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신앙의 ABC" / 강정규 목사

2025-01-12 · 여호수아 6~1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 6~12장의 내용을 설교로 다루고자 합니다. 오늘 설교는 두 파트입니다. 우리가 먼저 살펴보고 싶은 첫 번째 요점은 여호수아를 읽을 때 갖게 되는 고민에 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가나안 성읍을 ‘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헤렘’이라고 부릅니다. 말씀을 한번 보시죠. (수 6:17a) 이 성과 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전멸시켜서, 그것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라. 이 헤렘 명령이 여호수아를 통해 주어졌고, 여리고성과 아이성

전투의 결론은 모두 헤렘으로 끝이 납니다. (수 6:21)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남자나 여자나 어른이나 아이를 가리지 않고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치고, 소나 양이나 나귀까지도 모조리 칼로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 (수 8:26) 여호수아는, 아이 성의 모든 주민을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칠 때까지, 단창을 치켜든 그의 손을 내리지 않았다. 이 이야기가 아무런 문제 없이 소화되시는 분도 있겠지만, 몇몇 분들은 좀 마음에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명령을 내리실까?’ 그리고 이것에 순종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으시는 것에 대해서, 기독교 신앙이 소위 그냥 까라면 까는 것인가? 무조건 덮어놓고 믿는 것이 믿음인가? 이런 질문이 터져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를 주의 깊게 읽어갈수록 이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이나 더 나아가 불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과 여러분 사이에서, 그리고 성경과 여러분 사이에서 이런 이해를 먼저 고민하고 최선의 답을 찾아야 하는 설교자입니다. 제가

하려는 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의 설명입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은 있으나, 해답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도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여러분을 돕기 위해 힘써보겠습니다. 1. 헤렘 헤렘은 ‘신에게 바쳐지도록 구분된 것’을 의미합니다. 신에게 바쳐진 것이므로 인간이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헤렘의 대상은 없애버렸습니다. 이것은 사실 성경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전쟁에서 헤렘은 기본적인 관행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시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로 고대 전쟁은 상대방을 몰살하는 것이 상식에 가까웠습니다. 여호수아서 전반부에서도 고대의 전쟁 상황이기에 이에 관한 내용이 집중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고민은 남습니다. 특히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나 기독교 신앙이 "사랑의 종교"라는 관점에서 볼 때, 넌센스라고 느끼는 것이죠. 그래서 오랜 시간 이 부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릴 헤렘에 대한 설명과 구분은 <바이블 에센스> 강의를 참고했습니다. ①

구약과 신약의 구분 구약의 하나님을 심판과 복수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을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으로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저는 이 의견은 우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사실과도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너무 쉽게 고민을 피하려는 해석이라 볼 수 있습니다. ② 비역사적 해석 ‘출애굽 사건’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과정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을 죄로부터의 해방으로 보고, 그 사이의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 입성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죠. 이렇게 볼 경우, 해석은 쉽고 명쾌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면 성경의 역사적 기록이 다 의미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결국 성경에 기록된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피해 가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의 ABC에 벗어납니다. ③ 영적인 전투 이야기 헤렘은 물질적이고 현실적인 교훈보다는 사탄의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상징하는 영적 교훈으로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정당한가?"라는 도덕적 딜레마가 여전히 남습니다. ④ 자기 정당화의 산물 이 견해는 헤렘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닌, 이스라엘의 독자적인 행위로 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러나 성경에는 여호수아 외에도 헤렘을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라고 명시하는 구절들이 많습니다. 성경 전체의 일관성 측면에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⑤ 하나님의 문화적 양보 현대 학자들이

가장 많이 제시하는 해석학적 의견입니다. 당대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하나님께서 수용하시고 그 안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해석입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도 일정 시기 동안 ‘일부다처제’나 ‘노예제도’처럼 고대 사회의 관습을 그대로 허용하시고, 그것이 당연했던 당시의 의식 수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십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대 세계에서는 현대적 인권 개념이 미비했고, 타민족을 진멸하는 것이 당시 상식이었습니다. 헤렘에 대한 기사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석의 틀에서 우리가 고려할 것은 성경의 헤렘을 오늘날 우리 시대의 어떤 부분에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달라진 우리의 인권 수준과 문화관습이나 의식 수준에 맞춰 그분의 뜻을 계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5가지의 해석이 헤렘에 대한 다양한 해석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고자 할 때, 고려할 내용이 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한 걸음 더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우선 헤렘에 대해 여호수아서

안에서도 상충 된 기록이 등장합니다. 내용을 살펴보시죠. (수 10:40) 이와 같이 여호수아는 온 땅 곧 산간지방과 네겝 지방과 평지와 경사지와 그들의 모든 왕을 무찔러 한 사람도 살려 두지 않았으며, 이스라엘의 주 하나님의 명을 따라, 살아서 숨쉬는 것은 모두 전멸시켜서 희생제물로 바쳤다. (수 11:23) 여호수아는,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모든 땅을 점령하고, 그것을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을 따라 유산으로 주었다. 그래서 그 땅에서는 전쟁이 그치고,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위의 구절은 모든 사람이 전멸되었다고 나오고, 아래 구절은 가나안의 모든 땅이 점령되었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같은 여호수아에서 두 장만 넘겨보면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수 13:1) 여호수아가 늙고 나이가 많아졌다.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늙었고 나이가 많은데, 정복하여야 할 땅은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여호수아의 전쟁 이후에도 여전히 정복하지 못한 땅이 존재한다고 명시합니다. (수 15:63) 그러나 유다

자손이 예루살렘 성에 살던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사람과 유다 자손이 오늘날까지 예루살렘 성에 함께 살고 있다. 유다 지파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 16:10) 그러나 그들이 게셀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않았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살며 종노릇을 하고 있다. 가나안 족속 일부가 에브라임 지파와 함께 거주하며 완전한 진멸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수

17:12) 므낫세 자손이 이 성읍들의 주민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은 그 땅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다. (수 17:13) 이스라엘 자손이 강성해진 다음에 가나안 사람에게 노동을 시켰으나, 그들을 다 쫓아내지는 않았다. 가나안 족속이 완전히 쫓겨나지 않았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즉, 여호수아 10~12장에서는 가나안 주민이 몰살당했고 땅의 정복도 다 끝난 것처럼 기록되지만, 오히려 그 뒤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많은 가나안 주민이 생존해 이스라엘과

함께 살며, 정복하지 못한 땅으로 인해 고충을 겪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볼 때, 성경을 진짜 믿는다면 이렇게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헤렘 명령이 주어진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헤렘을 실천했다고 하는 기록도 성경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종학살과 같은 헤렘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기에 남은 자가 여전히 있다는 점도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본다면 다른 관점에서 이것을 이해해야겠죠. 이에

대하여 2가지 정도를 고려해봐야 합니다. 우선 수사학적 과장법에 대한 것입니다. 고대인들은 승전을 과장하여 기록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기원전 13세기의 비문을 보면, "온 땅을 평정했다"는 표현과, “이스라엘의 씨를 말렸다”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스라엘은 다윗-솔로몬 시대의 최전성기를 맞습니다. 즉, 모든 것을 평정했다는 등의 전쟁 기록은 당시의 문학적 수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문학적인 수사학 기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동의하지만, 그보다 제가 더 주목하고 강조점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헤렘 명령에 대한 ‘신학적 의미’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7장에서 가나안에 대한 하나님의 헤렘을 명령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당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것이고, 당신들보다 힘이 센 일곱 민족을 쫓아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당신들의 손에 넘겨주었을 때, 전멸하십시오. 절대 결혼을 시키지 마십시오. 그들과 분리된 삶을 사십시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멸절하라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그들과 교류하면서 사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순된 당부이죠. 멸절한 후 교류하고 사귀는 것 자체가 모순이지요.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헤렘은 ‘모두 죽여라’가 아니라, 그들의 풍습을 본받지 말고, 어떤 것도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당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분명합니다. 쉽게 말하면 언약 백성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말고 지켜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여 경고할 목적을 가진 과장 언어가 ‘헤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신학적인 이해이기도

하고, 이 또한 수사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너, 그러면 죽는다.” 이 말의 뉘앙스와 유사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헤렘 명령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원하셨던 것은, 가나안의 풍습과 신앙에 동화되지 않아야 한다는 강력한 경고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이들이 무너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비전을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비전이 무엇입니까? 약속의 땅에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들을 두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셨습니다. 언약백성은 하나님의 비전 성취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그들을 세우시고,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고,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는 통로로 삼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은 우선 구별된 나라, 거룩한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가나안에 살지만, 가나안과 달라야 했습니다. 가나안을 보지만, 가나안을 따르지 않아야 합니다. 구약의 언약백성이 이스라엘이고, 신약의

언약백성은 지금 우리들입니다. 교회입니다. 우리를 부르셨어요. 그런데 언약백성도 땅의 백성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약백성은 분별이 필요하고, 자신을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슬만 먹고 살지 않지요. 우리도 땅에서 뒤엉켜 살아갑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 만나를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달라야 합니다. 우리도 직장에서 삶에서 믿지 않는 사람과 생존 방식은 갖습니다. 일하지

않으면 굶고요.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안 생겨요. 생존 방식은 같을지 모르지만, 삶을 살아내는 방식은 달라야 합니다. 추구점은 달라야 합니다. 당시의 가나안은 왕들의 국가였죠. 피라미드 체제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다시피 위로 올라가기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결과로 줄 세우는 이런 모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과 달랐습니다. 언약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이나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모습이 아니라는 점이죠. 이런 관점에서 여호수아를 보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헤렘은 특이하게도 그 대상이 가나안의 절대군주인 왕들과 그들이 구축한 피라미드 체제의 상징인 ‘성안에 거주하는 사람들’ 뿐입니다. 성경이 진짜 헤렘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죠. 여호수아서에는 성밖에 사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헤렘 당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정리하면, 여호수아서의 헤렘은 단순한 정복과 학살에 대한 명령이 아니라, 가나안의 피라미드 체제를 거부하고 해체하려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명령입니다. 그래서

헤렘은 우리의 고민이 아니라, 우리도 따라야 할 결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것들을 내 안에서, 우리 안에서 헤렘 할 것인가.” 그 헤렘이 있는 곳이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이 왕이 되셔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곳. 우리도 이 말씀 앞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세상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이미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그런 모습을 헤렘 할 것인가. 이렇게 성경을 보면, 우리는 성경 전체의

흐름을 일관되게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역사가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그곳에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과 동화되기 시작합니다. 동화는 헤렘의 반대이죠. 그 결과 여호수아 사후 한 세대 만에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의 결과가 바로 사사기 시대인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은 진정한 헤렘에 실패했습니다. 헤렘은 그들 안에 들어온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어야 했지만, 그들은 자신을 헤렘하지 못하여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헤렘은 오늘날 우리 교회와 성도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나의 기준, 세상의 기준, 나의 뜻, 세상의 뜻이 헤렘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속한 것입니다. 2. 믿음과 삶 여호수아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우리 안에 이뤄지기 위해 우리 안에 필요한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계속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특별히 6~8장에는

두 가지 전투를 대조하여 이것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먼저, 여호수아 6장에 나오는 여리고성 전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때, 무엇이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알게 해줍니다. 가장 좋은 단어는 ‘믿음’이기도 하고, ‘신뢰’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믿기 때문에 하게 되는 행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것을 단순하게 표현하면

‘순종’입니다. 믿음과 순종은 세트입니다. 순종이 없으면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봐도 대부분 틀리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가나안에 의해서 동화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되지 않으면 100전 100패 할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땅을 그냥 주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들로 이스라엘을 바꾸어 가길 원하셔서 가나안의 전쟁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성 전투가 대표적인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다가온 순종의 갈림길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믿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입니다. 여리고성을 취하기 위해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은 이렇습니다. 하루에 한 바퀴 성을 도는 것입니다. 고대의 성은 곧 도시입니다. 지금 우리만큼 큰 도시는 아니었으니, 예를 들면 옥정 중심상가를 바깥으로 한 바퀴 도는 것입니다. 행진 순서는 싸움하는 병사들이 가장 앞에 서고, 나팔 부는 제상들이 그 뒤에 서고, 이번에는 언약궤가 가장 뒤에 위치합니다. 왕의 행차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성을 하루 한 바퀴 도는 일을 6일 동안 합니다. 이 6일 동안 나팔을 부는 제사장 외에는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은 이전과 달리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행진을 마친 뒤 여호수아가 명령하면 모두 큰 함성을 질러야 했습니다. 저는 종종 성경이 보여주는 이 내용을 상상해봅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그 행진 안에 있는 병사입니다. 처음 하루는 그냥 시키는 일이 하도 신기하니까 얼떨결에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날, 셋째 날 정도가 됩니다. 뭔가 의미가 없어 보이고 소모적인 일을 하는 것 같은 답답함도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게 뭐 하자는 거지?” 무의미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에 대한 불평과 불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때 주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침묵’입니다. 저는 침묵을 시키지 않았다면, 분명히 여기저기서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왔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6일의 침묵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생각해보면,

출애굽 1세대가 무엇으로 망합니까? 불평과 불만으로 망합니다. 이것은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망하게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입술의 파수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무엇을 먹느냐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6일은 하나님 안에서 오직 신뢰로 침묵해야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5일째 또 성을 돕니다. 내 생각이 자꾸 괴롭히죠. 이 정도 돌면, 여리고 성에 어떤 조짐도 보이고, 균열이라도 가야 할 것 같은 마음도

드는데, 아무런 일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의심이 올라오고 조급함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순종은 순간이 아니라, 완수해야 진짜 순종입니다. 어느 정도 하다가 멈추면 반 정도 신뢰한 것이 아니라, 신뢰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일은 우리의 삶에서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금은 의심하면서도 해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기에 그 작은 시도에 응답해주시고 경험시켜 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어떤 변화, 결과,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데, 묵묵히 기다리며 순종하며 나아가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내 생각을 침묵 속에 가두고 말입니다. 7일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일곱 바퀴를 돌아야 합니다. 참 힘든 하루겠죠. 어쩌면 힘이 든 만큼 다시금 불평과 의심도 증폭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소개하는 순종의 사람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신뢰는 다 알고, 다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을 말 그대로 신뢰하기에 걷는 것입니다. 내 신뢰의 대상을 바라보며

때로는 기다리고, 때로는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의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바울은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 것을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믿음의 걸음, 순종의 삶을 여러 모양으로 방해하니까요.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드디어 일곱째 날 일곱 번째 바퀴를 돕니다. 아직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내 경험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바퀴를

다 돌고 난 후, 여호수아의 명령에 따라 큰 함성을 질렀을 때 여리고성은 무너졌습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 안 드세요? 하나님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자 했으면 쉽게 무너졌겠죠. 여리고성 점령이 목적이었으면, 아니 가나안 땅 정복이 목적이었으면,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손쉽게 그것을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여리고성을 정복하는 일은 성을 차지하는 결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과정이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는 결과가 아니라 사실 과정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7일의 시간이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기적에 필요했다기보다는, 7일의 순종은 이스라엘에 대한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7일 동안 성을 돌지만,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다고 해도, 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 때 우리는 곧장 의심하기 쉽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함성을 지르기 전까지의 13번의 행진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훈련하신 시간입니다. 그 침묵의 동행이 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어쩌면 지금

우리의 삶이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위해 돌고 있는 13번의 행진 속에 속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 의미를 잘 모르고, 그냥 주어진 것을 바삐 해내며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서 그 결과가 무엇일지 잘 몰라요. 그런데 그냥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삶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한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아서, 답답할 때도 있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어가는 내 삶의 걸음은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으로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 애쓰고 있으니까요. 늘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은 지금, 이 순간도, 어쩌면 하나님의 큰일을 향한 13번의 행진 가운데 속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우리는 그저 나를 이끄시겠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걷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인 싸움이 바로 뒤에 나오는 아이성 전투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여리고성의 승리가 이스라엘을 교만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너무 약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자신감이

생깁니다. “아, 이건 내 전문이지.” 그래서 자기 방식대로 싸웁니다. 결과적으로 패배하고 이스라엘 병사 36명의 이 싸움에서 죽게 됩니다. 너무 자신했던 일에 실패하니, 이스라엘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내가 고작 아이성에 무너지다니.”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아이성에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교만한 내 마음에 무너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전투의 패배를 통해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성경의 위인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를 위해 여호수아는 언약궤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안에 죄가 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다.” 지난주에 살펴봤듯이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언약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하는 책임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입니다. 여리고성 전투에서 하나님은 헤렘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전리품 몇 가지에 욕심을 부려 헤렘하지 않고 몰래 취합니다. 아간이 자수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이 문제의

원인을 찾고자 제비뽑기를 합니다. 결국 아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집니다. 그는 언약적 배신에 대한 심판을 당합니다. 이 사건에서 하나님은 아간의 죄를 이스라엘의 죄로 보셨습니다. 언약 백성은 그 안에 있는 죄의 요소를 함께 책임지게 됩니다. 그것이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주의가 강한 곳일수록 내 주변 사람의 모습에 관심이 없습니다.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도 외면합니다. 건드리는 순간 피곤해지니까요. 우리 안에 있는 어떤 잘못은 개인의 잘못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함께 그것을 이겨나가기 위해, 극복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 언약 백성다운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혹은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바르게 하기 위한 지혜를 도모하는 일들이 모두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발견된 죄를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방식으로 살아내어 아이성 전투에 승리하는 것이 여호수아 6~8장의 내용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은 무려 7년 동안의 일입니다. 여리고성 전투와 아이성 전투가 이 모든 정복 전쟁의

모델과 같습니다. 여리고와 같은 태도면 이기는 것이고, 아이성과 같은 태도면 패한다는 것이죠. 이 뒤의 모든 정복 전쟁에는 이 공식이 적용됩니다. 믿고 순종하면 이길 것이요. 믿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면 패한다는 것입니다. 아이성 전투 이후 12장까지 31번의 전투가 기록됩니다. 이스라엘은 배운 것을 따라서 행합니다. 그 결과 모든 전투에 승리합니다.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비전을 담아내고 이루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정리하며 권면합니다. 언약백성은 오늘날 회심한 성도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회심한 성도를 통해,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펼쳐가십니다.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에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존재성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에 걸맞은 삶으로 가능합니다. 믿는 자라는 존재적 고백보다, 믿는 자다운 삶의 모습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은 간단합니다. 설교 제목처럼 신앙의 ABC와 같은 이야기죠. 저는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오늘 이 말씀의 메시지를 정리하며, 이것이 앎이 아니라 삶이 되기를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A. 헤렘이 있는 삶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며 끊임없이 세상의 여러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습니다. 내 안에 어느새 자리를 잡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헤렘 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이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으면 세상에 휩쓸린 삶을 살게 됩니다. 나도 모르게 말입니다. 주님이 왜 일주일에 하루를 구별하셨습니까?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돌아보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일주일은 어떠셨습니까? 어느새 내 안에 침투해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걸맞지 않은 생각들, 모습들, 가치관들, 삶의 방식들, 습관들이 있다면 이 시간 헤렘하기를 다짐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 존재에 대해서는 사랑하시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마십시오. 싸우셔야 합니다. B.

믿음의 행동이 있는 삶입니다. 회심의 고백이 날마다 내 안에서 작동되어야 합니다. 내가 회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것으로 설명하거나 증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따르기에 날마다 애쓰는 나의 삶이 그 증명입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오늘 그분 때문에 뭘 하시겠습니까? 매일매일, 이 질문 앞에 서야 하고, 우리는 삶으로 답해야 합니다. C. 신뢰하며 걷는 삶입니다. 순종은 순간이 아니라 과정임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신뢰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때로는 과정 가운데 불평보다는 침묵이 필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십시오. 지금 내가 바라보는 그 분의 뒤를 묵묵히 걸어가는 신실함이 필요합니다. 지금 내가 보기에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한 걸음을 걷지 않으면 여리고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믿음의 한 걸음, 신뢰의 한 걸음, 소망의 그 한 걸음을 걸으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