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손에 손잡고" / 강정규 목사

2025-01-19 · 여호수아 13~2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여호수아 세 번째 설교입니다. 다음 주일은 창립 주일로 외부 설교자가 오고, 그다음 주 여호수아 강해 마지막 설교는 23~24장에 나오는 여호수아의 유언을 다룰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13~22장에 나오는 땅 분배 이야기입니다. 분량으로 보면 굉장히 긴 본문이지만, 여호수아에 대한 어떤 강의를 들어도 이 부분은 굉장히 짧게 다루고 넘어갑니다. 어쩌면 성경에서도 가장 재미없는 부분으로 평가를 받아왔던 본문입니다. 물론 이 본문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나름의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땅에 대한 언약을 드디어 이루어졌다는 측면을 보여주죠. 하나님의 신실함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교훈만 주려고 성경에 이 긴 본문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주 원데이원바이블로 이 부분을 읽은 분들은 꽤 고생했을 것입니다. 거의 이런 느낌이죠.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잘 그린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못 그린 기린 그림이다.” 한번 땅 분배 이야기의 한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수 13:26-27)

헤스본에서 라맛 미스베와 브도님까지와 마하나임에서 드빌 지역까지와 골짜기에 있는 벧 하람과 벧니므라와 숙곳과 사본 곧 헤스본 왕 시혼의 나라의 남은 땅 요단과 그 강 가에서부터 요단 동쪽 긴네렛 바다의 끝까지라 13장부터 22장까지 이런 내용이 계속 반복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아무 의미 없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이 내용들 안에도 잘 캐내어 보면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이 본문의 메시지들을 소중히 대할 때, 오늘도 그를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 우선 가나안 땅 분배 이야기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는데요. 땅 분배에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습니다. 제비뽑기로 결정됩니다. 제비뽑기에 의한 결정,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기독교 역사 가운데 종교개혁자 츠빙글리는 제비뽑기를 활용한 결정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저도 사역 중에 제비뽑기를 사용해서 뭔가를 결정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충분히 이해가 있고, 어떤 결정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때는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성경에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그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건 여러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항상 제비뽑기로 결정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약시대에 사도행전 1장에서 가룟 유다의 빈자리를 채울 때 제비를 뽑은 것이 마지막 기록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에는 제비뽑기가 등장하지 않아서, 어떤 이들은 이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이 제비뽑기보다 우선시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저는 기독교 공동체는 성령 안에서

늘 그분의 마음을 쫓기 위해 힘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연약함이 많기에 한 번의 결정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겸손함을 갖고 부족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보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늘 따르며, 답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방식’이 꼭 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투표를 해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결정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의 생각이 앞선 결과가 될 수 있고, 제비뽑기를 하는 것도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서, 결과를 운에 맡기거나 결정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방식의 어떠함보다는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적어도 가나안 땅 분배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방식은 제비뽑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훈련하는 과정이었을까요? 제비뽑기의 결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철저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를 들어 땅을 분배하는데, 저 지파가 분배받은

곳은 강남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파는 연천입니다. 뭐 연천이 항상 나쁘지는 않죠. 그런데 나는 성향이 도시적인데 연천이고, 나는 성향이 자연 친화적인데 강남입니다. 배정받은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해서 맡기신 곳, 보내신 곳으로 받아들이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결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나보다 옳으시지.” “하나님이 나보다 지혜롭지.”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면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 이러한 신뢰는 지금 우리의 삶에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조금 더 예를 들어볼게요. 레위 지파의 경우입니다. (수 13:14) 모세는 레위 지파에게만 유산을 주지 않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불살라서 드리는 제물이 그들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다른 지파의 경우는 어떤 땅을 받는지에 대한 것이 달랐다면, 레위 지파는 아예 땅 분배에서 제외됩니다. 내가 만약 레위 지파입니다. 그런데 내가 레위 지파가 되고 싶어서 레위 지파로 태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내가 태어나면

그 상황이 나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모두 그렇게 주어진 환경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 마음에 드는 것도 있겠으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얼마나 많습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내가 봤을 때 더 좋은 환경에서 있는 사람이 나보고, “야, 뭐 그런 걸 불평해. 그냥 순응하고 살아.” 이렇게 말하면 그게 설득이 됩니까? 사실 이것은 개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풀어내지 못하면, 평생을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게 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어떤

환경이 더 좋은 환경인지 아닌지,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 안 태어나고 미국에 태어났으면 그게 더 좋은 것인지, 혹은 제가 목회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면 그게 더 좋은 것인지, 제가 강남에서 태어났다면 그게 더 좋은 것인지, 우리는 사실 알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도 제 마음에 계속 불편한 것은, 우리가 대부분 피하고 싶은 장애 등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저는 어떤 부분에서 절대로 제가 함부로 넘겨짚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살아갔던 송명희 시인이 그 연약함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고백하게 된 시의 내용은 참 깊고 놀랍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을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송명희 시인의 상황이라면, 평생 하나님은 불공평한 하나님으로 인식되고 싸워오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분이 주어진 삶을 살아내며 하나님을 경험하고, 돌아보며 고백하는 것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신뢰하는 삶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신 환경, 재능,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그보다 훨씬 큰 가치보다 훨씬 귀한 것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각기 다른 ‘최선’을 하나님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아세요. 여러분의 최선을 아세요. 내게 주신 재능의 크기를 아세요. “하나님이 주셨기에 하나님이 아신다.” 이것이 우리가 고백해야 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은 것을 요구하세요. 달란트 비유가 그것이지 않습니까? 5달란트 받은 자는 장사로 이윤을 남겨야 할 책임을 5달란트 가진 것입니다. 2달란트 가진 자는 책임도 2달란트입니다. 1달란트 가진 자도 1달란트의

책임을 다 했으면 동일한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등한시했기에 주인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하나님은 5달란트 가진 자와 2달란트 가진 자가 모두 성실히 사명을 감당했음에도, 그 결과는 10과 4로 달랐을 때, 둘 모두에게 같은 칭찬을 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주어진 환경, 가진 재능이 많다면 우리는 그것을 ‘책임’으로 느껴야 합니다. 반면 내가 모든 면에서 가진 것이 없다면 그런 나의 작음 속에 내가 빚어내는

것이 작을지라도 그것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것이 제가 믿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쿵’이라면, ‘짝’도 필요합니다. 그것이 뭘까요? ‘인간의 반응’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이라는 두 축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균형과 조화가 무너지면 신앙이 이상한 쪽으로 기울어서 망가집니다. 제가 쉽게 설명해 볼게요. 구원은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먼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이 가능한 것입니다. 이 결정이 없었더라면 어느 누구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백하는 것이 ‘돈으로도 못 가요’ 같은 찬양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을 사랑해서 구원하려고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정하셨으면 끝인가? 또 성경이

말하는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반응’이 반드시 필요하죠. 우리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말씀에서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구원 결정과 일하심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 자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제가 늘 말하듯 ‘믿음의 행동’이 동반된 것입니다. 그래야 살아 있는 믿음이죠. (요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입으로만 ‘믿어요’라고 하는 것을

믿음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합당한 삶이 그 믿음을 증명합니다. 만약 그 행함이 없다면 믿음이라 말할 수 없죠. 가짜 믿음, 죽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입으로만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진짜로 일하셨고, 우리도 진짜로 일해야 그것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손 내미심, 그리고 우리의 손 잡음. 이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의하지 않으면, 이 균형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주권’에 꽂혀 있어요. 그런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때는 이 신앙이 굉장히 파워풀해요.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뭔가 부정적인 상황에 대해서도 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려요. 부부 사이에서도 사이가 좋으면, “역시 하나님은 나에게 딱 맞는 짝을 주셨어.” 그런데 사이가 안 좋으면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사람을 주셨을까? 하나님이 날 미워하시나.” 이럽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신앙의 태도가 소극적입니다. 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니까 나는

안 해도 됩니다. 전도도 안 해요. “구원하시려면 어떻게든 하실 것이고.” 또 나의 신앙을 훈련해 가고자 하는 마음도 별로 없어요. 뭐든지 내 책임이 아니거든요. 그냥 나에게 있는 결과는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다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생각하니 내 마음은 편해요. 그런데 순응적이지만 능동적이지는 않아요.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묵상을 많이 하는 것이 ‘토기장이 비유’이죠. “내가 어떤 모양으로 사용되는 것인지는 주인이 다 결정한 것이다.” 반대로 누군가는 ‘인간의

반응’에 꽂혀 있어요. 이 사람들은 모든 것에 ‘자신의 결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할 때가 있어요. 신앙과 삶에 공백이 없어요. 또한 결과에 대해서 지나치게 교만하거나 지나치게 좌절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너무 중심에 있는 것이죠. 자기에게 결과의 책임과 칭찬과 탓을 다 돌리기 쉽습니다. “잘 돼도 내 덕, 잘 안돼도 내 탓.” 모든 것이 다 나에 의해서 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 나라 완성에도 내가 꼭 필요해요.

내가 너무 중요해요.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내가 다 하려고 하다 보니, 하나님의 개입에 대해서 종종 닫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묵상하고 따라가기보다는 이미 내가 너무 앞서가죠. 그러다 보니, 신앙이 자신의 마음에 맞으면 붕 떠올랐다가, 또 어떤 때는 착 가라앉습니다. 늘 마음이 조급해요. 적극적이지만 자기 뜻이 너무 강해서 순종적이지는 않아요. 이런 사람들이 가장 묵상을 많이 하는 것은 ‘제자도’이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리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행동이 수반된 말씀들을 좋아하죠.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이 두 가지 가르침을 균형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건강한 신앙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도, ‘인간의 반응’에 대하서도 바르게 이해하고, 그 두 가지 신학이 내 신앙과 삶 가운데 적절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적으로 잘 배운다고 잘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잘 배워서 그것을 자기방어적이나

회피용으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배워서 오히려 망하는 지름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안에서 내게 필요한 모습들을 잘 사용하여, 꾸준히 주님을 따르는 자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2. 인간의 반응 그렇다면 ‘땅 분배 이야기’에도 ‘인간의 반응’이 강조되고 있을까요? 잘 읽어보신다면 이 말씀은 그 어느 말씀보다 우리의 반응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왜냐하면 여호수아서의 땅 분배는 다 정복된 땅을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정복하라고 목표로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누구는 강남의 아파트를 주고 누구는 양주의 아파트를 줍니다. 집이 살아갈 거처로 생각하는 사람은 괜찮겠으나, 자산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불공평하다는 마음이 생길 수 있겠죠. 그런데 소유만 하면 되는 아파트가 아니라, 거기에 살면서 집을 지으라는 것이면 어떻습니까? 꼭 강남이 좋을까요? 교회를 개척하라는 명령이면, 강남이 더 좋은 것일까요? 혹은 양주면 무조건 유리할까요? 아닐 것입니다. 다 다를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이스라엘이 정복한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 정복되지 않은 곳이 많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31명의 왕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있는데 전체가 몇 개의 도시국가가 있는지는 나오지 않거든요. 그러니까 지도상으로 땅을 먼저 분배하고, 땅을 분배받은 지파는 이제부터 용기를 내어 그 땅을 차지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면 마치 이것은 그냥 약속되었으니까, 하나님이 무조건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도 하나님은 약속을

믿고 그 명령에 순종하여 나가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도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하여 성취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에 우리를 맞추어 순종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일에 대하여 우리가 따를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보호와 능력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약속의 땅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오직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에는 나의 능력이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가나안은 우리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그가 나에게 명하시니 우리는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인간의 반응입니다. 만약 신앙에 이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구름 위에서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현실에 뿌리박힌 신앙은 때때로 처절한 현실 앞에서 주를 믿기에 따르는 우리의 애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나의 열심 때문에 뭔가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사실 내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반응’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 구별해야 합니다. 무조건 열심히 뭔가를 왁자지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다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내가 순종하고 내가 따르고 내가 내 삶을 드려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 잘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 앞에는 때로는 내 몸을 쳐서 복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서 현실이 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놓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포장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리하면 여호수아서는 1~12장까지 전쟁 기사는 하나의 공동체로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고 순종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13~22장은 이제 흩어져서 하나님의 뜻에 각자 지파별로 가문별로 반응하여 그 뜻을 이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 중간에 땅 분배가 있는 것입니다. 땅 분배는 그러므로 결과물에 대한 배분이 아니라, 사명에 대한 부르심

입니다. 사명을 받아 성취해 가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사명 앞에서 여러 다른 모습들이 등장합니다. 그중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가진 모델과 가장 소극적인 모습을 가진 모델이 하나씩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명 앞에 가장 적극적인 사람은 ‘갈렙’입니다. 갈렙이 누구입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만이 출애굽 1세대 가운데 살아남은 유이한 인물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수기에서 모세의 명령에 따라 가나안 땅을 정탐했던 12 정탐꾼의 일원입니다.

그때 지파별로 한 사람씩 대표하여 정탐하였는데, 유다 지파의 대표가 갈렙이었습니다. 열두 정탐꾼 이야기는 너무 유명한 것이죠.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12명이 정탐하고 왔는데, 그 보고 내용이 완전하게 달랐죠. 12명이 모두 가나안이 매우 살기 좋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고, 정착하여 살기 좋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10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땅의 거주민들은 강하고,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그곳에는 아낙 자손(거인족)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을 정탐했음에도 그 약속하신 분의 일하심, 그 주권을 믿지 못하고, 믿음의 반응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자신들의 약함을 바라본 것이죠. 이런 10명의 이야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이 의분을 갖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 반드시 그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과 같습니다.” 민수기 말씀을 잘 보면, 그들은

자신들이 강해서 이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하나님께서 이미 승리를 약속하셨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믿음의 반응이 그들에게는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10명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출애굽 1세대가 모두 10명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출애굽 1세대에게 부적격 판단을 내렸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도 전에 정탐하고 온 내용을 듣고 나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한 출애굽 1세대를 데리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38년을 보내시며 다음세대를 준비시킵니다. 당시 40세였던 갈렙은 어느덧 78세가 되어 가나안에 들어옵니다. 출애굽 2세대가 중심이 되어 가나안에 입성한 것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단 두 사람. 출애굽 1세대 가운데 믿음의 고백을 하였던 여호수아와 갈렙만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출애굽 2세대는 첫 번째 인구조사 당시 20세가 안 되었으니, 38년의 광야 생활이

지난 후, 그중 가장 나이 많은 사람들이 50대 후반쯤 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보다 최소 20세는 더 많은 어른입니다. 여호수아가 2세대의 지도자라면, 갈렙은 이제 믿음의 선배로서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여호수아 1~12장에 나오는 7년의 정복 전쟁에 갈렙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지파별로 땅을 분배하여 싸우는 상황으로 전환되자 그가 믿음의 본을 보입니다. 갈렙이 여호수아를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수 14:10)

이제 보십시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 일을 말씀하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생활하며 마흔다섯 해를 지내는 동안,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나를 살아 남게 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이제 나는 여든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수 14:11) 모세가 나를 정탐꾼으로 보낼 때와 같이, 나는 오늘도 여전히 건강하며, 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힘이 넘쳐서, 전쟁하러 나가는 데나 출입하는 데에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수 14:12) 이제 주님께서 그 날 약속하신

이 산간지방을 나에게 주십시오. 그 때에 당신이 들은 대로, 과연 거기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은 크고 견고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는 그들을 쫓아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갈렙의 이야기를 보면서, 40세의 갈렙이나 85세의 갈렙이나 그는 한결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앙은 나이가 들수록 성숙하기도 하지만, 사실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많은 경우에 세상에 적응하며 패기를 잃고 철이 들어버립니다. 그래서

교회의 나쁜 선배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열심히 신앙생활 하면서 자라가는 사람에게 “나도 예전에 다 그래봤어. 다 한때야.”라고 말하며, 마치 자신은 이제 신앙의 도전 앞에 물러선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아름다운 영향력을 가진 신앙인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믿음으로 강하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갈렙이 달라고 하는 지역은 쉽게 점령할 수 있는 지역이 아닙니다. 아낙 자손이 있어서 가장 점령하기 힘든 곳입니다. 갈렙이

의지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일까요?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시기만 한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갈렙의 믿음의 근거는 여전히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는 세상 앞에 철들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종종 사역하다 보면, 누군가 힘들어 보여서 제가 확인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저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힘든 것도 사실인데 하나님 안에서 저 이겨낼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 교회의 성장은 기쁨보다는 늘 두려움입니다. 이미 제힘으로 어찌어찌할 수 있는 선은 예전에 넘어섰습니다. 제힘으로는 불가항력입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저는 우리교회는 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교회는 주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게 맡겨진 일만 주님 안에서 잘 하면 되는 것이고,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주님 앞에 바른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주님의 일하심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갈렙이

하나님의 사명 앞에 나이와 상관없이 가장 적극적인 사람이었다면, 그 반대가 있습니다. ‘단 지파’입니다. (수 19:40) 일곱 번째로 단 자손 지파의 각 가문의 몫을 결정할 제비를 뽑았다. (수 19:47) 그런데 단 자손의 경계는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셈과 싸워 그것을 점령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차지하여 거기 거주하였음이라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셈을 단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보면 단 지파도, 제비뽑기로 결정된 자신들의

몫을 차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경계를 더욱 확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번역의 엄청난 오류입니다. 새번역 말씀을 비교해서 보시죠. (수 19:47) 그러나 단 자손은 그들의 땅을 잃었을 때에 레센까지 올라가서, 그 주민들과 싸워 칼로 쳐서 무찌르고, 그 곳을 점령하였다. 그들은 거기에 살면서,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레센을 단이라고 불렀다. 단 지파는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잃었습니다. 잃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마음대로 이주한 것을 개역개정은 ‘경계가 확장되었다’라고 잘못 번역한 것입니다. 원래 맡겨진 땅을 잃어버린 것이 맞습니다. 단 지파가 처음 받은 땅에는 강력한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단 지파는 이들과 싸워 그 땅을 차지하는 일에 자꾸 실패합니다. 그러자 단 지파는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포기하고, 자신들이 정복하기 쉬운 다른 땅을 찾아 떠나는 결정을 내립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사사기로도 이어지는데, 결국 그들의 이러한 모습은 그 이후의 삶에도 이어져서,

단 지파는 이스라엘 가운데 가장 먼저 우상숭배에 빠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선택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갈렙과 단 지파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갈렙은 헤브론의 강력한 아낙자손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낙자손의 존재는 분명히 엄청난 장애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자기에 대한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장애물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으로 살아냈습니다. 반면 단 지파는 강력한 적군인 블레셋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여 도전을 포기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떠나 쉽게 정복할 수 있는 라이스로 갔습니다. 믿음의 반대는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가진 두려움은 그들로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게 했습니다. 그들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선택은 하나님을 점점 떠나서 끝내 영적 타락으로 이어지는 잘못된 선택이 됩니다. 결국 단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타락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며 권면합니다. 여호수아서의 후반부에 나오는 땅 분배 이야기는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적 기록이 아닙니다. 지리와 경계선에 대한 기록은 더더욱 아닙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이 안에는 매우 중요한 영적 교훈들이 담겨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필요합니다. 내가 왜 한국에 살고 있고, 내가 왜 이 교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고, 내가 왜 지금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내 존재의 의미와 이유에 대해서 질문해 볼 수는 있으나, 자칫 그 질문이 나를 더 나은 삶으로 이끌고 가지는 못할 때도 많습니다. 5달란트 가진 자를 보면서

“나는 왜 1달란트만 주셨나요?” 묻는 것에, 내 인생의 많은 것을 쏟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 질문으로 바꿀 수도 없는 것인데 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꿔보시는 것이 어떨까요? “주님, 혹시 제 삶의 자리에서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질문해야 우리는 내 삶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천은 단순해야 합니다. 이제 하루를 시작하며 나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찾아보십시오. 감사할 수

있다면 이제 그 환경을 받아들이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따라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셨다”는 신앙의 고백은 옳지만, 자칫 그 고백 뒤로 나를 숨겨서 내 삶의 실천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그런 분들은 갈렙을 더욱 묵상해 주십시오. 그는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주님의 일하심에 동참하고 싶어 합니다. 그는 가장 어려운 일에 먼저 믿음으로 반응하여 모든 이들의 본이 됩니다. 그는 세상 앞에 철들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성실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그런 사람을 찾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손에 손잡고 나아갈 믿음의 사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에는 교회와 삶이라는 두 개의 현장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주님께서 내가 해야 할 일로 보여주시는 것들이 있다면, 주저하지 마십시오. 내가 힘이 약하다고 내가 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 빠진다면 그것은 ‘단 지파’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갈렙과 단 지파의 차이는 가진 힘이 아니라, 의지하는

대상의 차이였습니다. 갈렙이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라는 믿음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선택의 순간을 맞습니다. 믿음으로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두려움으로 타협할 것인가? 갈렙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끝까지 붙잡고 도전합시다. 단 지파의 길을 가지 말고, 하나님의 뜻 안에 머무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