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주님의 권능, 우리의 위로 / 강정규 목사

2021-07-18 · 이사야 40:1-8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예언서를 설교합니다. 그래서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몇가지를 여러분과 나누며 시작하려 합니다. ‘예언'(豫言)’이 뭘까요? 우리는 예언을 말할 때 ‘예(豫 : 미리 예)’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래의 무엇에 자꾸 주목하는 것이죠. 하지만 구약에서 예언자 ‘나비’를 이해할 때 우리는 ‘언(言 : 말씀 언)’에 보다 강조점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입니다. ‘나비’가 히브리어로 예언자라면, 헬라어는

‘프로페테스’입니다. 여기서 영어 ‘prophet’[prɑːfɪt]이 나온 것입니다. ‘pro-phet’에서 ‘pro’는 ‘앞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앞의 것(미래)을 말하는 것을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공간적 의미가 본래적 의미입니다. ‘회중 앞에서...’ 예언자의 본래적 의미는 ‘회중 앞에서 신을 대변하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회중 앞에 서서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여 전하는 자가 예언자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저는 예언자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미래에 대한 것은 하나도 예측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뜻을 대변하기 위해 설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세상의 ‘예언자’와 성경의 ‘예언자’는 의미상 차이가 있습니다. 미래를 점치는 것?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언기도? 만약 미래를 알기 위해 예언기도를 받으러 다닌다면, 세상 사람들이 점을 보러 다니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청년 시절 ‘하나님의 음성 듣기’라는 것으로 가장 유명한 선교단체에서

훈련을 받으며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바에 부합한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에 위배되지 않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미 주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우리 삶에 필요한 지혜를 주셨습니다. 이 안에서 발견하시면 됩니다. 저는 그것을 돕는 역할입니다. 예언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이며, 쉽게 말해 당시의 설교자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설교자의 가장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 성경을 가감없이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언제나 좋은 설교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여러분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보편적인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예언자가 선포할 말씀은 그때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습니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는 그런 부르심 가운데 40년 가까이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들이 어떻게 예언을 했을 것 같으세요. 신내림 받은 사람처럼 갑자기 이들에게 또 다른 자아가 임해서 말씀을 선포했을까요? 예언자가 하나님의 명에 따라 말씀을 선포하지만, 결코 자아를 상실한 기계적 대언자는 아니었습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의지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였습니다. 예언자의 자아가 여호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습니다. 예언자는 때로는 이스라엘 편에 서서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모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돌려놓기도 합니다(암

7:1-6). 그러니까 말씀의 대언자라는 것이 기계적인 스피커 역할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함 가운데 그 뜻을 전하는 심부름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후, 그것을 자신의 언어로 정리하여 전했습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언자는 자신의 선포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 문학적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자의 역할과 매우 유사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는 주전 8세기를 배경으로

시작합니다. 수요 바이블 클래스를 통해서 다뤘던 내용이니 간단히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당시의 가장 강력한 국가는 앗수르(아시리아)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가 1시 방향에 있고 이스라엘이 7시 방향에 있다면, 앗수르가 계속 왼쪽으로 세력을 넓혀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위쪽에 있는 아람(시리아)과 북이스라엘은 앗수르를 대항하기 위해 힘을 합쳐 ‘반 앗수르 동맹’을 맺습니다. 여기에 남유다를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남 유다는 거절합니다. 당시 남

유다는 북이스라엘과 싸워도 패배할만큼 약소국이었습니다. 시리아(아람)-에브라임(북이스라엘) 연합군이 반 앗수르 동맹을 거절한 남유다를 공격하게 됩니다. 바로 이 시기에 하나님이 남 유다에 하나님의 뜻을 전할 도구로 사용한 것이 ‘이사야’입니다. 이사야는 시리아-에브라임의 공격 상황에 대하여, 여호와께 의지할 것을 명합니다. 즉, 정치적으로 어느쪽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사야의 명령을 듣기보다 눈앞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앗수르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앗수르에 대한 봉신국가가 되겠다고 합니다. 앗수르가 이것을 빌미로 아람(시리아)을 멸망시키고, 북이스라엘도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럼 이러한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니 유다 왕 아하스의 선택은 옳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남유다 위에 국경선을 맞대고 있던 나라는 북이스라엘이었죠. 그러나 북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이제 북쪽 국경선은 앗수르가 된 것입니다. 남유다는 더 큰 위기를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남유다

아하스 왕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을 때는, 남 유다의 정치 노선이 바뀌게 됩니다. 앗수르가 왕위 계승의 혼란이 생기며 조금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주변 다른 나라들과 힘을 합쳐서 ‘반 앗수르 동맹’을 결성합니다. 앗수르의 산헤립은 왕위 계승의 혼란을 극복하고 정복 전쟁에 나섭니다. 그들의 목표는 지중해 진출이었고, 이는 풍요로운 애굽 땅을 정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애굽으로 가는 길목, 바로 그곳에 남유다가

있었습니다. 앗수르는 애굽으로 가는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해 남유다를 침공합니다. 남유다는 앗수르의 공격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합니다. 47개 성읍 가운데 예루살렘 하나만 남고 모든 성이 점령을 당합니다. 앗수르에서는 ‘랍사게’라는 인물을 협상 대표로 삼아 유다에게 ‘항복’을 권고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제 항복할 것인지, 아니면 앗수르를 대항하여 싸울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비웃으며,

유다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것을 따르지 말라. 그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시리니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할지라도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너희는 앗수르 왕의 말을 들어라.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오라.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이 열방의 신들 중에 어떤 신이 자기의 나라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냈느냐, 여호와가

능히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사 36:15-20) 히스기야가 이러한 조롱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의 성전으로 갑니다. 그분께 엎드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이사야에게 보내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자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종 다윗을 위해서’(사 37:35) 예루살렘을 보호하고 구원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후손, 다윗의 왕조는 여호와 앞에 불순종했지만, 다윗에게 하신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 구원을 결정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앗수를 군대를 칩니다. 하루 사이에 18만 5천명이 죽습니다. 역사는 이 죽음을 ‘역병’으로 해석합니다. 역사는 앗수르의 퇴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다스리는 남유다는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개인도 죽을 병에 걸렸으나 기도함으로 15년의 수명 연장을 약속 받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연기된 것입니다. 질병으로부터 치유를 받은 히스기야 왕에게 멀리 바벨론의 사절단이 방문을 합니다.

바벨론은 고대 근동에 오랫동안 존재한 전통적인 강국입니다. 당시 서서히 앗수르의 대항마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마도 바벨론 사절단이 온 이유는 앗수르를 대항하기 위한 우호조약을 유다와 맺기 위한 이유였을 것입니다. 조그만 나라였던 유다의 왕 히스기야는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예물을 보내며 자신을 동맹의 한 축으로 인정해 준 것에 무척 고무된 것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이 바벨론의 협력자로 부족함이 없음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부와 군사력을

그들에게 보여줍니다. 이 모습에 대하여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어 히스기야를 책망합니다. 이사야는 초지일관 강대국을 의존하는 유다의 대외정책을 비판합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기보다 다른 나라를 의지하는 것은 여호와를 배반하는 우상숭배라고 고발합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위기의 순간마다, 앗수르, 애굽 등 주변 나라를 의지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구원을 경험했음에도, 대외정책에 있어서 별로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바벨론을 의지하는 모습. 이사야는 히스기야에게

남유다의 운명에 대해서 심판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바로 오늘 남유다의 모든 것을 보고 돌아간 바벨론에 의해서 그들이 보았던 모든 것이 바벨론의 차지가 될 것이라 말합니다. 또한 히스기야의 아들들이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갈 것은 선포합니다. 이러한 선포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그는 이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겸허히 수긍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서 예루살렘이 구원받았던 경험과, 개인적 치유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를 배운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분을 의지하면 살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후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면 비록 심판의 메시지가 주어졌더라도 그 심판이 연기될 것을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신앙으로 그것을 극복해 나가고자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이 39장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39장까지 읽은 후, 40장을 넘어가면 그 안에 연결되지 않는 시간의 간격이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39장까지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의 일을 다뤘는데, 갑자기 역사적 배경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도 수요 바이블 클래스를 통해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혹시 못 보신 분들은 앞으로의 이사야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꼭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B.C 701년 경에 있었던 이야기를 39장에서 다루고 있다면, 40장은 B.C 536년에 가까운 상황입니다. 15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입니다. 그 사이에 역사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보호로 앗수르의 침공에서 살아남은 유다 왕조는 계속 이어집니다. 히스기야에게 주어진 심판의 메시지가 그들 후손의 신실함으로 인해서 취소되거나 계속 연기된다면 좋았겠으나, 안타깝게도 남유다 왕조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사이 고대 근동의 패권은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넘어갑니다. 이제 바벨론이 최강대국이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서 눈치싸움을 하던 남유다는 이제 바벨론과 애굽 사이에서 눈치싸움을 하며

살아갑니다. 어떠한 위기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다면 하나님의 보호를 경험하겠으나, 문제는 유다가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나아갑니다. 결국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현실이 됩니다. 바벨론이 남유다를 침공하여 20년간 3차례의 포로를 끌고 갑니다. 3차 침공 때에는 예루살렘의 성전을 파괴하고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아서 끌고 갑니다. 남유다가 멸망한 것입니다. 그렇게 바벨론 땅에서 포로가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B.C 586년의 일입니다. 우리도

슬픈 역사이지만 일제 강점기를 경험했고, 일본에 강제 노역을 위해 끌려갔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척박함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주권을 잃어버린 백성의 삶이란 그런 것이지요. 예레미야는 유다의 마지막 멸망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고, 에스겔은 포로로 끌려간 때에 하나님의 예언자로 부름을 받아 그곳에서 예언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에스겔서는 포로기의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절망감이 가득했습니다. 고대 나라들은

각 나라마다 ‘신’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유대인의 신은 여호와 하나님, 다른 말로 여호와(야웨) 하나님입니다. 고대 국가들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으로 비쳤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기는 전쟁은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나안을 정복할 때,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 주변 나라를 정복할 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승리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을 통해서 세운 나라는 영원할 것이라는 ‘다윗 언약’을 약속해주셨기에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한, 자신들의 나라가 망하지 않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망한 것입니다. 그냥 망한 것이 아니라, 이들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성전’마저 다 파괴되었습니다. 원래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셔서 나라를 세우시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셨던 하나님인데... 이제 그 영광스러운 시절은 다 지나갔고, 이스라엘은 이 나라 저 나라에 휘둘리다가 끝내 멸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했던 ‘가나안

땅’에서도 쫓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이 사건을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배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고, 약속의 땅(가나안)에서 쫓겨났고, 왕조(다윗)도 무너졌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바벨론의 신에게 패배했습니다. 그럼 이들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그 이유를 말씀하신바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로 결정하신 것은, 그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민족 중에 가장 작기 때문입니다. 가장 연약해요. 하나님 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의 인생에 대입해볼까요? 본인 스스로가 자기 삶을 다 채우고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품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 자리를 내어드리지 않기 때문이죠. 이미 내가 스스로 강하다고 여기는 인생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강하기에 자신을 믿고 삽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가. 결핍을 아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생긴 빈 자리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자입니다. 프토코스. 주님이 돌보시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상태. 바로 그들이 주님을 간절히 사모함으로 주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입니다. 신자의 연약함은 그래서 때론 놀라운 힘을 경험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고난이 기회가 됩니다. 연약함과 고통은 모두 힘겨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우리가 그 가운데서 주님을 붙드는 것을 배웠기에 그것은 우리에게 연약함과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한 민족인데, 그들이 나라를 이루고 살면서 마치 자신들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처럼 여기며 스스로가 자신들에게서 하나님을 제외해버렸으니... 그들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성전과 다윗 왕조가 자리 잡고 있던 예루살렘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잿더미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포로로 끌려온 유배민의 눈에는 절망적인 자신들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에 역설이 있는데요. 그들은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라는 남 탓에서 시작해서, 결국은 포로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들의 잘못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때 주님의 예언 말씀을 새겨들었더라면….” 포로기는 너무나 절망적인 순간이었으나, 오히려 가나안 땅에서 다윗 왕조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잊어버렸던 하나님을 향한 갈망함을 되찾습니다.

이들에게 포로의 시간은 이들 스스로를 점검하고 정결하게 회복되는 그러한 거듭남의 시간인 것이죠. B.C 586년에 성전이 파괴되고 완전히 멸망을 했습니다. 그로부터 포로생활이 시작되고 B.C 536년 스룹바벨에 의한 1차 귀환이 시작될 때까지 그들은 포로기에서 절망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이제는 심판의 메시지가 아닌 회복의 메시지,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포로가 되어 한참의 시간 동안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그 때, 다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사야 40장부터의 말씀입니다. (사 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절의 노역의 때가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바벨론의 포로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제 바벨론의 포로기가 끝나고 이스라엘이 다시 회복될 것을 선포하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메시지가 그들에게는 정말 ‘복음’이지 않았을까요? 그들이 이 메시지를 들었을 때의 감격이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군대에서 전역 날짜만 다가와도 그것이 ‘복음’인데, 포로된 그들에게 이 메시지는 진정한 복음이었을 것입니다. 1절을 잘 살펴보면, 여호와를 대신하여 복수의 인물들(2인칭 복수 남성)인 ‘너희’에게 여호와의 백성을 위로하라고 명령합니다. ‘내 백성’이란 포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멀리 쫓아내어 마치 ‘내 백성이 아닌’ 것처럼 두셨다가, 이제 하나님은 그들을 다시 ‘암미’(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내 백성’이라는 호칭 자체가 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파괴되었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후반부를 시작하고 있는 ‘위로하라, 위로하라’는 이 단락뿐만 아니라 후반부 전체의 제목과도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그분으로부터 위로를 받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의 손에 넘기시고 얼굴을 감추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위로자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이후 그 누구로부터도 위로 받지 못하였던 하나님 백성에게 마침내 기쁜 소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가엾이 여기시어(49:13) 진노를 거두시고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 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사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표현된 어떤 이들에게 명하여 예루살렘을 위로하고, 죄로 인한 심판의 시대가 끝났음을 선포하며, 하나님을 위하여 광야에

큰 길을 닦으라고 명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 일을 수행하는 ‘너희’는 누구일까요?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너희’들을 예언자로 보기도 하고, 52장의 배경을 통해 파수꾼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언자나 파수꾼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역할을 충족하기에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누구일까요? 학자들은 이사야 40장이 ‘하늘어전회의’라는 배경의 틀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하늘어전회의란 천상의 존재들 안에

이루어지는 회의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하늘어전회의’라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이런 형식으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왕상 22:19-22, 욥 1:6-12, 2:1-6, 슥 3:1-10). 이것은 때로는 개인에 대해, 때로는 민족에 대해, 때로는 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그런 최고의 회의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욥기도 천상의 회의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사야의 다른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이사야 6장입니다.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입니다. 주께서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고 천상의 존재들이 그 옆에 있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유다의 심판을 결정하는 천상의 회의에 참석해서 사명을 받습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는 유다의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여호와의 신적 결정임을 분명히 선언합니다. (사 6:11)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사 6:12)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서가 시작부터 이런 배경적 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전했기 때문에 같은 틀로서 40장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과 하늘의 왕이신 여호와가 다른 신적 존재들에게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게 죄로 인해 선고되었던 심판의 시대가 끝나고, 여호와가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와 위로의 통치를 하는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이런 내용이 무엇을 말해줍니까? 포로기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마르둑’에게 패배해서 자신들이 포로가 되었다는 패배의식과 좌절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패한 전쟁을 그들이 어찌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패배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을 통해서 밝혀지는 것처럼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패배의 결과가 아닙니다.지금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정이 있었고, 그 계획에 따라 바벨론이 하나님의 막대기가 되어 이스라엘을 친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권능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신앙생활 안에서 겪는 많은 일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 이 문제 앞에서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무능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없거나 아니면 나의 하나님이 아니거나, 그가 이

세상의 일들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현실과 상황에 갇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동일하게 반복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적인 한계와 어쩌면 그것이 사람의 당연한 반응일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그 이상의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닥친 상황. 그것이 회개를 위한 것인지, 훈련을 위한 것인지, 테스트인지, 하나님의 다른 사역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벗어난 것일 수는 없음을 저는 단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답을 찾아야 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길을 따라서 걸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분 안에서 회복도 일어나며 길도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서 무조건적 심판을 하늘어전회의에서 선언한 것과 같이, 후반부의 시작인 40장에서는 무조건적 구원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6장이 전반부를 지배하는 심판 신학의 압축인 것처럼 40장은

후반부 핵심인 소망 신학의 근거가 제시되는 셈입니다. 6장에서 ‘이 백성’(6:9-10)으로 불리던 이스라엘은 이사야 ‘나의 백성’(40:1)으로 불립니다. 이로써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변화가 생김을 보여줍니다. 또한 두 본문은 ‘여호와의 영광’이라는 주제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권을 보여줍니다. 6장과 40장은 200년의 시간의 간격이 존재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사 6: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사 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사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소리’가 분사와 결합하여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경우는 6장과 40장이 유일한 경우입니다. 이러한 관계는 저자가 의도적으로 6장과 40장의 메시지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관계와 배치를 통해 오늘 이 말씀이 주는 메시지는 더욱 강력해지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히 ‘위로하라’, ‘회복하라’ 정도의 따스함을 주는 메시지가 아닌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이 말씀을 듣는 제일 첫 번째 독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는 상황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파국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순히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밀려서 포로된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일어난 일임을 이사야서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을 심판하여 바벨론으로 보내셨던 분, 그것을 통해 이들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니, 이 문제를 풀어갈 힘도 그분께 있는 것입니다. 40장의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선포가, 다시금 역사 가운데 실현되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뿐인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죠. 말씀이 계시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 가운데 살아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의 실제성, 선포의 현실화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이렇게 포로로 살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회복을 명하시고 너희를 위로하기 원하신다. 이제 복역의 시간은 끝났다.” 제가 믿음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 앞으로 하실 일도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자면, 6장에서부터 있었고, 39장 히스기야에게 주었던 심판의 메시지가 말뿐이 아닌 현실이 되듯이, 이제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위로는 그들의 삶을 바꾸는 실제적인 위로와 용서라는 것이죠. 인간의 위로는 때로는 마음을 전하는 것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당장 현실을 바꾸어 그 상황에서 건져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위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에 실제적인 변화를 만들어 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곧 우리의 위로인 것입니다.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 ‘꽃이 시든 후에’라는 표현은 심판이 지나간 것을 의미하죠. 심판이 지난 간 후에 이사야의 구원의 말씀은 성취될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영원히 설 것이다”라는 말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바벨론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귀환은 그것을

강력하게 인도하시는 여호와와 함께 광야를 지나 본향으로 돌아오는 이동임을 오늘 말씀은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후의 역사는 어떻습니까? 실제로 역사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 약 7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따라 이스라엘의 귀환으로 이루어집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죠. 그러나 말씀은 영원히 섭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눈앞의 것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할 때가 있습니다. 나라의 멸망, 성전의 파괴, 포로된 실상 앞에서 이스라엘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때 그들을 일깨우는 것이 예언자들의 선포였습니다.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라.” 남유다의 죄악, 하나님으로부터 얼굴을 돌린 그들의 모습으로 인해 현재적 심판이 그들 가운데 주어졌지만, 이제 그 안에서 충분히 깨달은 후에 하나님은 그들을 회복시키고자 일하십니다. (사 6: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사 40: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사야서는 이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님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오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로에서 해방되는 복음이

그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듯이, 죄악된 세상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하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그분은 나라는 임하였고 완성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도 눈앞의 현실이 있습니다.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님이 버리셨나? 하나님이 없나?” 그런 우리의 마음, 사탄의 속삭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의 예언자의 말씀을 보십시오. 성경의 진리를 열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고, 어쩌면 우리의 인생도 주어진 시간이 지나면 나그네 삶을 마칠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일하심은 영원합니다.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전하는 크신 하나님, 그분의 일하심. 세상의 어떠함도 막을 수 없는 그분의 광대하심. 오늘 우리의 초점과 우리의 예배가 그분께 향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저는 이사야서를 읽을 때마다 이 찬양이 떠오릅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my God, that is who You are. 광야에 큰 길을 만드시고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시는 주님, 우리가 알 수 없는 큰 능력을 행하시는 주님. 영원한 약속을 주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주님, 어둠 속에서 빛이 되시는 주님. 그는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나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