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2과 / 나는 누구인가 (1) / 강정규 목사

2021-08-06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지난주까지 1과 ‘하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2과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바르게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될 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탕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빼앗다시피 하여 가출하고, 허랑방탕한 삶을 사느라 세월을 잃어버리고 인생을 망쳐버린 탕자. 그가 아버지께 다시 돌아갈 수 있었던 계기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실상을 발견했을

때입니다. 자기 실상을 알지 못했을 때, 그에게 아버지는 떠나 버려야 할 의미 없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없는 자신의 처참한 실상을 자각했을 때 아버지는 종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아가야 할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탕자의 ‘자기 발견’이 ‘아버지에 대한 바른 인식’과 ‘아버지와 바른 관계 맺음’의 시발점이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을 먼저 아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 됨의 첫걸음입니다. 성경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까? 오늘 우리가 다룰 나는 누구인가? 인간은 누구인가? 이것에 대한 답을 우리는 흙의 특성을 통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참 인간일 수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1) 흙의 첫 번째 특성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흙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만약 흙이 생명의 양식을 공급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물론이요, 새나 동물 그리고 사람의 생존은 불가능합니다. 육식동물조차도 풀을 주식으로 하는 초식 동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습니다. 바다 속 물고기는 어떠한가요? 바닷물을 담고 있는 바다의 밑바닥 또한 흙입니다. 따라서 흙이 없다면 이 세상 모든 생물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듯 ‘생명’인 흙으로 인간을 지으신 것은, 인간은 서로 생명을 나누며 살아야 할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각설이

예수>라는 책을 쓰신 이천우 목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남루한 거지 옷에 찌그러진 깡통을 든 각설이 모습의 예수님이 떠오른다고 말합니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었죠. 어린 이천우가 7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12살 때가 되어서 거지가 되어 전국을 떠돌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폭력배에게 납치가 되어 소매치기 소굴로 끌려갑니다. 그곳에서 그는 폭력배의 엄한 감시 아래 20여 일 동안 소매치기 강제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서울역으로 첫 실습을 가게 됩니다.

표적은 시골에서 갓 상경한 아주머니입니다. 먼저 바람잡이가 아주머니에게 아는 척하며 수작을 걸었습니다. 그 사이에 다른 조직원이 다가가 예리한 면도날로 아주머니의 돈주머니를 그었습니다. 평소라면 그 조직원이 그 속의 돈을 꺼내지만, 그날은 이천우의 실습 날이므로 돈을 꺼내는 것은 그의 몫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이천우가 두목에게 떠밀려 아주머니 곁으로 다가간 순간, 어린 시절 고향에서 다녔던 주일학교 선생님의 음성이 불현 듯 그의 귓전에 들려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남의 것을 도둑질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이천우가 아주머니에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아주머니, 돈주머니 조심하세요. 저는 소매치기에요. 지금 큰 소리로 ‘소매치기야’ 하고 외치세요.” 하지만 무슨 영문인지 알아듣지 못한 아주머니는 ‘소매치기’라고 소리치지 않았고, 이천우는 패거리들에 의해 남산 소굴로 끌려갑니다. 두목의 명령을 어기는 자에게 가해지는 이른바 ‘사형집행’을 당했습니다. 그것은 집단 린치를 가한 뒤, 소굴 아래쪽에 있는

쓰레기 야적장의 유리조가 더미 위로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이나 사형집행을 당한 이천우는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한밤이 되어서야 의식을 회복한 이천우는 자신이 창고 같은 곳에 갇혀 있음을 알았습니다. 피투성이에 유리 파편까지 박힌 그의 몸은 천금보다 무거웠으나, 일단 도망쳐야 했습니다. 이를 악물고 무작정 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기었을까? 청량리역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싶었죠. 그러나 역 앞을 지나가는 수많은 행인들 가운데 피투성이인

이천우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도와달라고 외치고 싶어도 목구멍에서 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잃었습니다. 청량리역 광장에 내던져진 피투성이 이천우는 시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 갈 길 바쁜 행인들은 모두 그 시체를 피해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각설이 거지가 이천우를 발견합니다. 그는 자신이 거지였기에, 피투성이 거지 행색의 이천우 앞에 멈춰 섰습니다. 맥박 반응도 없고, 옷을 풀어헤친 후 가슴에 귀를 대보니 가냘프게

심장이 뛰고 있었습니다. 각설이 거지는 이천우를 자기 움막으로 옮겼습니다. 온 몸에 박힌 유리 파편을 뽑아 주고, 유리 가루는 자신의 혀로 핥아 제거했습니다. 각설이 거지의 혀는 곧 찢어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하지만 그 정성으로 마침내 이천우는 의식을 회복합니다. 청량리역에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이천우는 눈을 떠보니 아직 살아 있었고, 누군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을 살려준 각설이 거지이죠. 그 뒤로 이천우는 만약 예수님이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다면, 자기 눈앞에 있는 각설이와 같은 모습일 것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모든 사람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자신의 생명을 살려낸 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천우의 삶에서 그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과 같은 거지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천우 목사님께서 기도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각설이의 모습으로 나타나 보이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흙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때로는 이 세상 어딘가에는 여러분에 의해서 되살아날 누군가가 있는 법입니다. 여러분이 도와야 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품어야 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삶을 산다면, 여러분의 삶은 진정 ‘흙다운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2) 흙의 두 번째 특성은 ‘사랑’이다. 흙은 인간이 내버리는 온갖 쓰레기와 오물을 전혀 마다 않고 모조리 품습니다. 만약 흙이 인간의 쓰레기와 오물을 품어 주지 않는다면 이

지구는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흙은 그 무엇이든 구별하지 않고 포용하며 도리어 세상을 정화시켜줍니다. 흙은 곧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모두에게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인 흙으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은 모두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사랑과 유사해 보이지만 다른 것이 동정입니다. 동정은 일시적이고 일회적이지만 사랑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제사장, 레위인이 외면한 강도 만난 사람을 향해 만사를 제쳐두고 자비를 베풀었다는 것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그는 ‘이튿날’에도 마음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타인에 대한 우리의 마음은 쉽게 감동을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룻밤만 지나면 마음이 전혀 달라져 버리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경험합니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라는 속담처럼, 내 눈에서 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져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은 그

다음 날 아침에도 여전하였습니다. 그의 마음은 동정심이 아니라 참된 사랑으로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사랑하는 것. 이와 같은 사랑이 사람을 감동시키며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거지와 신사>라는 작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신사가 산책 중에 거지를 만났습니다. 거지의 구걸 앞에서 신사는 지갑을 꺼내어 돕고자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지갑을 자져오지 않은 것입니다. 이련 경우

웬만한 사람이라면 적선의 마음을 거두고 갈 것입니다. 주려해도 돈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사는 그냥 돌아서지 않고, 다른 주머니에 손을 넣었습니다. 꼭 돈이 아니더라도 줄 수 있는 다른 것이 있다면 주고 싶은 마음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그 주머니에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신사는 포기하지 않고 바지와 저고리의 모든 주머니를 뒤졌습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줄 것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사가 거지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군요.” 그 말에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신사 양반! 난 이미 당신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았습니다.” 거지가 신사로부터 받았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를 구별하지 않고, 지속적이며 반복적인 사랑이 거지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였던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교회 어떤 분의 부탁으로 청년들과 사랑의 열매 모금을 톨게이트에서 2~3회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톨게이트 현금 요금소 앞에서 계산후 남은 잔돈이라도 기부해주길

기대하며 통을 들고 인사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운전자와 제가 마주칠 시간이 몇 초 되지도 않지요. 제가 그 운전자에게 기대하는 것도 그리 크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짧은 순간 모금을 하면서도 반응들이 정말 많이 달랐습니다. 같은 돈을 주더라도 정말 거지 동냥 주듯이 주는 사람도 있고, 그 얼마 안 되는 돈도 정성을 다해서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수고가 많습니다”라는 인사를 하면서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지갑에서 만 원짜리, 혹은 몇 천원을 더

넣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충 보지도 않고 던지는 사람으로 인해서 동전이 길가에 떨어지는 일을 경험하면, “이왕 줄 거 뭐 저렇게 주나”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할 때, 돈의 액수에도 마음이 드러나지만, 그 태도에서도 그 마음이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땅에 지으시며 기대하셨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간다면, 여러분은 마땅히 ‘사람 중의 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3) 흙의 세 번째

특성은 ‘정직’이다. 흙은 정직합니다. 콩은 심으면 반드시 콩을 내어줍니다. 참고로 저는 콩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콩이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다른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대통령이 사과를 좋아한다고 청와대에 심겨진 감나무에서 사과를 맺지는 않습니다. 흙은 변함없는 ‘정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이 마땅히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옛날 어느 왕이 신하들에게 꽃망울이 맺힌 화분을 하나씩 나누어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달 후에 가장 예쁘게 꽃을 가꾸어 온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그때부터 신하들은 저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화분을 꽃 피우기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드디어 한 달이 지났습니다. 신하들이 각자가 정성스럽게 가꾼 화분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화분마다 아름답고 향기롭기 그지없는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으로 나온 신하의 손에 들려있는 화분은 꽃 대신 말라비틀어진 줄기만 볼썽 사납게 꽂혀 있었습니다. 왕이 노기 띤 얼굴로

어찌 된 일인지를 추궁했습니다. 신하는 죽을죄를 지은 죄인의 표정으로, 지난 한 달 동안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지만, 까닭 없이 꽃이 죽어버렸기에 어쩔 수 없이 그대로 가지고 왔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 죽을 꽃을 들고 온 신하에게만 상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한 달 전에 왕이 준 꽃은 모두 뿌리를 잘라버린 것들이었습니다. 즉, 아름다운 꽃이 핀 화분을 가져온 신하들은 모두 왕을 속이고 화분을 바꿔치기 한 것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 정직하게

본래의 화분을 가져온 것이죠. 여러분은 어떠한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계십니까? 이득을 위해서라면 화분을 바꿔치기 하는 쪽입니까? 아니면 어떤 불이익이 있을지 모르면서도 말라비틀어진 화분을 그대로 들고 나온 쪽입니까? 저에게도 정직함을 위한 싸움들이 존재합니다. 아마도 우리 각자의 삶에 그런 순간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상황에서도 정직함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사람’입니다. 4) 흙의

네 번째 특성은 ‘도구 됨’이다. 흙은 불에 타지 않습니다. 그러나 흙에 물을 부어 반죽을 한 뒤 불에 구우면 단단한 도구가 됩니다. 하지만 흙은 결코 자기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빚는 대로 토기장이에게 자신을 맡길 뿐입니다. 자신이 되기 원하는 도구가 아니라 토기장이가 원하는 도구가 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 놓습니다. 특정 도구로 빚어진 자신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다른 도구와 자신을 비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 자신을 맡겨 하나님의 도구로 살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직전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그때부터 요한은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마리아를 자기 집에서 모셨습니다. 마리아를 봉양하는 일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럼 그 기간이 얼마나 되었을지 생각해보셨나요? 이스라엘 여자들은 15~18세 사이에 결혼하여 첫 아이를 낳았습니다. 마리아도 그때쯤 예수님을 낳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리아의 나이 차이는 많이 잡아야 18세 정도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신 나이가 30대라면, 그때 마리아의 나이는 50세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 후 마리아는 90세가 되기까지 장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40년을 더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 요한이 20대 중반이나 20대 후반의 청년이라면, 요한이 60대 중반 혹은 70세의 노인이 될 때까지 마리아를 모셨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12명의 제자가 있었지요. 요한을 제외한 다른 제자들은 세계 도처에서 초대교회의 영웅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던 바울이라는 사람이, 자신도 예수님의 사도라며 세계를 누비고 다닙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의 어머니를 뒷바라지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부를 정도로 자기 자신에 대한 긍지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만큼 주님을 위한 삶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큰 꿈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며 젊은 시절 자기가 가졌던 꿈들은 다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세계 도처에서 들려오는 다른 사도들의 소식을 들을 때, 때로는 자신이 작게 느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노인이 되기까지 마리아 봉양하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었고, 자신은 주님의 도구임을 한시도 잊지 않았던 까닭이죠. 여러분, 요한의 인생은 어떻게 사용되었나요? 그는 사도 가운데 유일하게 순교 당하지 않고 장수했습니다. 요한은

힘없고 연약한 마리아를 40년 가까이 봉양하면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자신의 삶 가운데 터득했을 뿐 아니라,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의 영적인 교제를 심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리아에 대한 봉양이 끝났을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요한으로 하여금 요한복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한 1서, 요한 2서, 요한 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까지 쓰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아가기를 힘썼던

요한을 위해 맡겨두신 일이었습니다. 그가 40년 동안 마리아를 모시면서 자신도 모르게 인생에 대한 통찰력, 사랑에 대한 이해, 주님과의 깊은 사귐을 갖지 않았다면 결코 쓸 수 없는 글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쓴 요한복음을 통해 공관복음과 다른 심오한 그리스도를 소개받게 되고, 요한서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사랑 그 자체이심을 배우며, 요한계시록을 통해 역사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철저한 ‘도구 됨’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님께서 각자에게 명령하시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도구되어 살아가기를 단념치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도 못하는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씀에 근거해서 ‘생명’, ‘사랑’, ‘정직’, ‘도구 됨’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그러나 흙으로 지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가 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2:19에 의하면 짐승도 사람처럼 흙으로 지어졌습니다.

짐승이 흙으로 지어졌다고 생명의 삶, 사랑의 삶, 정직의 삶, 진리의 도구가 되는 삶을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본능, 자기 욕망을 좇아 살아갑니다. 그럼 무엇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원하신 삶에 이르게 합니까?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만약 사람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에 그쳤다면 인간은 짐승과 다를 바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은 인간에게

당신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시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 차이입니다. 인간이 생령으로서의 본질, 다시 말해 영적인 면을 상실한다면 그는 더 이상 짐승과 구별될 수 없는 것이죠. 짐승 같은 인간,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 될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있던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뤄가도록 도우시는 그 성령님을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비전에 따라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이 원하시는 4가지 부분을 기억하면서, 혹시 내게 느껴지는 도전들이 있었다면 그것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사랑을 전하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정직한 삶을 사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도구된 삶을 살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