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마가복음 1:15 / 6) 믿어라 / 강정규 목사

2021-07-16 · 마가복음 1:15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새번역 _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때가 찼다 / 하나님의 나라가 / 가까이 왔다 / 회개하여라 / 복음을 / 믿어라. 우리는 6주간 이렇게 6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여 말씀은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5주간의 메시지를 잠시 정리해보면 이렇습니다. 1) 때가 찼다 크로노스와 같은 물리적 시간이 있고, 카이로스와 같은 특별한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 안에 단호하게 개입하셔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우리를 위해 일하셨습니다.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일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도 찾아오셔서 전환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때가 찼습니다. 2) 하나님의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나눴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며, 평범한 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는 놀라운 곳입니다.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며, 어린 아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자들에게 그 나라는 주어질

것입니다. 3) 가까이 왔다 already, not yet.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지만 아직 완전히 임하지 않은 이중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이야기했습니다. 이미 그 나라에 속한 우리가 그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며 기대하며 살아내야 합니다. 4) 회개하여라 회개라는 것은 감정을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돌아서는 방향 전환임을 이야기했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사가 바뀌고, 섬김의 관계로 나아가고, 예수님에

대한 나의 마음이 바뀔 수 있는 그런 회개가 본질적인 것입니다. 5) 복음을 복음은 나를 기쁘게 해주는 무엇이 아닙니다. 복음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십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에게 행하신 이유는 하나님은 사람을 참으로 사랑하시어 자녀로 대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어떠한 위협에도 예수님이 우리의 복음이심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마지막 메시지는 ‘믿어라’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는 많은 단어가 사실은 성경적이지 않은 경우들이 있음을 경험하시나요? 성경의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고 사용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로 절반은 성경에 걸쳐 있고, 절반은 세속 사상이 들어와서 섞이는 경우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하면서도 오해가 심한 단어가 ‘믿음’에 대한 것입니다. 여러분, 간혹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믿기지 않아서 못 믿겠다’ 또는 ‘믿기지 않아서 힘들다’고

합니다. 때로는 ‘내가 정말로 믿고 기도했더니 이루어졌다거나 ’그렇게 열심히 믿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셨다‘고도 합니다. 제가 선교단체에서도 또 청년부 사역을 하면서도 경험한 일들이 있습니다. 교회나 선교단체에 훌륭한 청년 자매들이 많은데, 그 믿음 좋은 자매들이 ‘주님이 좋은 배우자를 주실 줄로 믿고 기도’하다가 노처녀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 내의 인구학적 속성상 자주 일어나는 현상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많은 사람이 마음 깊숙한 곳에 하나님에 대한 실망감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나에게 선하게 행하실 것을 정말로 믿었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나,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한 일이 없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는 결혼도 제대로 안 되나, 이런 깊은 상실감을 겪게 되는 것이지요. “이 대학을 붙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과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믿음에 대한 오해는 어떤 것일까요? 1. 믿어진다? 믿어진다.

이 말은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다는 말이 깔려 있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별로 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믿어졌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이 그런 사람에게는 믿음을 주셨는데, 왜 내게는 그 믿음을 안주셔서 못 믿게 하시는지 답답한 마음을 갖는 사람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씀은 뭐라고 가르쳐주고 있나요? 주님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복음이 믿어질 것이다”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어라!”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성경에

‘믿어질 것이다’라는 표현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에베소서 2:8을 근거로 그런 해석을 취하곤 합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고 하는데... 만약 ‘이것’이 ‘믿음’을 지칭한다면 믿음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원어를 보면 ‘믿음’과 ‘은혜’는 모두 ‘여성 명사’이고, ‘이것’은 ‘중성 명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법상 ‘이것’이 지칭하는 것은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의미인 것이죠. 만약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하나님께서 선물을 안 주셔놓고 믿지 않은 사람들을 심판하시는 것이 이상한 논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믿음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반응입니다. 지난 금요일 설교의 표현대로라면,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실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죠. 간혹 간증을 듣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확 믿어지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 설득되었다는 것이지, 선물로 주셔서 갑자기 나와 무관하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마구 밀어붙이시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C.S 루이스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마음을 강탈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 호소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시고 우리를 톡 건드리시면 우리는 그 신비한 영적 체험으로 거품 물고 쓰러져 버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조작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조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다가가서 진실로 반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2. 내가 소원하는 바를 믿는 믿음? 내가 소원하는 바를 간절히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치유 사건을 설교하며, 그들이 자기 병이 나을 것은 간절히 믿어서 나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병이 있으면 믿음으로 기도하고, 병이 낫지 않는 것은 믿음이 부족해서라고 말합니다. 특별히 치유 집회에 가면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영적 폭력이 많습니다. 이런 집회에서, 이런 기도회에서 병이 낫지 않은 채 집에

돌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마음속에 큰 고통을 떠안습니다. 내가 분명히 믿었는데 왜 안 고쳐주실까? 나는 믿음이 부족한 것인가? 나는 믿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인가? 심각한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혈루병 앓는 여인의 치유 이야기가 있죠. ‘예수님께로 가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사람이, 과연 그 여인 하나뿐이었을까요? 말씀을 읽어보면 예수님을 에워싼 무리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소원이 없었을까요? 간절함이 없었을까요? 믿음은 내가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그 내용과 대상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올해 반드시 결혼할 거라고,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 것, 그것이 기독교의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내가 소원하는 바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믿음을 내가 원하는 축복을 얻어내는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이어지는

오해가 있죠. 3. 의심 없이 세게 믿어야 이뤄진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이 틀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무언가를 구할 때 간절함과 열심이 부족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게’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살살 믿으면 안 돼요. 의심해도 안 돼요. 세게 믿어야만 응답해주신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은 모두 성경의 특정 구절을 오해한 결과입니다. (막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우리에게 익숙한 이 말씀은 앞서 언급한 ‘세게 믿을 것’을 뒷받침 하는 구절로 인식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 22절을 보면 “하나님을 믿으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2-14절까지 올라가면,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고 제자들이 그 말씀을 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20절을 보니 그 다음날 진짜 무화과나무가 말라서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놀라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어라” 말씀하신 것이죠. 여기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명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한 것처럼, 열매 맺지 않는 이스라엘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믿어야 할 사실입니다. 즉, 마땅히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할 이스라엘이 열매는 맺지 않고, 위선으로 가득찬 모습일 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그분이 하신 사실들에 기초하여 우리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의심 없이 굳세게 믿으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도할 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제 믿음이 약해서요.” 자주 쓰고 자주 듣는 표현입니다. 정말 믿음이 충분히 세지 않아서 문제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로 재시며, “믿음이 모자라서 병은 못 났겠구나, 올해 결혼하고 싶으면 믿음 강도를 더 올려라” 이렇게 하실까요? 열정적인 것은 좋을 수 있어요. 최선을 다하는 것도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잘못되면 더 열심히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무엇을 믿는 것인지

그 방향이 바른 것이어야 합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제가 음식을 잘못 먹고 속이 더부룩하고 배가 살살 아픈데, 소화제 대신 두통약을 먹으면서 이거 먹고 꼭 나을 것이라고 세게 믿으면 나을까요? 배가 아플 때는 그냥 소화제 잘 챙겨 먹으면 됩니다. 두통약 먹고 “믿씁니다~~!!” 하고 굳게 믿으면 나을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아이가 아빠에게 장난감을 사달라고 하는데, “네 열심이 부족하니, 더 열심히 장난감을 원하면 사주겠다”라고 말할 부모가

있으신가요? 부모는 자녀의 열심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녀의 필요를 보면서 움직입니다. 4. 마가복음이 가르치는 믿음이란? 마가복음에서 정확한 ‘믿다’라는 동사가 목적어를 동반한 경우는 3~4회 정도 됩니다. 그 중 하나가 우리가 읽은 1:15의 ‘복음을 믿어라’입니다. 그리고 9:42에는 ‘나를 믿어라’(예수님)는 표현이 있고, 11:22에는 아까 보았던 ‘하나님을 믿으라’가 있습니다. 즉, 복음,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것이 마가복음의 믿음입니다. 이것은 사실

다 하나이죠. 믿음이라는 단어가 목적어 없이 사용된 경우는 더 많습니다. 그런 경우들은 특별한 대상이 지칭되지 않고 ‘믿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그 믿음도 결국 생략이 되어 있을 뿐, 복음, 예수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은 병이 나을 것이라는 것에 초점이 아니라, 내 병을 낫게 하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성경 전체가 이야기하는 믿음은 내가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깨닫고 그 사실을 전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열심히 정성껏 믿으면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갖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재고 계시다가 기준을 충족하면 하나씩 복을 떨어뜨려주는 분이 아닌데 말입니다. 로마서 말씀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분인데,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감기를 고치는 것과 암을 낫게 하는 것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부친이 조금은 갑작스럽게 소천하셨습니다. 폐 질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 가족이 믿음이 없기 때문에 병이 낫지 않거나, 당사자의 믿음이 없어서 병이 안 낫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든 고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고치시지 않을 수도 있지요. 우리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 뜻을 받아들이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뜻 가운데 우리의 삶이 인도되어지고, 우리가 그 뜻을 잘 받들어 따라갈 수 있기를... 그분의 그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모세의 위대함은 하나님의 stop을 받아들인 것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0년을 바래왔던 일이었지만, ‘여기까지’라는 하나님의 뜻이 내 뜻보다 더 크고 중요함을 받아들였지요. 5.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까? 그러므로 믿음의 핵심은 ‘믿는 것’ 의지나 감정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믿는가’에 있습니다. 그 믿는 대상에 집중하다보면

느낌이 따라오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냥 그럭저럭 잘 그린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림 옆에 설명을 읽어봅니다. “이 그림은 한 구족 화가가 자신의 몸이 점차 마비되어 죽을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자기 아이에게 마지막 선물로 남기기 위해 굳어가는 몸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완성한 작품입니다.” 이러한 설명을 읽고 그림을 다시 보면 감동이 올라옵니다. 이 느낌이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반응입니다. 다만 그림의 자세한 내용을 알게

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반응입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가 잘 알게 되면, 강렬한 느낌과 감동을 경험합니다. 그 느낌 자체가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면밀하게 검토하며 우리가 그것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제가 유신론, 무신론을 말씀드렸죠. 그것은 증명할 수 있는 과학 명제가 아니라, 그냥 자신의 이해함 속에서 받아들이는 신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모든 사람은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저마다 세상의 실상에 대해 믿는 바가 있는 것이지요.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살다가 죽으면 끝나는 거지”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인생에 대한 그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정말 끝날까요? 누군가는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죽으면 이 땅에서의 고통이 다 없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인생이 고통스러우면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약 죽으면 고통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큰 고통이 온다고

믿는다면, 누가 현재의 고통을 끝내려고 자살을 하겠습니까? 죽음 이후의 상태는 증명할 수 있는 것인가요? 아무도 모릅니다. 각자 믿는 바가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1) 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또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것도 믿음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뭐,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죠. 반면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야. 눈에 보이는 육체가 전부는

아니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믿음이 다른 것입니다. 2)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내가 무엇을 위해 살고, 왜 사는지, 무슨 힘으로 사는지도 우리가 믿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의 목적은 마치 ‘화장실 수를 늘리는 것’ 같습니다. 화장실이 집 안에 없는 곳에서 살다가, 화장실이 있는 집을 살다가, 더 큰 집으로 옮겨가며 화장실 수를 늘리다가 인생을 다 보냅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한 답이 믿음입니다. 3) 내

삶의 목표와 이유와 힘은 무엇인가? 이제 이 질문들에 대해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실들을 찾아봅시다. 오늘 본문에서는 ‘복음’을 믿으라고,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하지요.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 속에,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내가 어디에 속한 존재인지, 무슨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의 답이 다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복음을 믿어라” 말씀하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1-1) 세상에 대해서

성경은 답합니다. 때라 차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 이 세상에 말입니다. 그것이 마가복음이 선포하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믿어야 할 내용입니다. 세상이 무의미하게 그냥 흘러가고 있지 않다! 로마 제국이 강력해 보이고 로마 황제의 통치가 영원할 것 같기에 사람들이 모두 로마 황제의 복음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찼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하나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벗하는 세상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셨다는 것, 그리고 완성해가고 계심을 우리는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이 하나님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점점 부는 집중되고 간격은 커져가고 있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조화롭고 질서가 있는데, 인간들의 세계는 조화와 질서보다는 더 누리고자 하는 욕망 가운데 점점 많은 사람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하나님 없는 세상에 소망이 있을까요? 괜찮을까요? 신이 있다면 모든 인간을 창조했다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하겠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단절된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이 세상은 죄로 인해 깨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고통스럽고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2-2) 나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은 말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2-3) 내 살므이 목표와 이유와 힘이 무엇인지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소개할 때 대부분 소속을 밝히죠. “저는 OO학교/회사에 다니는 OO입니다.”

기독교인들도 가끔 말합니다. “저는 강남에 큰 교회 아시죠? 거기 다녀요.” “저는 그냥 동네 교회 다녀요.” 사실 ‘그냥 동네 교회’라는 말은 좋지 않죠. 열등감이 포함된 단어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사귐의교회’에 다닌다고 말해주십시오. 내가 어디에 소속되었는지를 나타내면서 우리는 자아정체감을 가집니다. 성경은 내 존재의 변화를 말해주고 있어요. 하나님은 우리의 소속을 바꿔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 궁극적 소속이 영원히 바뀌었으므로, 이 땅에서 내가 누리는 잠시간의 소속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막 1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막 10: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아마 우리 사귐 식구들은 우리가 지금 버린 것과 받는 것 사이의 중요한 ‘차이’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지요. 버리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있으나, 우리가 받게 되는 목록에는 아버지가 없습니다. 어머니도 형제도 자매도 자식도 땅도 버렸으면 100배를 받는데, 왜 아버지는 아예 빠졌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나머지 100배는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얻고, 교회 공동체(하늘

가족)를 얻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 버렸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로 말미암아 아버지가 되시고, ‘내세’에 ‘영생’을 주십니다. 그러나 ‘현세’에도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동체,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과정에서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공동체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현세를 살아가게 하시는 힘입니다. 또한 교회가 하나님 나라다움을 드러낼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그리로 들어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천국 열쇠’를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문을 교회가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세상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기도 하고, 우리로 인해 들어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방에서 교회가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청년아

때가 찼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교회의 부흥과 회복을 위해서, 건강한 교회가 이 땅에 세워지는 일을 위해서 여러분 인생을 드리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우리 교회는 어떠한 교회인가,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미비했으나, 그래도 빠른 시간 안에 건강한 교회를 꿈꾸는 사람들, 예수님을 잘 따르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작다면 여전히 작지만, 그러나 성경 속 어떤 공동체와 견주어도 작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이제 우리 공동체가 여기서부터의 한걸음이 중요하겠지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고, 세상에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는 모였을 뿐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이 모인다는 것은 중요한 시작입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 주님이 피 값으로 세우신 그 비전을 따라가는가. 저에게는 이것이 막중한 책임감으로 다가옵니다.

저의 첫 번째 목표는 사귐의 공동체에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끝까지 함께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목표도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숫자를 늘리고 싶은 욕심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모여 있는 사람들끼리 재미있게 신나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가 믿지 않는 영혼들을 주님 만나도록 하지 못하면, 우리가 늙으면 교회는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미래 세대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살리시고, 우리를 통해서 또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교회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저는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전하고, 믿지 않는 영혼들이 예수님을 알아가는 통로가 되는 교회. 목사인 저에게는 은퇴가 있습니다. 길면 30년, 그 안에 하나님이 저에게 맡기신 시간이 얼마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큼의 시간이던지, 저는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살아내고 싶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지키시는 이 교회가 30년 후에도 하나님 나라가 경험되는 그런 교회가 되고... 다음 세대에게도 잘 물려주어 50년 후에도 이곳은 하나님 나라이길 소망합니다. 그 사이 주님 오셔도 ‘할렐루야!’ 하며 그 나라의 완성을 맞이할 수 있는 교회되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그로부터 2000년 동안 전해져 온 복음. 우리는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믿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속하여 살아갈 때, 우리를

바꾼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그 날까지 일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받아들입니다.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