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TENET

2026-08-26 · 이사야 37장 14~21절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제가 드라마나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최근 <오디세이>로도 유명한 ‘놀란’ 감독의 영화를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의 작품 중 <인터스텔라>는 설교나 강의에서 많이 인용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란 감독의 영화 가운데 개인적으로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 <TENET>이라는 영화였습니다. 보신 분은 아실 텐데, 이 영화는 시간의 정방향과 역방향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회전문을 통과하면 시간의 방향이 바뀝니다. 그런데 제목을 ‘TENET’이라고 지은 데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TENET’이라는 단어 자체가 앞으로 읽어도 뒤로 읽어도 똑같은 회문입니다. 그리고 영화 자체도 그렇습니다. 정방향으로 흘러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방향을 바꾸어 역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같은 길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지나갑니다. 지난 수요기도회를 마치고 남아서 기도하는데, 그날 나누었던 신앙의 방식이 문득 이 ‘TENET’처럼 보였습니다. 우선 지난 수요묵상기도회를 통해 나누었던 메시지의 핵심을 다시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에는 하나의

방향이 있습니다. 먼저 무엇이 가야 합니까? ‘몸’입니다. ① 몸 — 나아감 일단 몸이 하나님 앞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음이 먼저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훈련을 제대로 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갈대와 같아서 마음이 몸을 끌고 가게 하면 꾸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몸이 마음을 끌고 가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공부하려면 먼저 책상에 앉는 몸의 연습부터 해야 합니다. 운동하려면 운동할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운동장으로 나가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표현합니다. 예배의 자리에도 먼저 몸을 드려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서도 우선 엉덩이 싸움을 해야 합니다. 마음이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먼저 순종의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히 10:25)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신앙에도 적용되는 이야기입니다. ② 마음 — 고백 그러나 몸만 드려진 상태에 머물면 껍데기 신앙이 됩니다. 몸으로 나아간 뒤에는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듣고자 하고, 깨닫고자 하고, 돌이키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예배는 몸만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사 29:13)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고, 입술로는 나를 영화롭게 하지만, 그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경외한다는 말은, 다만, 들은 말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③ 주권 — 인정 그렇게 몸과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순간부터 진짜 신앙이 드러납니다. 중요한 것은 주도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내 생각보다 하나님의 뜻이

옳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결국 마지막 판단자는 내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내가 옳고 그름을 결정하고,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결정합니다. 그러나 순종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데서 나옵니다. (잠 3:5)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잠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④ 기도 — 의탁(믿고 맡기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고 결단했다고 해서 내 힘으로 그것을 다 해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지만 내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는 기도를 ‘의탁’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의탁은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께 맡깁니다. 나를 붙들어 주십시오.” (시 37:5) 네 갈 길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만 의지하여라.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입니다. 몸 → 마음 → 주권 → 기도 나아간다 → 고백한다 → 인정한다 → 맡긴다 이 네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의 신앙으로 연습해야 합니다. 1.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가 남유다의 왕으로 있을 때 북쪽의 강력한 제국 앗수르가 침공합니다. 남유다는 그들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결국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성읍들이 점령당합니다. 그때 앗수르에서

랍사게가 나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해 항복을 요구하는 연설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유다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히브리어로 말합니다. (사 36:4) 랍사게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히스기야에게 전하여라. 위대한 왕이신 앗시리아의 임금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무엇을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 하냐? (사 36:5) 전쟁을 할 전술도 없고, 군사력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지금 누구를 믿고 나에게 반역하느냐?” 그리고 심지어

이렇게 말합니다. (사 36:10) “이제 생각하여 보아라. 내가 이 곳을 멸망시키려고 오면서, 어찌, 너희가 섬기는 주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왔겠느냐? 주님께서 친히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땅을 치러 올라가서, 그 곳을 멸망시키라고 이르셨다.” 두 번째 연설에서는 더욱 노골적입니다. (사 36:18) 혹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할지라도 속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자기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랍사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며 예루살렘의 마지막 소망을 꺾으려 합니다. 실제로 앗수르 앞에 여러 나라가 무너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도 이미 멸망했습니다. 그러니 랍사게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사마리아도 구하지 못한 여호와가 어떻게 너희를 구할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듣는 히스기야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왕인데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왕의 자리는 너무나 무겁고

힘겨웠을 것입니다. 현실은 감당할 수 없는 공포이고 위협이고 절망입니다. 절망의 벽 앞에 히스기야가 서 있습니다. 왕으로서 뭐라도 하고 싶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 히스기야가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십시오. 먼저, 몸입니다 (사 37:1) 히스기야 왕도 이 말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하여, 자기 옷을 찢고, 베옷을 두르고, 주님의 성전으로 들어갔다. 히스기야는 먼저 몸을 움직입니다. 어디로 갑니까? 성전으로 갑니다. 아직 대책이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기도의 자리로 갑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어디로 향하는가? 내 몸은 어디로 향하는가? 두 번째는 마음입니다 (사 37:2) 그는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원로 제사장들에게 베옷을 두르게 한 뒤에, 이 사람들을 아모스의 아들 예언자 이사야에게 보냈다. (사 37:3) 그들은 이사야에게 가서, 히스기야 왕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은 환난과 징계와 굴욕의 날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와도 같습니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습니다. 베옷은 슬픔과 애통과 겸비의 표현입니다. “아이를 낳으려 하나 낳을 힘이 없는 산모와 같습니다.”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무력한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꺼내놓습니다. 몸으로 성전에 들어온 사람이 이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낮아집니다. 세 번째는 주권입니다 (사 37:14) 히스기야는 사신들에게서 이 편지를 받아 읽었다. 그런 다음에 주님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주님 앞에 편지를 펴놓은 뒤에, (사 37:15) 주님께 기도하였다. (사 37:16) 그룹들 위에 계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만군의 주님, 주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산헤립이 보낸 항복 권고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히스기야가 고백합니다. “주님만이 이 세상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시는 오직 한 분뿐이신 하나님입니다.” 산헤립이 던진 질문은 결국 이것이었습니다. “누가

진짜 주권자인가?” 어느 나라의 신이 앗수르 왕에게서 자기 나라를 구했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 앞에서 히스기야는 고백합니다. “주님이 주권자이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이것만은 놓치지 않습니다. 네 번째는 기도입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펼쳐놓습니다. 그는 편지를 찢어버리지 않습니다.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자기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다고 움켜쥐지도 않습니다. 그 현실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펼쳐놓습니다. (사

37:18) 주님, 참으로 앗시리아 왕들이 여러 나라와 그 땅을 마구 짓밟아 버렸습니다. (사 37:19) 여러 민족이 믿는 신들을 모두 불에 던져 태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참 신들이 아니라, 나무와 돌로 만든 것들이기에, 앗시리아 왕들에게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사 37:20) 주 우리의 하나님, 이제 그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셔서, 세상의 모든 나라가, 오직 주님만이 홀로 주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여 주십시오. 이것이 의탁입니다. “하나님,

이것을 하나님께서 하십시오.” 자신의 운명과 문제를 하나님의 손에 맡깁니다. 히스기야는 몸으로 나아갔고, 마음으로 자신을 쏟아놓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기도로 의탁했습니다. 2. 흥미롭게도 이사야 30~31장에서 하나님께 책망받는 남유다의 모습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그들도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들도 먼저 몸을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몸은 어디로 향합니까? (사 30:2) 너희가 나에게 물어 보지도 않고, 이집트로 내려가서, 바로의 보호를 받아

피신하려 하고, 이집트의 그늘에 숨으려 하는구나. 애굽으로 향합니다. 히스기야의 몸은 성전으로 향했지만 그들의 몸은 애굽으로 향했습니다. 그래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위기 때 어디로 향하는가? 내 몸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들의 마음 역시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사 30:7) “이집트가 너희를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은 헛된 망상일 뿐이다. 이집트는 '맥 못쓰는 라합'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열방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도, 이 사건 가운데 일하시는 하나님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사 30:15) 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회개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것이며,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의지합니다. (사 31:1) 도움을 청하러 이집트로 내려가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그들은 군마를 의지하고, 많은 병거를

믿고 기마병의 막강한 힘을 믿으면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은 바라보지도 않고, 주님께 구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몸, 마음, 주권, 의탁의 방향이 모두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히스기야는 위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합니다. 몸 → 마음 → 주권 → 기도. 우리가 지난주에 나누었던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향을 히스기야에게서 그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3. 그런데 여기까지가 지난 수요일에 나누었던 내용이라면 오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이제 방향이

바뀝니다. 우리가 ‘몸 → 마음 → 주권 →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이제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① 기도 — 응답 우리가 기도로 하나님께 의탁했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십니다. (사 37:21b) 네가 앗수르의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들으셨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주어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히스기야가 움직였습니다. 히스기야가 성전으로

갔습니다. 히스기야가 마음을 낮췄습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행동하십니다. 기도의 가장 놀라운 순간은 내가 말하는 순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② 주권 — 믿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이제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 37:33) 그러므로 앗시리아 왕을 두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이 도성에

들어오지 못하며, 이리로 활도 한 번 쏘아 보지 못할 것이다. 방패를 앞세워 접근하지도 못하며, 성을 공격할 토성을 쌓지도 못할 것이다. (사 37:34) 그는 왔던 길로 되돌아갈 것이고, 이 도성 안으로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한다. 이것은 나 주의 말이다.” 올라갈 때의 주권은 ‘인정’입니다. “하나님이 옳으십니다.” 그러나 내려올 때의 주권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말씀대로 될 것을 믿겠습니다.” 하나님을 주님이라고 인정하며 올라갔다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으며 내려오는 것입니다. ③ 마음 — 고백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면 우리의 마음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 가운데 자주 경험하는 놀라운 일입니다. 기도하러 왔을 때는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어떻게 하지?” 그런데 하나님 앞에 그것을 온전히 맡기고 말씀 앞에 서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알겠습니다, 하나님. 그렇게 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상황은 아직 그대로인데 내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 때문에 너무

힘들고 속상해서 기도하러 왔는데 하나님 앞에 그 사람과 그 문제를 내려놓다 보면 마음이 풀리기도 합니다. 위로를 얻기도 합니다. 그 문제를 견딜 힘이 생기기도 합니다. 때로는 놀랍게도 그렇게 미워하던 사람을 향한 긍휼의 마음까지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에게도 말씀하셨습니다. (사 37:6) 이사야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대들의 왕에게 이렇게 전하십시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앗시리아 왕의 부하들이 나를 모욕하는

말을 네가 들었다고 하여, 그렇게 두려워하지 말아라.” 산헤립의 말을 들으면 두려움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아직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기 전에 마음이 바뀝니다. 어떤 때는 평안을 주십니다. 어떤 때는 용기를 주십니다. 어떤 때는 인내를 주십니다. 어떤 때는 소망을 주십니다. 핵심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내 마음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상황이 바뀌어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상황이 바뀌기 전에 마음이 먼저 바뀌는 것입니다. ④ 몸 — 살아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다시 우리의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다시 일상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본문은 그것을 다시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고, 포도밭을 가꾸는 삶으로 묘사합니다. (사 37:30) “히스기야 임금님, 주님께서 임금님께 다음과 같은 증거를 보이실 것입니다. 금년에는 백성이, 들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먹고, 내년에도 들에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해에는, 백성이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둘 것이며, 포도밭을 가꾸어서 그 열매를 먹을 것입니다. (사 37:31) 유다 사람들 가운데서 난을 피하여 살아 남은 사람들이, 다시 땅 아래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다시 씨를 뿌립니다. 다시 곡식을 거둡니다. 다시 포도밭을 가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이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4. 이제

전체를 다시 보십시오. 몸 → 마음 → 주권 → 기도 응답 → 주권 → 마음 → 몸 그리고 각각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을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나아간다 → 고백한다 → 인정한다 → 맡긴다 듣는다 → 믿는다 → 고백한다 → 살아낸다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놓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내 삶을 기도로 맡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달라진 마음으로

다시 내 삶을 살아갑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나면 이제 방향이 바뀝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 있습니다. 정방향으로 갔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은 내 몸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몸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몸으로 세상 가운데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나와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삶으로 돌아갈 때의 나는 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이에 주님의 함께하심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이 언제나 상황의 ‘해결’을 의미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 갔다가 돌아왔는데 병이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관계가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형편이 그대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달라져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며

들어갔다가 담대함을 가지고 나옵니다. 원망하며 들어갔다가 감사하며 나옵니다. 붙잡고 들어갔다가 내려놓고 나옵니다. 도망치고 싶어서 들어갔다가 순종하기 위해 나옵니다. 하나님께 나아간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기도하러 들어간 사람과 기도하고 나온 사람이 여전히 같다면, 우리는 아직 믿음의 왕복을 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5.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을 ‘TENET’이라고

붙였습니다. 앞으로 갔던 길을 반대 방향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갔다가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갔다가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일방통행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몸을 하나님께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미 몸으로 이 자리에 나아왔습니다. 이제 마음과 정성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말씀 앞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로 의탁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여러분의 삶으로 돌아가십시오. 두려움으로 들어왔다면, 믿음으로 나가십시오. 원망으로 들어왔다면, 감사로 나가십시오. 붙잡고 들어왔다면, 맡기고 나가십시오. 도망치고 싶어서 들어왔다면, 순종하기 위해 나가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것으로 다시 살아가십시오. 오늘 이 밤, 예배하기 전의 나와 예배하고 난 뒤의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다시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