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마태복음 3장 / 강정규 목사

2025-01-24 · 마태복음 3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가 최근에 봤던 말라기는 구약의 가장 마지막 예언서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예언이 담겨 있었습니다.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메시아가 와서 통치할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간절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하게 메시아가 오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 이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구약에서도 결국 페르시아의 속국이 되어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가 간절했고, 구약과 신약 사이에 헬라의 지배를 받다가 잠시 100년간 독립을 했던 시기에 많은 사람이 그 독립 영웅을 메시아로 칭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로마에 의해서 이스라엘 땅은 지배를 받게 되었죠. 신약시대의 사람들은 그러므로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아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어떤 모습으로 오는 것인지를 알 수는 없었습니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은 있지만, 외적인 표징이나 정보는 없었죠. 그러나 그

중요한 단서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주어진 ‘엘리야’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오면, 메시아가 온다는 것의 준비 사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의 사람들은 조금만 특별한 사람이 등장하면 ‘저가 엘리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장면이 있죠?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마 16:14)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때도 누군가는 예수님이

‘엘리야’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안에서 예수님은 명확하게 엘리야가 누구였는지를 드러내십니다. (마 11: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누가 엘리야라고 말씀하십니까?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변화산 사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 17:10)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마 17:13)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예수님보다 조금 먼저 와서 사역했던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는 것은 명확하게

우리에게 어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이죠. 이 관점을 갖고 오늘 마태복음 3장을 읽어보겠습니다. (마 3: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서, 유대 광야에서 선포하여 (마 3:2) 말하기를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였다. (마 3:3) 이 사람을 두고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가 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하여라.'" (마 3:4)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었다. 그의 식물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요한은 예언자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고 그대로 선포하는 예언자입니다. 예언자는 자신이 전하는 예언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부는 이해했으나 모든 의미와 궁극적인 성취까지 완전히 알지는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세례 요한에게 주신 메시지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앞서 엘리야의 역할은 무엇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죠? 메시아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와 하나님 나라는 매우 긴밀한 연결을 갖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 실현되고, 메시아의 사역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교회 성도님들이라면, 천국이 단순히 죽어서 가는 곳을 의미하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를 하늘나라(천국)로 바꿔서 표현한 방식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언급하고 있는 천국의 더 정확한 표현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죽은 후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늘 말씀처럼 이 세상에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서요. 메시아에 의해서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임재가 온전히 이 땅에 이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가 오기 전까지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매개자를 통해 간접적인 통치를 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가 임한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 없이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할 수 없고, 메시아 사역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아는 신약의 언어인 헬라어로 바꾸면 그리스도이죠. 즉,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오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이 통치를 세례 요한이 먼저 선포하는 것입니다.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언자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복장이 특이합니다. 그는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을

보면, 이 모습은 엘리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왕하 1:8) 그들이 왕에게 대답하였다.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는 분명히 디셉 사람 엘리야다" 하고 외쳤다. 마태복음뿐 아니라 누가복음도 명시적으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눅 1:17) 그는 또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님보다 앞서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아오게 하고 거역하는 자들을 의인의 지혜의 길로 돌아서게 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가 된 백성을 마련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엘리야의 영적 사명을 이어받은 자로 말라기 이후 400년의 침묵을 깨고 하나님이 사용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신약에 등장하지만, 세례 요한을 성경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라고 표현합니다. (마 11:13) 모든 예언자와 율법서는, 요한에 이르기까지, 하늘 나라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세례 요한은 단순히 메시아를 준비하는 사인이었는가? 아닙니다. 그가 감당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회개’에 대한 촉구였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는 요단강에서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일종의 세레모니죠. 그런데 이것은 이전의 유대교 전통에 없던 것이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죄를 씻어내어 정결하게 하기 위한 정결 예식의 도구로 물을 사용했습니다. 주로 성전에 나아가기 전에 행했습니다. 이것은 신체적 정결, 의식적 정결을 위한 것이었죠. 요한이 베푼 회개의 세례와 정결례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결 예식은 반복적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담은 결정적인 돌이킴에 대한 고백을 강조한 것으로 단 한 번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촉구하는 회개는 정확히 말하면 무엇입니까? ‘회심’입니다. 예수님이 후에 베드로에게 ‘한번 씻은 것을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라고 말씀하시죠. 이것이 바로 요한의 세례가 가진 의미입니다. 죄에 거하던 삶을 씻어내고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심의 고백을 담은 것이죠. 회심한 자는 그 삶을 그 고백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회심의 고백을 믿지 못하고 계속 확인하려고 어떤 예식에 참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말씀을 보면, 회심에 대한 고백을 세레모니로 해 주니, 이에 참여해서 그것을 경험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 3:5) 그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부근 사람들이 다 요한에게로 나아가서, (마 3:6)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며,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저도 한 번쯤은 강이나, 하다못해 침례탕을 만들어서

거기서 세례가 아니라 물속에 풍덩 잠기는 침례를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정말 내가 물에 푹 잠기어 나의 옛사람은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그 경험. 그러니까 교회에서 어떤 의식을 통해 그 안에 깊은 신학적 의미를 체험하게 하는 것은 때로는 중요한 것입니다. 자아가 센 사람은 한 3초 더 물속에 넣었다가 빼주고. 그런데 이때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뼛속까지 종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종교적으로

하는 것은 뭐든지 형식적으로나마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죠. 지금도 종교의 형식만 채우려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배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예배 안에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기보다 의무와 습관으로 앉았다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죠. 기도로 하나님과 대화를 하기보다 종교적 행위의 일환으로 중언부언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봉사활동을 하거나 교회 내의 직책을 맡는 것으로 자기 자랑이나 자아 표현의 기회로 삼는 것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중심

없는 모습으로 세례를 받으러 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본 요한의 반응이 어땠는지 아십니까? (마 3:7)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마 3:8)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마 3:9)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마 3:10)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를 제가 요즘 말로 표현하면, 논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들에게 요한은 쌍욕을 날리고, 그들의 위선을 꼬집습니다. “회개의 예식에 참여만 하려고 하지 말고 제발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기에 언약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또한 오늘날 우리도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자기가 유명한 목사님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을 굳이 굳이 설명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크고 유명한 교회에 다니는 것이 자기 신앙의 보증이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가 서울 OOO교회 집사입니다.” 유대인들은 “저기 아브라함 아시죠? 제가 그 후손입니다.” 세례 요한은 상남자죠.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도 아브라함 자손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도끼로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실 것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회심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정성’임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 진실한 고백과 새로운 삶에 대한 결단이 있으면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풀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보험을 들 듯이 그런 마음으로 온 사람들은 크게 꾸짖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강조하듯 복음을 잘 알고 회심하는 것이 너무 중요해요. 이것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주

솔직히 말하면, 우리의 회심의 고백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은 가만히 있다고 되지 않습니다. 우리 안의 자기중심성을 부인하는 것이 쉽지 않아요. 가룟 유다가 회심 안 했을까요? 저는 유다도 신앙이 분명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열두 제자로 뽑았다는 것은, 그리고 그에게 재정을 맡겼다는 것은 그에게도 좋은 신앙의 모습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도 예수님을 따르면서 회심의 경험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도 예수님의 메시지와 하나님 나라를 믿고 따르려고 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변질했죠? 이유가 뭘까요? 자신의 기대와 예수님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심했다는 것은 나를 꺾어서 내가 예수님의 방향에 맞추어가는 일을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더 중요했어요.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도 계속 불만이 쌓여갑니다. “왜 이걸 꼭 이렇게 해야 해. 왜 이렇게 안 하시지? 이게 더 옳은 것 아닌가?” 결국 그는 예수님을 곁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예수님 앞에서 자기 뜻을 꺾는 일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유다가 될 가능성이 없을까요? 저는 목회를 하면 할수록 교회는 정말 신비로운 곳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하면, 제가 보기에 100명이 모이면 100명의 생각이 다 다릅니다. 그중에 교회가 하나를 선택하면 99명은 ‘왜 그렇게 해?’라고 말하게 되겠죠. ‘내 생각에는 이렇게 해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올 수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기본적으로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하다못해

팸에서 작은 것 하나를 결정하는 일조차 그럴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하겠습니다.” 말하면,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왜 꼭 그걸 해야 해요?” 저는 교회만큼 자기주장을 하기 쉬운 곳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는 반드시 회심공동체가 되지 않으면, 그리고 그 고백 앞에 날마다 자기를 세우는 사람이 많지 않으면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부터, 성도 한 사람 한 사람. 우리가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 뜻과 달라도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뜻을 향해 99명이 맞추고자 애쓰고 있을 때, 저는 그것이 회심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목회와 목양은 안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것이 된다면, 그것은 성령이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가 목회를 8년 하면서 가장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한 순간도 주를 의지하지 않으면 실패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제가 어제도 풍삶기를 했는데, 이렇게 적혀 있던 문구가 떠오릅니다. “회심한 자가 넘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이 교만이다.”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이 예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으면 결코 나를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자기 욕망이 강해지기도 합니다. 왜 그럴까요?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 뜻을 내려놓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을 관철시키려고 애쓰는 시간으로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자기중심성이 더 강해집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나를 비워내고 주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핵심은 나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주께 정직하게 쏟아놓으십시오. 그러나 쏟은 그 자리에 당신의 뜻을 채우실 하나님을 묵상하십시오. 내 주변환경과 사람을 내 뜻에 맞게 바꾸려는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끝날 때는 결국 하나님 앞에서 내가 바뀌어 나오는 것이 기도의 신비입니다. 억지로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 가운데 나를 위로하시고 설득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인격적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늘도 그분 앞에

서십시오. 저는 올해 여러분의 기도가 깊어지길 바라요. 기도가 깊어지려면 우선 엉덩이가 좀 무거워져야 합니다. 사람들과의 교제는 좀 줄이셔도 됩니다. 적어도 저는 금요기도회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깊은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요단강. 하나님 나라에 대한 메시지와 회개가 선포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통해 새로운 결단을 하던 그곳. 오늘 이 요한의 세례 현장에 누가 오십니까? 예수님이 오십니다. 더 나아가 세례를 요청하십니다. (마 3:13) 그 때에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으로 요한을 찾아가셨다. (마 3:14) 그러나 요한은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말렸다. (마 3:15)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은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옳습니다." 그제서야 요한이 허락하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이 남죠. 예수님도 회심이 필요했을까요? 예수님은 ‘회개’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와 동일하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인간이신 예수님이 따르는 것이고, 그 도구로 세워진 요한의 귄위를 존중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힘이 없어서 겸손한 것은 진짜 겸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존재가 무엇인지 알고, 자기 능력이 무엇인지 아는데도 그것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에서도 마찬가지였죠. 그리고 요한에게 찾아가서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 세례를 요청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보이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러분은 주님의

겸손을 닮아가고 계십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나를 알아주지 않으면 서운하고, 나를 누가 무시하는 것 같으면 화가 나고, 입으로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지만, 주님의 그림자도 못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본성일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든 대접을 받고, 어떻게든 존중을 받고, 어떻게든 인정을 받으려는 마음이 우리 안에는 가득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의 어떤 모습을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까?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광야의 외치는 소리일 뿐이다. 나는 주님의 신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에게 세례를 요청했을 때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께 세례를 받아야죠. 어떻게 당신이 내게 오셨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에 대하여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말합니다. 그는 겸손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입니다. 회심에 관한 세레모니가 세례라면,

회심의 영적 날인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성령님은 회심한 자들에게 임재하시는 것입니다. 회심하기 전의 사람 안에 거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의 세례를 통해 성령이 임합니다. 성령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분의 메시아 사역도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마 3: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예수님도 세례에 참여하시고, 예수님도 성령의 임재함 가운데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셨다면, 우리가 어찌 다른 힘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에게는 놀라운 신비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약함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점점 나의 약함을 드러내기보다 자신감을 드러내고 자기 주도적인 태도를 보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그것이 다 허세입니다.

내가 얼마나 약한지 고백하는 것은 사실 내가 약함으로 느끼는 그 부분만큼 하나님이 내 안에 일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약함이 곧 강함입니다. 성령이 내게 오셔도 내가 강한 상태로는 그분이 일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강합니까? 우리는 하나도 강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는 더 공격받고 피해를 보기 때문에 우리를 지키겠다고 우리도 강한척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약합니다. 그리고

약해도 됩니다. 저는 주님이 왜 우리와같이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맡기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끝까지 자신은 약하고 하나님이 강함을 인정하는 사람만 주님과 동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예배 안에서 몇 가지를 결단하며 나아갑시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의 ‘왕’과 ‘주’이심을 고백합시다. 회심의 고백을 다시 하나님께 올려드립시다. 둘째, 세례가 의미하듯 옛사람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고백합시다. 나의 죄 된

본성을 부인하며 거듭남을 고백합시다. 셋째,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삶을 결단합시다. 내가 정말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야 할 부분을 결단합시다. 넷째, 겸손하신 주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그 겸손을 본받읍시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쓰시지 않습니다. 다섯째, 우리의 약함을 성령님 앞에 고백하며, 우리의 약함이 주의 강함의 자리로 바뀔 수 있기를 기대합시다. 오늘 이런 고백과 기도로 나아갈 때, 주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