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 요한서신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요한일이삼서의 배경이 이단의 공격으로 인해 분열과 위기를 경험한 초대교회 공동체의 이야기였음을 나눴습니다. 특별히 복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복음,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여 단순한 뛰어난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던가, 아니면 인성을 부인하여 우리와는 다른 비인격적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것이 초대교회 이단의 특징이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의 이단으로는 ‘영지주의’가 가장 유명한데,
영적인 것만이 선하고 위대하며, 물질적이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는 이원론적 사고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상의 위험성은 사상 자체보다 그것이 가져오는 삶의 파급력이 문제입니다. 영지주의는 육적인 것이 악하므로 그것이 철저히 통제하여야 한다는 금욕주의와 혹은 정반대로 육적인 것은 중요하지 않으므로 자유롭게 살아도 된다는 자유방임주의로 나타나곤 했습니다. 실제로 신약성경의 상당히 많은 부분은 이러한 이단의 잘못된 가르침 속에서 기독교 진리를 제대로 알려주기 위해 기록된
부분이 많습니다. 요한서신 또한 그런 것이죠. 우리는 이 책의 저자를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있었던 사도요한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복음을 전수하여 아름답게 세워진 교회가 거짓된 진리 가운데 휘청거리고, 그 안에 분열이 생겨서 갈라지고, 떨어져 나가는 모습을 보니 얼마나 아픔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남아 있는 교인들을 위한 목회적 권면으로 요한서신을 쓰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 지난 설교에서 주목했던 이야기는 사도요한의 가르침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마지막 시간을 보내며 전하셨던 이야기, 즉 요한복음 13~17장에 나타나는 최후의 만찬에서 가르치신 내용에 기초한다는 점입니다. 그 마지막 가르침의 키워드는 2개였습니다. ‘사랑’과 ‘성령’이었죠. 언제나 메시지는 메신저가 메시지에 합당한 삶을 살 때 힘이 있습니다. 요한의 젊은 시절에 별명이 뭐였는지 기억하십니까? ‘토르’였습니다. 천둥의 아들. 보아너게. 성격이 급하고, 감정적이고, 욱하고. 그의 그런 모습이 오히려 제자공동체 안에서 분열을
일으키거나, 관계적인 어려움을 가져오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가르침처럼, 회심한 후 성령 안에서 변화되다 보니, 사랑의 사도가 되어 있는 것이죠. 그런 그가 전하는 메시지가 요한일서이니 그 진실함이 더욱 느껴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성령 안에서 다듬어진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모범적인 신앙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짜 믿는다면, 그분 안에서 삶이 변화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유가 있다면, 우리의 결심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돕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들어와 사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2018년에 했던 설교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맘몬주의와 이기주의가 압도하는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돈보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으며, 이웃을 나를 사랑하듯 사랑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사업가로서 부당한 이득 취하기를 거부하고, 좋은 상품을 만들어 다수의 삶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공무원으로서 뇌물과 잠깐의 이익이 되는 결정을
거절하고, 공정하고 능률적인 행정으로 시민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 살인적인 경쟁의 시대에 상사에게 나를 모함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는 동료에 대해 복수하지 않고 도리어 사랑하며 기다릴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이런 것을 도저히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나한테 해코지한 사람을 한 번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명령은 그런 사람을 일곱 번씩 일흔 번, 그러니까 무한히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상황에서 용서하려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성령께서 마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런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성령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고, 그것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설교를 통해서, 말씀 묵상을 통해서, 주 안에서 사귄 형제들의 권면을 통해서, 좋은 책을 통해서, 음악이나 미술을 통해서,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로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귀를 기울이고 살면서, 선택의 순간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더욱 민감히 헤아리며, 그것에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회심한 자들에게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것이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사람, 무엇보다 그 성령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변화가 없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물론 변화의 속도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회심은 대체로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을 비롯한 11명의 제자들은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입니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서 다듬어져 갔기 때문입니다. 요한서신을 읽으면서 영지주의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는 마치 그 시대에만 그런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경계하는 이단의 가르침을 보면 우리에게도 고민이 필요합니다. 말씀 몇 부분을 살펴봅시다. (요일 1:8)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자기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입니다. (요일 1:10) 우리가 죄를 지은 일이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합니다. 이단들은 자기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죄라는 범주가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요일 2:4)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요일 2: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깝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삶은 그리스도의 성품이나 계명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요일 2:9)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습니다. (요일 4: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형제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 오늘날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없을까요? 교회에 와 있으나, 나는 죄인이 아닌 것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그리스도가 명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없을까요? 요한일서는 지금 그런 사람들이 복음에 합당하지 못한 사람들,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지금 시대에도 상당히 많은 교회 안에 속한 사람들이
겉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쩌면 상당한 사람들은 그 단계에서부터 서서히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우리가 간혹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이미 다 끝난 문제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어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사람을 연구해보니, 크게 이렇게 나눠볼 수 있습니다. 1) 교회 밖 (무신론자 / 유신론자 / 가나안 성도) 2) 교회 안 (회심 전 단계 / 회심을 잃어버린 자 / 회심하여 자라가는 자) 무신론자 →
유신론자 가나안 성도 → 교회 안에 속한 자 회심 전 탐구자 & 회심을 잃어버린 자 → 회심자 교회 안에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회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태신앙으로 특별한 결단 없이 신앙생활을 쭉 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다 미회심자입니다. 있는 것은 당연한데, 그들의 변화를 돕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반응하여 주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하고, 그분과의 인격적 교제를
누리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모태신앙이 아닌 분들은 어떤 이유로 교회에 오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들어온 것인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것인지 우리는 잘 점검해봐야 합니다. 당연히 어느 순간까지는 진정한 회심을 하지 않고 교회에 머물게 됩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렇게 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어쩌면 누가 회심했고 안 했는지 정확히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네 가지 밭의 비유처럼 이것은 엄연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길가처럼 말씀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지만, 어느 하나도 마음에 담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상태에 있을 것입니다. 빨리 도움을 줘야 하고, 스스로도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돌밭처럼 말씀이 들어가지만, 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세상에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만 늘 은혜를 받고 삶은 변하지 않죠. 누군가는 가시덤불처럼 변화하는 모습까지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단이 자꾸 세상에서 경험하는 유혹과 핍박 앞에 무너지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공급받아 마음에 잘 새기고, 삶으로 잘 연결하고, 그 말씀으로 유혹과 핍박, 시험과 고난을 잘 이겨내야 좋은 땅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늘 이런 진리의 말씀을 우리는 보고 듣고 대하지만, 말씀은 말씀으로 삶은 삶으로, 살아가는 종교인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연히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회가 영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요한서신의 그 위기의 교회가 우리와 무관한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 시대의 교회와 이 시대의
목회자와 이 시대의 성도들이 마주하는 신앙적 상황이 결코 요한서신의 그때보다 평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복음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면 괜찮아요. 진리를 잘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돕는 것이 교회의 존재 이유고 우리가 공동체로 존재하는 이유니까요. 그러나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아무리 들어도 자기의 생각과 방식을 바꾸지 않는 태도는 문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시대에도 심각한 복음의 왜곡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적 동의가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표현이 있는데, ‘예수를 믿지만, 예수를 따르지는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지만, 주인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따르지 않는 사람이나,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회심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요즘에 회심에 대해서 다시 공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식
때문입니다. 제가 개척 후 세례 주는 것을 아껴왔습니다. 이유는 기본적으로 이미 교인 가운데 세례를 받으신 분들도 많고, 우리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세례는 정말 바르게 주고 싶어서 그런 때를 기다려왔어요. 세례는 우리에게 있어서는 결혼식과 같은 시간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거든요. 잘 주고 싶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례를 형식적으로 경험하죠. 세례는 회심을 한 사람들이 그 결단을 공동체 앞에서 선언하면서, 이제 나는 정말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결혼식에 버금가는 것이고, 우리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 복음을 듣고 자라서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에게 그 영혼이 세례를 받는 것은 돌잔치와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안에,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최근에서야 비로소 진정한 회심을 한 것 같다고 느끼시는 분은, 세례를 다시 공부하고 세례를 받을 필요도 있다고 느껴요. 저에게 회심의 중요성을 배우고, 세례를 다시 받아도 되냐고 묻는 분들이 종종 있는데, 자신이
진정한 회심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저는 다시 세례를 베풀 마음이 있습니다. 그 결단을 잘 지켜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반드시 교육이 동반됩니다. 왜 하는지 아세요? 회심을 점검해야 하거든요.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면, 그것은 제가 관대한 것이 아니라, 목양을 잘 못 하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자칫 미회심 상태에 대한 면죄부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회심한 이후의 죄에 대한 이해입니다. 회심 후에 죄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죄를 짓습니다. 사탄은 진짜 거짓말의 달인입니다. 그의 유일한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멀어지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회심하기 전까지는 우리에게 이렇게 꼬십니다. ‘뭘 하려고 그래, 그냥 지금 삶이 괜찮아. 유난스럽게 살지 마. 변하는 것은 없어.’ 그런데 회심한 이후에는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지금 네 모습을 봐. 네가 회심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 역시 예수를 믿는 것은 너랑 안 어울려. 너는 그렇게 못 살아. 포기해.’ 회심해도 죄를 짓습니다. 죄가 뭔가 유난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자기중심성임을 이해한다면, 회심한 이후에도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3가지입니다. 첫째, 약해서. 아직 주님을 따르는 삶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질 수 있어요. 넘어짐이 줄어들 것입니다. 방향이 바뀌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둘째, 과거의 습관
때문에. 과거부터 이어진 나의 삶의 습관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죄를 짓는 경우가 있죠. 이것은 계속 싸워나가면서 떨쳐내는 것이죠. 셋째, 의지적으로 짓는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된 삶을 거부하고,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첫째, 둘째는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상태는 적어도 죄 때문에 괴로운 상태입니다. 주님을 따르고 싶지만 잘 안 돼서 괴로운 상태이죠. 이것은 회심 이후에도 세례 이후에도 나타날 수 있고, 계속 성령을 의지하면서 나아가면 됩니다.
지속적인 변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계속 말씀을 먹고 결단하면 점진적으로 변해가고 성숙해져가며 죄와 멀어집니다. 그러나 세 번째 의지적인 죄를 짓는 상태에 아직 있다면 세례를 줄 수도 없고, 회심한 이후에도 이 상태에 빠지면 다시 회심 전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배웠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에 나오는 이단들도 자신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고, 하나님을 알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또한 빛 가운데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은 거짓된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보시죠. (요일 2:4)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그 사람 속에는 진리가 없습니다. (요일 2:5) 그러나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속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참으로 완성됩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음을 압니다. (요일 2:6)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아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인정하는 것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지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회심에는 당연히 알아가는 과정이 선행됩니다. 알지 않고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알지 못하는 신을 믿을 수도 사랑할 수도 없어요. 그건 말 그대로 덮어놓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행이기 때문입니다. 즉, 알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어떠한 앎의 노력, 삶의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는 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알아도 따르지 않는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래요.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은,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그분의 말씀 안에, 그분의 성령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속 강조하는 것은 아직 그것을 누리지 못하는 분들을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고, 스스로 신앙을 잘 점검하여 나에게 변화가 필요한 부분을 깨닫고 함께 돕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교회 안에 신앙적 도움이 필요한 분들을 도울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돕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스스로 그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정이기 때문입니다. 갈망함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설교
안에서 여러분의 신앙을 잘 점검해주십시오. 신앙생활을 수십 년을 해도, 겉에서만 맴돌 뿐, 단 한 번도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에 그저 신앙생활이 그런 것으로 착각하며 살기도 합니다. 가장 안타까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 모두가 진짜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돕고 서로를 붙잡아 주고 일으켜 세워주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서, 우리에게 맡기신
영혼들을 잘 지켜내야 합니다. 요한의 이 서신을 받는 대상은 교회 공동체 안에 남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이 어떠했을까요? 그들 중 누군가는 교회의 분열로 인해 상처가 남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관계에 대한 공허함이 남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교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진리가 무엇인지 고민에 빠졌을 테지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어떠한 사건 앞에서 종종 그러하듯 말입니다. 요한은 그러한 독자들을 위해 이 편지를 쓰면서 그들을 격려하고 안정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는 거짓된 가르침들을 바로 잡고, 성도들에게 참된 복음과 진리를 다시 전해주어 그들이 그 진리를 붙들고 일어설 수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두 가지 속성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하나님은 빛이시다’ 입니다. (요일 1:5)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들어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요, 하나님 안에는 어둠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어두움이 틈타고, 각자의 마음에 어두움이
틈타는 일이 있을지 모르나, 우리가 그 상황에서도 빛이신 주님께 나아가면 빛이 우리의 모든 어두움을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빛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이런 모습이 상상됩니다. 마치 식물이 그 빛을 받으며 생명으로 피어나듯이, 내가 그 빛을 벗어나 살면 시들고 내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그 빛 가운데 나아가면 다시 힘을 얻고 살아나는 모습 말입니다. (요일 2:8) 나는 다시 여러분에게 새 계명을 써 보냅니다. 이 새 계명은 하나님께도
참되고 여러분에게도 참됩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혹시 어둠 가운데 이 예배로 나오신 분이 있습니까? 저는 오늘 예배를 포기하지 않고 이 예배에 참여한 여러분이 정말 잘하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에게 그 마음을 주신 분도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님이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 안에서 그 빛 앞에 여러분을 내어드려 보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회복과 치유가 그분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요한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두 번째 키워드는 이것이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요일 4:8)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십니다. 저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금 떼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분여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사랑을 맛보고 사랑의 감정을 알아야지만, 하나님의
더욱 완전한 사랑을 소망하고 그분께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세상에 사랑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고, 사람은 사랑받을 때 행복함을 느낍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필요하다는 점이, 저는 우리가 가진 복음이 어느 시대에나 복음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복음이 세상에 만연한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 속한 사람들에게 사랑을 갈망할수록 더욱 비참해진다는 현실로
답을 주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이 땅에 아들을 보내어주심으로 드러났고, 그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성령께서 거하시며 사랑으로 채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왔기에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랑을 추구하며 절망의 벽에 가로막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예전에 많이 불렀던 찬양의 가사가 이렇죠. 날 사랑하신 주님의 그 큰 사랑으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나의 힘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없네 나의 가진 모든 것으로 당신을 축복할 수 없지만 주님이 주신 크고도 놀라우신 그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을 축복합니다 나의 힘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느끼기에 사람들은 사랑을 원하지만 동시에 사랑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사랑하려고 다가설수록 그 마음을 정직하게 돌려받지 못한 경험들 때문입니다. 상처받고 배신당하고 미련한 자 취급받는 것이 깨어진 세상의
실상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 깨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이 취하는 방법은 담을 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행복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는 깨어진 세상의 생존방식일 뿐입니다. 그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움받은 사람이 넘어져도 쓰러져도 계속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깨어진 세상의 그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내 안에 마르지 않는 생수와 같은 사랑이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진 절망과 두려움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준 만큼 돌려받지 못해서 내 마음이 고갈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며 받는 사랑은 우리의 모든 공허와 깨어짐의 틈을 다 메우고 남습니다. 이유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사랑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채움 받은 사람이 깨어진 세상이 주는 절망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행할 수 있는 것이며,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통해 세상을 회복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결국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사랑은 내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하면 끝까지 할 수도 없고, 반응이 오지 않을 때는 사랑이 미움으로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He First. 그가 먼저.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무엇을 하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약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고 뭔가를 요구하신다면 저는 착취의 하나님이지,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주셨고, 지금도 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초대교회에 있었던 이단의 공격, 거짓 복음이 지금 교회 안에도 있습니다. 복음과 삶을 분리시키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따르는 것을 분리시켜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변화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사탄의 전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 안에 존재하는 거짓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진리를 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나의 회심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가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내가 그분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고백할 수 있고, 그분이 주인 된 삶을 살며, 그분 안에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회심은 방향의 전환입니다. 진짜 내 방향이 하나님께로 향했는지 자신을 잘 돌아보고, 너무 늦지 않게 내 마음을 결단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먼저 주십니다. 하나님은 회심한 이후에도 우리 힘으로 그리스도를 따라 살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성령을 보내어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도록 돕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사랑하라고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며 그 사랑으로 우리를 회복하셔서 우리가 그분이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시는 분입니다. (요일 5:14)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지는 담대함은 이것이니, 곧 무엇이든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요일 5: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청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 것들은 우리가 받는다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뜻 가운데 구하면,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성령님, 제 안에서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제가 당신을 듣고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사랑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 사랑으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저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오늘도 이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사랑과 성령의 동행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