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이사야서가 39장까지의 내용과 40장부터의 내용이 어떻게 다른지 나눴습니다. 또한 수요 바이블클래스를 통해서 이사야서의 배경, 더 나아가 예언서의 시대적 배경을 다뤘습니다. 저는 지난 2주간의 바이블클래스 내용과, 다음 바이블 클래스 내용까지 세 편을 이해한다면, 여러분이 예언서를 읽기에 충분한 배경지식을 확보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통일왕국 이후, 분열왕국 시대와 앗수르 제국, 북이스라엘의 멸망, 남유다와 바벨론
제국, 남유다의 멸망과 포로, 페르시아의 등장, 유다의 귀환. 이렇게 열강의 변천과 그에 따른 이스라엘의 상황들을 정리해서 바라볼 수 있다면, 선지서를 이해할 수 있는 관점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이사야서는 앗수르 – 바벨론 – 페르시아 시대라는 3개의 시대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1-39장은 앗수르 시대, 40-55장은 바벨론 포로 시대, 56-66장은 페르시아 귀환 시대를 다루고 있는 매우 독특한 책입니다. 우리가 지난주부터 살펴보는 이사야 후반부의
시작인 40장부터의 말씀은 유다가 멸망하여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살아가던 때의 모습이라고 설명을 드렸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왜 멸망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바이블 클래스를 보십시오. 저는 그것을 여러분이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여기고 오늘 설교를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 배경만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다면, 40장 이후의 성경은 읽기만 하면 그냥 다 이해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를
다루는 40-55장까지라고 했습니다. 이 부분도 들여다보면 다시 구분된 특징이 있습니다. 도입부(40:1-11)와 결부(55:6-13)를 빼면 안의 내용이 둘로 나눠집니다. 1) 40:12-49:13 _ 야곱-이스라엘에게 주는 말씀 야곱의 탄식이 담긴 내용으로 시작 (40:12-31) : 여호와의 무관심 또는 침묵에 불만을 토로하는 야곱-이스라엘에게 회복과 귀향의 약속이 주어짐 2) 49:14-55:5 _ 시온-예루살렘에게 주는 말씀 시온의 탄식이 담긴 내용으로
시작 (49:14-26) : 마찬가지의 불만을 토로하는 시온-예루살렘에게는 복구와 후손의 약속이 주어짐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바벨론, 갈대아, 고레스와 같은 역사적 이름들은 40-48장에서만 등장하고, 49-55장에는 비유적, 비역사적 표현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앞부분은 역사적인 의미 안에서 읽는 것이 더 도움이 되고, 뒷 부분은 시대적, 사건적 한계를 넘어 포괄적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오늘 우리는 40-48장에 해당하는 포로시대 예언 전반부를 다뤄보려고
합니다. 이 부분은 신약성경이 자주 인용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부분에는 여러분이 평소에 많이 들어봤던 그 말씀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만큼 신약에서도 많이 인용하고, 우리에게조차 익숙합니다. 제가 얼마 전에 저희 교회의 톡방에 이런 표현을 남긴 적이 있죠. “우리가 예언서의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은 성경의 말씀들이 신화나 전설 속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실제로 일어났음을 우리가 이해할 때, 그 역사에
개입하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에도 역사하고 계심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포로기를 살아가던 유대인에게 주셨던 말씀인 동시에, 신약을 살아가던 신약성경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다뤘든 40장의 시작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메시지로 시작합니다. 위로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이들에게 주어졌던 고난의 시기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이들을 위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연결성 있는 메시지를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시작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부터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서 나라와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에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후손들 가운데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준다면, 출애굽기는 그들이 어떻게 민족을 이루어 가는지 보여줍니다.
모세오경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시간이죠. 그리고 여호수아 때에 이르러 이스라엘 민족은 약속의 땅을 차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땅을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모든 백성에게 땅을 분배하시고, 각자 분배 받은 땅을 통해 양식을 공급받아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긴다면, 땅의 소유는 하나님께 있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분배받아 살아감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와 함께 등장한 중요한 개념이 ‘희년’입니다. 희년법이 말해주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인생사에서 이런 저런 일로 받은 땅을 담보 잡히고, 때로는 잃어버리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매 50년마다 최초 분배받았던 대로 귀속되어, 다시금 새로운 출발선에 설 기회를 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영원한 부자도, 영원한 가난한 자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속해 있고 그 앞에 순종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은 ‘왕’도 주시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모두가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입니다. (신 15: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즉,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 공동체라면, 그 안에 가난한 자가 없는 삶을 위해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그치지 않겠으나, 말씀에 대한 끊임 없는 순종으로 나아가길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원하셨던 것이죠. 조금 더 있는 자가 궁핍한 자를 위해 손을 펴서 나누고, 이를 통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모세오경의 마지막인 신명기의 말씀이에요. 여호수아서에서 비로소 땅을 얻게
되니까, 땅을 주시기전부터 이미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사시대 – 통일왕국 시대 – 분열왕국 시대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위 말씀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어야 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존하고 있는 모델이 되어야 할 이스라엘 안에서 부의 양극화, 사회적 양극화는 날이 갈수록 심해져 갑니다.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여 부자에게 도움을 청해도, 더 어려움만 당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누구를 의지하고 붙드냐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동기가 신앙은 아니었을 수도 있어요. 너무 힘들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치 않으시고 그들을 돌봐주십니다. 그들의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선지자들을 보내어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이스라엘의 모습,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들에 대해서 경고합니다. 그 경고 앞에 돌이켰으면
좋았을테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과 멀어진 이스라엘에 대하여 일하십니다. 희년을 지키지 않으니, 하나님이 희년을 행하신 것입니다. 리셋(reset)을 하십니다. 유다 전체를 심판하셔서 그들 모두를 땅 없는 자들로 만드셨죠. 이것이 바로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그래서 수요일에 봤던 역대하 마지막에는 이 일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을 하죠. (대하 36:21) 그리하여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시켜서 "땅이 칠십 년 동안 황폐하게
되어, 그 동안 누리지 못한 안식을 다 누리게 될 것이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단 한 번도 지키지 않았던 ‘희년’, 즉 땅의 안식이 비로소 바벨론 포로기를 통해서 이뤄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벨론 포로기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그들 모두가 가난하게 되었더니, 그들 모두가 연약한 자, 생존을 하나님께 의지해야 하는 자가 되었더니, 그들 모두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들을 하나님은 회복시켜 주십니다. 프토코스(가난한 자)가 된 유대 전체를 구원하셔요. 그렇게 다시 기회를 주신 것이죠.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그 포로된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선포됩니다. ‘위로, 소망, 회복’에 관한 메시지. 풀과 꽃은 인간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지라도 주님의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하나님은 선포하십니다. 이 영원한 말씀에 오늘 우리도 기대고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바벨론은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도저히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견고한 성과 같았을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복음전도자들에게 로마제국도 그렇지 않았을까요? 요한계시록에는 구약에 있었던 ‘바벨론’이라는 명칭이 나옵니다. 이것은 당시의 그들의 위협이 되었던 ‘로마’를 지칭하는 표현이었습니다. 로마의 황제가 주는 위협이 하나님의 살아계심보다 더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시대나, 신약의 시대나 이사야서의 이 말씀들은 붙잡고 의지해야 할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었습니다. 여호와는 포로된 백성들에게 선포하십니다. (사 40:15) 그에게는 뭇 나라가, 고작해야,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물이나, 저울 위의 티끌과 같을 뿐이다. 섬들도 먼지를 들어 올리듯 가볍게 들어 올리신다. (사 40:26) 너희는 고개를 들어서, 저 위를 바라보아라. 누가 이 모든 별을 창조하였느냐? 바로 그분께서 천체를 수효를 세어 불러내신다. 그는 능력이 많으시고 힘이 세셔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나오게 하시니, 하나도 빠지는
일이 없다. 우리가 금요일에 보았던 설교 주제가 ‘하나님은 누구신가?’였습니다. 결국 모든 신앙의 시작은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거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대답은 그는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라.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는가? 모름지기 자연의 질서란 요만큼만 흐트러져도 그것이 재앙을 가져오는데, 이것을 질서 있게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포로된 백성에게 희망을 주시는 말씀을 하시는 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유명해진 이 말씀입니다. (사 40: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사 40: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사 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사 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여러분, 우리는 피곤할 수 있어요. 우리는 무능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라도 피곤하여 지치고, 장정이라도 비틀거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이 있어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그는 새 힘을 얻을 것을 믿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은 그들이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프토코스와 같이 연약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죽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이들이 강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연약해진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납니다. (사 41:8)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사 41:9)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사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여러분, 우리가 41:10 말씀을 통해서 참 많은 위로를 받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갈 때부터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시죠. 우리는 종종 내 삶이 내 힘으로 되어가고 있을 때마다 하나님을 멀리 합니다. 어느덧 내 안에 간절함이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붙들면 좋을 텐데,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닥쳐야 비로소 하나님을 굳게 붙잡습니다. 우리가 사람들끼리도 “야, 쟤는 꼭 필요할 때만 우릴 찾아.” 이러면 이게 얼마나 좋지 않은 말입니까? 구약의 하나님이 무섭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제가 가만히 보면 구약의 하나님은 참 속도 없어요. 자존심도 없어요. 하나님은 일편단심입니다. 하나님은 곰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여우에요. 이사야서는 그러면서 하나님의 ‘종’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종.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부분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이죠. (사 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이사야 후반부는 한 말씀 한 말씀이 다 큰 위로가 되는 말씀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가 되어 있는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시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 때가 이르기를 기다리셨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사 42: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사 42: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저는 이사야서 후반부를 읽으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기가 끝나고 회복되길 기다렸던 소망함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때가
되기를 기다리셨던 마음이 더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함께하고 싶으세요. 그러나 이들이 새롭게 되어지는 그 시간이 필요해요. 선지자들을 통해서 위로하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한 70년의 시간이 끝나가자 가장 먼저 달려오셔서 위로하시고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 같아요. “너희가 바라보는 강대국 바벨론, 너희가 여호와보다 더 강력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했던 바벨론의 신 마르둑. 나는 그들보다 위에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받을 영광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고, 내가 받을 찬양을 우상에게 양보하지 않겠다” 말씀하십니다. 강력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이 느껴집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자신의 백성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사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은 때로는 포로기의 이스라엘처럼, 스스로 연약해
보이고, 소망을 잃어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크나큰 위로의 말씀입니다. 한번 우리가 이 말씀을 다시 읽을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읽어보시겠습니까? “OO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OO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지난주 설교에서도 나눴듯이 우리가 힘들 때 옆에 있는 사람이 그냥 내 아픔에 공감을
해주는 것으로도 위로에요.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 위로가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주는 위로가 있다면 어떠할까요? 만약 여러분이 어떤 억울한 일을 국민청원에 올렸는데, 대통령이 “그 일은 제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약속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마 그 순간 비로소 그 문제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분,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분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권능의 깊이만큼 우리에게 주는 위로와 소망이 커지는 것이죠. 그런데 더 나아가 이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내가 너를 창조했다.”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바꾸면 “내가 너를 낳았다.” 그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너는 내 것이다. 이사야서에서 자꾸 하나님이 자기 과시를 하시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들이 있어요. 43:11에도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 43:13에도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오.” 저도 제 가족을 위로할 때, 가끔 이런 표현을 씁니다. “여보, 나 믿어.”, “유하야, 건하야. 아빠가 해줄 거야. 걱정 마.” 지금 이 메시지를 받는 그들의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그들은 감히 소망을 갖기도 어렵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자신들과 관계가 끊어졌다고, 그러므로 이제는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시죠. (사 43: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광야에 길을 내실 수 있는 분, 사막에 강을 낼 수 있는 분. 우리가 지난주에 이사야 말씀을 듣고 ‘큰 길을 만드시는 주(way maker)’라는 찬양을 부를 때, 그 의미가 더 명확해지고 더 파워풀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말씀에 근거한 우리의 믿음이 담겨있기 때문이에요. 짐승들조차도 존경할 대상, 그 유일한 창조주께서 이제 침묵을 깨고 일하실 것임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일하시면 광야에도 길이 생기고, 사막에도 강이 넘쳐흐르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이 역사에 나타났다는 것에서 너무나도 큰 감격이 있습니다. promise keeper. 약속을 지키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벨론이 하나님을 누르고, 하나님을 이기고 유다를 포로로 잡아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도구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보내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후반부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이 살아계신 하나님과 ‘우상’의 비교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은 선언합니다. 나 외에는 다른 신은 없다! (사 45:18) 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이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5:22) 땅의 모든 끝이여 내게로 돌이켜 구원을 받으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여러분, 우리가 알고 있는 십계명의 말씀이 있죠. 1계명.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2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이것은
세상의 여러 신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신이 여호와 한분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외에 다른 것을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사 46:1) 벨 신이 고꾸라졌고, 느보 신이 넘어졌다. 짐승과 가축이 그 우상들을 싣고 간다. 힘겹게 떠메고 다니던 것들이, 피곤한 짐승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다. (사 46:2) 우상들은 한꺼번에 넘어지고 고꾸라졌다.
우상들은 자기들을 싣고 가는 자들에게서 도망쳐 나오지도 못한다. 오히려 우상들은 포로가 되어 잡혀 간다. 벨은 바벨론의 수호신인 ‘벨-마르둑’을 의미하고, 느보는 ‘벨’의 아들입니다. 느보라는 이름은 바벨론 왕의 이름 속에 많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고 강하다고 떠들던 신들입니다. 그러나 그 바벨론의 위용이 100년을 넘기지 못합니다. 페르시아에게 곧 무너질 운명입니다. 그러면 그 우상들은 스스로 걷지도 못하고 짐승에게 실려 다녀야 하는
무능한 조각들에 불과합니다. 아까 국민청원 이야기 했지만, 대통령이 해결해준다고 했는데... 우리가 그것 못 믿고 잘 아는 동네 깡패에게 가서 호소하고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 앗수르 의지하고, 애굽 의지하고 하다가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강력함 앞에 위축되어 있고, 로마시대를 살아가던 초대교회 교인들도 로마의 황제가 주는 위협 앞에 놓여 있었고,
어쩌면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도 세상이 주는 위협 앞에서 마음이 요동칠지도 몰라요. 그러나 영원한 것은 하나님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결코 다른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리고 그분이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분이 나에 대해서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알려주길 원해요. 오늘도 우리가 믿고,
우리가 예배하는 나의 유일한 예배의 대상, 그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인 줄 믿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한 말씀을 읽고 우리가 그분을 높여드리고 싶은데요. 하나님의 마음을 제가 대신 전해드리겠습니다. (사 46:3) 야곱의 집안아, 이스라엘 집안의 모든 남은 자들아,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너희를 안고 다녔고, 너희가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내가 너희를 품고 다녔다. (사 46:4) 너희가 늙을 때까지 내가 너희를 안고 다니고,
너희가 백발이 될 때까지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다. 내가 너희를 지었으니, 내가 너희를 품고 다니겠고, 안고 다니겠고, 또 구원하여 주겠다. 여러분, 여러분이 백발이 되더라도 하나님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는 더욱 많아지고 때로는 버겁기까지 할 때가 있죠. 어느덧 내가 의지하던 부모님도 나이가 드시고, 그런 상황들 안에서 우리는 때로는 어려운 일을 만나면 홀로 있는 것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늙어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안고 다니시고, 백발이 되어도 여러분을 품고 다닙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우리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분을 향하여 우리의 전심을 드리며 함께 찬양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