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기초>가 ‘복음은 무엇인가?’에 관해 다루었다면, <새로운삶>은 그 복음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하여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첫 번째 답으로 ‘성령’을 제시했습니다. 핵심은 “내가 복음을 믿었으니, 이제부터 잘 살아보자”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에서 복음의 삶을 이루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새 삶의 ABC는 결국 성령에 관하여 배우고 동행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설교는 ‘성령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성령을
‘능력’으로 이해하면 여전히 내가 중심이 됩니다. 내가 성령의 능력을 받아 강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관계가 역전됩니다. 내가 성령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왕이 될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왕이 내게 오셔서 내 안에 그분의 통치를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의 핵심을 ‘능력’으로 보면 ‘방언’이 보이지만, ‘인격’으로 보면 ‘성령이 시키는 대로’ 그 모든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방언이 새로운 삶의 열매가 아니라,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삶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새로운 삶의 세 번째 설교로서 ‘자라남의 원리’에 관하여 다뤄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지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자라남이란 영적 탄생에서 시작합니다. 신앙기초 첫 번째가 ‘회심’이었습니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엄밀히 말해서 아직 영적으로 태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회심을 거듭남, 다시 태어났다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회심한 사람도 있겠지만, 회심을 위한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위해 교회가 존재합니다. 교회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 이 공동체를 통해서 회심하게 될 것을 기대하고, 회심이 일어나면 함께 축하하고 축복합니다. 회심했다는 고백으로 ‘세례’를 받는 것이지요. 최근에도 우리 교회에는 아기들이 계속 태어나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기쁜 일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도 계속 태어나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 광고 시간에 한 분이 회심했다는 것을 기뻐하며 나눴던 것도 그렇습니다. 회심이 신앙의 진정한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5년 전, 제가 영적 성장에 관해서 공부하고 훈련하며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회심 없이 목양 없다.” 회심하지 않은 사람을 영적으로 성장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태어나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성장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공동체가
‘가족’입니다. 가족 안에서 누리는 두 가지 큰 기쁨은 ‘탄생과 성장’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부부뿐 아니라 조부모나 확대가족 안에서도 기쁨이 됩니다. 그런데 출생만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 성장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어린아이가 어느새 성장하여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자기의 삶을 책임지고 더 나아가 새로운 가족을 꾸려나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행복입니다. 교회도 영적인 가족이기에 똑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실 교회 안에서 ‘성장’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교회 성장’이라고 하면 자꾸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이 많아지는 것과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은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많아져서 규모가 성장하는 듯 보여도, 그 안에 회심한 자가 적고 영적 성장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의 탈을 쓴 군중들의 모임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건강한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변질을 걱정해야 하는 심각한 위기입니다. 아마 제가 ‘성장’이라는 단어를 <새로운삶>
시리즈에서 자주 쓰게 될 텐데 기억하십시오. 제가 말하는 성장은 규모나 수적인 증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성장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영적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영적 탄생 후 영적 아이가 예수님을 닮은 자로 자라나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장입니다. (벧전 2:2)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영적으로 탄생하는 회심, 그리고 거듭난 후에는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의 젖을 잘 먹으며 자라가는 것이 구원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의 시작은 언제나 회심입니다. 태어나야 자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회심을 점검하면 사람들이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주는 것을 좋아하지, 나의 회심을 점검하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듣는 것은 부담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 앞에 내가 서는 것은 부담스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복음의 본질 앞에 내가 서야
합니다. “당신은 교회 다니니까 이제 구원받았고 괜찮습니다.” 이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은 쉽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것을 이야기해 주는 것도 쉽습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구원받은 자로 구원을 누리며 살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 내 삶에서 정말 경험되지 않는다면 그 말은 점점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만약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위로만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진짜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주고, 정말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붙잡아주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이사야를 묵상하면서 계속 듣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돌이키라.” 하나님은 “지금 모습 그대로 괜찮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마치 위험한 병을 발견한 의사가 환자에게 그것을 수술해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지, 단순히 “괜찮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까지 우리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실까요?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포기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받을 수 있는 진짜 위로와 사랑은 하나님이 한 번도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고 나를 포기하신 적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영혼을 포기하지 않는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적어도 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우리도 서로를
붙잡아주며 함께 세워져 가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과거 어느 순간에 일어난 단회적 사건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회심을 통해 구원에 들어왔고, 지금도 구원을 누리며 살아가며, 마침내 완성될 구원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 안에 자라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라고 권면합니다. 회심이 나의 통치자를 바꾸는 것이라면, 영적으로 자라간다는 것은 바뀐 통치자의 통치를 받으며 변화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땅에서 완벽하게 그리스도와 같아질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변화되고,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이 삶을 마칠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방향은 그리스도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적 성장은 완벽함의 문제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계속 그리스도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사랑하기에도
버거웠던 인생이 다른 이를 품고 살아가는 인생으로, 상처받지 않으려고 나를 지키던 인생이 상처받을 것을 감수하면서도 사랑하는 인생으로,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불안했던 인생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인생으로, 인정받기 위해 살던 인생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인생으로 바뀌어 갑니다. 그렇게 조금씩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영적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변화를 말하고 있습니다. (엡 2:1) 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엡 2:2)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엡 2:3)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전에는’이라고 불리는 것은 회심 전의 삶입니다.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는 내 인생의 현실입니다.
구원이 필요한 삶이었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지독히 저 자신을 위해 살았을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인정받기 위해 살았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그나마 조금이라도 다르게 살아가려고 애쓸 수 있는 것은 제 안에 주님이 오셔서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회복하시고 치유하십니다. 세상에 완전히 적합하게 피팅되어 살아가던 내가 회심하여 거듭납니다. 오죽하면 이 변화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거듭난다’라는 말에는 ‘다시 태어난다’와 ‘위로부터 태어난다’라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요 3: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위로부터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다시 태어나도 세상에 속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백 번을 다시 태어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존재, 하나님께 속한 존재,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이 ‘위로부터 태어나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다’의 의미입니다. 회심은 내가 통치하던 인생의 통치자, 주권자, 왕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인을 바꾸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 우선 내가 통치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제 삶의 주인이
되어 제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통치해 주십시오.” 이것이 회심의 고백입니다. 그리고 회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거하시며 다스리십니다. 그렇게 우리 안에 오시는 분이 ‘성령 하나님’입니다. 회심과 성령은 세트입니다. 회심과 성령의 내주는 떼어놓을 수 없고, 내주하시는 성령 없이 우리는 자라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이고 약속입니다. (고후 1:22)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를 자기의
것이라는 표로 인을 치시고, 그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엡 1: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엡 1:14) 이 성령은, 하나님의 소유인 우리가 완전히 구원받을 때까지 우리의 상속의 담보이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십니다. (롬 8:9b)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경은 명확하게
말합니다. 당신이 회심했다면, 이제부터 당신의 삶에는 성령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데….” 사실 오늘 설교의 뒷부분은 그런 분들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회심에 관해서는 이미 <신앙기초> 시리즈를 통해 충분히 말했습니다. 이제 다음으로 가야 합니다. 회심한 삶이 새로운 삶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삶이 새로운 삶입니다.
새로운 삶은 성령님의 인도하심 아래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바로 [풍삶기: 풍성한 삶의 기초]에 나오는 ‘3F 기차’입니다. 기차의 맨 앞 칸은 ‘Fact’, 진리입니다. 기차의 두 번째 칸은 ‘Faith’, 믿음입니다. 기차의 마지막 칸은 ‘Feeling’, 느낌과 경험입니다. 기차는 앞의 기관차가 뒤의 칸을 끌고 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을 이끌고 가는 것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에 ‘믿음’이
붙습니다. 그러면 그 뒤에 ‘경험’이 따라옵니다. 진리 → 믿음 → 경험.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성경은 진리입니다. 그 진리 가운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사실도 있고, 우리가 붙들어야 할 약속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진리를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단지 알고 있는 것과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오늘의 선택을 하는 것은 다릅니다. (마 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것을 먼저 구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돌보신다.” 이것이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다면 먼저 그의 나라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때 그 길에서 하나님이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먼저 보여주세요.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는 것을 먼저 경험시켜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뭐가 빠진
것입니까? ‘믿음’이 빠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안이 보이지 않는 컵을 하나 보여주며 “여기에 마실 수 있는 물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제 말을 믿고 마시면 그다음에 경험합니다. “아, 정말 물이구나.” 그런데 “제가 먼저 마셔보고 물인지 확인한 다음에 목사님의 말을 믿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제 말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본질상 보지 못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보는 것은 이미 경험입니다. 모든 것을 먼저 경험하고 확인한
뒤에야 따르겠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태도가 아닙니다. (요 11: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영광을 보여주면 네가 믿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신앙이 잘 성장하는 사람에게는 이 선순환이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러면 그 진리에 자기 삶의 고백을 얹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가르치는 것을 믿음으로
선택하고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진리가 약속한 삶을 경험합니다. 한 번 그렇게 경험하면 다음에도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한 영역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면 다른 영역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자녀의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보았는데 그 길에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면, “그러면 내 사업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지 않을까? 내 미래도, 내 삶의 다른 영역도 하나님께 맡길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믿음의 영역이 넓어집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 말릴 수가
없습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런데 많은 사람이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경험하면 믿을게요.” 여기서 계속 버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너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너는 성경을 진리로 믿지 않는구나.”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발휘되지 않는 그 자리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믿음’이라는 나의 몫은 하지 않고 ‘경험’이라는 하나님의 일하심만 기다리다 보니 아무것도 경험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자기를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시네.” “말씀대로 안 되네.” “성경이 틀렸네.” 어쩌면 평생 여기에 머물러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회심’ 자체를 스스로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신 것이 맞나?” 아무것도
경험되지 않으니까요. 한 번도 하나님의 통치에 ‘예’하고 따라가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러면 이 사람이 갈구하는 것은 목사가 주는 ‘안심의 메시지’뿐입니다. “구원을 의심하지 마세요. 구원의 확신을 가지세요.” 그런 메시지로 의심을 눌러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없는데 “나는 교회를 다니고 있으니까, 나는 세례를 받았으니까, 나는 구원받은 사람일 거야.” 이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수없이 상처받다 보니 확실한
증거나 경험 없이 믿음을 내어주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잘 압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는 세상과 다릅니다. 그분의 인격 앞에 먼저 발을 내디딜 때 비로소 가장 안전한 경험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3F 기차를 이해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령님은 이 열차의 기관사처럼 모든 과정마다 우리를 돕는 분입니다. 회심도 성령의 역사였던 것처럼, 우리가 진리를 깨닫는 과정도,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도, 삶에서 경험하는 과정도 모두
성령님의 함께하심 안에서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십니다. ‘Fact’,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것을 ‘Faith’, 믿음으로 받아 순종하면 ‘Feeling’, 경험이 생겨납니다. (요 14: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진리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저도 이 시간 성령님의 도구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님이 함께하실 때 오늘 이 예배 안에서 설교가 나를 향한 이야기가 되고, 성경의 이야기가 단순한 글이 아니라 나를 향한 음성으로 들립니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성령께서 들었던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십니다. 필요한 순간에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 앞에 나를 다시 세우십니다. 그때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멘’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아멘’이 단순한 관용구처럼 사용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멘’은 본래 가벼운 말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진리입니다.” “저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가겠습니다.” 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회심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시도록 내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치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이 내게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이 길로 가자”고
말씀하실 때,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용서’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일상을 살아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미움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성령께서 지난주에 들었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용서하라.” “미움의 감옥에 갇히지 마라.” 그때 무엇을 해야 합니까? 아멘. 내 마음으로는 어렵지만 “주님, 그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그 말씀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순종할 수 있도록 그가 나에게 힘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고 일하십니다. 이것이 꼭 우리가 뭔가를 포기해야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데 내 통장이 비었고, 내 필요가 채워지지 않았고, 자원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오늘도 나아갑니다. 그런데 제게 자원이 없습니다. 함께할 사람도 없습니다.
주님, 제가 믿을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이것도 진리에 대한 믿음의 반응입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일하시는지 경험해 보십시오.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저의 삶에서도 정말 많은 순간을 이렇게 걸어왔습니다. 작은 믿음의 결단에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그 경험을 통해 다시 다음 걸음을 내딛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의 가장 큰 뜻은 내가 그분께 속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그분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을 무시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녀에게 뭔가를 말합니다. 그런데 자녀가 내 이야기를 듣지도 따르지도 않습니다. 처음에는 “얘가 나를 믿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계속됩니다. 어떤 것도 듣고 따르지 않으며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얘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나를 없는 존재처럼 대하는구나.” 성령님도 그렇습니다. (사
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여기에서 반역은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왜 근심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자녀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기분이 나쁜 일이지만, 성령을 무시하며 살아가는 것은 다시 세상의 통치와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아가며 깨어지고 망가지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회심한 자들에게 함께하시는 성령님입니다. 그런데 내가 회심한 자답게 살지 않고, 다시 내가 주인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며 그분을 무시한다면 때로 하나님께서 회초리를 드실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초리를 맞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픕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여전히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성경>이라는 성경필사노트를 만든 ‘김미혜’라는 분이 있습니다. 원래 이분이 동대문에서 의류 사업을 했는데 ‘돈 버는 재미’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업자가
갑자기 떠나고 결국 사업이 기울어 폐업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의 어머니가 당시 딸의 모습을 보면서 “딸의 사업이 망하더라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분은 가게를 다 정리하고 남은 돈을 헌금하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폐업 감사헌금.” 사업이 망하면서 다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했습니다. 국민일보에 나온 인터뷰 내용입니다. 제가 여러분의 사업이 망하기를 바라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환경이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있다면, 저는 일이 잘되지 않는 것보다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에 훨씬 더 뼈아픈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유로 하나님께서 회초리를 드신다면 저는 하나님의 편입니다. 물론 우리가 겪는 모든 실패와 어려움을 하나님의 징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가 그분을 떠나 망가져 가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고만 계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깨닫고 돌이키기를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엡 4:30)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구속의 날을 위하여 인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살아갈 때 그런 우리를 보면서 근심하십니다. 마음 아파하십니다. 다시 성령과 무관한 듯 옛 삶의 방식으로 돌아가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이야기를
드리며 설교를 맺으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를 여기까지 잘 이해하셨다면 기독교 신앙의 기본 원리가 정리되었을 것입니다. 진리 → 믿음 → 경험. “경험하면 믿을게요”가 아니라, “믿으면 경험합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따라 걸어갈 때 그 길에서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중요한 방식은 ‘들은 진리’를 생각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의
통치 아래 자라가기 위해서는 ‘들은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수많은 세상의 이야기와 세상의 원리를 듣고 살아갑니다. 특히 유튜브 시대를 살아가면서 피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이야기를 매일 듣습니다. 그에 비해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듣고 있습니까? 6일 내내 세상의 이야기를 듣고 살아가는데 일주일에 한 번 한두 시간 이곳에 와서 예배드리는 것으로 삶의 균형을 맞추기에는 너무나 불균형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 한 번의 시간에 주어지는 말씀조차 내 삶의 영양분으로 삼지 못한다면 그 삶은 늘 영적인 허기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자라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예배가 너무나 소중한 이유는 진리를 듣는 것이 회심과 영적 성장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듣고 또 들으십시오. 에클레시아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다시 듣고, 묻고 배우십시오. 말씀 묵상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양육의 시간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성령께서 설교와 묵상과 나눔과 양육을
통해 들은 그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순간에 그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슬픈 것은 말씀이 들리지 않는 상태로 나를 그냥 방치하는 것입니다. 나를 소중히 여긴다면 내 삶을 말씀의 진리 안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세상의 소리는 너무 많이 듣고 있는데 말씀을 먹는 시간은 등한시했다면 삶의 우선순위를 조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놓치면 아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들은 말씀 앞에서, 다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음성 앞에서 이번 주에 한 가지라도 ‘아멘’ 하십시오. 귀만 풍성하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때, “아멘. 주님, 그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믿고 따라가겠습니다.” 고백하십시오. 진리를 듣고, 진리를 믿고,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경험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놀라운 삶의 비결입니다. 주변에 신앙이 성장하고 있는 분들을 보십시오.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살아가고, 그 길에서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전에는 믿지 못했던 영역들도 말씀을 붙들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깁니다. 그렇게 우리의 믿음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우리가 진리로 세워져 갈 때, 우리 안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세상의 거짓된 진리와 세상의 풍조는 밀려납니다. 말씀을 붙잡을수록 세상의 풍조는 밀려납니다. 성령을 온전히 믿고 그분의 뜻에 나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상태가 ‘성령 충만’입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모든 사귐의교회 성도들이
정말 살아계신 하나님, 이 시대의 어떤 이야기와 풍조보다 강하신 그 하나님을 믿고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함께 이 말씀을 고백하며 마치겠습니다. (요일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깁니까? 우리의 믿음입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믿음,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하고
믿음으로 따라가는 것. 그 믿음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우리를 승리하게 할 줄로 믿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