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나누는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주에는 인간을 흙으로 지으셨다는 말씀을 통해, 흙의 특성에 빗대어 우리는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생명’, ‘사랑’, ‘정직’, ‘도구 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사람, 사랑을 전하는 사람, 정직한 사람, 하나님의 도구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고, 사람다운 사람의 길입니다. 그럼 인간은 과연
그런 삶을 살고 있다고 평가를 받고 있는가? 1) 생명 (마 23:27)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안타깝게도 성경은 생명의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과연 그들의 모습은 어떠했기에 이런 책망을 받게 되었을까요? ‘회칠한 무덤’은 생명의 삶과는 거리가
멉니다. 회칠은 석회를 바르는 일입니다. 무덤을 회칠하여 겉으로는 깔끔하게 보일지라도 그 안은 죽음만이 깃들어 있을 뿐입니다. 즉, 이것은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는 듯하지만, 사실 그 속에는 악한 것이 가득하다는 의미이죠. 우리가 흔히 낯선 곳에서 사람 만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산에 가다가 어둡고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동물을 만나는 것보다도 무섭다고 이야기를 해요. 인간이 정말 생명의 삶을 살고 있는가? ‘제레미 리프킨’이라는
미래학자의 견해를 언젠가 소개해 드리기도 했는데요. 인간이 머무는 곳에는 파괴가 일어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 또한 인간이 지구에 남은 마지막 야생의 터를 침범한 것이 원인이라고 말합니다. 1900년만 해도 인간이 살아가는 땅은 전 세계 영토 가운데 14%였습니다. 지금은 77%입니다. 그러면서 야생 생물의 서식지가 줄어들었습니다. 서식지가 파괴된 야생동물은 인간 곁으로 오게 되고, 그들 안에 있는 바이러스가 인간세계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에볼라, 사스, 메르스와
같은 모든 팬데믹도 같은 이유이죠. 인간의 욕심은 자연을 파괴하고, 동물세계를 파괴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파괴되고 있습니다. 다들 그렇겠지만, 예전에 저희 집에는 ‘방’ 한 칸씩을 모르는 사람에게 월세로 주고 살기도 했었습니다. 아마 그런 집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 방을 빌려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도 했어요. 지금으로서는 전혀 가능해보이지 않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발전하고 있고, 우리의 겉모습은 더 깨끗하고 번듯해지며, 우리의
삶의 모습도 그러하지만... 우리는 점점 더 악하고, 개인주의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2) 사랑 (마 5: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마 5: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랑’에 대해서는 어떤가요? 주님은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함을 꾸짖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셨던 ‘사랑’일까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상대의 실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허상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결혼한 뒤에 서로 속았다고 말합니다. 누가 누구를 왜 속였을까요? 물론 정말로 안 좋은 마음으로 사기를 치는 경우들도 있겠죠. 혹은 상대가 속인 부분도 있겠지만, 실은 자신에게 더 많이 속습니다. 서로 사랑을 속삭이는 동안 각각 자신의 상대를 백마 탄 왕자요, 신데렐라 같은 공주로 여깁니다. 그 안에서
빚어내고 있는 것은 상대의 허상일 뿐 실상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만든 상대에 대한 허상을 깨고, 상대에게서 발견되는 실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자신이 빚은 상대의 허상에 집착하느라 실상을 배척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기심과 이기심이 부딪치는 곳에서 인간의 실상은 외면을 당하고, 사랑이 아닌 상처만이 남게 됩니다. 책의 일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가장 가까워야 할 배우자의
이기심으로 인해 자신의 실상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자녀들이 부모가 그려 낸 허상에 자신을 맞추느라 괴로워하며 신음하는가? 과연 그대는 예외인가? 이것은 그대의 실상이요, 우리 모두의 실상이 아닌가?” 3) 정직 (잠 2:13) 이 무리는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하며 (잠 2:14)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하나니 (잠 2:15) 그 길은 구부러지고 그 행위는 패역하니라 ‘정직’에 대해서도 성경은
인간이 정직한 길에서 떠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너무 신났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넘치는 청년들과 함께 공부하고 함께 예배하고 함께 생활하는 것 자체가 매일 매일이 수련회 같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험기간이 다가오면서 저의 그러한 기대는 많이 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정직해야 할 신학생들 사이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컨닝과 부정직한 방법으로 시험성적을 올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로 지내며 교회들이 건축이나
증축을 하면서 편법을 동원하는 것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약간의 이익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5년 정도 자영업자의 삶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 속에서 돈을 버는 아주 작은 부분을 경험하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부정직함을 통해 조금 더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있고, 저보다 더 큰 사업을 하시는 분들은 그런 유혹이 더 많이 광범위하게 찾아오겠구나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새신자반에서 이재철 목사님은 아들이 7살에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3월에 태어난 아들인데 음력 날짜인 2월로 생일을 호적에 홀려 한 해 일찍 학교에 들어가게 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고백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후에 이 부분에 대한 깨우침을 갖고, 아들에게 사과를 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아들의 삶을 아버지의 욕심으로 평생 거짓의 굴레를 쓰게 한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는 것이죠. 그러면서도 이것이 한 가지 예화일 뿐, 어디 삶 속에서 부정직함이 이뿐이겠는가? 이재철 목사님은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묻습니다. “그대의 경우는 어떠한가? 그대는 자식 앞에서 언제나 정직하고 당당한가? 아니면 그대의 부정직함을 그대의 자식이 이미 알고 있음에도, 정작 그대만 그 사실을 모른 채 정직을 위장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대는 하루 종일 사람들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자식에게 모조리 털어놓을 수 있는가? 그대는 그대가 온종일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했는지 빠짐없이 배우자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가? 그대는 지금 그대의 지갑 속에 있는 돈이 어떤 경로로 당신의
수중에 들어왔는지, 그 전 과정을 추호의 부끄러움도 없이 만천하에 공개할 수 있는가?” 어쩌면 정직은 하나님 앞에 서 있음을 날마다 인식하고 그 분 앞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4) 도구 됨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말씀에서 ‘제 길’이란 영원한 진리의 도구 된 길이 아니라, 허망한 욕망의 길, 덧없는 본능의 길을 의미합니다. 현대사회라는
단어와 이미지를 생각하면 참 바쁜 모습이 떠오릅니다. 현대인들 대부분 하루를 굉장히 바쁘게 보냅니다. 가족끼리 얼굴 보기조차 힘든 판입니다. 옛날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것을 배워야 하고, 또 높은 학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진리의 도구가 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불행하게도 ‘제 길’을 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바빠지면 바빠지는 만큼, 인간의 지식이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이 세상은 더욱 혼탁해 갑니다. 각자가 제 길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과 본능이 부딪치며 혼란과 혼탁이 일어나는 것이지요. 우리의 하루를 되돌아봅시다. 오늘 하루를 보내며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고 생각하며 보냈나요? 그 안에 주님의 도구됨의 모습이 있었나요? 아니면 하나 같이 ‘제 길’은 아니었었는지요? 흙에 대한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기대하신 모습을 나눈 후에, 지난 설교의 마지막에 강조했던 것은 ‘그러나 동물도 흙으로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동물과 인간이 구별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령’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영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동행하심과 인도하심 속에서 우리가 진리의 길을 발견하고 그리로 나아가도록 말입니다. 그러나 앞선 4가지 주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실패했던 것처럼,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우리에게 작동하지 않는 것이 ‘영적인 삶’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에 함께하심을 고백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모든 죄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우리는 짐승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를 엄청난 욕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이 영적인 면을 상실하면 짐승과 다를 바 없고, 오히려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 쉽습니다. 짐승 세계에는 비열한 강간은 없습니다. 짐승은 한 끼 먹이로 족한 까닭에 대량 살상이나 학살은 없습니다. 짐승은 인간처럼, 평생 걸려도 다 쓰지 못할 것을 쌓아 두기 위해 남을 짓누르거나 해치지 않습니다. 여러 면에서 볼 때,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과 동행하지 않는 인간의 삶이란 짐승보다 더 악하고 못할지도 모릅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 3: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의인이 없다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단정지어 말합니다. 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생명을 품고, 사랑하며, 정직하게, 진리의 도구가 되어, 생령으로 살아야 할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전면적으로 부정을 당하는 죄인이 되었을까요? 성경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여기서 한 사람이란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을 말합니다. 아담의 범죄의 결과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인간이 죄인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어떤 분들에게 이 이야기는 걸림돌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질문이 필요한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담처럼 에덴에서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습니다. 그 죄는 아담이 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고,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가 아담과
똑같은 죄인이라고 말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로마서 5:14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범죄’와 ‘죄’입니다. 두 단어는 헬라어로 보나 영어로 보아도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범죄’는 드러난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란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범죄’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담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인 된 본질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우리는 죄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얼마 전 올림픽이 있었습니다. 저와 아내가 올림픽 영상을 보다가 피부색과 생김새가 거의 닮은 흑인들이 함께 화면에
잡힌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미국 대표였고, 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선수였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지원과 시스템이 더 우수하다보니 성적도 미국 선수가 더 좋았습니다. 경기 영상을 보며 아내가 “저 아프리카 선수는 미국 선수를 보면서 무슨 생각이 들까?” 이렇게 물었습니다. 흑인이 타고난 운동능력이 좋으므로 미국 대표팀에는 매우 많은 흑인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NBA라는 농구의 경우 팀에서 90%가 흑인입니다. 가장 잘하는 선수들도 다 흑인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대부분 다 아프리카에서 살던 사람들이 노예로 강제이주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흑인이나, 아프리카에서 살아가는 흑인이나 모두 같은 흑인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국적이 다를 뿐이죠. 본질상 같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술 공장에서는 여러 종류의 술이 생산됩니다. 위스키일 수도 있고, 막걸리일 수도 있습니다. 다 종류가 다르지만 본질적으로는 모두 술입니다. 독한 술이냐, 약한 술이냐, 비싼 술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모두 술이란 면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흑인이 무슨 국적을 지니고 있든 본질적으로 모두 흑인이고, 술 고장에서 생산되는 것이 상표가 무엇이든 모두 술이듯이... 범죄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무슨 범죄든 서슴지 않는 비도덕적인 죄인이 있고, 스스로 범죄를 삼가지만 안에서 죄인인 사람의 구별이 있을 따름입니다. 즉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 안에서 범죄자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지만,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아’나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양궁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면 그 원인은 과녁을 향한 궁수의 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과녁을 벗어난 것이죠. 만약에 누군가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죄의 결과이고, 죄의 원인은 인간 중심의 조준이 과녁에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바라보고
조준하고 따라가야 할 과녁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중심의 조준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있고, 자기중심적입니다. 바로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주에 이어서 ‘죄’가 무엇인지, 인간의 범죄 과정을 성경을 통해서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저희가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며 기대하셨던 4가지 모습들이 우리 안에서 잘 실천되지 않았던 모습들을 돌아보며,
‘죄’에 대한 기준이 무엇인지를 정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교회에 가면 정죄감이 들어서 가기 싫다.” 맞습니다. 사람들은 행복과 평안을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기대하는 것은 사랑받고 위로받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축복하고 격려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교회가 ‘죄’를 가르치고 말하지 않는다면, 사실 그것은 교회가 가진 가장 중요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병원에 가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한 삶을 누리고 생명을 얻기 위해서 병원을 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의사가 정확한 진단을 하기는커녕 “당신은 괜찮습니다.” 언제나 좋은 말만 해준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것은 병원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병원이 정확한 진단을 통해 어떤 처방이 필요한지를 알려주고 그것을 통하여 건강하기를 돕는 것처럼, 교회는 영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부분이 문제가 있는지를 일깨워주고, 진단해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정죄감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만약에 죄인이라는 선언이 해답이 없는 심판 선언이라면 그것은 절망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가 바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만약 내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다행이 아니라, 나와 예수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막 2: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가진 새로운 존재가 되었기에, 여전히 나의 옛날 모습을 떠올리게 하며 소망이 없고, 죄인이라고 몰아세우는 사탄의 정죄함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삶을 돌아보면 여러 가지 연약함이 존재하지만,
내 중심은 언제나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이 있어서... 주님께서 여러분의 그 모든 연약함을 끌어안으시고, 네가 나를 정말로 사랑하고 의지하니 괜찮다고 말씀해주시는 그 참된 위로가 오늘도 여러분에게 가득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