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에 대한 첫 번째 설교에서 다뤘던 것은 죄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갖고 계셨던 하나님의 비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우리의 사명 또한 구원받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된 모습으로 하나님의 원래 계획에 동참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안에서 세계관이 확장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도표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죠. 구속사는 굉장히 중요한 개념이지만,
그것에만 마음을 두면 우리에게 있는 구원의 확신은 우리 삶의 모든 목표를 다 이룬 것 같은 허무함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이 꿈꾸시는 비전에 동참하게 되면,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살아가는 새로운 소망으로의 초대가 됩니다. 저는 오늘도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를 통해, 보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에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3) 하나님 나라의 어원 성경 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바른 이해를 위한 노력입니다. 성경이 최소 2000년 전의 기록이며,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곳에서 있었던 일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성경을 내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천지가 성경을 잘 해석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데요. 그들의 해석이 얼마나 어설픈지 유명한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신천지 강사 : 성경에 보면 천사들 조직이 4그룹으로 되어 있다고
나옵니다. 4개 그룹의 우두머리가 천사장입니다. 이단 대처사역자 : 천사가 네 그룹으로 있다는 것이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신천지 강사 : 에스겔서 28장에 있습니다. (겔 28:14) 너는 기름 부음을 받고 지키는 그룹임이여 내가 너를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어서 불타는 돌들 사이에 왕래하였도다 성경에서 천사를 ‘그룹’이라고 부르죠.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읽은 거예요? Group. 모임을 뜻하는 영어단어로 해석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해석하면 오류에 빠지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많이 쓰지만, 예전에는 대부분 이것을 ‘천국’이라는 말로 더 자주 썼습니다. 지금도 천국이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천국’을 검색해보시면 굉장히 특이한 것을 발견하시게 될 것입니다. 한글 개역개정 기준으로 ‘천국’이라는 단어는 37구절에서 사용됩니다. 그런데 그중에 디모데후서의
1회를 제외하면 모두가 ‘마태복음’에서 사용됩니다. 즉, 성경에서 ‘천국’은 보편적인 표현이 아니라, 마태복음에 한정된 매우 독특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하나님 나라’보다 ‘천국’이라는 단어를 더욱 익숙하게 여기는 우리가 매우 특이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성경이 보급되면서, 한국 안에 있던 하나의 용어와 이것이 만나 버립니다. 바로 천당이죠. 천당은 ‘하늘에 있는 신들의 궁전’이라는 뜻인데, 불교 용어입니다. 그러니
선교적으로 보면 ‘천당’이라는 개념이 우리 안에 있으니, 그것과 유사한 것이라고 설명하기에는 좋은데,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천당, 극락, 저승’과 같은 개념과 동일시하지는 않으니, 그 부분은 넘어가고, ‘천국’에 대해서는 조금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① ‘하늘’에 대하여 ‘천국’은 한자이죠. 그 의미를 풀어서 쓰면 ‘하늘나라’입니다. 마태복음은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하늘나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가 주로 쓴 이 표현이 왜 우리에게 이토록 익숙한 표현이 된 것일까요? 그만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마태복음’을 편식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영향력을 몇 가지 근거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설교를 모아서 정리한 것 가운데, 마태복음에는 산성설교와 8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도 나오는데 평지설교와 4복 4화입니다. 산상수훈이나 8복은 교회를 조금 다녀보신 분이라면 들어봤을 것이지만, 4복
4화는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주기도문을 가르치는 장면도 성경에 두 곳에 나옵니다. 한번 누가복음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눅 11: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뭔가 어색하죠? 뭐가 빠졌습니까? ‘하늘에 계신’이라는 수식어가 빠졌습니다. 왜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이 있고, 누가복음에는 없을까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은 유대인 랍비들의 표현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하늘에 계신’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아도 구약에 몇 개 나오고, 신약에서는 16번 나오는데, 그중에 마태복음이 15번입니다. 이 정도면, 여러분은 이제 마태복음이 오히려 조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고 있지 않기에 ‘유대적’ 표현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에서 주기도문을 가르칠 때는, 그 대상이 유대인이 아니기에
일반적인 기도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죠. ‘하늘에 계신’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와닿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면, 유대인들에게 이 표현이 주는 뉘앙스와, 우리에게 다가오는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기에 유대적 표현을 표면적으로 인용하면, 알게 모르게 달리 받아들이는 부분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늘’이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공중(sky)’ 개념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공중 어딘가에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은 ‘공중에 어디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늘나라를 하늘에 있는 나라라고 여기면 오류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땅과 구분되는 ‘하나님의 영역’을 표현하는 신학적 표현일 뿐입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도 이런 예시가 존재합니다. 용안(龍顔). 왕(王)의 얼굴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용상, 용포 등의 단어도 마찬가지이죠. 이것은 한국인이라면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것의 의미를 모른 채 외국인이 이 단어를 번역한다면 상당한 오해가 생겨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용안을 ‘Dragon Face’라고 번역을 해버린다면, 영어권 사람들이 그것을 읽으며 떠올리는 이미지는 왕의 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일 것입니다. 그들이 용안을 보며 용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나, 우리가 천국을 보며 공중에 있는 어떤 장소를 떠올리는 것이나 비슷합니다. 즉 용안이라고 써도 왕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이 맞는다면, 천국이라는 단어를
볼지라도 우리는 그 참된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가 사실은 같은 것을 지칭하고 있는 다른 표현임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 19:14)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시고 (막 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각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하신 동일한 가르침을 분명 말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천국’으로, 다른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합니다. 의미상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천국’에 대해서도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는데, 이것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여러 단어와 겹치게 된 것입니다. 기존의
‘천당’이라는 개념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자기가 생각하는 천당의 개념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개념 속에서 이해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단순히 사후세계의 어떤 장소로 오해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승이 아닌데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여러 가지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성경이 말하는 것을 공부하며 찾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설교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늘’에 대한 오해만 바로잡으면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라’라는 단어도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② ‘나라’에 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번역하는 단어는 영어로 ‘The Kingdom of God’이라고 씁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표현은 ‘h` basileia tou Qeou/’입니다. 우리교회 식구들이 비교적 매우 익숙하게 들어왔던 표현이죠. 즉, ‘나라’는 헬라어 ‘바실레이아’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럼 ‘바실레이아’가 우리가 생각하는 ‘나라’의
개념과 같은가? 여러분은 ‘나라’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우리는 ‘국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럼 사회문제로 넘어가서 국가의 3대 요소가 무엇이죠? ‘국민 / 주권 /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이 중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국민’과 ‘영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떠올릴 때도, 우리는 그런 물질적 개념으로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국민’은 믿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면 무엇보다 궁금한 것은 ‘그래서 그 나라는 어디에 있는데?’라는
것이죠. 지리적이고 공간적 개념의 장소를 우리는 찾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바실레이아’는 그런 의미의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국민, 주권, 영토 가운데 바실레이아의 개념을 가장 유사하게 표현하는 것은 ‘주권’입니다. 라이트(N.T. Wright)에 의하면 이 단어는 1세기의 유대적 용법에서 ‘하나님이 왕이 되신다’를 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왕권 안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은 주권을 잃어본 경험이 있지요.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긴 때, 영토도 있고,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권이 없으니, 우리의 땅도 우리의 백성도 모두 대한민국 소속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이 땅에 있더라도, 내가 인간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을 왕으로 따르면 나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가장 근본 개념입니다. 신약의 '바실레이아'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말쿠트'입니다. 이 단어 또한 공간적인 의미로서 사용된 경우는 극히 적고, 대부분은 ‘통치’, ‘지배’, ‘치세’,
‘왕권’과 같은 관계적인 개념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배경에서 ‘바실레이아’는 ‘말쿠트’와 더불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통치’ 또는 ‘왕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라고 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것이 지리적인 영토라면, 그것은 그릇된 이해가 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는 표현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나의 왕이시다’는 고백을 하면 내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느 영토로 여러분이 여행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여러분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다스림)를 받는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주기도문에 나오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영토가 생기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이 임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통치안에서 모든 사람이 왕의 주권을 높이는 것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③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 하나님의 통치안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이것은 우리가 죄악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거듭남’이나 ‘영생’도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새롭게 태어난 것이고, 영원한 하나님께 속한 삶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제자가 되는 것’, ‘영생’, ‘구원’ 개념과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됩니다. 제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것인데, 그것은 십자가에 그 자신이 못 박히고 오직 그리스도가 그 안에서 주인 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생이라는 단어도 단순히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6:47은 믿는 자가 영생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성도가 되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바로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시대에 참여한 것을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 영생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막연하게 시간적으로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 악한 세대에서 벗어나 다가오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참여하는 것이 ‘영생’의 진정한 의미이죠. 그리고 그것이 곧 구원이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것들로부터 다시 돌이켜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심을 통해 삶의 방향을 바꾸어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던 우리에게 다시 돌아갈 기회를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이것은 가장 기쁜 소식, 복음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찾아 ‘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미지의 세계를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땅에서 살지만,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임하고 역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머무는지, 내가 어떤 피부색을 가진 사람인지, 이런 요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 백성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왕이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것이 우리의 진실하고 간절한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