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의 두 번째 설교를 나눕니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잠언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주제가 이 안에 다뤄지고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야고보서에서도 ‘지혜’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잠언을 통해서 잠언이 말하는 가장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이미 배웠습니다. 그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럼 신약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야고보서가 전하는 참된 지혜란 무엇일까요? 지혜의 세 가지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있다면 받아보시고 싶으십니까? 야고보서는 지혜는 하나님께 달라고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구하면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성령과 유사합니다.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 혹은 인격적으로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신다고 표현을 합니다. 어떻게 성령을 받습니까? 성령님이 램프의 지니도 아니고 여러분이 부르면 언제든 나타나는 이러한 존재인가요?
아니면, 여러분이 성령을 통달해서 깨달아 그분을 알 수 있나요? 성령이 진리의 영인데, 여러분이 학습을 통해서 도달하고, 어떤 다른 능력으로 그분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을 우리가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금요일의 표현대로 한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이죠. (눅 11: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바로 야고보서가 말하는 ‘지혜’도 학습을 통해
얻게 되는 지적인 지혜라기보다는 성도들이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약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여기서 지혜는 지난주에 언급한 ‘시험과 고난’을 이기고 견디어 나갈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험을 이기고 고난을 견디고자 하는 것이 여러분의 신앙적 결단이라면, 그것을 이끌어 나가시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이 말씀에서의
핵심은 ‘모든 사람에게’입니다. 즉, 이러한 지혜는 차별 없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구하기만 한다면... 세상의 지혜나 지식은 노력을 통해, 공부를 통해, 경험을 통해 습득됩니다. 그래서 얻는 사람이 제한적입니다. 석사-박사 올라갈수록 희소성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제가 경험해보건대,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 삶을 인도하는 답을 내려주실 것임을 알지만, 오히려 알기에 구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별히 제가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을 때, 일부러 비전을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묻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자기를 어디 오지로 선교를 보낼까봐... 제가 예전에 사울 왕을 두고 했던 설교의 제목이 사울의 ‘도도한 삶’이었습니다. 바로 그의 삶이 여호와께 ‘묻지도 듣지도’ 않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거장을 만나면 어떤 모습을 보일까요? 제가 개척을 할 때, 책으로 제게 영향을 많이 주셨던 김영봉 목사님을 찾아가서 제가 무엇을 하고자
했을까요? 그분 만나서 제 얘기만 잔뜩 하고 올까요? 제 얘기를 하고자 하면 그분을 만나러 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거장을 만나면 그분의 이야기를 듣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이끌어 가시는 거장 중의 거장이죠.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 삶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하나님은 그분께 묻는 자들에게 그 지혜를 알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실 때 ‘후히’ 주십니다. 새번역 성경은 ‘아낌없이’ 주신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더글라스 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는데,
그는 이 부분을 ‘순전하게’로 해석하는 것을 권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할 때 오직 ‘주시겠다는 마음’만을 갖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야고보서 1:8에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 나오는데 그와 반대의 모습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꾸짖지 않고’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런 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심사하며 결격 사유를 따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직 주시겠다는 마음과 의지’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구하기만 하면.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세요.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장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주시길 원하세요. 저도 자녀를 키웁니다. 자녀가 좋아하는 것이 있고 싫어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제가 봤을 때 자녀가 좋아해서 저에게 달라고 하지만 줄 수 없는 것이 있고, 자녀가 싫어하지만 겪게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 중에 그것을 줌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의 삶이 더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은 주지 않으시는 것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재물’을 채워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이 여러분을 봤을 때, 주면 안 될 것 같아요. 그래서 그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시거나 능력이 없거나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 여러분의 기도대로 들어주지 않는 것이 아니지요. 그 반대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믿음으로 살아갈 지혜를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인지 알려주십시오. 하면
기쁨으로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주님께 길을 물으면 그 길을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그렇게 안 따라가는 것이 문제이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알려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두 번째 : 지혜는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는 방식이다. IQ 검사를 해보신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높게 나온다면 어떤 영역에서 뛰어난 부분, 발달된 부분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인가, IQ 순서대로 우리가 지혜롭게 살아가는가? 생각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유사하게 하나님 안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성경을 많이 알거나, 어떤 지식이 풍성한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지식이 풍성한 것은 어떤 부분에서 다른 이들보다 폭넓은 지식의 깊이가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살아간다는 것은 지적인 앎의 크기와는 다른 문제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에게서 그 앎의 어떠함이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의 초점은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살아내는 방식입니다. 삶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약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우리 안에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안에 무화과나무가 자리 잡고
있으면 무화과 열매를 맺는 것이고, 포도나무는 포도 열매를 맺는 것이죠. 내 안이 짠 물이면 밖에도 짠 물이 흘러나옵니다. 그럼 내 안에 세상 것이 가득하면 내 삶은 세상 것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면, 내 삶의 영역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선한 행실, 온유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메시지 성경은 13절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지혜롭다는 평가를 듣고 싶습니까? 지혜롭다는 평판을 쌓고 싶습니까? 여기 여러분이 할 일이 있습니다. 제대로 살고, 지혜롭게 살고, 겸손하게 사십시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사는 방식입니다.” 이번 주중에 어떤 분이 제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기쁘게 순종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억지로 순종하게 되는 부분이 있는데, 그렇게라도 순종하는 것이 맞을까요?” 제가 뭐라고 했을 것 같습니까? “저도 그렇게 순종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는 기쁘게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험’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광야에서의 삶을 예로 들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통해서 먹이십니다. 그때 ‘만나 룰’을 지정하십니다. 크게 2가지입니다. 하루 이상의 것을 가져가지 않기, 안식일 전에는 이틀 분을 가져가기.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토요일이었으니까. 월요일이나 화요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와서 2배를 챙겨 가면 썩습니다. 즉, 매일 하나님 앞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귀찮다고 2일치를 거두면 다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유통기한이 하루입니다. (출 16:19) 모세가 그들에게 아무도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고 하였다. (출 16:20)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었다. 그랬더니, 남겨 둔 것에서는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풍겼다. 모세가 그들에게 몹시 화를 내었다. 그런데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아야 하잖아요. 금요일에는 평소의 2배를 가져가도록 하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금요일에 주신
만나는 토요일을 넘어 일요일까지 두고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금요일 만나만 유통기한이 2일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언제나 공지를 잘 못 알아들었거나, 삐딱한 친구들이 있어요. 이스라엘 백성 안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출 16:27) 모세가 이렇게 말하였는데도, 백성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이렛날에도 그것을 거두러 나갔다. 그러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안식일에 그거 거두겠다고 나간 이 사람, 또 아까 평일에 2일분 가져왔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계속 평일에 2일분을 거두고, 안식일에 만나 거두러 나아갔을까요? 아닙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법을 훈련받고 배워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길임을 배우는 것이죠. 만나의 원리는 사실 이것이 자연현상이 아님을 일깨워주는 것이죠. 매일같이 내리고 언제나 유통기한이 하루면 자연의 질서라고 받아들일지도 몰라요.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대로 질서를 깨어가며 주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내 삶에 함께하고
계심을 그들은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도 하고 불순종도 해봅니다. 그러면서 순종했을 때의 결과와 불순종했을 때의 결과를 경험하죠. 순종하는 삶이 더 낫다는 결론은 또한 그 가운데서 얻어지는 유익입니다. 경험이 적으면 좌충우돌하겠지만, 경험이 쌓이면 판단과 결정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히 5:9)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순종은 훈련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순종함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어주신다고 해요. 순종의 훈련이 제일 안 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순종해보지 않는 것입니다. 뭔가를 해봐야 그로 인해 깨닫고 배우는 실패 혹은 성공의 경험이 생기는데, 해보지 않는 사람은 경험이 없습니다. 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면, 그것을 따라 순종하는 훈련을 해보십시오. 그 안에서 깨닫는 경험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은 결국 모든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 위로부터 온 지혜는 성결하다. 저와 매우 친하게 지내는 목회자 가운데 정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이 결혼하고 자녀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름을 외자로 ‘결’이라고 지었습니다. 제가 그때에도 아들이 너무 살아가면서 부담스럽겠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이후에 저는 또 개척학교를 통해 ‘성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이분도 저와 알고 지낸 후에 자녀를 낳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름을 또 ‘결’이라고 지었습니다.
성결. 정결보다 더 강력한 이름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아이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가 속한 교단의 이름이 ‘성결교’입니다. 성결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성결을 영어로 쓰면 ‘holiness’입니다. holy가 거룩이라는 의미이니, 거룩하고 깨끗하다는 말이 ‘성결’입니다. 성경에서 ‘거룩 혹은 성결’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코데쉬’는 세상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결, 거룩 등을 가장 이해하기 쉬운 개념으로 설명하면 ‘구별’입니다.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모습이죠. 제가 자주 언급하는 예화로, 기독교인의 삶은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배와 같습니다. 배가 바다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처럼, 기독교인이라고 하여 세상을 떠나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살아갑니다. 현실에서 도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배가 바다에 떠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배 안에 바닷물이 들어와 있는 것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침몰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세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기독교인 안에 세상의 것이 가득 차면 침몰해버리는 것입니다. 제가 금요일에 보여드렸던 그림입니다. 저는 이것이 교회 공동체가 추구해야 하는 그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일컬어 교회의 머리시다, 모퉁잇돌이 되셨다 말합니다. 그가 교회의 시작이고 교회의 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향해 나아갈 때, 우리는 그분의 영향을 받고 그분을 닮아갑니다. 저는 주님 닮는 것이 거룩이고 성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한걸음이 곧 성화, 성결을 이루는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성결’이라는 개념은 특별히 구약의 제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배이죠. 예배는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법에서 그분 앞에 서기 위한 인간의 성결한 준비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진실하고 간절한 태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라는 직책이 있었습니다. 바로 모든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 가운데 제사장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했습니다. 이때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결해야 하는 것이었죠. 그래서 대제사장이 입는 복장 중에 머리에 쓰는 관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대속죄일이 되면 모든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 그곳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성결하시기에 그분 앞에 나아가는 자, 그분을 가까이하는 자들에게는 성결함이 요구되었습니다. 성결은 하나님의 속성이고, 하나님이 계신 곳은 성결한 곳이었죠. 야고보서는 지혜와 관련하여 성결에 대해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약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구약 성경에서 '성결'은 주로 육체에 관한 것이었던 데 비해 신약성경에서는 '성결'을 마음의 문제로 적용하여 신자는 나누이지 않은 한마음인 성결한 마음을 가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의미하는데, 그 지혜는 성결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지혜가
가진 첫 번째 특성입니다. 그 뒤에 이어서 나오는 화평, 관용, 양순, 긍휼 등은 성령의 9가지 열매들과 유사합니다. 이것들 모두 주님의 성품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죠. 야고보서에 ‘성결’에 대해 한 번 더 언급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또한 지난주에도 살펴봤던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말씀은 성결에 대한 말씀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 성결은 필수조건이죠.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것과 함께 섞여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이 두 마음을 품은 상태를 성결하지 못한 상태라고 말합니다. 예전에 우리가 마음 ‘심’ 위에 가운데 ‘중’이 2개 쓰인 한자를 근심 환(患)임을 살펴본 바 있습니다. 두 마음은 근심이라는 것이 세상에서도 이치인데, 두 주인의 섬기는 삶이 평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 혼탁해진 마음을 바로잡는 것, 하나님만이
존재하고 좌정하시므로 거룩해지는 것. 그것이 마음을 성결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누가 살고 있습니까? 주님이 계시다면 주님만이 주인 되는 삶입니까? 혹시 주님을 모셨다고는 말하면서 액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라보며 위안만 되는 그 모습으로 모시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교회는 어떠할까요? 교회는 가장 주님의 거룩함의 모범이 되어야 할 곳이 아닙니까? 한국교회를 비판할 때, 복음을 볶음으로 만들어버렸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복음은 순전하고 구별된
이야기인데, 여기에 이것저것을 다 섞어서 복음이 희미해지고 더 나아가 볶음이 되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만이 절대적 진리이자 유일한 진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어떤 것들이 들어와서 교회의 원리로 작용하고 있다면 성결함을 방해받고 있는 것입니다. 어제 청년부 수련회 둘째 날, ‘찬양으로 드리는 우리의 고백’이라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예배당 뒤편에 앉아서 청년들과 스탭들이 나누는 간증과 찬양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설교를 여기까지 써놓고 마무리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설교를 마무리하고자 힘썼지만 이 설교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하는지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미 토요일 밤 시간이므로, 시간에 쫓기고 다급한 마음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앞에서 자신의 삶에 있었던 여러 삶의 굴곡들을 나눴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공동체의 마음을 여시고 자신의 과거와 내면의 아픔들을 꺼내어 놓는 깊이 있는 시간으로 이끌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제가 더 이상 설교를 뭐라고 진행해야 할지
더 막막해지더군요. 왜냐하면, 이 설교가 그들의 삶의 무게 앞에서 너무 가볍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왜 우리 교회에는 이렇게 삶이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들을 계속 들으면서,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나라면 과연 저들의 저 상황 속에서 저들과 같은 고백을 나아갈 수 있었을까?” 이런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삶의 굴곡과 어려움 아픔, 세상을 저버리고 싶었던 시간들과 싸워왔던 이들의 이야기이지만... 제가 그 이야기들
속에서 공통된 마음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고백은 하나 같이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아닌, 그 어두운 삶의 시간들 속에서도 이끌어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였기 때문입니다. “제 몸은 지금 많은 것을 잃었지만,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알고 아픈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배웠기에... 다시 예전의 건강하지만 하나님 모르는 삶으로 돌아가기는 싫어요.” 깨어진 가정, 사랑받지 못하는 환경 가운데 자란 사람들이 참 많았지만... 지금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이야기들. 제가 그런 간증을 들으며 2가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제가 전했던 설교가 그들에게 기억되고 인용되는 것을 보면서... 설교자로서 더욱 느껴지는 막중한 책임감, 거룩한 부담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저들의 삶을 인도하신 그 하나님에 대해서 들으며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어떠한 것이고, 그것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우리를 세상과 구별하여 거룩한 길에 이르게 하는지... 내가 그것을
설명하고 증명할 필요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위로부터 온 지혜는 성결하고, 그 하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주님의 거룩함을 따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이 사실은.... 어떤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빛이 왜 빛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이 그 빛을 맞으며 바라보며 고백하듯, 위로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시는 그 지혜가... 우리의 삶에 비춰질 때 주님의 거룩함이 나의 거룩함으로 역사되어... 내 삶이 달라지며
세상과 구별된다는 것은 증명할 명제가 아니라, 고백해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를 정리해 봅시다. 야고보서는 시련과 고난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기록한 편지입니다. 외적인 박해죠. 그리고 교회 안에는 복음을 혼탁하게 하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거짓된 복음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자녀라 말하고 구원받았다 말하면서 삶의 어떠한 모습도 주님 닮지 않은 사람들을 꾸짖고 바로잡기 위해 쓴 편지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가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시기 위해,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내려주십니다. 구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님은 하나님의 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 지혜는 성결합니다. 그 성결함이 나의 성결함이 되기 위해서,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은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는 순종의 훈련을 해나갑니다. 저는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 놀라운 힘을 증명할 수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증언하고 싶습니다. 성경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받고 그것을 받아들여 살아갔을 때,
그들은 두 마음을 품지 않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나아갔고, 그들의 삶의 모습에는 주님의 거룩함을 닮은 흔적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도 주님께 묻고 주님을 찾는 자들에게 다가와 주실 주님. 어쩌면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까이 오셔서 우리의 삶을 주님의 거룩함 가운데 빚어 가실 주님. 그 주님을 기대하며, 거룩하신 그 이름을 높이며 나아가길 원합니다. 증명이 아닌 증인되어 그 주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을 향해 선포하며 나아갑시다. 사귐의교회는 경기도 양주시 옥정동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2018년 창립되어, 고읍에서 예배하다가 2020년부터 옥정에서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귐, 이웃과의 사귐을 꿈꿉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