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우리가 묵상하며 설교로 만나볼 책은 전도서입니다. 11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묵상 본문이므로, 3번의 주일에 걸쳐 설교해야 하지만, 저희가 12월에는 1년에 한 번 ‘교회와 사역’에 관한 설교를 하기에, 두 번의 설교로 전도서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합니다. 설교자로서 삶 속에 느끼는 가장 큰 은혜는 역설적으로 부담감입니다. 사실 제 삶은 365일 긴장 상태입니다. 매주 설교를 준비하는 것은 여전히 훈련에 가깝고, 월요일 오후부터는 뭔가를 준비를
시작하지 않으면 불안할 만큼, 설교 준비가 제게 그리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담감을 제가 은혜라고 표현하는 것은 제힘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사명 앞에 나를 맡기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부르심에 합당한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어쩌면 사탄이 주는 유혹에 불과하고,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저부터 얼마나 많은 은혜와 깨달음과 진리 속의 자유함을 누렸는가,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최선을 다하느냐가 저의 몫이라고 믿습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섭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한 주 동안, 전도서 묵상과 공부를 시작하며 전도서의 매력에 빠졌습니다. 전도서의 매력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이제 비로소 이 책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이전과 다른 느낌입니다. 아주 쉽게 말해서 이번에 만난 전도서는 마치 구약 시대의 <풍성한 삶으로의 초대>와 같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이미
풍삶초를 만나보신 분들에게는 다시 되새기는 은혜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분들에게는 예습과 동기부여가 될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전도서의 메시지를 듣고 여러분의 고민과 같다고 느끼면, 바로 풍삶초는 그 해답을 함께 나누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설교’란 여러분과 말씀이 연합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저의 사상이나 생각을 설교로 듣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여러분이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제가 사랑하게 된 전도서를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 여러분이 전도서를 바르게 그리고 깊게 이해하는데 있어서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것입니다. 전도서를 잘 이해하고 여러분의 삶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전도서가 가진 독특한 관점과 구조를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몫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보겠습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잘 기억하시면 전도서가 더 깊이 다가올 것입니다. 1. 왜 전도서인가? 여러분에게
제가 전도서의 저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좋은 주일학교를 나오신 분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솔로몬이요.” 그런데 전도서에 ‘솔로몬’이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전도자’라고 하는 인물이 등장할 뿐입니다. 이 전도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에 책의 제목이 ‘전도서’라고 붙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전도자로 번역한 단어는 ‘코헬렛’입니다. 히브리어 코헬렛은 사람들을 모으는 자, 사람들을 가르치는 자 정도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에게 도를
전한다고 하여 전도자라고 우리가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 제가 코헬렛으로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코헬렛의 실체가 솔로몬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전도서 안에서 이 사람의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마치 솔로몬과 같이 보이는 표현들이나 소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전 1: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전 1:12) 나 전도자는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지혜가 많았고, 큰 재산을 모았고, 아주 큰
일들을 해본 왕이라고 표현되기에 사람들은 솔로몬을 전도자의 가면 속 실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리고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딱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합니다. 더 들어가면 피곤해지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사귐의교회 교인들의 수준을 믿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늘 한 걸음은 더 들어가서 설명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전도자가 솔로몬일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해보려 합니다. 우선 전도서를 원어로 보면, 전도서의 히브리어 형태는 아람어가 섞인 히브리어입니다.
즉, 쉽게 말해서 솔로몬 시대에 사용하지 않았던, 훨씬 후대에 나온 히브리어로 전도서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훈민정음을 한글로 썼다고 하여, 그 한글과 우리가 지금 쓰는 한글이 똑같지 않습니다. 오늘날 형태의 한국어로 된 책을 가져다 놓고, 이것이 세종대왕이 썼다고 말한다면 어느 누구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전도서의 필체가 그렇습니다. 솔로몬의 지혜가 전승되었다가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서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있겠으나, 솔로몬이 기록하여 후대에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어떤가요? (전 1:16) 나는 장담하였다. "나는 지혜를 많이 쌓았다.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다스리던 어느 누구도, 지혜에 있어서는 나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다. 지혜와 지식을 쌓는 일에서, 나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다윗 때에 비로소 예루살렘이 이스라엘 땅이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통치를 한 것은 다윗부터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이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면, 이것은 아버지 다윗을
깎아내리는 것이 됩니다. 또한 ‘어느 누구도’라는 표현은 선왕 한 명을 둔 왕이 쓰기에는 맞지 않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솔로몬의 이름이 전도서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대에는 유명인사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여 작품을 쓰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전도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전도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전도서를 가르치는 학자들 가운데, 전도서의 저자를 ‘솔로몬’으로 특정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혹시 솔로몬이 안 썼다고
하니 충격에 빠지신 분이 있습니까? 그럼 제가 반대로 이렇게 물어보겠습니다. 꼭 솔로몬이 써야 합니까? 성경은 저자가 누구이냐에 따라 권위가 있고 없고가 결정되지 않습니다. 성경 중에는 저자가 아예 밝혀지지 않은 책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책이 잠언과 욥기와 함께 <지혜서>로 분류되며 오랜 시간 동안 구약성경의 정경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담아내는 중요한 축을 담당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저는 전도서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을 믿습니다. 2. 전도서의
목소리 이 문제는 위의 문제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적어도 전도서 안에 전도자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이렇게 구조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1:1-11 (3인칭) 1:12-12:8 (1인칭) 12:9-14 (3인칭) 전도자를 3인칭으로 쓴 것은 전도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지 않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1인칭으로 쓴 부분이 전도자가 직접 말하는 이야기이죠. 3인칭으로 쓴 부분을 보통 전도서의 ‘서론’과 ‘결론’이라고 부릅니다. 가운데 ‘본론’은 전도자의
말입니다. 그럼 전도서 안에는 몇 개의 목소리가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은 1명, 어떤 사람은 2명, 어떤 사람은 3명이라고 봅니다. 모두 ‘전도자’ 한 사람이 기록한 것일 수도 있고, 두 명 내지 세 명의 목소리가 함께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 구조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이것이 몇 명의 저자로 봐야 하는지는 이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 명의 목소리로 봐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전도서 안에는 ‘저자(화자)’가 있고,
‘전도자’가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는 책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여서 이 책을 왜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마지막에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전도자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저자가 우리에게 의도를 갖고 전도자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예전에 제가 굉장히 호기심 갖고 지켜봤던 것이 어떤 한 교회가 했던 부흥사경회입니다. 첫째 날 강사가 ‘수녀’였고 ‘수녀가 본 영성의 세계’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둘째 날 강사는 ‘종교학 박사’였고 ‘비교 종교학자가 본 기독교’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셋째 날 강사는 ‘승려’였고, ‘스님이 본 예수’라는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당연히 교인들이 강사들의 특강만 듣고 가지 않습니다. 특강의 취지가 독특하기에 담임목사가 먼저 나와서 그 사경회의 목표를 소개하고, 강사를 통해 교회 밖의 사람들의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듣고, 다시 마지막에 담임목사가 나와서 그것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죠. 바로
여기서 담임목사의 역할이 ‘저자’이고, 초청받아서 강연하는 사람들이 ‘전도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제가 굳이 이 교회의 사경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전도서 내에서도 ‘저자’와 ‘전도자’는 깊은 공감대가 있지만, 결정적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는 신앙적 태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도서의 본론에 해당하는 전도자의 이야기는 분명 신앙인들이 새겨들어야 할 지혜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결론과 우리의 결론이 같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가
승려를 초청한 이유가, 그래서 불교로 개종하라는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그들이 교회 밖에서 바라보며 느끼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잘 듣고, 새길 것은 새기고, 고민할 것은 고민하며 더 좋은 신앙을 위한 결론을 내리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죠.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전도서를 읽는 여러분은 굉장히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하나 읽어갈 때면 공감이 되는 말 그대로 지혜로운 이야기, 성찰하게 하는 이야기, 고민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공감이 되는
것과 우리가 따라가야 할 진리로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것을 잘 이해하고 분별하여 소화할 때 전도서는 우리에게 진짜 진리가 됩니다. 전도서 안의 목소리에 대한 설명을 드렸는데, 이번에는 전도서 밖의 목소리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전도서는 욥기, 잠언과 함께 ‘지혜서’로 구분됩니다. 지혜를 다루는 3편의 책 중에, 우리가 이미 다뤘던 ‘잠언’의 목소리는, 세상을 자신감 넘치는 모습으로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젊은 지혜자의
목소리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추구하고 살아가며, 이 지혜를 붙들고 살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낙관하며 외치는 젊은 목회자와 같습니다. 그래서 잠언에는 일종의 ‘패턴’이 확실합니다. 아침에 해가 뜨고 밤이 되면 어두워지고, 봄/여름/가을/겨울의 변화가 예비하심대로 일어나기에, 이 패턴을 미리 잘 알고 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콩 심으면 콩 나고 팥 심으면 팥 나는
것처럼, 좋은 것을 심으면 선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고, 악한 것을 뿌리면 결과가 악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신념, 소신, 패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무엇을 말합니까? 욥기의 목소리는 잠언과 대비되는 듯 보입니다. 욥의 관점에서 보자면 잠언의 고백과 달리 하나님의 공의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질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도 하고 거두시기도 하고, 복을 주시기도 하고 화를 주시기도 하시기에, 욥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질서를 초월한 하나님을 담아냅니다. 욥이 그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을 경외하며 나아가는 것이 해답이었음을 깨닫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전도서의 목소리는 무엇인가? 잠언이라는 젊은 지혜자와 욥기라는 실존적 경험자의 이야기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는 또 한 사람인 것이죠. 이 사람은 조금 더 인생 경험이 많은 중년의 비평가와 같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한마디 내뱉는 것이죠. “삶은 그렇게 딱 정의내릴 수 없는 것이야.” 전도자는 삶에 대한 수많은 고민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고, 삶을 설명해가는 목소리입니다. 저자는 이 전도자의 사상과 깨달음을 우리에게 소개하며, 우리에게 더 깊은 진리를 전해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즉, 지혜서 3권의 목소리는 각기 다릅니다. 인생과 삶을 바라보는 조금씩은 다른 이야기. 제가 느끼기에 인생 안에는 잠언, 욥기, 전도서가 다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각
사람마다 추구하는 바가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성향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습도 모두 다릅니다. 어쩌면 삶 안에서도 이런저런 모습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도 하죠. 제가 신학생으로 살아가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면서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은 ‘잠언’의 태도입니다. 세상을 신학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소신 있게 삶을 부딪쳐 살아가려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어쩌면 젊음의 패기라고 할까요? 열정이라고 할까요? 여전히 그런 모습이 우리의 신앙에 잊히지 않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욥기’와 같은 삶도 마주합니다. 신학적으로 잘 이해되지 않고, 다 설명할 수 없는 실존적 고민과 문제들 말입니다. 그래서 고난 중에 고민하고, 그것을 소화하다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삶 말입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 속에 다 가두어 생각할 수 없다는 겸손을 배우게 합니다. 그리고 제가 점점 목회를 해나가고 한 살씩 나이를 먹어가면서 경험하는 것이 ‘전도서’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제가 이제 40세가 넘어가고, 결혼도 13년 차에 아이 둘을 키우고,
목회도 단독목회 5년을 경험하고, 목양을 하면서 수많은 성도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듣고 보며 ‘삶’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에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장 신중해진 태도는 삶을 함부로 조언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 저에게 답을 묻는 경우들이 참 많지만, 제 답이 상대방에게 답이 될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삶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럼 인생은 답이 없는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을
점점 더 모르기에 답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하게 깨달아 가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듯 보이지만, 어쩌면 전도서를 읽으며 우리가 공감하는 것처럼 사람의 삶은 다 비슷한 연결성을 갖고 있습니다. 비슷한 문제를 다 마주하고, 그 안에서 답을 찾으며 나아갑니다. 가까이서 바라보면 모두 다르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모두가 비슷한 것이 인생입니다. 다양성이 있는 동시에 보편성이 있는 삶에 대해서 저는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다양성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보편적 추구함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저는 진짜 우리가 삶에서 붙잡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요즘에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의 저자도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와 비슷합니다. 전도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다양한 인생의 이야기로 공감대를 만들면서도, 그 인생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깨달아 가도록 이끕니다. 그래서 전도서의 주제는 ‘우리가 참된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있습니다. 3. 헤벨 만약 누군가에게 전도서를 읽으며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헛되다.’ (전 1: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저자는 전도자의 이 가르침을 책의 시작과 함께 우리에게 소개합니다. 또한 본론의 마지막 말씀도 이렇게 끝이 납니다. (전 12:8)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결국 이것이 전도자가 가진 깨달음의 핵심이라는
것이죠. 여기서 ‘헛됨’이라고 번역한 단어의 원어가 ‘헤벨’입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서 이것을 ‘헛됨’이라고 번역하면서, 우리는 전도서를 허무주의를 의미하는 책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헤벨은 ‘헛되다’라는 의미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헤벨’의 본래 의미는 수증기, 연기 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생이 연기와 같이 일시적이고, 동시에 모양을 설명하기 힘든 수수께끼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헤벨을 쓰는 것입니다. 연기의 특징은 잡을 수 없습니다.
모양을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존합니다. 그래서 단순히 허무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수수께끼와 같으며, 바람을 잡는 일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지 않는 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인생을 스스로 완벽히 통제하고 싶어하며, 자신의 계획대로 이루어가려는 우리를 멈춰 세우기 위한 책입니다. “당신 정말 이렇게 살아도 괜찮겠어?” 그런 의미에서 저는 풍삶초와 전도서가 유사하다고 느낍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자유를 노래하는 문학, 노래 등은 어떤 환경에서 더 아름답게 나오는지 아십니까? 억압의 시대입니다. 자유에 대한 결핍이 역설적으로 자유를 추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복음이 진짜 복음이 되는 것은 누구에겐지 아십니까? ‘좋은 소식’이 필요한 인생들에게 입니다. 즉 깨어진 세상을 경험하며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진짜 복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이 정말 그 사람 안에 핵심 진리가 되게 전하기 가장 어려운 대상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삶의 고난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삶의 공허함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에게 복음은 간절한 소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에게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이 세상이 죄로 인해 망가지고 깨어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삶을 통해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채워지는 변화의 기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 갈망한다는 이야기를 할 때,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해버립니다. “그럼 풍족하게 산 사람들은 인생을 잘 모르겠구나.” 과연 그럴까요? 저는 반대로 풍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공허함을 크게 느낄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물질적 풍요를 채우면 만족을 누릴 수 있을 것처럼 우리에게 말하지만, 막상 그것을 누리면서 갖게 되는 공허함, 헤벨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전 2:10) 원하던 것을 나는 다 얻었다. 누리고 싶은 낙은 무엇이든
삼가지 않았다. 나는 하는 일마다 다 자랑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수고하여 얻은 나의 몫인 셈이었다. (전 2:11) 그러나 내 손으로 성취한 모든 일과 이루려고 애쓴 나의 수고를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고, 아무런 보람도 없는 것이었다. 노동과 수고를 통해 살에서 결과를 맛보기도 하고, 업적과 성취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인생은 잃는 것도 많은 법입니다. 또한 성취를 누리는 만큼 시기와 질투도 많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같은 세상에서는 올라갈수록 얻는 것도 많지만, 잃는 것도 많은 법입니다. 돈도 헤벨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늘 독보적 존재입니다. 유일신 신앙이란, 여러 신 가운데 하나님 하나를 잘 믿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이 유일하게 동급의 영향력을 지닌, 그런 위험성을 가진 대상으로 표현하신 것이 ‘돈’입니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제가 보기에 ‘돈’에는 힘이 있습니다. 돈에는 소위 ‘유사전능성’이 엿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능해 보인다는 것이죠. 오죽하면 우리가 ‘물질 만능주의’라는 표현을 쓸까요? 우리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정말 그것이 만능이 될 것 같은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돈을 자꾸 의지하려 합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러한 의지함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경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섬기는 삶을 결정하는 순간이 옵니다.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은 돈이 하나님보다 귀한 사람에게 2인자 자리에서 계시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관계, 연합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부가 연합의 관계이고, 하나님과 우리를 부부에 비유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첫 번째는 다른 사람이고, 두 번째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달라는 말에 사랑으로 응답할 인간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하나님에게 그런 태도를 보입니다. “하나님, 제 삶의 두 번째 자리에 만족하시고, 그냥 저를 사랑해주세요.” 전도서는 인간 세상이 주는 그러한 돈에 대한 유혹과 마음에 일침을 가합니다. (전 5:10) 돈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만족하지 못하고, 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이 벌어도 만족하지 못하니,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헛되다. (전 5:11) 재산이
많아지면 돈 쓰는 사람도 많아진다. 많은 재산도 임자에게는 다만 눈요기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소용이 있는가? (전 5:12) 적게 먹든지 많이 먹든지, 막일을 하는 사람은 잠을 달게 자지만, 배가 부른 부자는 잠을 편히 못잔다. (전 5:13) 나는 세상에서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아끼던 재산이, 그 임자에게 오히려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다. 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돈은 우리의 통제 아래 있는 도구가 되어야 할 뿐, 돈이 나를 움직이는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돈을 추구하는 삶이 정말 행복한가? 재산이 많아지면 편리해지는 것이 있죠. 그런데 그만큼 삶이 평안한가? 편리와 평안은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만큼 큰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불행한 선택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부자들이 왜 담을 높일까요? 불안함입니다. 그 높은 담 아래 자기만의 왕국에 갇혀 돈으로 얻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이 정말 행복할까요? 자수성가한 대기업의 회장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의 삶에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과연 언제를 떠올릴까요? 제가 그 입장이 되어보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지킬 것이 없었던 그래서 담이 낮았던 그 삶일 것입니다. 다만 이제 돌아갈 수 없을 뿐이죠. (전 5:15) 어머니 태에서 맨몸으로 나와서, 돌아갈 때에도 맨몸으로 간다. 수고해서 얻은 것은 하나도 가져 가지 못한다. (전 5:16) 또 한 가지 비참한 일을 보았다. 사람이 온 그대로 돌아가니,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를 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전 6:2)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는 부와 재산과 명예를 원하는 대로 다 주시면서도, 그것들을 그 사람이 즐기지 못하게 하시고, 엉뚱한 사람이 즐기게 하시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요, 통탄할 일이다. 부와 재산과 명예를 우리가 얻었다고 하여, 그것이 내 것처럼 여기는 것은 무지일 뿐입니다. 그것을 내가 열심히 모으는 삶을 살았어도,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또 누군가 엉뚱한 사람이 그것을 즐기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헤벨. 연기와 같은 그것을 잡으려고
내 삶을 다 소모하는 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일까요? 거기에 인생의 참된 행복이 있을까요? 전도서의 저자는 전도자의 깨달음을 통해 우리를 흔들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에게 이러한 흔듦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가는 그 방향으로…. 전도서는 그런 우리를 멈춰서서 가는 방향이 맞는지 고민해보게 만듭니다. 인류의 역사를 돌아봅시다.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지혜가 있고 영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이 마주하는 헤벨의 문제를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헤벨을 극복하는 실제적 안정감을 누리고자 힘써 왔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개개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명을 발전시키며, 다양한 방법들로 세상을 변화시켜 왔습니다. 그래서 진보가 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 진정한 의미의 극복을 했을까요? 과학 기술이 발전되어 여러 혜택이 있고, 인간의 수명도 많이 늘어났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과학 문명의 발달 때문에 전쟁의 공포는 늘어났으며,
그만큼 대량 살상으로 죽어가는 일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사람이 자연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가야 할 때가 있는데, 의료기술의 발달로 인해 수명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몸은 쇠약해져서 생존은 했으나, 그냥 살아있을 뿐 아무런 삶의 행복을 누리지 못한 채 병원에서 지내다가 가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예전에는 멀리 있는 사람과 소통하려면 편지로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며 이야기하고, 삐삐로, 핸드폰으로 점점 소통이 쉬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곳에 있던지 누구와도 얼굴을 보면서 옆에 있는 것처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그로 인해서 편리해진 만큼, 그 안에서 생기는 관계의 문제들, 카톡 안에서의 소외감, 외로움이 해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군중 속에 공허함이 참 많죠. 진짜 인류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가? 인간은 본질적인 공허와 허무를 극복할 수 있는가? 정답이 뭐예요? 이것도 헤벨에 있습니다. 인생이 헤벨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답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사는 삶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가 절대 분명하지 않기에... 연기처럼 신비롭고, 우리가 잡을 수 없는 영역이 있기에, 그러한 삶 속에 살아가는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다른 삶의 방법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애씀과 다른 애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자기 중심성을 내어버리고 인생을 다룰 수 있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서 붙들어주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인생이 우리 뜻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이 영원히 성공일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고난이 끝까지 고난일지 그 또한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빠르다고 달리기에서 항상 이기는 것이 아니며, 강하다고 전쟁에서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지 않고, 총명하다고 재물을 잘 모으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전도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세상을 당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려던 시도가 어떠했는가?”
앞으로도 “당신이 주인 되어 살아도 정말 괜찮겠는가?” 우리의 삶은 마치 페트병 하나에 담긴 물처럼 유한한데... 이미 그것을 어떤 사람은 반이나 쏟으며 삶을 살아봤는데... 남은 삶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제 고민해봐야 하지 않겠나 묻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생이 헤벨이라는 말에 동의가 된다면, 이제는 그 인생을 창조하신 분 안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헤벨. 인생을 내 손으로 잡으려 하지 말고, 손을 펴서 헤벨을 느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연기도 바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세계의 질서와 원리입니다. 즉, 모든 헤벨은 하나님 안에 속한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세계 안의 일부임을 우리가 깨닫고, 우리는 바람의 부는 방향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것을 통해서 모든 자연을 태초부터 지금까지 질서 정연하게 이끌어오셨던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 안에 속한 헤벨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사랑해서 주셨음을 믿는다면, 왜 성경이 가장
앞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만드셨다. 하나님이 당신을 만드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이것을 인정하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삶의 궁극적 목표와 방향을 찾는 것이 삶에 가장 필요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삶이 헤벨이라는 말에서 이 이야기는 모두에게 적용되겠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려봅시다.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 그의 삶에도 업적과 성취가 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는 성공한 인물입니다. 산헤드린이라는 유대인 지도자 모임 70명 중에 속한 정치인이며, 바리새인이며 선생으로 인정받는 종교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삶은 헤벨이었습니다. 그나 우리나 다르지 않습니다. 인생은 헤벨이니까요. 그는 헤벨을 극복하고자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오게 되죠. 예수님이 그에게 가르치신 것은 성령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삶’이 이 헤벨을 극복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너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는
말, 곧 이 세상의 가치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내 말에 놀라지 마라. 너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너는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의 소리는 듣지만,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하나님의 바람, 곧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도 다 그와 같다.” 성령이 바람과 같이 존재하심을 말씀하신 것이며, 그 성령 안에서 우리가 새로워질 때, 우리의 헤벨이 극복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헤벨이어도
괜찮은 삶에 대한 확고한 마음, 그 평안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있는 것을 바람이 스치고 지나간 나무를 보며 알 듯,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우리의 삶은, 또한 세상 사람들에게 헤벨과 같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인생은 헤벨입니다. 알 수 없어요. 그러나 그것은 나의 한계에서 느끼는 두려움일 뿐, 하나님의 창조 안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손안에서 우리의 헤벨도 다뤄질 것을 믿으며 나아갈 때, 그 삶을
의미 있게 바꾸시고 선명하게 하시며, 창조주가 주고자 하신 행복 안에 거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가장 큰 지혜를 발견하고 발휘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