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를 할 때, 가장 큰 2가지 방법론이 있다면 ‘강해설교’와 ‘주제설교’입니다. 강해설교는 책을 정한 후 본문을 계속 설교해 가는 것입니다. 장점은 장기간 동안 한권의 책을 연속적으로 다루다보니 보다 깊이 있는 분석과 설교가 가능합니다. 주제설교는 성경의 본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 주제별로 다루는 것입니다. 한가지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의 여러 부분을 통해서 설명하는 방식을 씁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 나라> 혹은 <믿음> 이라는 주제를
정하고 설교를 해나가면 주제설교이고, <마태복음> 혹은 <이사야> 이런 식으로 책을 중심으로 설교를 하면 강해설교인 것이죠. 저는 오늘부터 금요일마다 여러분과 주제설교를 통해서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정리해나가려고 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이 쓰신 <새신자반>을 중심으로 설교를 준비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누구신가? 2. 나는(인간은) 누구인가? 3. 예수님은 누구신가? 4. 성령님은 누구신가? 5. 성경이란 6. 기도란 7. 교회란 9.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 10.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이재철 목사님은 지금은 은퇴하셨지만 양화진에 있는 100주년 기념교회를 담임하셨던 분이시죠. 이분은 강해설교로 굉장히 유명한 분입니다. 요한복음을 6년 2개월 동안 강해설교를 하기도 하셨죠. 또한 제가 신학교 시절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셨던 선배 목사님이기도 합니다. 많은 책을 쓰셨는데 <비전의 사람>, <인간의 일생>,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등을 쓰기도 하셨고, 얼마 전에 유명세를 탔던 싱어게인 가수
이승윤, 또 유튜버 이승국 씨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1988년에 먼저 주님의교회를 개척하셨는데,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교인들과 나누기 위해서 ‘새신자반’을 시작하였습니다. ‘초신자’가 아니라 ‘새신자’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알아야 할 것을 바르게 알아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새신자반>이라는 책은 6년 동안 주님의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안식년을 맞아 책으로 집필하게 된
내용입니다. <새신자반> 이후에는 <성숙자반> 그리고 <사명자반>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희의 목표는 일단 <새신자반>입니다. 10과이지만, 저는 욕심내지 않고 천천히 다루고, 이를 바탕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 30분 정도의 설교로 구성을 할 예정입니다. 그러므로 1과를 끝내는데 2주, 3주가 소요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를 정리하는 장기간의 프로젝트입니다. 아시겠지만 저는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입니다. 성경공부는
성경의 구성과 내용과 흐름을 가르치는 것이죠. 반면, 제가 많이 해보지 않은 부분이 <양육>을 하는 일입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도가 무엇인지, 이런 것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본 경험이 적습니다. 어쩌면 <새신자반>의 내용은 대부분 이미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미 신앙생활을 오랜 시간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이것들이 새롭게 정리되고, 또 교정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시작해보려 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입니다. 시작해보겠습니다. 1과. 하나님은 누구신가? 아마도 이 질문은 매우 쉬운 대답이 툭툭 튀어나올 수도 있는 대답이고, 어쩌면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경험 속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유추할 것이고, 누군가는 객관적인 기록을 통해서 이 질문을 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진실한 모습이 맞는가? 어쩌면 유한한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육체를 지닌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둠인
인간이 빛이신 하나님을 온전히 안다는 것은 맹인이 손을 더듬어 코끼리를 온전히 인식하려는 것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직은 하나님을 더듬어 보는 수준에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영이신 하나님 앞에 영으로 서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온전히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겸손하게 그분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알아 가려는 노력을 일평생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다 알았다는 것은 자만이며, 그러한 자만에 빠질 때 실은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을 요즘에 자주 보지요. 포로생활이 그들에게 주어졌을 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대로 정의를 내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고 하나님을 가장 잘 안다고 자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들은 가장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우리가 나누지만, 토마스 성인의 이야기로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없음을 잊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후의 인간 지식이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 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의 제일 첫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 하나님, 천지, 창조’라는 4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구절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지만, 사실 이 네
단어는 모두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태초. 대체 태초는 언제일까요? 이 우주가 언제 생겼는가? 과학 만능의 시대인 오늘에도 이 질문에 대한 과학의 해답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육체를 지니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겸손하게 무릎 꿇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인간은 감히 없다고 봅니다. 천지.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측량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200억 광년쯤
된다고 하는데, 이는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가는 빛이 200억 년 동안 가야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그럼 천지의 전부인가? 그것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감히 ‘천지’를 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창조. 내 머리카락은 분명히 나의 것이지만, 돋아나는 흰머리를 내 능력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의학이 발전하여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창조해 주신 뼈의 완전한 기능을 대신하지 못합니다. 그 위대한 과학도 인간의 생명인 피를 만들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대신할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창세기 1:1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처음부터 믿음의 대상인 것이죠. 그런데 이 말씀을 믿느냐, 아니냐에 따라 인생의 과정과 결과는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주 되심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인간의 삶은 우연히 태어난 존재일 뿐이고,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창조주 되심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피조물에 대한 창조주의 사용 설명서’로 인정하게 됩니다. 이 세상 모든 제품들은 만든 제조자가 있는데, 제조자보다 그 제품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은 없지요. 그러므로 제조자들이 자신의 제품에 ‘사용 설명서’를 넣어줍니다. 그것을 따르면 제품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인생에 대한 창조자의 사용 설명서인 ‘성경’을 믿고 따르는 것이, 인생이란 최고의 작품을 망가뜨리거나 탕진 혹은 오용하지 않고
영원히 바르게 가꾸어 가는 길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니신 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를 함께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달리, 남자와 여자의 형상을 모두 지니고 계신 분입니다. 여기서 형상이란 외적 모습이 아닌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닌 분입니다. 하나님은 앗수르 18만 5천 군대를 하룻밤 사이에 진멸시키는 등, 강력한
부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크신 하나님의 위대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부성의 특성은 강함이지만, 강한 것은 섬세하지 못합니다. 고열에 시달리는 어린 자식이 밤잠을 설칠 때, 어머니는 아이의 침상에서 뜬눈으로 밤을 새웁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만 듣고도, 아이의 표정만 보고도, 아이가 무엇을 원하는지,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차립니다. 여자는 약해도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요. 아이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부드럽고 포근하고 그윽하면서도 끝없이 깊습니다. 아버지의 부성이 따라갈 수 없는 모성의 특징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위력적인 부성 뿐 아니라 이와 같은 모성을 함께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감동적인 일인가요? 모성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성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시 121: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런 말씀들은 모성의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상상하기 힘든 말씀들입니다. 저도 저희 교회 집사님들하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아버지들은 좀 강하게 아이에게 말하는 경우가 있지요. “사내가 그 정도는 참아야지.” 그러나 어머니들은 연약함을 발견하면 감싸고 품어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성과 모성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특별히 모성을 지니신 하나님이기에 사랑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어주시는 것을 기꺼이 하시는 것입니다. 청년부의 준형 형제가 성경을 열심히 읽습니다. 구약을 읽다보면 하나님의 부성들이 너무 느껴져서 무섭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구약도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수많은 모성들이 있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 바로잡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모습이 더 많지요. 신약에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모습도 있지만,
또 그 안에 하나님의 부성이 느껴지는 부분도 많습니다. 하나님께 부성과 모성이 함께 있음을 우리가 제대로 보지 않으면 다른 교리로 그 부족함에 대한 이해를 채우려 합니다. 이단 가운데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교파도 있지요. 또한 가톨릭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신격화하여 ‘성모 마리아’로 섬기며 모성에 대한 갈구를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 마리아가 흉내 낼 수조차 없는 하나님의 모성을 완벽하게 지니고 계십니다.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니신 하나님, 그분만으로도 우리는 족하고도 남습니다. 셋째,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시다. 한국에서 기복신앙에 대한 비판이 크게 생겨나고, 저는 그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기에, 제 안에도 기복신앙에 대한 염려와 경계가 매우 큽니다. 그런데 그로 인한 반작용으로 ‘복’이 얼마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창 1:27-28a)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창 5:1)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창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제일 먼저 행하신 것을 뭐라고 하나요? 인간에 대한 어떤 요구가 먼저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로 행하신 것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을 창조하시던
그날 즉시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즐겨 하시는 분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복이란 무엇일까요? 이 복을 이해하기 쉬운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S전자, L전자 제품이 더욱 비싸지만 믿고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값비싼 물건이지만 애프터서비스가 철저하기 때문입니다. 값비싼 자동차를 생각해봅시다. 조그마한 나사가 하나만 풀려도 자동차는 위험한 흉기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애프터서비스가 보장되지 않는 자동차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애프터서비스 없이는 사람답게 살아갈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이 없다면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치는 흉기가 되기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을 구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복을 구하는 행위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란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뒤에 사람으로
불렸다는 창세기 5:2의 말씀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복을 구하는 것, ‘기복’은 옳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기복주의’는 철저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기복주의란 하나님이 아닌 ‘복’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초점의 차이는 굉장히 큰 것입니다. 남녀가 만날 때에도 그 사람이 좋은 것과 그 사람이 줄 수 있는 다른 것이 좋은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었으니 사람이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함이고,
애프터서비스는 그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입니다. 만약 애프터서비스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허구한 날 정비소에 세워 두기만 하는 자동차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자동차가 아닌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은 언제나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것이 인간의 삶의 목적입니다. 복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은총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사실 그런 사람은 꼭 하나님이 아니어도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그러한 복을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 그것을 쫓아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우상 숭배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복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복을 주시며 함께 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훈련시키시는 분’입니다. 오늘 하나님에 대해 살펴볼 마지막 가르침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극히 사랑하신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시 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시고, 이런 마음으로 지키시는 이스라엘이라면, 이 민족은 대궐 같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며 살아야 마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나라를 형성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은 혹독한 노예 생활입니다. 애굽에서의 400년.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당신의 자녀를 반드시 ‘훈련시키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타고난 사람이라도 훈련이 없다면, 그런 사람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딸 수는 없겠죠. 훈련을 시키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기력하고 무능한 자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성숙한 도구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훈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신뢰받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이나 고독한 훈련을 받은 것도, 다윗이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 미친 시늉까지 해야
할 정도로 가혹한 훈련을 받은 것도 모두 같은 이유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우리가 닮고 싶은 사람들 가운데 훈련이 없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책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그대가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아직까지 하나님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그대는 성숙한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다. 이 말의 의미는, 그대가 지금 전혀 예상하지 않은 시련과 어려움에 처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그대를 훈련시키려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믿으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신앙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기 시작하셨음을 깨달으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당면한 시련을 피하려 하지 말라. 그 시련에 적극적으로 맞서라. 하나님께서는 필히 그대를 우뚝 세워 주실 것이다.” 제가 얼마 전에도 나눴던 ‘시이-고견’과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영어에도 이런 경구가 있더군요. Don’t pray for an easy life, but pray to be a strong man. 평안한 삶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훈련에 기쁨으로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다윗은 생존 자체가 위협받는 그 혹독한 훈련 가운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34: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시 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시 34: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의 이 찬양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욱 강한 사람으로 친히 훈련시켜 주고 계심을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훈련을 기꺼이 받아들이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그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고, 어머니처럼 우리를 보듬어 안아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가장 행복한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특별한 이유와 목적을 갖고 계시기에 우리를 훈련하시는 분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이 순간도 그 하나님의 섭리 안에, 사랑 안에 거하고 있음을 믿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다해 그분을 높여드리고, 그분께 나아가고, 그분을 의지하여 주어진 삶의 모든 상황 가운데 승리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