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난주부터 <새신자반>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1과의 주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이고 지난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4가지 사실을 먼저 배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둘째, 하나님은 ‘부성과 모성을 함께 지니신 분’이시다. 셋째, 하나님은 ‘복 주시는 분’이시다. 넷째, 하나님은 ‘훈련시키시는 분’이시다. 그런 또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알려주고
있을까요? 다섯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창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성경에서 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속성을 알려주신 최초의 구절입니다. 그분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녀를 기르며 많이 깨닫곤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만을 강조하는 분이라면, 사실 인간도
자기 자식을 자기 생명처럼 여긴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전능하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사랑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자식을 사랑해도 늙어지면 도리어 자식의 부양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시공을 초월하여 변함이 없으며, 언제나 완전무결한 사랑이실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전능하신 분이라고 가장 먼저 소개하신 걸까요? 그것은 인간이 유한한 까닭입니다. 여러분
돈 자랑은 자기보다 돈 없는 사람 앞에서만 가능하죠. 자기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인간이 만약 하나님처럼 전능한 존재라면, 하나님은 우리 앞에서 자신의 전능하심을 말씀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전능함이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전능함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유한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유한함을 망각한 채
마치 전능자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이가 아플 때 부모는 마음이 더 아픕니다. 마음은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생각하지만, 사실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이 경험하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실상은 아무것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아버지가 되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지난 이사야 설교에서 많은 분들이 위로와 은혜를 경험했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한 허세가 아니라, 그분은 진짜 그렇게 일하셨음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일컬어 “너는 내 것이라, 내가 너를 안고 다니겠다, 품고 다니겠다” 말씀하시니, 이것이 유한하고 무력함을 느끼곤 하는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바로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고, 새롭게 하셨으며, 자녀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 많은 나를 품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성이 이룬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붙잡으시고, 그렇게 살려 내신 우리의 일평생 또한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창 17:1b)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전능함’을 말씀하시며, 우리의 삶이 그 분 앞에 놓여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뒤에서 우리의 백그라운드가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힘입어 우리는 완전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브라함. 그의 가정에는 자식이 없는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전능하심 가운데 기적적인 역사로 100세에 아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100세에 얻은 그 아들을 이번에는 제사의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기대에 부응합니다. 이 상식 밖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단 한마디의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성경은 아브라함의 순종의 근거를 그가 하나님께 들었던 말씀에 대한 믿음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아들 이삭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므로, 어떤 경우에도 이삭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과... 설령 이삭이 정말 죽는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위해 다시 살려 주시리라는 것을 굳게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러한 믿음 가운데,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에 무조건적인 순종을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삭 대신 그 예배의 제물로 쓰일 양을 이미 그곳에 예비해 두셨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확인한 아브라함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창 22: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창 22: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고 예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그냥 삶을 살아가다보면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버리는 경우도 많지만, 내 삶에 있었던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이끄심을 묵상해보면,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책의 내용을 여러분에게 읽어드리겠습니다. “지금 그대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근심하지 말라. 현재 그대 손에 잡힌 것이 없음으로 인해 절망하지도 말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시공을 초월하는 전능자시다. 그분은 그대가 생각하기도 전에, 그대의 생각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이미 그대를 위하여 예비해 두고 계신다. 그분이 작정하신 때에 그것을 그대에게 주시기 위해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사건을 연출하시고,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계신다. 두려워 말라. 근심치도 말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먼저 확립하라. 때가 이르면, ‘여호와 이레’ 하나님께서 그대를 위해 친히 예비하신 것들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 품에 안겨 주실 것이다.” 일곱째,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 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저는 정말로 아버지가 되어보니 하나님의 마음을 부분적으로나마
느끼고 공감할 때가 있는데요. 당연히 저는 저의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자녀를 사랑해도 언제나 자녀와 함께 있을 수는 없다. 제 아들은 저에게 맨날 ‘아빠, 가지마’라고 말합니다. ‘건하야, 아빠에게는 교회가 직장이야. 다른 아빠들이 회사에 가는 것처럼, 아빠도 일을 하러 교회에 가는 거야’라고 이야기를 하지요. 제가 교회에서 일하는 동안 자녀와 함께 있을 수는 없습니다. 엄마 또한 만사를 제쳐놓고 자녀 곁에 붙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인생은
반드시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때로는 남겨두고 부모가 먼저 떠나는 것, 그것이 인간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분이시기에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과 달리 함께 하시면서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떠나지 아니하리라” 약속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라고 해서 정말 인간과 같다면, 우리는
언제나 불만을 터트릴 것입니다. 인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시간을 내어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제가 부지런히 목회를 해도 제가 물리적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제한적입니다. 만약 하나님도 그러시다면 우리는 불만을 터트리겠죠.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을 무엇에 비유하면 좋을까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태양 빛은 하늘에 태양이 떠 있는 한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그 빛이 우리 앞에서, 우리 뒤에서, 우리 옆에서 함께 합니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면
태양도 부산에 있습니다. 같은 시간 서울로 올라오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또 태양은 서울에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도 그 빛은 비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땅속으로 들어가거나, 시간이 지나 밤이 되면 그 빛은 우리와 무관해 집니다. 태양빛도 결국은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의 빛이십니다. 땅 속에 있던지, 바다 아래에 있던지, 하늘 위에 있던지
그 빛이 닿지 않는 시간 또한 없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에 있던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시 139:5)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시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시 139: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시 139: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시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자기 계산과 어긋나는 결과가 주어졌을 때, 뜻하지 않은 재난이나 불행이 닥쳤을 때, 이내 근심하며 절망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가운데 일어난 일들은 불행을
주시려 허락하셨을 까닭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 우리의 삶을 주님의 길로 이끌어 가는 과정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스로 향하던 요나가 폭풍의 바다 속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버리셨기에 요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죠. 요나는 하나님을 외면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요나와 함께 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나에게 그것은 절망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요나가 가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인 니느웨로 그를 인도해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믿는 사람만이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에 의한 자신의 유익함으로 귀결될 것임을 믿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찬양했죠. (시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그
골짜기는 사망의 골짜기였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함을 고백하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느껴지는 은혜의 골짜기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다면, 지금 이 순간도 여러분과 동행하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을 제한하고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과 비교 불가능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끝까지 신뢰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이르면, 우리와
동행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의 삶 속에 반드시 결실 될 것입니다. 여덟째, 하나님은 ‘져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최근에 청년부 수련회 중에 구약의 파노라마를 가르쳤는데, 야곱이 하나님을 이기었다는 설명에서 질문이 나왔습니다. 얍복 강가에서 야곱이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의 존재는 ‘하나님’이셨지요. 그래서 야곱은 그곳의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에서 결과는 야곱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시죠. 그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뜻입니다. 도대체 하찮은 인간이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오늘 밤에 집에 가서 제 아들과 씨름을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결과는 아들이 이길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아빠이고, 제가 아빠이기에 져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제가 있는 힘을
다해서 아들을 집어던진 뒤 두 팔을 치켜들고 승리의 만세를 부른다면, 저는 온전한 정신을 지닌 아빠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을 이기고 기뻐하는 하나님이라면 참된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연약한 인간에게 져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인간에게 응답해주시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도 몇 번이나 계속해서 같은 것을 구하고 요구하면 괴롭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많은 청을 드립니까? 하나님을 향해 입만 열면 요청이고 요구입니다. 시도 때도 없이 거듭되는 우리의 요청을 하나님은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응답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져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의 거듭되는 허물마저 되풀이하여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는 만약 옆 사람이 똑같은 잘못을 반복한다면 몇 번이나 용서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전과를 지닌 자를 꺼립니다. 전과 몇 범만 되면 피하려고 부터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매일 같이 죄를 반복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져 주시는 하나님’ 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고, 먹보다도 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져 주시며, 우리를 흰 눈처럼 정결케 해주십니다. 새하얀 눈처럼.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온갖 책임과 의무를 다 해주시는 참된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보면서 많이 느끼지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요. 제가 독서실에서 있을 때, 깜짝 놀라는 일이 있었습니다. 고등학생 여자 아인데, 다른 또래 친구보다 키도 크고 덩치도 좀 있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마침 아버지도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셨던 분인데... 아이가 연락을
받지 않으면 사무실로 전화를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 애기가 거기 있나요?” 저는 순간적으로 ‘어떤 애기를 찾는 거지? 독서실에는 애기가 없는데...’ 이사야서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통해 그 아버지의 마음을 읽습니다. 늙을 때까지 우리를 안고 다니고, 백발이 될 때까지 우리를 품고 다니겠다는 하나님 아버지. “아, 우리는 절대 외롭지 않은 존재구나..” 어린 아이를 정말 사랑하는 엄마도, 거실에서 다른 일에 몰두하면 아기의 존재를 잊어버렸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면 잠시 육아에서 벗어나서 잊고 싶은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하나님은 우리를 자신의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손바닥에 써 두었다면 언젠가는 지워지겠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손바닥에 새겨두었기 때문에 그 이름은 잊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습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하나님은 그 손바닥에 새긴 우리의 이름을 들여다보시며, 우리를 위한 사랑의 노래를 불러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동행해 주시는 분임을
기억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예비하시는 하나님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져 주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와 동행하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한숨의 골짜기에 머물지 마십시오. 지금 당장 하나님 아버지를 의지하고 굳건히 서십시오. 그것이 참된 용기요, 믿음이요. 지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