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태신앙으로 성경을 매우 친숙하게 어려서부터 접할 수 있었지만, 막상 제 의지로 성경에 한 걸음 더 다가서기 시작했을 때,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궁금증, 혹은 의아함들이 저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성경은 진리라고 하는데... 성경의 이곳과 저곳에서 말하는 것이 조금 틀리거나, 숫자 등이 각기 다르면 그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죠. 예를 들어, 같은 사건인데 여기서의 연도와 저기서의 연도가 차이가 있고, 여기서는 귀신이 2명이 나갔는데, 저쪽에서는
같은 기록에서 3명이 나가는 등, 이런 작은 요소요소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었죠. 어디서는 부르심의 장소가 다르고, 어디서는 기적을 행하신 장소가 다른 것 등 굉장히 많았습니다. 그런데 더 성경을 공부하면서 제가 걸려있었던 부분들이, 성경 집필에 대한 저의 무지와 오해 때문에 발생했음을 많이 깨달았습니다. 만약 성경저술을 한 사람이 책 한권을 쓰듯 기록을 했다면, 이곳과 저곳의 이야기가 다른 것에 대해서 문제 삼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수천 년에 걸쳐서 여러
명의 각기 다른 사람들, 그것도 배경도 살아가는 방식도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통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우리 청년부가 이번 수련회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지금 있었던 일들을 쓰라고 해도 서로 기억하는 기억의 조각들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10명이 쓴 수련회 때 있었던 일들이 모두 다를 것입니다. 만약 모두 같으면 그것이 베낀 것이겠죠. 누구는 밥을 6시에 먹었다고 하고, 누구는 7시에 먹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수련회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기억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기록에 있어서 사람을 도구 사용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기계와 같이 사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과 영성을 활용하셔서,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님의 함께하심 가운데 성경이 기록되었다는 것을 이해함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게 성경을 이해한다면, 부르심의 장소가 틀린 문제보다는 부르심의 이유와 목적을 바라보게 되고, 기적을 행하신 사건이 갖는 메시지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는 성경의 무오류에 대해서 자칫 그것이 기계적으로 일치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에서의 성경은 오류가 적지 않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의 무오류성을 믿습니다. 그 무오류성이란, 성경이 하나님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역사에 담긴 하나님의 해석을 우리에게 전하여 주며,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보여주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히려 정밀한 기계가 아닌, 적지 않은 오류가 있는 인간을 통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시고,
그런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펼쳐 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게 됩니다. 저는 요즘에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깨닫고 배워가는 기쁨을 누립니다. 예전에는 이곳저곳의 다른 점들에 작은 어려움을 겪었다면, 요즘에는 성경 이곳저곳이 연결되며 깨달아지는 메시지에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한 부분을 읽어도 그것이 주는 깨달음과 은혜가 크지만, 그것이 연결되어 깨닫게 해주는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선포는 그보다 더 깊고 크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지역에나 누구에게나 역사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기쁨을 위해, 제가 예언서 설교를 나누면서 여러분에게 성경의 큰 그림과 세계사의 흐름을 함께 이야기를 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이 하나의 이야기는 단편적인 이야기가 갖는 메시지를 넘어서, 이 일의 과거와 미래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하고... 기독교 정경 속의 사건을 넘어서, 우리의 세계 안에서 역사를 운행하셨던 하나님을 만나게 해줍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역사의 주관자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스라엘이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 포로가 된 사건은, 단순히 강대국의 침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며 살아가도록 명하셨는데, 이스라엘이 그 뜻을 버리고 끝내 돌이키지 않았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땅이 없는 자들이 되도록 만드셨다고, 바벨론 포로 사건에 대해 성경 전체가
공통적인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보시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관점입니다. 선지자 미가는 이사야와 활동했던 시기가 비슷합니다. 미가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면, 그들이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버렸다는 고발을 담고 있습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미가서 2장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미 2:1) 악한 궁리나 하는 자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망한다! 그들은 권력을 쥐었다고 해서, 날이 새자마자 음모대로 해치우고 마는 자들이다. (미
2:2) 탐나는 밭을 빼앗고, 탐나는 집을 제 것으로 만든다. 집 임자를 속여서 집을 빼앗고, 주인에게 딸린 사람들과 유산으로 받은 밭을 제 것으로 만든다. (미 2:3) "그러므로 나 주가 말한다.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계획하였으니, 이 재앙을 너희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너희가 거만하게 걸을 수도 없을 것이다.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재앙의 때가 될 것이다. (미 2:4) 그 날이 오면, 사람들이 너희를 두고서 이러한 풍자시를 지어서 읊을 것이다.
슬픔에 사무친 애가를 지어서 부를 것이다. '우리는 알거지가 되었다. 주님께서 내 백성의 유산의 몫을 나누시고, 나에게서 빼앗은 땅을 반역자들의 몫으로 할당해 주셨다.' (미 2:5) 그러므로 주님의 총회에서 줄을 띄워 땅을 나누고 제비 뽑아 분배할 때에 너희의 몫은 없을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자신의 것을 삼아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방향으로 나아갔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땅을 빼앗아 반역자들에게 주신다는 예언의 내용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의 반응은 안타깝게도 이런 경고를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다시금 달랐습니다. (미 2:6) 그들의 예언자들이 말한다. '너희는 우리에게 예언하지 말아라. 이 모든 재앙을 두고 예언하지 말아라. 하나님이 우리를 망신시키실 리가 없다.' (미 2:7) 야곱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주님의 영도 분노하시느냐? 주님께서 정말 그런 일을 하시느냐?' 하고 말하느냐? 나의 말이 행위가 정직한 사람에게 유익하지 않으냐? 그들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듣고도 깨달음을
얻기보다는, 예언자들의 경고를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하나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말하며,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에게 일어났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였고, 다윗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남유다마저도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들이 당한 심판에 대한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도 꽤 아프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마치 남유다의 마지막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실망시킬 리가 없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인데 그럴리 없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살아갑니다. 성경에 구약이 존재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어떻게 살아가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약의 역사는 세계사 가운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일어났던 실제적 멸망과 포로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오히려 이런 그들을 그냥 포기하고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심판을 당하고 멸망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이들을 그렇게 역사에서 사라지도록 두시지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우리가 자격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한없이 가볍습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돌아섰지만, 하나님은 돌아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며 그들을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언약은 많은데 그 중에 가장 대표되는 언약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 ‘그리고 다윗 왕과 맺은 언약’입니다. 예언서에는 사울 왕과 솔로몬 왕은 자주 언급되지 않지만, 다윗의 이름은 39회나 언급이 됩니다. 다윗 언약 때문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스라엘은 그 언약을 자신들이 유리한 방법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은 언약에 충실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기로 약속한 분이다’ 말하는 방패로 삼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정말 그 모습이 싫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과 끝까지 함께 가기 위한 방법을 마련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은 곰 같이 사랑하고, 우리는 여우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다른 것을 향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 앞으로 다시 돌아오라고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이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다시 한 번 방패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예배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데, 뭐가 잘못인가요?’ 말하며, 마음이 담기지 않은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꼬박꼬박 행하고 자신들의 마음은 세상에 내어준 채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마음을 다해 예배하면 예배를 통해 죄사함의 은혜도 주시고 복도 주시는데, 그들은 마음 없는 예배를 하면서 그것을 해달라고, 약속하지 않았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초반부는 이런 이스라엘의 잘못된 모습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발합니다. (사 1:1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사 1: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 (사 1:15) 너희가 팔을 벌리고 기도한다 하더라도,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때로는 주일에만, 예배 시간에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감을 느끼고, 다른 모든 순간에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게 나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슬퍼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이야기로 볼 수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어느 것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성전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모습을 목격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무능하여 멸망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은 여호와의 영이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을 정도로 백성들이 끊임없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 버린 성전과 도성은 바벨론 사람들에 의해서 파괴됩니다. 바로 이 일이 이사야서의 배경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39장까지 하나님은 이러한 일에 대해서 경고하셨지만,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데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러나 너무나 큰 은혜는 하나님께서 이들을 버리고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냉정하게 행하셨더라면, 이들에게 다시금 회복의 기회를 주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면서도 ‘은혜’를 행하십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게 되었을 때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70년이라는 한정된 하나님이 내린 징계의 시간을 채우길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자녀를 크게 혼내보신 경험이 있습니까? 예전에는 아마 크게 혼났던 경험들이 있겠지만, 요즘에는
그런 경험조차 적어졌죠. 만약 어떤 시간 동안 체벌을 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 체벌이 끝나기를 그 자녀도 기다리겠지만, 어쩌면 부모도 그 시간은 괴롭고 슬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체벌이 끝나기를, 부디 그 체벌의 시간을 통해 자녀가 잘못된 부분들을 반성하길 기대할 것입니다. 왜냐면, 그래야 다시금 행복한 관계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변화되길 기다리셨어요.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충격적인 일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성전을 잃고, 약속의
땅에서 추방당하고, 다윗 왕조도 멸망을 당한... 이러한 충격적인 사건이 없다면 이들은 돌아서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정도로 이스라엘은 망가졌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이 고난의 시간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고난이 목적이 아니라 돌이킴이 목적입니다. 그 70년의 시간에도 하나님은 이들이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예언자들을 보내서 말씀하십니다. 소망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이 반드시 구원하시리라 약속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도달하자 하나님은 이들에게
그 소망의 일들이 시작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0~55장은 그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메시지로 시작한 이야기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계속 말씀해주십니다. 지난주 말씀에 하나님이 계속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주셨던 것은, 바로 지금의 현실 앞에 두려워하고 소망을 잃은 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진심어린 마음들입니다. 마음이 교만했을 때는 하나님이 눈에 안 보여서 문제라면, 포로 된 삶을
수십 년 살다보니까 자존감도 바닥에 떨어지고, 삶에 허덕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기가 힘겨운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그러므로 이제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일깨워 주시는 것이죠. 위로하고 설명해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어쩌면 쉬운 말로 당근과 채찍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도 관심과 사랑이 있을 때나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세요. 이사야서 40~55장은 바벨론의 포로기가 끝나가는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40~48장 부분에는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이름이 몇 차례 등장합니다. 이 시기는 고레스 왕이 리디아를 정복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전 546년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리디아 왕 크로수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 41:2) 누가 동방에서 한 정복자를 일으켰느냐? 누가 그를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하였느냐? 누가 민족들을 그에게 굴복하게 하였느냐? 누가 그를 왕들의 통치자로 만들었느냐? 그의 칼은 그들을
쳐서 티끌처럼 만들고, 그의 활은 그들을 흩어서 검불처럼 날리게 하였다. (사 41:3) 그가 거침없이 질주하여 그들을 추격하니, 미처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다. 포로기의 시작점, 즉 남유다를 멸망시키고 포로로 잡아가던 때는 ‘느브갓네살’ 시대인데, 신바벨론 제국의 최 전성기였습니다. 느브갓네살이 40년 이상 왕위를 지키던 때의 바벨론은 강력했으나, 그 이후 왕들이 계속 교체되고 혁명과 암살 등이 이어집니다. 그 상황에서 페르시아의 고레스가 바벨론을 위협해 오고
있었던 것이죠. 실제로 바벨론 내부에서는 나보니두스에 대한 불만으로 페르시아를 반기는 기운도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이사야서는 예언합니다. 이제 곧 페르시아가 바벨론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돌려보내게 될 것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사야서의 두 번째 예언 부분이라는 40~55장에서 전반부가 40~48장입니다. 지난주에 봤던 말씀인데, 강조한 것은 2가지입니다. 바로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 그리고 ‘우상숭배 배격’에 대한 배격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 따위에게
굴복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이제 회복시킬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후반부에 해당하는 49~55장을 기억할 때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키워드가 있다면 ‘여호와의 종’입니다. 이사야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에 대한 노래가 4개가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는 지난 주 설교의 본문이었던 42:1~9에 나왔습니다.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 것’이 여호와의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49~55장 사이에 나머지 3편의 종의
노래가 나옵니다. 즉, 이 단락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종’에 대한 것입니다. 그럼 이사야서가 말하는 여호와의 종은 누구인가? 보통 이것에 대해서는 개인으로 볼 것인가 : 이사야/다윗 등, 집단으로 볼 것인가 : 이스라엘, 혹은 개인이나 집단에 모두 적용되는 것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다양합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에 나타난 여호와의 종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상당 부분 성취됩니다. 그러므로 신구약의 연속성을 고려한다면, 구원의
주체로서 ‘여호와의 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어느 누구도 구원의 주체자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죠. 그리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계승하는 오늘날의 교회, 혹은 하나님 나라 백성 공동체는 이 구원의 선포자입니다. 모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이 종들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죠. 즉,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사람이 ‘여호와의 종’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호와의 종의 삶을 가장 대표적으로 살아가신 분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인
것이죠. 두 번째 종의 노래를 살펴봅시다. (사 49:1) 너희 섬들아,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 너희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 (사 49:2) 내 입을 날카로운 칼처럼 만드셔서, 나를 주님의 손 그늘에 숨기셨다. 나를 날카로운 화살로 만드셔서, 주님의 화살통에 감추셨다. (사 49:3)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아, 너는 내 종이다. 네가
내 영광을 나타낼 것이다." (사 49:4) 그러나 나의 생각에는, 내가 한 것이 모두 헛수고 같았고, 쓸모 없고 허무한 일에 내 힘을 허비한 것 같았다. 그러나 참으로 주님께서 나를 올바로 심판하여 주셨으며, 내 하나님께서 나를 정당하게 보상하여 주셨다.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준비된 종입니다.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존재라면 승승장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그의 사역에는 결실이 없습니다.
모두 헛수고 같고, 허무한 일에 힘을 허비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거절당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결과에 대해서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론 좋은 결과는 기쁨이 됩니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까지가 최선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에 대해서 자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과를 갖고 내가 하나님의 종이니, 아니니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사 교육 때마다 강조하는 제가 제일 멋지게 생각하는 교사의 모습이 있습니다. 다른
반은 다 부흥하는데, 오히려 열심히 하는데도 애들이 떨어져나가는 교사인데... 남은 한명의 아이를 위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교사의 모습입니다.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아는 자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골 교회, 남들이 다 가기 떠나고 싶어 하는 그 교회, 사역자 공고를 내도 오지 않는 그 교회에서 끝까지 맡겨진 자들을 위해서 사랑과 충성을 다하여 일평생 목회를 했다면, 어찌 그 목회가 몇 배의 부흥을 이룩한 교회의 목회자보다 빛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종은 여호와의 결정과 여호와의 판단만을 기다립니다.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해석합니다. 그분이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사랑하는 종, 이스라엘이다. 내가 너를 통해 빛을 발하리라.” 그러나 내가 말했다. “내가 한 일은 다 헛수고였다. 평생을 애썼지만 내놓을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 맡기련다. 그분의 판결을 기다릴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셨음을 믿고, 주님의 귀한 종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하는 태도를 갖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분께 의지하는 종의 모습을 우리는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종을 땅 끝까지 구원을 선포하는데 사용할 ‘이방의 빛’으로 세우십니다. 아시다시피 바울과 바나바는 이방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이방의 빛에 대한 말씀을 성취합니다. (사 49:6)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주님의 관심은 땅 끝에 있었습니다. 저는 선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기에 지금 우리에게 맡기신 선교지는 어디일지 20대부터 찾고 물었습니다. 여전히 미전도 종족들이 존재합니다. 누군가는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기에는 또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이 복음을 잃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언젠가 언급한 것처럼,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선교에 대한 정의는 ‘예배가 없는 곳에 예배가 있게 하는 것’입니다.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배를 잃어버린 자들에게 예배가 세워지도록 하는 것. 저는 그것이 우리 시대가 감당해야할 선교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여호와의 종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종의 노래를 살펴봅시다. 이 부분은 신약에서 특정한 사람이 이것을 성취한 것으로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종의 태도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따라가야 할 부분으로 여기며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사 50:4) 주 하나님께서 나를 학자처럼
말할 수 있게 하셔서, 지친 사람을 말로 격려할 수 있게 하신다. 아침마다 나를 깨우쳐 주신다. 내 귀를 깨우치시어 학자처럼 알아듣게 하신다. (사 50:5) 주 하나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셨으므로, 나는 주님께 거역하지도 않았고, 등을 돌리지도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공급을 받는 종은 세상의 어려움 앞에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모욕과 박해를 받더라도 굴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분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사 50:6) 나는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내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겼다. 내게 침을 뱉고 나를 모욕하여도 내가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사 50:7)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니, 그들이 나를 모욕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냈다. 내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것을 내가 아는 까닭은, (사 50:8) 나를 의롭다 하신 분이 가까이에 계시기 때문이다. 누가 감히 나와 다투겠는가! 함께 법정에 나서 보자.
나를 고소할 자가 누구냐? 나를 고발할 자가 있으면 하게 하여라. (사 50:9) 주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실 것이니, 그 누가 나에게 죄가 있다 하겠느냐? 그들이 모두 옷처럼 해어지고, 좀에게 먹힐 것이다. 자존감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내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방법> 이런 책도 있지요. 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자존감은 높아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깨달아가며 말입니다.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도와주는 부모와
교사, 목회자를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할 수 있겠죠.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이 내 가까이 있음을 알 때, 나를 돕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때, 우리는 세상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통해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통로가 되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하나님이 사랑하고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해주십시오. 네 번째 종의 노래는 특별히 여호와의 종이기도
하지만, ‘고난 받는 종의 노래’로,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입니다. 특별히 이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성취된 것으로 신약은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사야 52:13~53:12까지의 내용인데 중간 부분만 읽어보겠습니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 53:10)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번에는 그 고난이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제적입니다. 죽음까지 이어집니다. 이 종은 고난도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임을 알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합니다.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사야서의 종의 노래가 ‘예수님’에 의해서 우리를 위한 대속적 사랑으로 성취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이 종에게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는 환영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멸시를 받고, 싫어 버린바 되었고, 고통을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입니다. 어쩌면 한동안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박해와는 거리가 먼 모습으로 살았습니다. 교회가 환영받는 시대도 있었고, 배우자 선호도에서 목사가 상위권에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제는 그것이 다 옛말이 되어갔다는 것을 느낍니다. 어쩌면 우리가 경험한 시대 가운데 가장 교회 다니는 것이 어렵고 힘든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더 이상 교회는
세상의 주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교회 다닌다는 것만으로도 더 많은 불편과 어려움을 감내해야 하는 그런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그만큼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인이 경험하고 노래했던 이야기에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잔을 나도 나누어 마시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종이 고난을 받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죽음까지 이르는 순종을 여호와가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의 최종 목적은 ‘속건제물’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에서 제물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시죠? 그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동물의 희생으로 사람은 죽음을 면하고,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만의 길이니, 너희는 다른 길로 가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구약 이사야서에 이미 종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와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것은... 때로는 세상과 다른 방법으로, 때로는 그로 인한 어려움을 알지만 기꺼이 나아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 12: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5)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종은 죽음을 통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길이 영광의 길과 같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에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것, 비록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제도로부터 나온 것이지만, 십자가의
길은 어느 시대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걸어가야 했던 종의 길,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포로기의 백성들을 위로하다가 ‘종의 노래’를 주셨을까요? 결국 돌이킴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포로기를 거쳤다고 끝인가요? 이들이 변하지 않았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죠. 무엇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의 모습인지 보여주셔야죠. 제가 지난주에 쉽게, 그들이 포로기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회복이 일어났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귀환시켰다고
정리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글로는 짧은 한 줄에 지나지 않지만, 포로생활을 해나가며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지키고, 지금 눈앞에 있는 바벨론의 화려함을 따라가지 않는 삶.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나님이 마르둑에게 졌다는 바보 같은 생각을 하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쉽지만... 막상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맘몬(물질)이 내 삶에 주는 힘이 더 크다고 여기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실제적인 도움은 줄 수 없고, 혹은 그 부분에는 계시지 않고, 그저 내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그런 분으로 여기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저는 바벨론 포로기의 백성들에게 필요했던 것과 우리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했던 신앙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지금 때로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회복시켜 우리를 ‘출애굽’, ‘출바벨론’에 이어 ‘출인생’하여 하나님 나라의 회복 가운데 참여시켜 주실 것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여호와의 종의 모습을 기억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것이 위로와 회복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주께서 그들의 수고와 슬픔을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이스라엘의 고난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실 영광스러운 회복이 임하게 될 것이라고 소망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로마
가톨릭에는 ‘연옥 교리’가 있습니다. 죽음 이후 천국에 가기 위한 중간단계와 같습니다. 바로 천국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정화되어 천국에 갈 수 있는 존재가 되는 장소로 연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옥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연옥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현세의 삶임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후 상태에서 겪는 고난이 아니라, 현세에 겪는 고난이 우리가 영광스러운 미래에 이르기 위해 거쳐야 할 계곡이라는 것이죠.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이란
역설투성이입니다. 모세는 왕자로서 쓰임 받지 못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사용되도록 준비되었던 것은 인생이 계속 자신의 생각과 다른 나락으로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장 약속의 땅에서 망했고, 포로기에서 회복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사실들을 묵상해볼 때면, 우리의 삶이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질문해 보게 됩니다. 바울은 서신서의 절반을 감옥에서 씁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본받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예, 그렇습니다. 바울의 그 이야기의 핵심은 감옥이 아닐 것입니다. 그 안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그의 태도였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삶에도 광야의 시기가 있고, 때로는 바벨론 포로의 시기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어요. 광야에서도 모두가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은 아닙니다. 출애굽 1세대는 오히려 광야에서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살아가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 포로기를 살면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바벨론의
화려함에 마음을 빼앗겨 그것 따라 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고난을 겪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견디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포로기에 주어진 이사야서 속의 ‘여호와의 종’에 대한 메시지. 그것은 포로기 가운데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가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의 상황에서 전파되어,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가운데서 묵묵히 여호와 하나님의 종이 되어 걸어가기를
응원하는 메시지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한 알의 밀알 같이 사용되어, 여러분을 통해 주를 만나고 알게 되고, 땅 끝까지 빛을 비추는 일들이 나타나길 소망합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종이 아닌, 여호와의 종의 삶을 살아내게 하옵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