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 동안 각각 두 달씩 이사야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작년 7월에는 이사야의 전반부인 1-39장까지를 두 달에 걸쳐서 설교 했습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서 올해 7월부터 8월까지 이사야의 후반부를 함께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번에 보는 이사야는 성경에서 장수로 따지면 두 번째로 긴 책입니다. 66장으로 이뤄진 책이죠. 가장 긴 책인 시편이 여러 저자가 쓴 시 모음집이라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한권의 책으로서는 이사야서가 가장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사야를 볼 때마다 정말로 이 책이야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성도님들이 이사야를 이렇게까지 깊이 있게 접해본 경험이 없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이사야에서 히스기야 이야기 정도를 알고 있거나, 위로를 주고 힘을 주는 말씀의 모음 가운데 한 부분을 알고 있거나, 예수님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언들에 대해서 일부분을 설교로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로서 12번째 설교이고, 아마도 2편의 설교를 더 해서 우리가
이사야서에 대해서만 총 14편의 설교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사야서 강해로서 우리의 첫 발걸음입니다. 첫 만남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고, 때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들 투성이 일수도 있습니다. 아마 우리에게는 모두 망각의 은사가 있어서, 이번에 열심히 들어서 조금 내용이 정리되는 것 같다가도, 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물가물해지는 상황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를 믿으십시오. 여러분이 이번에 이사야서의 설교와 이사야서에 대한 바이블클래스를
들으며 따라오고자 힘썼던 노력은 결코 날아가 버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약 이번 기회를 통해서 이사야서의 구조와 배경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정리가 되신 분들은, 그것이 구약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니 더 나아가 신약의 이야기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영향을 미치는 엄청난 지식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설령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아직은 부분적으로 아록 부분적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오늘도 성령께서 주시는 깨달음의 지혜,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주하게 하실 은혜를 사모하며 나아가 봅시다. 오늘의 양식을 주실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서론에서 한 번 더 우리의 여정을 정리하는 것은 오늘부터 이사야서의 세 번째 파트를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가 가진 독특한 구조를 기억하시지요? 이사야서의 별명이 ‘작은 성경책’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서가 66장이고, 성경도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66권입니다. 구약이 39권이고 신약이 27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전화번호라고 했습니다. 구약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실패하였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새로운 언약 가운데 새로운 백성이 생겨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첫 부분인 1-39장도 구약의 메시지와 매우 유사합니다. 남유다의 실패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39장에서 40장 사이에는 시간의 간격이 존재합니다. 100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버렸고, 40장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40-66장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새로운 일을
하시는 것에 대해서, 그들에게 주시는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메시지와 닮아 있습니다. 27장에 이르는 메시지가 신약 27권과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40-66장이 우리가 이번에 묵상하고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다시 둘로 시간이 나눠집니다. 바로 40-55장까지와 56-66장까지의 배경이 또 다른 것입니다. 40-55장은 바벨론 포로기에 있는 백성들에게 귀환에 대해 말씀하시며 위로하시는 메시지라면, 56-66장은
귀환 후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지난 3주의 메시지는 이사야서로 보면 두 번째 부분이자, 포로시대의 배경인 40-55장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07.18 _ 이사야 9) 주님의 권능, 우리의 위로 (사 40:1-8) 40장의 상황은 이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들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70년의 포로 생활이 이제 끝나가는 시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여전히 함께 하시고, 새로운 일을 하실 것이라는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 분이라면 그 메시지는 아무런 힘이 없지만, 하나님은 약속한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고 그들을 위해 이제 일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능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07.25 _ 이사야 10) 나는 하나님이라 (사 40-46장)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들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으며 힘을 얻는 말씀들이 많이 있죠.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잊었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희를 한 순간도 있지 않았다는 것이죠. 내가 너희의 아버지이고, 내가 너희를 창조하였다, 너희는 나를 믿어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08.02 _ 이사야 11) 종의 노래 (사 49-55장) 이사야의 두 번째 파트 안에는 4편의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이들이 포로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찾는 마음들도 생겼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었기에 이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회복은 오로지 하나님의 결정에 따른 것이죠. 그러므로 이들에게 종의 노래를 통해서 하나님이 찾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종이 어떤 모습인지를 말씀하십니다. 바로 그 종의 모습은 예수님이 성취하셨고, 모든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추구하며 따라가야 하는 길입니다. 이것이 지난 3주간의 설교였습니다. 포로된 백성들에게 주셨던 말씀들이죠.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의 마지막 결론 부분은 55:6-13입니다. 일부분을 함께 봅시다. (사
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와서 들어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살 것이다. 내가 너희와 영원한 언약을 맺겠으니, 이것은 곧 다윗에게 베푼 나의 확실한 은혜다. (사 55:6)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사 55:7)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그에게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우리의 하나님께로 돌아오너라. 주님께서 너그럽게 용서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비록 유다가 포로 가운데 있지만, 여전히 이 약속은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 언약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영원한 왕조로 세우신다는 것을 맹신하여, 자신들은 언약에 충실하지 않으면서도 다윗의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는 신념에 가득차서 그릇되게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구절에서 다윗 언약을 조건적으로 재해석합니다. 즉 회복의 조건이
‘다윗 언약에 대한 맹신’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돌이킴과 돌아옴’에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어 나아가면 하나님이 그들을 회복시키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사 55:12) 참으로 너희는 기뻐하면서 바빌론을 떠날 것이며, 평안히 인도받아 나아올 것이다. 산과 언덕이 너희 앞에서 소리 높여 노래하며,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다. (사 55:13) 가시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잣나무가
자랄 것이며, 찔레나무가 자라던 곳에는 화석류가 자랄 것이다. 이것은 영원토록 남아 있어서, 주님께서 하신 일을 증언할 것이다. 55장의 이 약속이 주어진 후, 이사야서에는 다시 한 번 시간의 공백이 생깁니다. 그 시간들 안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바로 지난 수요일에 바이블 클래스를 통해서 다뤘던 그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역사의 주도권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넘어가 버립니다. 강력했던 바벨론은 혼란기를 겪고 나보니두스와 그의 아들 벨사살 때에는 멸망의
길로 접어듭니다. 반면,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통합하여 왕이 된 고레스는 리디아까지 정복하며 강력한 국가로 급부상합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시작이죠. 성경에는 메대-바사라고 나오는 국가입니다. 페르시아(바사)가 핵심이므로 바사 왕 고레스라고 부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왕인 키루스 2세를 의미합니다. 그가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바벨론 성을 차지하면서, 그곳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다 백성들의 주인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이제 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가 아니라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고대 제국마다 속국의 백성을 대하는 방향이 달랐는데, 앗수르는 혼혈정책을 펴서 속국의 정체성을 흔들어놓습니다.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했던 북이스라엘이 그로 인해서 혈통이 바뀝니다.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민족이 결혼을 하면서 탄생한 혼혈인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죠. 바벨론은 포로로 끌고 가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다니엘과 에스겔 같은 사람으로부터 수많은 남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오게 됩니다. 강제 이주를 시킨 것이죠. 반면
페르시아는 고레스의 삶에 있었던 사건들 때문인지 몰라도, 그가 가진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인해서 이제는 각자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 배경은 돌아오는 수요일에 좀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그로 인해서 바벨론에 있던 남유다 백성들이 그들이 본래 살아가던 가나안 땅,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70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적용해서 생각해보면 1950년쯤에 러시아나 몽골 쯤으로 강제 이주
당했던 사람들이 이제 막 다시 한반도로 돌아오게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역사에 이런 일들이 있었죠. 바로 러시아어로 ‘카레이츠’라고 불리는 고려인입니다. 1860년 무렵부터 생겨난 고려인이 마지막으로 강제이주 당했던 것이 1945년입니다. 1990년 이후 소련이 해체되며 고려인들의 삶은 불안정해졌고, 2000년 이후로 한국으로 귀환하는 고려인 동포가 많아졌습니다. 출입국 통계에 의하면 2020년 4월 기준으로 국내 거주 고려인은 85,072명입니다.
물론 아직도 중앙아시아에 사는 고려인은 약 50만 명에 이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보면 우리는 참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분단국가의 현실도 그러하고, 강대국 사이에 지정학적으로 끼어 있는 것도 그렇습니다. 56장부터의 내용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부터의 설교를 듣는 것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저는 공동체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신앙의 결단은 결국 하나님과의
개별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내 아내가 믿음이 좋다고 나도 1+1로 함께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며,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이 자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결단할 수 있을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스라엘 백성에 속하여 있으나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으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백성에 속하여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던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 조차 일어난 일입니다. 그 12명 가운데서도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다시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오는 감격을 맛보지만,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이들의 신앙도 온전한 회복이 일어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바벨론 포로 기간 당면한 어려움으로 인해 이들의 신앙이 더 간절하고 뜨거워졌는지도 모릅니다. 보통 청년의 때 교회를 대충대충 다니던 남자 청년들도 군대에 가서
외롭고 힘든 마음 가운데 교회에 가서 첫 예배를 드리면 감격이 찾아옵니다. 훈련병, 이등병 때만 느껴지는 그 알 수 없는 감동. 그런데 그것도 곧 군대에 대한 적응이 다 끝나고 나면, 이제 교회 가는 일이 귀찮은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들이 아주 많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마음이 쉽게 바뀌는지 알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일하심 가운데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 우리의 생각으로는 그 일을 행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이들에게 있기를 기대하지만, 안타깝게도 귀환민의 영적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페르시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의 재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정작 그 일은 현실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돌아오셔서 예루살렘에서 왕으로 통치하시리라는 기대의 말씀이 40장과 52장에서 주어졌지만,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배민들이 마주하고 있는 척박한 현실은 구원이 성취되었다고 보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어보였지요. 어쩌면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강정규 목사가 성경을 근거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전하지만, “그런데 내 삶은 왜 이렇지?”라고 묻기도 하는 여러분의 삶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임했다고 하니까 임한 것 같은데, 또 내 현실을 보면, “정말 임했나? 내가 정말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었나?” 이런 의문을 갖는 것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즉, 귀환한 예루살렘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회의감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56장의 말씀은
바로 ‘오지 않은 구원’에 대한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응답인 것입니다. (사 56:1)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 (사 56:2) 공평을 지키고 공의를 철저히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 안식일을 지켜서 더럽히지 않는 사람, 그 어떤 악행에도 손을 대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삶 가운데 경험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분의 계명과 약속을 받고도 무시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봤던 포로기의 마지막인 55장에서, 하나님은 다윗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이들을 귀환시키기로 결정하십니다. 그때에도 ‘회개’가 조건으로 강조되었습니다. 55장에서 56장 사이에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왔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오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제 귀환한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다. 나의 의가 곧 나타날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공의를 행하여라.”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사역을 하실 때와 비슷하지 않나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말씀하셨던 것이 떠오릅니다. 그러면서 이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 명령으로 ‘안식일 준수’가 강조됩니다. 안식일의 준수는 한편으로는 제의적 형식화를, 다른 한편으로는 안식일의 세속화를 초래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서
핵심은 안식일을 ‘더럽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새기며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강조된 것은 포로기부터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약속의 땅에 살았지요. 성전에 가서 예배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포로기에 바벨론이라는 이방의 땅에 살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스스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안식일을 지켜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빼면 더 이상 약속의 땅에 사는 것도 아니고, 성전도 이들에게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포로기와 그 이후까지도 안식일은 점차 유대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신앙고백적 수단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안식일과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신앙의 모습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뜻이 무엇인지는 3절부터 잘 나타납니다. (사 56:3) 이방 사람이라도 주님께로 온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당신의 백성과는 차별하신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고자라도 '나는 마른 장작에 지나지 않는다' 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여라. 여기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 대상을 언급하고 있어요. 하나는 이방인이요, 다른 하나는 고자입니다. 성경의 표현이 고자이니 저도 그대로 사용을 하겠습니다. 주님께로 온 이방인이란, 외국인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방인이 여호와를 따를지라도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구별되어 권리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든 차이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기준이 바뀌고 있는 것입니다. 그전까지 하나님의
백성은 민족적-혈통적-태생적 공동체였다면, 이제는 신앙고백적-선택적-자발적 공동체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급은 고자에 대한 것입니다. 아마도 이 언급은 구약의 율법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신명기 말씀에 따르면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즉, 고자는 태생적이거나 사고 혹은 어떤 이유로 고자가 된 사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고자가 갖는 생물학적 한계는 육체적 후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마른 나무(장작)’에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 56:4) 이러한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록 고자라 하더라도, 나의 안식일을 지키고, 나를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사 56:5) 그들의 이름이 나의 성전과 나의 성벽 안에서 영원히 기억되도록 하겠다. 아들딸을 두어서 이름을 남기는 것보다 더 낫게 하여 주겠다.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지 않도록, 영원한
명성을 그들에게 주겠다." 지금 이 부분에서는 ‘고자’를 예로 들었지만, 사실 이것은 아마도 율법에 비추어 가장 강력한 대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이 거절당했던 고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공동체에는 허락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율법과 안식일 준수를 자신들의 기준에 맞춰 충실히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안식일을 지키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며 사는 것. 이런 사람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거절 당했던 고자라고 할지라도, 혹은 그 어떤 사람도 이 기준대로라면 나아오기에 부족하지 않아요. (사 56:6) 주님을 섬기려고 하는 이방 사람들은,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여 주님의 종이 되어라.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는 이방 사람들은, (사 56:7)
내가 그들을 나의 거룩한 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겠다. 또한 그들이 내 제단 위에 바친 번제물과 희생제물들을 내가 기꺼이 받을 것이니, 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그리고 먼저 언급된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주어집니다. 이방 사람들도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을 철저히 지키면 그가 하나님께 나오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방인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꺼이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집은 만민이 모여 기도하는 집이 됩니다. 나의 거룩한 산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합니다. 이들이 성전에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며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사야서 초반부인 1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에 대해서도 혹독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식적인 제사의 의무만 취할 뿐, 그들의 삶에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은 다 무너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들의 제사를 받으시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아마도 이 부분에서 이 말씀을 떠올릴 것이죠. (마 21:13)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다시 한 번
이렇게 신약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사야 1장에서도, 이사야 56장에서도, 신약에서도 원하셨던 것은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참된 삶을 힘쓰고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며 예배를 드리는, ‘삶과 예배가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방인이어도 괜찮은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선민 이스라엘이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다른 어떤 것이 여러분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장애물이 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과 예배의 모습이 중요해요. 이렇게
먼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자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에 대해서 말씀을 하신 후, 지금 그들의 모습을 고발합니다. 그것이 56:9부터 나오는 이야기들입니다. (사 56:10)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것들은 눈이 멀어서 살피지도 못한다. 지도자가 되어 망을 보라고 하였더니, 벙어리 개가 되어서 야수가 와도 짖지도 못한다. 기껏 한다는 것이 꿈이나 꾸고, 늘어지게 누워서 잠자기나 좋아한다. (사 56:11) 지도자라는 것들은 굶주린 개처럼 그렇게 먹고도 만족할
줄을 모른다. 백성을 지키는 지도자가 되어서도 분별력이 없다. 모두들 저 좋을 대로만 하고 저마다 제 배만 채운다. 귀환민의 모습은 하나님의 기대와 저 멀리 있었습니다. 백성을 지키는 파수꾼에 해당하는 지도자들이 먼저 타락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기는커녕 자기의 배만 불리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포로기 이전의 고발이 포로기 이후에도 똑같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심판과 구원 경험에도 불구하고,
영적 지도자들의 무지와 탐욕이 전혀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 57:6) 너는 골짜기의 매끈한 돌들을 가져다가, 그것들을 신으로 떠받들었다. 네가 그것들에게 술을 부어 바치고, 또 곡식제물을 바쳤다. "내가 너희의 그런 꼴을 보았으니, 내가 어찌 기뻐하겠느냐?" (사 57:7) 너는 또 저 우뚝 솟은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거기에다 자리를 깔았다. 거기에서 제사를 지냈다. 하나님은 이들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지적하십니다. 6절부터 청자의 인칭이
2인칭 여성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가 남편 여호와를 버린 아내와 같음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성경은 영적 간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죠. (사 57:11) 네가 그처럼 무서워하는 신들이 누구냐? 도대체 그 신들이 얼마나 무서우면, 나를 속이면서까지, 나를 까마득히 잊어가면서까지, 그 신들에게 매달리느냐? 내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다고, 네가 나를 경외하지 않는 것이냐? (사 57:12) 너는 네가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생각하겠지만, 네가 한 일을 내가 다 폭로할 것이니, 너의 우상들이 너를 돕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귀환하여 살아가며, 그들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이사야 55장에서 주님께서 약속의 말씀을 주신 후, 예언의 선포에는 공백의 시간들이 존재했습니다. 56장까지의 간격이 존재하지요. 물론 그 사이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서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그들은 또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이렇게 반응했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여기서 화가 잔뜩 나신,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57:14-21에는 하나님의 진정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참고자료 들에 의하면, 이 단락의 제목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끝까지 인도하고 고치겠다고 약속 하시는 하나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전혀 다른, 어쩌면 하나님이 싫어하셨던 옛날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에 포로로 보내기까지 하시며 이들을 깨우치고자 하셨지만, 엄중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변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들의 그 모습을 보시며 하나님이 하시는 결정은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길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쳐주기로 하십니다. (사 57:16) 나는 사람들과 끝없이 다투지만은 않는다. 한없이 분을 품지도 않는다. 사람에게 생명을 준 것이 나인데, 내가 그들과 끝없이 다투고 한없이 분을 품고 있으면, 사람이
어찌 견디겠느냐? (사 57:17)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사 57:18) 사람의 소행이 어떠한지, 내가 보아서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고쳐 주겠다. 그들을 인도하여 주며, 도와주겠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여 주겠다. 여러분. 저는 이사야서를 통해서 참된 우리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거듭 느낍니다. 우리가 모두
경험하는 일이지만, 만약에 어떤 자녀가 조금 서툴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뒤떨어집니다. 그래서 남들은 다 할 수 있는 것도 잘 못합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 아이를 붙잡고 가르치고, 훈련을 시킵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낙심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래서 다그치기도 하지만, 또 격려하고 달래기도 합니다. 맨 처음 기대했던 것만큼 다 못해도, 그 목표를 조정해서라도 “오늘 여기까지만 해보자. 이만큼만 해보자. 할 수 있어.” 말하며 그 일을 포기하지
않고 해나가도록 힘을 씁니다. 제게 오늘의 하나님은 그런 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제의적으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하나님은 58장에서는 참된 금식이 무엇인지를 그들에게 가르칩니다. 음식을 억제하는 것이 금식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금식의 핵심은 나의 주권을 포기하고 내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죠.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참된 금식을 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역사하시리라 말씀하십니다. (사
58:11) 주님께서 너를 늘 인도하시고, 메마른 곳에서도 너의 영혼을 충족시켜 주시며, 너의 뼈마디에 원기를 주실 것이다. 너는 마치 물 댄 동산처럼 되고, 물이 끊어지지 않는 샘처럼 될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대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역사하셨던 하나님 앞에 서기보다, 다시 돌아온 땅에서 살아가던 옛 습관대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모습은 돌아보지 않고, 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지
않으시는지에 대해서만 불만을 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사 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사 59: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제가 아는 한, 하나님은 한결같이 우리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하나님을 잊고, 귀찮아합니다. 내 잘못을 보기보다는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 앞에서는 모든 다짐과 고백을 쏟아놓지만, 정작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보다 더 도움이 될 다른 것을 의지하며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포기하기보다는 도와서 일으키기 원하시며, 여전히 하나님의 기대는 오늘도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우리들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창세기에 대해서 공부할 때, ‘예레미야스’라는 학자는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을 보시며 하나님은 후회하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심판의지가
바뀐다. 이것이 여호와 신앙의 독특성이다. 고대에는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고 죄가 심판과 연결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그런데 노아의 홍수 사건 이후에 하나님이 변하신다. 인간에게 악함이 여전히 유지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심판의지를 극복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인류가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홍수 이야기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인류가 어떻게 이 땅에서 생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의 의로움이 아니라 우리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심판 의지를
극복하심으로 인류가 생존할 수 있는 토대가 된 것이다.” 인간은 죄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도 때로는 심판으로 등을 돌립니다. 서로가 등 돌린 이 상태에서 누가 먼저 돌아왔는가? 여전히 인간은 하나님께 등을 돌린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에게로 돌아서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비로소 인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 것입니다. 영원 안에 사시며 그 이름이 ‘거룩’이신 분,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메시지다. “나는
높고 거룩한 곳에 살지만, 또한 기운 잃고 풀죽은 자들과 함께한다. 그들 속에 새로운 영을 불어넣고,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나는 끝없이 사람들을 법정에 세우거나, 끊임없이 노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용기를 잃고 말 것이고, 내가 창조한 영혼들이 지쳐 주저앉고 말기 때문이다. 나는 노했었다.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몹시 노했었다. 고집스럽게 제멋대로 가는 그들을, 내가 심하게 쳤고, 노하여 등을 돌렸다. 그러나 뒤돌아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보면서, 그들을 치유하고 이끌어 주기로, 그들을 위로해 주기로 마음 먹었다. 나는 애통하는 그들에게 새로운 언어, 찬양의 언어를 안겨 주련다. 먼 곳에 있는 자들에게도, 가까운 곳에 있는 자들에게도 평화가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고쳐주마.” - 이사야 57:15-19 아시는 분이 많겠지만, <그 사랑으로>라는 찬양의 배경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이야기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의 마음을 대변하며 쓴 찬양입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가 살펴본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관계가 이 찬양의 고백과 잘 연결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선민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첫째 아들과 갖습니다. 그러나 그는 때때로 아버지를 오해했고, 혼자 속앓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잘못된 마음을 깨우치기 위해 말씀하시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마음들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너무
오랫동안 내 삶에 있어서 더 이상 새롭고 흥미롭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분 옆에 있으나 헛된 소망을 꿈꾸다가 허전한 마음에 힘겨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눈을 들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누구보다 잘 아시고, 여러분을 누구보다 원하십니다. 이제 우리가 그 깨달음 가운데 고백할 차례입니다. 주의 사랑을 기억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