든 나라와 이미 정복한 모든 나라를, 나는 당신들의 각 지파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수 23:5)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친히 당신들 앞에서 그들까지 마저 쫓아내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이 보는 앞에서 그들을 몰아내실 터인데, 그 때에 당신들은 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소유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시 믿음의 도전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가나안 땅에서 승리한 것은 믿음으로 반응한 결과입니다. 그것을 통해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끝이 아닙니다. 남은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권면하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계속 믿음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에 언약한 대로 우리가 행하면 우리를 도우실 것이고, 언약을 어기면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계속 살려면, 하나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지도자들에게 먼저 이 말씀을 전한 후, 온 백성을 모읍니다. (수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그들의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선지라 그는 자기 삶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설교하기 시작합니다. 아브라함부터, 출애굽 사건과 광야의 사건. 그리고 그가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가나안을 차지한 것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돌본 적이 없는 땅을 내가 너희에게 주었다. 너희가 만든 적이 없는 도시들도 주었다. 너희는 거기에 살고 있다. 너희가 심은 적이 없는 포도와 올리브를 너희가 먹고 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여호수아의 설교가 이어집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아 보이면, 여러분이 누구를 섬길지 오늘 선택하십시오. 여러분의 조상들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을 섬기든지, 아니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아모리 땅의 신들을 섬기든지요,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 이것을 현대적 설정으로 바꾸면 이럴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렵고 불편하게 느껴지면, 여러분이 예전부터 따랐던 것들, 즉 세상의 가치관이나, 물질을 숭배하는 것, 혹은 현대 사회에서 흔히 추구하는 명예와 쾌락을 섬기는 것들을 붙들고 계속 사십시오. 그러나 저는 제 가족과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사랑과 진리를 신뢰하며 살아가겠습니다." 즉,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선택입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따를 것인지, 어떤 것을 섬길 것인지, 무엇을 품고 살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날 이곳에 있던 사람들은 결단합니다. “우리는 여호와를 선택합니다.” (수 24:22)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주님을 택하고 그분만을 섬기겠다고 한 말에 대한 증인은 바로 여러분 자신들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말하였다. "우리가 증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이 시대의 우리에게 진짜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 수많은 것들보다 여호와를 더 의지하십니까? 내 삶에서 다른 어떤 것보다 여호와를 더 의지하며, 다른 어떤 것 때문에 여호와를 섬기는 일 앞에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주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 고백 앞에 우리가 증인입니다. 우리의 이 고백을 서로 잘 지켜가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주변에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못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말로 가르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그때는 여호수아처럼 먼저 하나님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십시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십시오. 회심의 고백 앞에 신실한 여러분을 하나님이 반드시 지키실 것입니다. 결론. 오늘 우리의 선택은? 사랑하는 여러분. 여호수아서의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수 24:31)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생전에 줄곧 주님을 섬겼고, 여호수아가 죽은 뒤에도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일을 아는 장로들이 살아 있는
날 동안에는 주님을 섬겼다. 여호수아와 그 시대 지도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베푸신 모든 일을 알고 고백하는 자들이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감정일 것 같습니까? 감정은 요동칩니다. 신앙은 변함없는 진리에 대한 나의 고백이고, 영원한 나의 왕이요, 나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일입니다. 그것을 배우고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말씀의 끝이 뭔가 찜찜하시죠? 네, 그렇습니다. 이후의 역사가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와 함께했던 세대가 죽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떠나 다른 길로 가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다른 것을 모두 선택했습니다. 그중에 다른 것을 더 우선하여 선택한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신앙은 늘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버려서 하나님이 버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것을 우선시해서 하나님이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은 하나님도 선택하고 다른 것도 선택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것과 하나님 사이에서 늘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말을 바꿀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해. 그런데 다른 것도 중요하지. 그러니 둘 다 선택해.” 여호수아 이후의 세대가 실패한 원인이었습니다. 또한 여호수아 이후 세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광야의 경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광야와 전쟁 상황 중에는 안전했던 신앙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이후부터 급속하게 몰락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는
답이 없는 환경이 광야입니다. 우리는 광야를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내게는 이겨낼 답이 없으니까요. 가나안 땅은 강력한 땅이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여호와를 의지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안전했습니다. 갈등의 상황들, 어려움의 상황들, 무력함의 장벽들. 우리는 모두 힘겨워합니다. 그러나 힘겨워함 속에서 우리는 주를 의지합니다. 우리의 몸은 광야보다는 비옥한 가나안을 원하지만, 우리의 영은 주님을 필요로 하는 나의 삶 속에서
가장 안전합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느껴지는 상황들, 관계들, 사건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분명히 바로 그때 그 가장 가까이에 여러분의 도움이 되실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예배 안에, 우리에게 예배를 주신 주님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그분 앞에 신실하기를 바랍니다. 그분을 붙잡으십시오. 그분께 내 마음을 결단하십시오. 하나님을 선택한 여러분들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을 믿습니다.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오늘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