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마태복음 4장 1~11절 / 강정규 목사

2025-02-07 · 마태복음 4장 1~11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저는 요한복음의 ‘로고스 기독론’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로고스’는 말씀입니다. 즉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선언이자 설명이 ‘로고스 기독론’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으로 표현되는 예수님’이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셨고, 또한 그가 곧 하나님이라고 선언합니다. 삼위일체의 고백이죠. 태초에 하나님과 말씀이신 예수님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은 하나로 존재하고 있었으니까요. 하나님이 말씀이고, 말씀은 곧 진리이고, 진리가 하나님의 성품이듯,

하나님은 나눠서 설명할 수도 있으나, 본질상 하나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이렇게 기록하죠.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육신화 된 말씀이라는 것이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누굴 보면 됩니까?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면, 예수님을 따라 살면 됩니다. 끝이죠.

신앙은 이게 끝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세를 통해 전달받아서 율법이라는 도구로 순종하고자 할 때는 오해가 생겼어요. 마치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한 다리 건널 때마다 본질에서 달라지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처럼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이 직접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보면, 하나님의 비전이 보이고, 하나님의 성품이 보이고,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들으면 당시 예수님을 보았던 사람들은 다 믿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현실은 안 그렇죠? 즉,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해서 믿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만큼 우리 자기 뜻을 꺾는 것이 어렵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죠. 그런데 그런 아담이 가진 죄의 속성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삶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신을 바꾸어 가는 사람은 죄를 이겨 나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금요설교로 다뤘던 마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곧 ‘성령’의 임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임재와 함께 사역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주는 깊은 인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역을 하기 전에 세례만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한 가지를 더 받습니다. 뭘 받습니까? ‘시험’을 받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보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따라야 할 눈에 보이는 진리였어요.

그런데 그가 보여주신 모습에는 ‘시험을 받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시험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마치 루터의 이야기처럼,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을 우리는 막을 수 없어요. 그러나 새가 둥지를 트는 것을 막을 수는 있습니다.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막을 수 없으나, 시험에 빠지는 것은 막을 수 있고, 막아야만 합니다. 시험에 져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시험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 어떻게 찾아오는 지도 보여주고,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지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한번 그것들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 4:1)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마 4:2)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우선 이 말씀에서 이상하면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요단강으로 가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것처럼, 광야로 가셔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는 점입니다. 우선 여기서 예수님이 가신 곳은 ‘광야’라는 곳입니다. ‘광야’와 ‘40’이라는 숫자를 보면 우리는 곧바로 무엇이 떠오릅니까?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보낸 40년을 떠올립니다. 그들의 40년은 ‘실패의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과 불신앙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즉 성령에 순종하셔서 광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40일의 시간을 금식하셨어요. 그리고 그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구약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렸던 이스라엘의 실패를 다룹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이제 메시아의 시대, 새로운 언약의 시대, 신약의 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여기서 이제는 그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십니다. 광야의 실패를 광야의 승리로 바꾸고 시작하려는 듯 말입니다. 일종의 악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장면이 바로 예수님의 시험 사건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은 바로 앞 3장에서 성령이 함께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이지만, 40일의 금식으로 굶주리게 되었어요. 그러자 바로 사탄은 시험을 주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작은 틈을 놓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고, 그곳에 속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우리라고 할지라도, 땅을 밟으며 살아가는 ‘이미’와 ‘아직’의 중간에서 우리에게 시험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시험이 없는 상태는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정말 너무 충만해서 틈이 생기길 기다리고 있거나, 이미 사탄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어서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거나. 그리고 시험은 그 특성상 점점 강한 것이 올 것입니다. 우리의 맷집이 올라갈수록 더 강한 펀치가 아니면 우리에게는 시험도 되지 않을 테지요.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나를 잘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적의 공격방식에 대해서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몇 가지 반복되는 사탄의

공격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에서 사탄의 유혹은 ‘먹음직함, 보암직함, 탐스러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일서의 표현에 따르면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어느 시대나 같은 것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그가 할 줄 아는 공격은 고작 세 가지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에덴에서도, 예수님께도, 신약시대에도 쓴 것은, 그만큼 인간이 이 부분에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 시험에 넘어졌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오늘 잘 따라가 봅시다. 1) 돌을 떡으로 만들라 - 먹음직함 / 육신의 정욕 (마 4: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첫 번째 시험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욕구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물질로 대표되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둡니까? 그것을 통하여 내 욕구가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시험은 ‘물질의 유혹’과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두 육신의 정욕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40일간의 금식으로 인하여 굶주렸고 배고픔에 대한 육체적 욕구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필요를 자극하죠. 먹음직한 것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에 집중하게 만들고 붙들게 하는 것이 시험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도 있는 물질적인 필요가 내 삶의 우선순위에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더 고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첫 번째 시험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시험에 대한 예수님의 방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마 4: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잘 보면, 사람이 떡으로 살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떡으로 살아가는 것, 즉 물질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부정한 말씀이 되겠죠.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세요. 다만 그것이 더 높은 가치를 차지하고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떡은 필요하지만, 떡으로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그것보다 더 우리가 우선해서 추구하고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그거 하면 그래서 돈이 돼?” 모든 직장을 구할 때도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배우자를 구할 때도 그 사람의 직업과 재산이 중요시됩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일까?” 우리의 말은 곧 관심의 영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이면 주식이나 코인, 재테크 이런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에 열을 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들에게는 그 이상의 낙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달라야 합니다. (골 4:3)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골 4:4) 그러니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로 이 비밀을 나타낼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골 4:5) 외부 사람들에게는 지혜롭게 대하고, 기회를 선용하십시오. (골 4:6) 여러분의 말은 소금으로 맛을 내어 언제나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여러분은 각 사람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마땅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양육을 통하여 여러분의 삶을 세워가고자

힘쓰고 있지요. 그것의 첫 번째 목적은 먼저 여러분이 복음을 알고, 복음 안에 세워지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목적은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여 줄 수 있도록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가장 의미 있게 사용하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관심을 무엇에 두고 살 것인가? 사탄은 우리를 더욱 부추기지만, 우리는 말씀을 의지하여 더욱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붙들어야 합니다. 2)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 보암직함

/ 안목의 정욕 (마 4: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에덴에서는 선악과로 보암직함의 유혹을 합니다. 이번에는 시편 91편의 말씀까지 그는 인용하며, 예수님이 기적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게 하려 합니다. 사탄이 주는 두 번째 시험은 ‘명예와 교만의 유혹’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눈에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증명하라는 유혹입니다. 우리에게는 ‘무시’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고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우리는 가장 속상해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인정 욕구와 관련된 것입니다. 사탄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부추깁니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고자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네가 이러이러한 어려움에 빠져있는 것을 보면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닐

거야.”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하게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시험해 보는 태도로 나가도록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이러한 사탄의 공격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4: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여러분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해 주시면 믿겠습니다”라는 기도는 괜찮은 기도일까요? 사실 성경 전체적 입장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여 시험했을 때, 하나님은 그것을 믿음 없는 행동으로 간주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허락해 주신 시험은 ‘말라기에 나오는 십일조에 대한 시험’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마음으로 시험하라는 의도가 아니라, 그분의 신실하심을 믿고 순종함으로써 경험해 보라는 의미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아나니아 삽비라가 하나님을 속였다가 죽게 되었을 때, 베드로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꾸짖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이 하나님을 시험하라고 부추기고 있을 때, 그것을 단호히 거부합니다. 그것은 시험해 보는 것은 ‘믿음’이 아닌 ‘교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험하지 않습니다. 그는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습입니다. 3) 천하 만국을 주겠다 - 탐스러움 / 이생의 자랑 (마 4: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마

4: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세 번째 사탄이 주는 시험의 요소는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위해 자신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위한 마음을 부추기며 우상숭배로 이끄는 시험입니다. 세상의 성공에 대한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악과는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이는 인간이 더 높아지고, 더 강해지고, 더 많이 갖고 싶어 하는 교만을 부추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성공하고 싶고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세상은 계속 우리를 그 경쟁 속에 몰아세우기도 하고,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공하면 그만이라고 말하기도 하죠. 기독교 안에도 한때 ‘고지론’을 주창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회의 각 영역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고 말하며 1970~80년대 한국교회에 널리 퍼졌던 사상입니다. 이 개념 안에서 많이 나온 단어들이 ‘기독교적 리더십’ 혹은 ‘선한 영향력’과 같은 것입니다. 소위

기독교적 엘리트주의를 주창했던 우리의 잘못된 과거이고, 성공과 부를 신앙의 증거로 삼는 왜곡된 신학입니다. 리더십도 좋고, 선한 영향력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상의 성공과 왜 연결되어야 합니까? 선한 영향력은 높은 위치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향력은 십자가에서 가장 낮아졌을 때 가장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은 위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 주며 낮아지신 것이고, 선한 영향력은 주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 어느 자리에서나

위치에서나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말씀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가 되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디서나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아낸다면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성공입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주어진 삶에서 주어진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더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더 주어진 일에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정직하고 열심히 살아간 결과 우리는 세상에서도 인정받는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리가

주어지고 돈을 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 그것은 ‘면류관’이 아닙니다. ‘순종의 기회’가 커진 것뿐입니다. 5달란트의 삶이 내게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종이란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주님께 보여야 할 모습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 앞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우리의 관심은 그 이상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내게 주어진 삶의 모습이 내가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을 등한시하게 만들고, 그를 섬기는 일을 못 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다만 그를 섬기십시오.’ 이제 이 말씀의 마무리를 보겠습니다. (마 4: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예수님이 사탄의 시험을 다 이겨내신 후, 주님의 천사가 와서 수종 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시험을 이겨내는 우리를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시험에도 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시험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을 이겨낸 우리를 하나님은 위로하시고 ‘잘하였다’ 칭찬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시험이 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있습니다. 아니, 피해야 합니다! 그가 하는 공격은 고작 세 가지입니다. 늘 같은 공격을 합니다. 물질의 유혹, 교만과 자기 증명의 유혹, 세상의 영광과 성공을 좇고 싶은 유혹은 지금도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승리의 비결이 있죠. 예수님의 대답에 공통된 표현이 무엇입니까? ‘기록되었으되’ 예수님은 자신의 언변과 논리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억하고 붙잡습니다. 사탄은 여러분에게도 늘 시험을 걸어 올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승리의 비결을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험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도록 피할 길도 예비하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왜 우리가 시험을 감당할 수 있는가? 우리의 힘이 아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여러 순간에서 크고 작은 시험을 맞닥뜨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이 이미 그 길을 가셨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따를 때 동일한 승리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압니다. 그리고 이길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여 시험을 이기는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