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우리는 <여호수아>를 시리즈로 다룹니다. 여호수아서는 모세오경이라고 불리는 다섯 권의 책이 끝난 이후,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우선 구약의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약속이 있었죠.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창 12:2) “네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겠다.” (창 15:18) “내가 너를 복의 통로로 삼으며 보호하겠다.” (창
12:3) “내가 네 후손에게도 언약을 계승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 (창 17:7) “언약의 징표로 모든 남자에게 할례를 행하라.” (창 17:10-11) 창세기는 바로 이 언약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이 약속이 이어지죠.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들이 됩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당시 애굽이라는 가장 강대국의 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의 초청을 받아서, 애굽으로 이주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400년을 지내며 이제는 하나의 민족을 구성할 숫자로 번성합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조가 바뀌며 이스라엘 족속은 애굽에게도 위협할 숫자라고 판단이 되었고,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준비시키며 그를 이스라엘 족속의 지도자로 삼으십니다. 결국 모세가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애굽의 파라오와 담판을 짓습니다. 바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지만, 애굽에 내려진 심판에 의해 항복하고 맙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족속은 애굽을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으로 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전체가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언약을 계승하는 의식을 갖습니다. 이제 이 언약의 주체가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제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죠. 국가와 국민 사이에도 책임과 권리가 있습니다. 백성은 국가의 질서와 법을 준수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대신 국가로부터 보호받으며 국가의 일부분이 되는 ‘권리’를 갖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국가’와 ‘국민’의 관계로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과 법에 순종해야 하는 ‘책임’이 있고, 대신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살아가는 ‘권리’를 갖습니다.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이 ‘율법’이고, ‘권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주신 것이 ‘성막’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이죠.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함께 거하시며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며 동행하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 중에 ‘자손’에 대한 것은 이미 들어주셨고, 이제 ‘땅’에
대한 약속을 지키고자 백성들을 인도하십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가 된 것이죠. 이후 성경이 보여주는 내용은 이스라엘이 언약에 성실하지 못하여 실패하게 된 이야기들입니다. 결국 출애굽 1세대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실 이 언약 파기의 책임은 이스라엘에게 있기에 하나님은 이들을 놓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고 기다리십니다. 결국 출애굽 2세대에게 다시 한번 가나안 땅에 들어갈 기회를
주십니다. 1세대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2세대에게 다시 율법을 가르치며, 자신들의 실패를 거울삼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고 죽습니다. 그렇게 약속의 땅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가 모세에서 여호수아로 바뀝니다. 이런 배경에서 여호수아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1. 여호수아 (수 1:1) 주님의 종 모세가 죽은 뒤에, 주님께서, 모세를 보좌하던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수 1:2) “나의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스라엘
자손 곧 모든 백성과 함께 일어나, 요단 강을 건너서, 내가 그들에게 주는 땅으로 가거라. (수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대로, 너희 발바닥이 닿는 곳은 어디든지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호세아’였습니다.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꾸어 줍니다. 호세아의 뜻은 ‘구원’이고 여호수아의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바꾸면 ‘예수’가 됩니다. 즉, 예수님의 이름과 같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호수아는
열두 정탐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고백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수결에 상당히 잘 휩쓸립니다. 10명의 정탐꾼이 입을 모아 두려움을 이야기하는데, 거기서 여호수아와 갈렙이 믿음의 고백을 외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이후 여호수아는 모세의 수종자로서 모세 곁에서 모세를 돕습니다. 즉, 모세의 오른팔이었던 여호수아가 모세 곁에서 지도자 훈련을 받다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게 된 것입니다. 아마 이때 그의 나이도 모세가 처음 지도자가 되었던 것처럼 70~80세쯤 되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120세, 여호수아가 110세에 사망한 것을 보면 인생의 2/3 지점에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2023년 기준 한국 남성의 기대수명이 80.6세입니다. 우리 기준으로 보면 대략 53세 정도에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출애굽 2세대는 시내산 언약 당시에 20세가 되지 않았거나, 아예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세’라는 인물이 가졌던 상징성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가 가장 중요한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죽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리더십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아주 쉽게 예를 들면, 제가 갑자기 목회를 그만두고 우리 박예진 전도사님이 사귐의교회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담임이 되니까 기쁘고 신날까요? 이따가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의 마음은 엄청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 1장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처럼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1:5)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 (1:5) “강하고 담대하라.” (1:6)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1:7)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1:9) “네가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1:9) 이런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여호수아의
마음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무한히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이 모든 약속이 ‘조건부’입니다. (수 1:7) 오직 너는 크게 용기를 내어, 나의 종 모세가 너에게 지시한 모든 율법을 다 지키고, 오른쪽으로나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하여라. 그러면 네가 어디를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수 1:8) 이 율법책의 말씀을 늘 읽고 밤낮으로 그것을 공부하여, 이 율법책에 씌어진 대로, 모든 것을
성심껏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네가 가는 길이 순조로울 것이며, 네가 성공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조건 ‘결과’를 구할 때가 있습니다. “제게 사랑을 주세요. 제게 용기를 주세요. 제게 믿음을 주세요.”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과정’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을 발휘할 기회, 용기를 발휘할 기회, 믿음을 발휘할 기회.’ 그 기회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면 하나님이 그를 통해 사랑도, 용기도, 믿음도 더 자라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제가 주를 닮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라는 기도의 응답은, 여러분이 사랑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사람을 내 옆에 주시고, 그런 사람을 내 팸에 주셔서 나로 하여금 사랑을 배워가게 하는 것입니다. 용기와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용기를 발휘하고 믿음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여러분을 응원하며 성령으로 말씀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상황에서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면 그만큼 성장하는 것입니다. 더욱 하나님 앞에서 강한 자로,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자로 말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모든 백성은 모세를 따랐던 것처럼 여호수아를 따르겠다고 서약합니다. 2. 가나안 당시 가나안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각각 도시마다 왕이 통치하는 도시국가 형태였습니다. 서로 갈등과 전쟁이 많았습니다. 외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오자 가나안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대항했던 것입니다. 이곳은 농경과 무역이 발달해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비옥한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으로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지중해 연안에 있었기에 무역으로 인해 경제적 가치가 높은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우상숭배의 땅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제외하고는 ‘유일신 신앙’이 없었습니다. 가나안도 여러 신을 섬겼는데, 대표적인 것이 ‘농경과 비의 신’이었던 ‘바알’과 ‘풍요와 다산의 여신’인 ‘아세라’였습니다. 당시 가나안은 경제적으로 부유했고, 정치적으로는 왕을 중심으로 한 피라미드 체제였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의 지배계급은 풍부한 삶, 그리고 안전한 권력
체계를 바탕으로 엄청난 타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레 18:21) 너는 결단코 자녀를 몰렉에게 주어 불로 통과하게 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 18:22) 너는 여자와 동침함 같이 남자와 동침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레 18:23) 너는 짐승과 교합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말며 여자는 짐승 앞에 서서 그것과 교접하지 말라 이는 문란한 일이니라 (레 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더러워졌고 (레 18:25) 그 땅도 더러워졌으므로 내가 그 악으로 말미암아 벌하고 그 땅도 스스로 그 주민을 토하여 내느니라 몰렉의 제사는 아동을 희생시키는 인신 제사의 성격이었고, 그 아래에는 가나안의 심각한 성적 타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새롭게 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앞서 가나안의 도시들은 서로 전쟁을 반복했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가나안과 이스라엘 중에 누가 더 군사적으로 잘 훈련되고 경험이 많겠어요? 당연히 가나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어떤 삶을 살다가 왔습니까? 떠돌이 유목민입니다. 당시 가나안의 도시들은 전쟁을 대비한 형태의 도시국가들이었어요. 높은 성벽과 요새화된 방어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여리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이미 철기문화로 넘어가 있었어요. 전차 등 군사 무기와 기술력에서도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비할 수가 없었습니다. 2장에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여리고 정탐꾼 사건이 나옵니다. 고대 사회에서 여인이 기생 혹은 창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을 탓하기 어렵습니다. 대부분 가장 사회의 약자가 되었을 때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의 견고한 피라미드 가장 밑에 살아가던 그녀가, 그 땅을 치러
온 이스라엘 정탐꾼에게 협조하는 것은 그녀에게 여리고에 사는 것이 매우 비참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녀는 차라리 적군일지라도 현재의 불합리한 삶을 타계할 그들을 응원하고 싶었던 것이죠. 그렇게 라합의 도움으로 여리고 정탐꾼 두 명은 여리고를 정탐한 후 안전하게 복귀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라합에게 훗날 여리고를 정벌할 때, 보호를 약속합니다. 이제 본격적인 가나안 입성을 위해서 요단강을 건널 준비를 합니다. 3. 요단강 요단강을 건너는 순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한 방법을 여호수아가 가르칩니다. (수 3:5)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자신을 성결하게 하시오. 주님께서 내일 당신들 가운데서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수 3:6)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에게 언약궤를 메고 백성보다 앞서 건너가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들 앞에서 나아갔다. 여호수아서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신뢰’입니다. “내가 하는 일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니?”
마치 이 답을 들고 서 있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법은 언약궤입니다. 언약궤는 성막 안 지성소에 두는 물건인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에 가장 먼저 들어가라”는 것이 하나님이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제시한 방법입니다. 만약 제가 이런 지시를 내렸다가는 비상식적이라고 여겼겠죠. 맞습니다. 비상식적입니다. 원래 우리는 상식을 어긋난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고, 저는 기적을 하나님의
개입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은 보통 상식적으로 일하십니다. 상식 또한 하나님의 질서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어떤 일을 위해서 ‘비상식적인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했던 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고자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믿고 따를 수 있는 훈련’입니다. 사실 요단강에 언약궤를 멘 사람부터 들어가라는 것은 여호수아서에서 그리 힘든 순종이
아니라고 보일 정도입니다. 이조차도 못하면 그 후의 것은 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기준과 판단을 뛰어넘어 순종할 때, 하나님은 그 순종을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로 바꿔주십니다. 언약궤를 앞세운 제사장들의 발이 요단강 물에 닿는 순간, 흐르던 강물이 멈추게 됩니다. 발아래로는 흘러 내려갔고, 발 위의 상류 물은 한쪽에 쌓이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요단강은 홍해가 그랬듯 사람이 건너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기적이죠. “하나님의
기적을 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이렇게 기도한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입니까? “내게 믿음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요구 앞에 순종했을 때, 기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늘 하나님이 추구하시는 방식입니다. 모든 백성이 요단강을 건넙니다. 출애굽 1세대가 마른 홍해를 건넜다면, 출애굽 2세대는 마른 요단강을 건넙니다. 사실 성경에서 물을 건너는 것은 중요한 상징을 갖습니다. (고전 10: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고전 10: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주지하듯이, 바울이 말하는 이 장면은 홍해를 건너는 장면입니다. 바울은 홍해를 건넌 것이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홍해를 건너간다는 의미가 세례의 의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내 인생의 전환점입니다. 세례를 기점으로 내 삶이 바뀌었고 다시 태어났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회심이 마음의 고백이라면, 세례는 그것에 대한 몸의 고백입니다. 우리가 송구영신 예배 때 봤던 ‘지상대위임령’의 내용도,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세례를 주라’는 것이었죠. 출애굽 2세대는 모세의 설교를 통해 모압에서 ‘회심’을 다짐했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행함을 통해 세례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여러분도 세례를 받으면 ‘세례패’를 제작해서 줍니다. 생일은 매년 있지만, 세례는 인생에 한 번인 소중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요단강을 건넌 이스라엘
백성도 이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웁니다. (수 4:20) 여호수아는 요단 강에서 가져 온 돌 열두 개를 길갈에 세우고 (수 4:21)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 자손이 훗날 그 아버지들에게 이 돌들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든, (수 4:22) 당신들은 자손에게 이렇게 알려 주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넜다. (수 4:23) 우리가 홍해를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우리 앞에서 그것을 마르게
하신 것과 같이, 우리가 요단 강을 다 건널 때까지, 주 우리의 하나님이 요단 강 물을 마르게 하셨다. (수 4:24) 그렇게 하신 것은, 땅의 모든 백성이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강하신가를 알도록 하고, 우리가 영원토록 주 우리의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내 인생을 지배하던 나의 옛사람의 영향력이 나에게서 끊어지고, 내가 다시 태어난 그것을 고백하고 기념하는 것이 세례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요단강을 건넌 것이 그들의 자손에게도 들려줄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그 믿음을 우리의 자녀들에게, 우리의 후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무엇을 전해주시겠습니까? 깨어진 세상이 추구하는 그 방식에 조금이라도 앞서갈 수 있는 그것을 전해주시겠습니까? “무조건 일단 성공해야 해. 도움이 될 만한 친구를 사귀어야 해. 돈 잘 버는 직장이 최고야.” 이렇게 가르치시겠습니까? 그렇게 자녀들을 쪼아대서 소위 엘리트로 만든 그 부모들과 자식의 관계는 지금 어떻습니까?
그들이 그로 인해서 조금 더 나아진 부분도 있겠으나, 그들의 내면세계와 정신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물론 우리가 아무리 자녀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고 싶어도 그게 우리 뜻대로 잘 안 됩니다. 용돈으로 협박하는 것도 한계가 있는 나이도 곧 옵니다. 그래서 저는 자녀의 신앙이 부모의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가롯 유다의 실패가 예수님의 책임인가요? 우리의 힘으로 안 되는 것도 있습니다. 믿지 않는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 신앙생활 한다고 기죽지 마십시오.
어쩌면 혼자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더 대단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사랑해주십시오.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자녀도, 남편도, 아내도, 형제도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십시오. 사랑이 우리에게 끊어지지 않는 끈을 줄 것이고, 사랑으로 초청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4. 길갈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은 어디 땅입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믿음을 보셨어요. “아, 얘네들은 출애굽
1세대와 달리 나와의 언약을 계승해갈 수 있겠구나.”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 그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계승할 사람들로 보신 것입니다. 언약의 계승자는 그 징표로 뭘 해야 하죠? 할례입니다. (수 5:2) 그 때에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돌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베풀어라." 남성분들이라면, 이 대상자가 나일 수도 있다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글자는 ‘돌칼’입니다. 지금처럼 마취가 가능합니까?
수술용 칼이 있습니까? 할례는 뭐 예전부터 해왔으니까 가능하다고 칩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가 어딥니까? 요단강 건너기 전만 하더라도 ‘상식적’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할례하고 그다음 요단강 건너서 이제 싸워야 맞습니다. 이게 우리의 생각과 기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또 내 생각과 방법과 다른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왜요? 바로 믿음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 내 생각에 불가능한
것을 하라고 하실 때, 내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길갈에서의 할례는 제가 보기에 이 백성을 지도해야 하는 여호수아에게나, 하나님의 명령을 여호수아를 통해 듣게 되는 백성들에게나, 엄청난 믿음의 싸움이고 승부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믿음의 승부처마다, 아주 예리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날 길갈에 주목하고 계셨습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어떻게 합니까? 할례를 행합니다. (수 5:8) 백성이 모두 할례를 받고 나서 다 낫기까지
진 안에 머물러 있었다. (수 5:9) 주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집트에서 받은 수치를, 오늘 내가 없애 버렸다." 그리하여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 믿음의 승부처는 이미 하나님께서 승리하신 곳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믿음대로 하면 이기게 하시고, 다만 우리의 믿음을 지켜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1에는 이미 가나안 왕들이 요단강 사건을 전해 듣고, 간담이
서늘해져서 용기를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적군의 위협은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믿음의 승부처에서 우리의 적은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나와 싸우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믿음을 요구하시는 순간, 그 믿음의 행위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배가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는 것이죠. 그것이 내 생각과 다르고 말이 안 될지라도. 생각해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실패는 모두 믿음의 실패였습니다. 왜요? 내 생각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덮어놓고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믿음을 가르치시지 않아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 1세대의 실패 때도, 그들은 믿음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는 믿음으로 행해야 했어요. 출애굽 2세대도 요단강을 건넜고, 그로 인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봤습니다. 그러면 길갈이라는 믿음의 승부처에서 그들은 믿음을 보이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길갈에서 그들이 믿음으로 할례를 행하자, 이것이 이집트의 수치를 없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 이전, 회심 이전의 삶이 이집트의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평이 생길 때면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말했습니다. 우리로 따지면 “하나님 안 믿는 것이 낫겠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옛 모습이 이집트의 삶입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이스라엘과 함께했지만, 그들은 툭하면 하나님을 버리고 이집트를 찬양했어요. 우리로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의 삶을 찬양하고 동경하고 부러워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드디어 하나님은 이들의 믿음을 통해서 그 수치를 벗어버렸습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 내 것이 되었구나”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길갈에서 머물며 유월절 예배도 드립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가져다준 하나님의 구원사건이죠. 이제 이들이 진짜 하나님의 구원에 속한 사람들이 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의 음식을 처음 먹습니다. (수 5:11) 유월절 다음날,
그들은 그 땅의 소출을 먹었다. 바로 그 날에, 그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과 볶은 곡식을 먹었다. (수 5:12) 그 땅의 소출을 먹은 다음날부터 만나가 그쳐서, 이스라엘 자손은 더 이상 만나를 얻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 해에 가나안 땅에서 나는 것을 먹었다. 이제 광야의 삶이 끝나고, 가나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삶의 방식은 바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이들과 동행하시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시며, 믿음으로 사는 자와 늘 함께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언약이 어떻게 계승되어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한 그 약속은 이스라엘을 거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언약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성찬을 하지만, 성찬이 바로 그 언약을 기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눅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우리가 언약을 계승했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도 성경이 가르치는 언약 백성의 삶의 방식과 같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고, 우리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동일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믿음의 승부처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
백성의 의무와 책임입니다. 언약을 계승하고 있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도 동일합니다. 우리의 권리는 무엇입니까?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 결코 망하지 않으리.”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쩌면 하나뿐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뜬구름 잡는 믿음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깨달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신뢰하는 것이며, 내 인생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돌아보며 나를
앞으로도 이끌어가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까? 여호수아처럼 믿음의 행보를 시작하시겠습니까? 믿음의 승부처마다 우리를 주목하고 계신 하나님. 오늘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의 걸음을 주께로 옮기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