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 대한 두 번째 설교 시간입니다. 지난주에는 교회와 사역에 대해 설교를 했기에, 한 주간의 공백이 생기면서 전도서의 내용을 잃어버리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첫 설교를 잠시 요약하고 되새긴 후, 오늘의 말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는 ‘코헬렛’이라고 불리는 전도자의 목소리가 주인공입니다. 코헬렛의 이야기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로 저자(화자)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저자는 전도서의 처음(1:1-11)과
마지막(12:9-14)에 등장합니다. 그는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는 코헬렛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그 분투 가운데 어떻게 진정한 해결책에 이를 수 있는지 말하고자 합니다. 전도서의 가장 중요한 단어는 헤벨입니다. 헤벨은 연기, 수증기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성경은 ‘헛됨’이라고 표현하지만 단순히 헛되다는 것보다는 연기와 수증기가 잡을 수도 없고 모양이 계속 변하는 것처럼, 인생이 수수께끼 같다고 말합니다. 삶 자체가 뭐라 한마디로
설명하기 어려운 속성임을 부각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전도서는 인생이 답이 없다고 말하거나, 단순한 허무함 뿐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헛되니 고민하지 말고, 골치 아파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찰해보라고 말하는 것이죠. 세상적으로 성공한 왕이나 부자라도, 예외 없이 그 복잡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하고, 인생은 우리가 잡을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헤벨이라는 표현 안에 담긴 함축적 의미입니다. 코헬렛은 인생의 경험이 많은
지혜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끊임없이 성찰하며 나름의 교훈을 정리하였습니다. 그가 하고 싶은 요지는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의 기준들로서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원하던 것을 다 얻어도, 누리고 싶은 만큼 다 누려도, 하는 일마다 자랑스러운 성취를 얻어도 그는 공허합니다. 그 모든 발걸음이 바람을 잡으려는 시도와 같음을 깨닫습니다.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곤 하는 ‘돈’에 대한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아도 만족할 수
없으며, 오히려 돈을 추구하는 태도가 그 인생을 망가뜨리게 함을 깨닫고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인류는 진보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이 ‘헤벨’이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삶은 ‘헤벨’이라는 것이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헤벨을 극복하는 힘이 우리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인생이 헤벨이라는 전도자의 말에 동의가 된다면,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삶을 대하는 태도와 다른 새로운 모습이 필요하다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나눈 첫 번째 메시지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구조를 이해하시겠지만, 한번 더 정리하면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A. 서론(1:1-11) : 삶은 헤벨이다. B. 본론 (1:12-12:8) : 삶의 여러 헤벨의 요소들. A’ 결론(12:9-14) : 가장 의미있는 삶. 코헬렛의 목소리가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주체는 저자이며, 그는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해 코헬렛이 말한 모든 것을 평가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저자는 우리가 코헬렛의 깨달음을 잘 들은 후, 인생에 대해 성찰하며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돈과 재물을 얻기 위한 인생이 헤벨이라는 이야기가 지난 설교의 키워드였다면, 그 외에도 전도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헤벨의 여러 주제들이 있습니다. 코헬렛은 지혜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지혜도 헤벨이다. 분명 지혜는 미련함보다 낫고, 사람을 위기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새로운 지혜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표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이 여기에 등장하는 것이죠. 또한 지혜가 많으면 오히려 번뇌와 근심도 많습니다. 또한 지혜와 지식을 구하는 것은 몸을 혹사하고 건강을 상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단순해야 하는데, 너무 지혜로운 것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정적으로 아무리 뛰어난 지혜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지혜자나 미련한 자나
죽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전 2:16) 사람이 지혜가 있다고 해서 오래 기억되는 것도 아니다. 지혜가 있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린다. 슬기로운 사람도 죽고 어리석은 사람도 죽는다. 또한 세상의 노동과 수고도 허무합니다. 노동을 통해 삶의 성취를 이루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노동을 많이 하는 것은 그만큼 몸과 마음이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삶이 스트레스입니다. 또한 수고한 삶을 통해 많은 업적과 성취를
얻게 되는 만큼 다른 사람의 시기와 질투도 커집니다. 그리고 노동과 수고로 탁월한 삶의 성취를 이룬다 해도, 죽고 나면 그 열매는 어떤 누군가가 다 갖게 될 것인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일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1세대 경영인, 1세대 목회자가 뛰어나도 그다음에 누가 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다 무너져버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연 그들이 여러분의 그 수고에 대해 얼마나 기억할까요? 아시다시피 많은 유산을 남겼다고 해서, 그것이 후손의 삶에
꼭 바람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 경우도 많습니다. 정의도 때론 헤벨입니다. 악인에 대한 심판이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도 있으며, 극악한 악인이 이 땅에서 장수하지만,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사악한 사람도 죽고 나면 그의 악행을 사람들이 망각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생에는 우리의 기대와 바람과 다른 너무 많은 예외성이 존재하기에 그 모든 것은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연기와 같고 바람을 잡는 일처럼 인생은 결코 내가 손에 움켜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인생도 헤벨입니다. 결국 늘 새로운 즐거움을 쫓게 되는데, 그 만족의 끝이 없기에 본질적으로 늘 만족을 주지 못하는 삶을 만들어 버립니다.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에서 다뤘던 이 땅의 4가지 거짓된 추구에 대한 교훈을 기억하십니까? 즐거움, 인정, 지위, 재물. 그것들이 우리 삶의 진정한 행복이 될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을 코헬렛은 자신이 깨달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 코헬렛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인생의 교훈입니다. (전 7:14) 좋은 때에는 기뻐하고, 어려운 때에는 생각하여라. 하나님은 좋은 때도 있게 하시고, 나쁜 때도 있게 하신다. 그러기에 사람은 제 앞일을 알지 못한다. (전 7:20) 좋은 일만 하고 잘못을 전혀 저지르지 않는 의인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전 7:21) 남들이 하는 말에 마음을 쓰지 말아라. 자칫하다가는 네 종이 너를 욕하는 것까지 듣게 된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보편적 공감을 하게 됩니다. 코헬렛의
이야기는 모든 인간이 삶에서 경험하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모습이 다 다르지만, 멀리서 보면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다른 자연세계의 피조물에 대해서 그런 감정을 갖습니다. 다 거기서 거기다. 그런데 하늘을 나는 새가 우리를 봐도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어, 사람이다.” 우리는 삶을 각자의 모습대로 치열하게 살지만, 모든 삶이 유한하다는 것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코헬렛은 끊임없이 우리 삶의 그 유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유한성을 두 가지 현상으로 정리합니다. 이는 매우 뛰어난 성찰입니다. 바로 인생이 헤벨인 이유는 ‘시간’과 ‘죽음’의 지배 아래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전도서의 처음(시간의 문제)과 마지막(죽음의 문제)에 등장하며 헤벨의 여러 현상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시간 (1:3-11) 연기다. 한낱 연기다! 모든 것이 연기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한평생 일했건만, 한평생 뼈 빠지게 일했건만 무슨 성과가 있는가? 한 세대가 가고 다음 세대가 와도 변하는
것은 없다. 예부터 있던 지구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돌아간다. 해는 떴다가 지고 다시 떴다가 지기를 되풀이한다. 바람은 남쪽으로 불다가 북쪽으로 불고 돌고 돌며 다시 돈다. 이리 불고 저리 불며 늘 변덕스럽다. 모든 강이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가득 차지 않는다. 강물은 옛날부터 흐르던 곳으로 흐르고 처음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한다. 이미 있던 것이 다시 있을 것이고 이미 벌어진 일이 다시 벌어질 것이다.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누군가
“이봐, 이거 새로운 것이야” 하고 법석을 떨어도 흥분하지 마라. 전부터 듣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세상에서 인류가 행하는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 바뀌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기술을 개발하고, 나라들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산에 올라가 보면 산은 우리의 그런 변화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100년 후, 누구도 우리를 기억하지 않겠지만, 오히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천보산은 삼국시대에도 있었고,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대한민국, 분단,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바뀌고 왕권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늘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많은 것이 바뀌는 것 같지만, 결국 세상은 늘 살아가던 방식을 되풀이하며 살아가는 사람만 바뀔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그렇게 존재한 자연에 비하면 너무 짧은 찰나일 뿐이죠. 그 수많은 세월 동안 자연은 자기의 자리에서 자기의 할 일을 하고 있고, 우리는 그 곁을 잠시 머물다 지나갈 뿐입니다. 죽음(11:7-12:7) 늙으면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힘줄은 늘어지고, 쥐는 힘은 약해지며, 관절은 뻣뻣해진다. 산을 오르는 것은 옛일이 되며, 내리막길을 걷는 일마저 겁이 난다. 머리털은 사과꽃처럼 희어져, 성냥개비처럼 부러질 듯 힘없는 몸을 장식할 뿐이다. 그렇다. 너는 영원한 안식으로 가는 길에 거의 이르렀고, 친구들은 네 장례 계획을 세운다. 근사했던 삶이 조만간 마무리된다. 값지고 아름다운 인생이 끝난다. 몸은 그 출처였던 땅으로 되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불어넣으신 하나님께 되돌아간다.
모두가 연기다. 연기일 뿐이다. 전도자는 모든 것이 연기라고 말한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며 들었던 강의에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사람이 머리가 아무리 좋든 혹은 그렇지 못하든 50대 중후반이 되면 다 거기서 거기다. 기억력이 먹통이 되고 암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이죠. 그리고 60이 넘으면 옛날에 예뻤든 안 예뻤든 거의 비슷해집니다. 그리고 70이 넘으면 사람이 돈이 많든 없든 거의 비슷해집니다. 70이 넘으면 뭘 먹어도 별로 맛이 없고 잠도
잘 안 온대요. 돈이 많아도 그렇대요. 여기까지 보통 얘기하는데 옆에 있던 어떤 분이 한마디 더 하더랍니다. 80이 넘으면 산 자나 죽은 자가 비슷하대요.” 무엇을 말합니까? 죽음 앞에 다가갈수록 우리의 삶은 그 죽음의 영향력 앞에 힘을 못 쓴다는 것입니다. (전 7: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인간의 삶이 많이 다른 듯하지만, 결국 모든 삶이 시간을 거스를 수 없고,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죽음은 지혜롭든 어리석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모두에게 찾아옵니다. 좋은 삶을 살았든, 나쁜 삶을 살았든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 모두 공평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사람은 삶에 대해서 굉장히 냉소주의적이거나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즉,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를 갖는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삶을 진지하게 관찰하면 종종 이런 결론에 도달합니다.
소확행, 욜로(YOLO). 그럼, 과연 성경이 우리 삶이 그런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세상을, 우리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회의적으로 보도록 만들려는 것일까요? 그냥 한번 뿐인 인생에서 작은 행복을 누리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을까요? 우리가 알다시피 ‘죽음’은 죄로 인해 인간에게 주어진 결과입니다. 죽음은 원래 인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이 있기 전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세상에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누리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원래 모습, 어쩔 수 없는 모습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음 아래 창조되지 않았습니다. 사망은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질서 안에 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았을 때, 또한 우리의 어떤 추구가 하나님을 대신하게 된 것이 궁극적 문제입니다. 그 질서가 무너지며 우리가 죽음의 문제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삶이 공허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허한 인생을 우리에게 주시고 ‘보시기에 심히 아름답다’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서가 바로 잡히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법을 배워가고 회복해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하나님이 가르치신 방법으로 우리의 삶에 주어진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사용하고 누리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전 2:24)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전 2:25)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 우리가 세상에서 맛있는 것을 먹고 만족함을 누려도 됩니다. 세상에서 행복을 맛보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오히려 저는 세상 가운데 진짜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밖에 있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입니다. (전 3:13)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우리의 삶 가운데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 바른 질서, 회복된 관계입니다. 우리의 잠재력도, 우리의 은사도 하나님 밖에 있는 상태에서는 진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울의 지식은 회심 이전에도 깊었습니다. 바울의 열정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주인 됨 아래 바르게 사용될 때, 그의 지식은 복음을 전하는 가르치는데 바르게 사용되었으며, 바울의 열정은 영혼을 살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스포츠의 명언이 있죠. 슛은 한 사람을 기쁘게 하고, 어시스트는 두 사람을 기쁘게 한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영광,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한 헌신과 섬김으로 사용되었을 때, 하나님도 기쁘고, 나도 기쁘고, 나를 통해 누군가도 기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위에 올려졌느냐, 안 올려졌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내 인생이 그분의 손안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을
위한 것으로 사용되며, 그 안에 생명력이 불어넣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헤벨, 시간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한없이 작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내재적 한계를 바라보면서, 궁극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인간이 진짜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에 그 답이 있을까? 우리의 시작은 어디일까? 정말 우리는 어느 날 우연한 변이로부터 수많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서 우연히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을까?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내재적 한계를 극복할 답은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보다 크신 분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라면... 그렇다면 그분 안에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지는 않을까요? 정말 성경이 말하는 것처럼, ‘죽음’이 죄로 인해서 우리에게 찾아왔을 뿐, 원래 우리의 것이 아니라면... 그럼 ‘죽음’ 앞에서 나약해지는 우리의 근원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 또한 그분에게 있지 않을까요? 성서학자인 김세윤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인간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원인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그의 무한한 자원을 공급받지 못하고, 우리 자신의 피조물적 내재의 자원에만 갇혀 있게 되어, 그 자원의 유한성, 곧 결핍성에서 오는 갖가지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분리되어 죽음의 권세 아래 놓이게 되면서, 우리에게 모든 고난의 증상들이 생겨났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사탄의 통치 아래에 떨어진
상태, 죽음의 권세 아래에 있는 삶, 바로 이 세상에 속한 삶입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죽음의 권세로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이 겪게 되는 죽음의 증상들이 극복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님의 사명 선언문이라고 말씀드린 누가복음 4장의 나사렛 회당에서의 선포처럼,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 포로 된 사람, 눈먼 사람, 억눌린 사람들로 표현되는 이 세상이 주는 여러 고난과 죽음의 증상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회복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생명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자들도 자신들의 모습으로만 살아갈 때는 한계와 두려움 속에 있었습니다. 불안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고백하고 다짐했지만, 결국 죽음의 위협 앞에서 그분의 곁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라지죠. 제자들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왜요? 그들이 목격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들은
그 사건을 목격한 후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삶에 성령이 동행하고, 세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평안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혹 죽음을 이기신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기 어려운 문제죠. 그러나 성경에서 부활 사건을 생략하고 말씀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 사건 이전과 이후에 그처럼 180도 변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믿기지 않는다면, 부활 이전의 제자들과 부활 이후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다시피 사람은 본래 쉽게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변한다면 그것은 분명 어떤 일이 그 삶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들이 죽음을 이기시고 약속대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능히 사람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변하지만, 우리 밖에서 우리를 감싸는 하나님의 능력은 누구나 변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초월자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전능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이 우주보다 더 크시고 우주 밖에서
계시는 분이어야만 고장 난 이 우주를 고칠 수 있고 병든 인류를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전지전능하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우주적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만든 세계 안으로 찾아오셨을뿐더러, 더 나아가 자신이 만든 피조물 안에 거하시는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구원이 이뤄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한계 안에 있던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하시고, 새로운 존재로서 변화하셔서, 한계를 뛰어넘는 ‘영원’이라는 개념으로 우리를 인도하신 것이죠. 사람들은
내가 이해할 수 없기에 신이 없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전도자는 그것이 지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이 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삶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 궁극적 지혜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진짜 고민해봐야 해요. 과연 우리가 정말 다 알고 있을까요? 우리가 보고 있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 전부일까요? 바닷속 물고기가 인간이 살아가는 법을 어찌 알겠습니까? 하루살이가 내일이 존재하고
한해가 지나감을 어찌 알겠습니까? 과연 우리의 존재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까요? “하나님을 내가 다 이해하면 믿을 테야.” 이런 태도는 애초에 틀렸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하고 터득할 수 있다면, 그는 초월자이기는커녕 우리 인간보다 더 작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우리보다 크신 초월자이고, 전능자이고, 완전한 자여야 제한성과 불완전성 속에서 죽어가는 인류와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은 인간의 이성 안에 담기는 분이 아니라 그 이성으로 터득할 수 없는 분이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그분이 스스로를 우리에게 계시한 만큼 이해할 뿐입니다. 어쩌면 인생은 주어진 시간을 살고 나면 죽음을 맞이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는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성경은 그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실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은 찾아오셔서 그 존재적 한계 이상의 것을 경험하게 하시고, 꿈꾸게 하시며,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다시 이어 주신
것입니다. 땅에 떨어진 가지와 같던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생명이 흐르는 나무에 접붙임 받은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삶 속에서 지혜를 정리한 코헬렛과 저자의 차이입니다. 코헬렛은 지혜롭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의 유한함, 인생의 헤벨, 그 수수께끼와 같은 지혜의 한계성을 깨달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 12:1) 젊을 때에 너는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여라.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 (전 12:2)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두워지기 전에, 먹구름이 곧 비를 몰고 오기 전에, 그렇게 하여라. 인생을 진짜 의미 있는 모습으로 채워가려면, 삶을 정말 소중한 시간으로 흔적을 남기려면,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평범해지고 평등해지는 삶을 깨달으며, 그는 삶 너머에 있는 존재를 기억해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는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단순히 죽음 앞에 평등해지는 삶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서 완전히 구별된
삶을 만나게 될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코헬렛의 깨달음은 귀하지만, 성경의 진리는 그 이상을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의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저자는 12장 9절부터 이렇게 결론적 권면을 합니다. 전도자는 지혜로웠고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따져 보고 검토하고 정리했다. 전도자는 옳은 말을 찾아 알기 쉬운 진리로 기록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지혜로운 이의 말은 우리에게 제대로 살라고 촉구한다. 그 말은 잘 박힌
못처럼 인생을 붙들어 준다. 그것은 한 분 목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도 하다. 친구여, 이 밖의 것에 대해서는 너무 무리해서 연구하지 마라. 책을 출판하는 일은 끝이 없고, 공부만 하다 보면 지쳐서 공부밖에 못하는 사람이 된다. 나는 할 말을 다 했고 결론은 이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여라. 그분이 명하시는 대로 행하여라.” 이것이 전부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환히 드러내시고, 감추어진 의도에 따라 그것의 선함과 악함을 판단하실 것이다. 코헬렛의
지혜로움은 우리의 삶을 성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지금 주어진 것이 전부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날이 있기에,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헤벨이라는 것은 명백한 진리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인생조차 내 마음대로 끌고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으로 허송세월하거나, 헛된 것을 쫓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삶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세계 안의 일부임을 깨닫고, 하나님 안에 속한 인생으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인생을 내 손으로 잡으려 하지 말고, 내 힘으로 삶의 안정감을 확보하려 하지 말고, 내 계획대로 내가 생각하는 헤벨일지도 모르는 성공으로 이끌어가려고 하지 말고, 손을 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람은 쥐고 흔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원리입니다. 코헬렛은 너무 많은 삶을 허비하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젊을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젊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많은 사람이 그 젊음과 열정을 세상의 헛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라 허비합니다. 허망한 것을 쫓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여기 있으니, 창조주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경외하는 삶. 그분 안에 질서가 잡힌 삶을 살고 그분을 따라 사는 삶이 우리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진리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냥 흘러가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우리의
모든 시간은 하나님 앞에 쌓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 하나님 앞에 설 날을 바라보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채워가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국제시장 영화의 엔딩 장면이 설교에서 종종 인용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친 김에 저도 얼마 전에 아내와 함께 <국제시장> 영화를 다시 봤습니다. 황정민이 연기한 주인공 ‘덕수’는 6·25 때 남한으로 내려옵니다. 아버지는 북에서
못 내려오셔서 어린 나이부터 장남으로 집안을 돌보며 책임을 다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하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노년의 덕수가 방에 들어와 아버지 사진을 보고 하는 이야기가 있죠.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에. 동생도 찾았고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그러면서 장면이 바뀌면서 어린 덕수가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아버지가 말씀하시죠. “울지마라 덕수야. 그래. 니 얼마나 고생했는지 다 안다. 내가 니한테 영 고맙다.
내 못한 것 니가 잘 해줘서. 진짜 고맙다.” 덕수가 아버지에게 말하죠. “아버지, 아버지가 진짜 보고 싶었습니다.” 아버지가 말하죠. “그래. 내도 니가 영 보고 싶었다.” 저는 이 장면을 볼 때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는 날을 떠올려보게 됩니다. “하나님, 저 약속 잘 지켰지요. 아버지를 잃어버린 동생들도 많이 찾았습니다. 이만하면 저 잘 살았지요. 그런데 저 진짜 힘든 때도 많았습니다.” 그때 주님 말씀해주시지 않을까요? “울지마라. 아들아. 네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내가 다 안다. 고맙다. 내 남겨진 사명 니가 잘 해줘서 진짜 고맙다.” 아마 저도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 안겨서 울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 그 소망이 있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그 소망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길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도 그런 삶을 향해 애쓰는 서로를 위로하며 “내가 다 안다” 말해줄 수 있고, “함께 하자” 말해줄 수 있는 영적 동역자요,
형제자매요, 가족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