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시온, 헵시바, 쁄라 / 강정규 목사

2021-08-15 · 이사야 60-6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나사렛에서 자란 것으로 알려진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목수의 아들인 그는 가끔 비범함도 보였지만 그래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혼기가 지났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서른 살쯤이 되어 종교인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는 갈릴리 지역에서 제법 유명한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를 중심으로 그가 행하는 놀라운 일들이 전해지며 사람들은 의아하기도 하고 궁금함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시대에도

세례 요한과 같은 선지자적 사역을 하는 사람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여러 경건한 랍비들도 있고, 바리새인들도 있으니 나사렛 출신의 이 청년도 그러한 종교인의 길을 가는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어쨌든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 출신의 한 청년이 이제는 제법 영향력 있는 설교자이자 성경 교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그의 성장을 보았던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그의 변화된 삶에 대해서 무척이나 궁금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가 아주 오랜만에 나사렛으로 오는 날이며, 때마침 안식일이라

회당에 가면 그를 볼 수 있는 날이었습니다. 오늘 회당에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뿐 아니라 그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까지 더 많이 모인 것 같습니다. 회당이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바벨론 시대에 포로로 끌려가면서 예배를 드리기 위한 공간으로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나사렛도 예루살렘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기에 성전에 쉽게 갈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하는 것이지요. 보통 유대인이 사는 마을은 어디서나 회당이 있었고, 나사렛 출신의 청년도 회당에서 자주 말씀을

가르치곤 했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고향을 방문했기에, 오늘은 그가 랍비의 자격으로 구약 성경을 읽고 가르치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갔고, 이사야의 예언이 적힌 두루마리를 폅니다. 오늘 말씀은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서를 나누려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가 말씀을 읽습니다. (사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사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나사렛 출신의 청년이 읽은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라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것이죠. 이사야서 두루마리 끝부분에는 나중에 언젠가 오신다는 ‘메시아’와 ‘그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오늘 그는 그것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다른

말로 ‘메시아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바로 하나님이 정한 ‘메시아’, 즉 구원자가 되는 존재가 있는데, 그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기름을 부으신다고 합니다. 그는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고, 갇힌 자에게는 놓임을 선포하고,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왔음을 선포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구약의 이 말씀은 도대체 언제나 이뤄지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인물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이 말씀을 받을 때부터 유대인들은 계속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는 힘없는 국가에 불과했고, 가장 기본적인 주권도 여전히 회복이 안 되었고, 지금은 더군다나 대제국인 로마가 다스리고 있는데... 과연 다윗과 같이 위대한 왕이 다시 나타날까요? 이 민족을 구원할 그런 메시아가 진짜 오기는 할까요? 과연 오늘 서른 살쯤 된 저 랍비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지 궁금합니다. 그는

이사야서 말씀을 짧게 읽은 후, 다시 두루마리를 말아서 말씀을 관리하는 자에게 돌려주시고 앉았습니다. 그때 회당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에게 향했습니다. 그때 그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눅 4:21b) 다른 말로 표현해보자면, 저 예수라는 나사렛 출신의 랍비가 지금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은 후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방금 너희가 들은 성경 말씀이 역사가 되었다. 이 성경 말씀이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여러분. 제가 설교의 시작을 당시 예수님께서 하셨던 일을 목격하였던 사람의 관점으로 시작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은 하나의 책이라는 것을 많이 말씀드립니다. 어쩌면 오늘 우리가 보는 말씀은 그러한 연결성을 나타내는 말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씀일지도 모릅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으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나사렛 회당에서의 이 장면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항상 궁금해하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뭘 하시려는 것인데?”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도, 그 예언의 말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메시아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들의 기대와 자신들의 입맛대로 메시아를 기다리다 보니 정작 그 메시아가 왔을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명품 중에서도 가장 고급만을 다루는 매장에 오늘 갑작스럽게 VVIP가 방문한다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정말 중요한 VVIP인데

직접 방문하는 일이 없으므로 가장 극진히 모셔야 한다고 위에서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 매장에 너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한 사람이 매장을 들어오려고 합니다. 보안 요원이 막아섭니다. 오늘 진짜 중요한 손님이 오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출입이 어렵다고 거절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VVIP입니다. 우리가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이 이야기는 구약부터 신약에 이르는 메시아에 대한 오해를 설명하기에 좋은 예화입니다.

VVIP가 와도, 그가 누구인지 모르고, 어떤 모습인지도 모르고, 그의 방문을 맞이해야 할 사람들은 ‘마땅히 VVIP라면 이런 모습이겠지’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컸기에, 정작 그를 봐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죠.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그렇습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진 함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죠. 다시 말씀에서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는지 살펴봅시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친다.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자유와 놓임을 선포한다. 여호와의

하나님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포한다.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약 이것을 단서로 여러분이 메시아를 찾고자 한다면, 여러분이 느끼기에 이 중에 가장 직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행동을 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포로된 자와 갇힌 자를 사면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조금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이 행동을 하는 것이 메시아라면 이건 찾을 수 있어 보이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면서 여기에 나오는 사람을 ‘왕’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사면권은 왕의 권리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왕’과 같은 이가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그래서 바로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의 모습은 ‘군주’였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로마의 굴레와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그런 왕 말입니다. 또한, 그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가장 강력하게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 로마의 지배 말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당당하게 찬란한 다윗 왕조의 회복을 가져다줄 그러한 존재 말입니다. 아마도 제가 생각하기에

지금 버전으로 바꾼다면, 우리를 미국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나라를 만들면서도, 1인당 국민소득이 가장 높도록 경제적 부강을 가져다주고, 동시에 복지 또한 북유럽보다 더 좋게 만들어서, 나로 하여금 아무런 근심 걱정 노후에 대한 걱정 없이 대접받는 국민으로 만들어줄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는 것. 즉, 내가 생각하는 나를 최선의 삶으로 만들어줄, 나에게 가장 좋은 혜택을 줄 그런 사람을 찾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이러면 이것이 왕입니까? 백성들의 저런 필요를

다 채워주고 그들의 입맛에 맞추는 것이라면 왕보다는 거의 노예인데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갖는 것에 대하여 ‘램프의 요정 지니’와 많이 비교하는데요. 딱 저 마음이 ‘지니’와 같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는 존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니’가 내 램프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길 바랄 뿐, 나를 통제하고 나를 다스리는 것은 또 원하지 않지요. 지니는 나보다 더 능력 많은 내 종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런 기대를 갖고

있어요. 하나님이 능력을 보여주시길 바라지만, 내 삶을 통치하기보다 내 뜻에 맞게 움직이길 바라죠. 동기야 어쨌든 그들이 메시아를 ‘왕’적 인물로 보았던 것은 굉장히 중요한 발견이었습니다. 적어도 그것은 신약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의 나라는 세상에 있지 않고,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보여주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유대인이 구약의 예언 말씀을 왜곡하고 잘못 해석하며, 그리스도를 마주해도 잘 따라가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그들과 다른 길을 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오늘 이사야서 60-62장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바로 이사야서의 이 예언을 콕 찝어서, 그 예언을 성취하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고, 예수님이 그것을 이루셨어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고 그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의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더 전문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제는 이사야의 큰 구조와 배경이 여러분에게 조금은 자리 잡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요. 이사야서의 구조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어요. 심판과 위로. 그리고 후반부를 다시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럼 이사야가 세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것을 구분하기 위해서 ‘1이사야, 2이사야, 3이사야’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60-62장은 세 번째 부분에

들어가 있어요. 역사적으로는 이 시기가 어떤 시기입니까? 1-39장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던 시대. 40-55장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있던 시대. 56-66장은 페르시아에 의해서 귀환을 하게 된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듣는 대상은 포로에서 돌아온 귀환한 유대인들이고, 이들이 예루살렘의 회복을 꿈꾸며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쌓는 그런 이야기가 구약의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지금 귀환한 백성들의 현실은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재건한다는 일에는 참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이 재건되고 회복된다는 것은, 다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로 그들에게 진정한 회복에 대한 소망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대상은 민족으로는 ‘이스라엘’이요, 도시로는 ‘예루살렘’이요, 또한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시온’입니다. 시온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위치한 산의 이름입니다. 이 땅을 다윗이 차지한 후 다윗 성이라 칭하고 이곳에 법궤를 안치하면서부터

시온은 이스라엘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온은 이스라엘의 상징으로, 예루살렘을 나타내는 말로 자연스럽게 사용되었고, ‘시온의 딸’이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주민과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시온이가 있는데, 시온은 하나님 나라의 상징과 같아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시온에서 자신을 보여주시며, 구원을 베푸시고, 그곳에서 그의 백성을 축복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 상태에서도 시온의 회복을 사모했던 것입니다.

시온의 회복이 곧 하나님 임재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 51:3)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바벨론 포로는 하나님의 심판이고 징계였습니다.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노하여서 시온을 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시온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보이시며, 시온에 임재하시며 여호와의

성으로 삼는 것입니다. 주님은 시온의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사 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사 60: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는 과정들이 있습니다. 가장 먼저 창조 때는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다스리라는 명령이 주어졌습니다(창 1:26-28).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창조된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

12:1-3).” 이것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고, 더 나아가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하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사명이자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하신 내용들이 출애굽기에서 이뤄집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구성된 것입니다. 민족이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만나시고 하셨던 약속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저는 이 약속들이 여전히 하나님께 창조된 존재로서 신앙을 고백하며,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고백하는 신앙 안에 있고, 이제는 영적 이스라엘이자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이어받은 교회 공동체에 속한 우리가 계승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킵니다. 가나안 땅에서 나라를 이루도록 하시려는 것이죠. 출애굽을 한 이후 시내산으로

부르셔서 그들의 사명을 ‘제사장 나라’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그 사명을 그들이 감당하지 못하고 실패했습니다. 포로가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그들을 바벨론에서 출바벨론 시키신 후 말씀하십니다. (사 60:3) 이방 나라들이 너의 빛을 보고 찾아오고, 뭇 왕이 떠오르는 너의 광명을 보고, 너에게로 올 것이다. (사 60:4)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그들이 모두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너의 아들들이 먼 곳으로부터 오며, 너의 딸들이 팔에 안겨서 올 것이다. 나라들과

왕들은 이스라엘/시온에 임한 하나님의 빛과 광명으로 나아올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시온에게로 옵니다. 이것은 온 땅 가운데 하나님이 통치를 전하는 제사장 나라의 사명이 여전히 너희에게 있다고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사야서를 통해서 확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앗수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하나님이 남유다를 치시는 몽둥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고레스. 하나님의 뜻대로

70년의 종살이를 끝내어 돌아가게 하는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큰길을 만드시고, 큰 능력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스룹바벨, 에스라, 느헤미야에 의해서 유대인들이 귀환합니다. 3차 귀환이라고 해요.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오는 수요일에 나눌 것입니다. 이들이 먼저 성전을 재건하고, 그 후에는 성벽을 쌓습니다. 그를 통해 도시의 기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나타나는데요. (사 60:10)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10절의 말씀을 통해,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칙령에 의해 느헤미야가 성벽을 쌓는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 또한 페르시아 왕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시온을 회복하시는 일하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엄청난 역설이 있습니다. 여전히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그들의 통치 아래 있는 이스라엘인데, 하나님은 모든 열방의 왕들이

시온에게 ‘항복’하고 시온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현실은 이들이 속국인데,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이들이 온 세상의 중심입니다. 설교 초반에 누가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었어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왕을 원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럼 이사야서의 이 말씀은 어떤 차원일까요? 진짜 시온으로 모든 열방이 돌아오는 일이 일어났는가?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메시아가 세상의 군주로서

군림하지 않았던 것처럼,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주변 나라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온 세상의 구주로 등극하시는 일이 있었고, 다시 오실 주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우리가 소망하는 것처럼, 이사야서의 예언과 같이 예루살렘으로 모든 열방이 나아오는 것도 같은 이야기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 되는 나라가 오게 될 것을 바라보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 나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0장에서 말하는 시온의 회복은 단순히 예루살렘의 재건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약속들은 이중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큰 민족을 이루는 것’인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차적으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나왔고, 더 나아가 그는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삭의 후손인 기독교의 조상일 뿐 아니라, 이스마엘의 후손인 이슬람교에서도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자손들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시내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또 이사야 60장에서 다시 말씀하신 것처럼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가 되었는가? 엄밀히 말하면 12지파로 혈통적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실패합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12사도에 의해서 구성되는 영적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신약의 ‘교회’가 이어받습니다. 교회의 역할이 제사장이 아닙니까? (벧전 2:9a)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즉,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이 실패했다고 하여 끊어지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였다고 그 약속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 웨슬리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꾼은 땅에 묻으시나, 당신의 일은 계속해 나가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서 60장에서 귀환한 백성에게 주신 예루살렘 회복의 말씀은 특별히 그렇습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도성이 재건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작은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이 내다보고 있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약속은 요한계시록으로 연결됩니다. 바로 주님의 재림의 날 완성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이사야서 말씀의 성취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사 60:19) 다시는 낮에 해가 네 빛이 되지 아니하며 달도 네게 빛을 비추지 않을 것이요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네 영광이 되리니 (사 60:20) 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계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계 21: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계 21: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즉, 이사야서에서 주어진 회복의 약속은 단순히 귀환민들 안에서 일어나는 도시로서 예루살렘의 재건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재건된 성전은 후에 로마에 의해서 다시 무너집니다. 그럼에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이 약속이 바라보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입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임하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입니다.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은 도시가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공동체를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비치므로, 자연이나 인공적인 그 어떠한 빛도 필요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합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습니다. 다른 말로 정리하면, 영원히 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즉 인생에서 슬픔의 날이 존재하지

않는 날이 도래함을 의미합니다. 죄악 이전의 완전한 회복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 60:21) 너의 백성이 모두 시민권을 얻고, 땅을 영원히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서 심으신 나무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라고 만든 주님의 작품이다. (사 60:22) 그들 가운데서 가장 작은 이라도 한 족속의 조상이 될 것이며, 가장 약한 이가 강한 나라를 이룰 것이다. "때가 되면, 나 주가 이 일을 지체없이 이루겠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약속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말입니다. 바로 이 배경에서 61장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주어집니다. 이사야 40-55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이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름다운 소식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재 대신 화관을, 슬픔 대신 희락을, 근심 대신 찬송을 주시는 하나님을 노래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메시아 희년이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희년’의 명령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종인 메시아에 의해서 메시아 희년이 이뤄질 것이라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서 죄 아래 억눌린 백성들을 해방시킵니다.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것이죠. 구약 희년의 특징도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모든 노예가 자유를 얻습니다. 바로 우리의 메시아가 오심으로 영적 희년에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사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메시아가 오셔서 하시는 일입니다. 슬퍼하는 자들의 머리에 ‘화관’을 씌워줍니다. 기쁨으로 바꿔주겠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옷은 축제 때 입는 옷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을

주가 기쁨으로 바꾸시는 줄 믿습니다. (사 61: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사 61:9)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구약의 많은 약속들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언약의 주체인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므로 그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사명에 실패하고,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는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 약속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분은 변하지 않았기에 그 약속은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그의 나라가 완성될 때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그 약속은 이뤄질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끝으로, 62장에서 하나님은 영원히 자신의 백성을 위하여 일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 62:1) 시온의 의가

빛처럼 드러나고,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처럼 나타날 때까지, 시온을 격려해야 하므로, 내가 잠잠하지 않겠고, 예루살렘이 구원받기까지 내가 쉬지 않겠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러한 수고로 인하여 교회는 이방에 공의를 베풀며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의 시간이 지나갔고 이스라엘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바로 그 마음을 담아 새 이름을 주시는데, 그것이 ‘헵시바’와 ‘쁄라’이다. (사 62:4)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헵시바 : 나의 기쁨이 그에게 있다 (my delight is in her) / 쁄라 : 결혼한 자 이스라엘은 헵시바로, 예루살렘은 쁄라로 하나님의 기쁨이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관계로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간 것은 하나님과 이별한 상태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백성을 다시 기쁨으로 맞이하시며, 예루살렘을 신부로 맞이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새로워진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믿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네가 나의 기쁨이다”, “너는 나의 신부이다”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존재가 하나님께 그토록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떠올려봅니다. 하나님을 믿게 되고, 알고 싶은 마음에

성경을 읽다가 우리가 경험하는 같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목사님, 구약을 읽으면 하나님이 굉장히 무서우신 분 같아요.” 성경을 읽으면 구약의 하나님은 가혹하시고 엄하시고 무서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100미터 미남이라는 소리가 있듯, 구약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은 100미터에서 보면 심판자입니다. 그런데 한 걸음, 두 걸음 다가와서 보면 그분의 엄해 보이는 눈빛 안에는 사랑하는 우리를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 있으며... 우리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기

백성을 끝까지 지켜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가 느껴집니다. 저는 구약부터 신약까지 성경을 읽으며 가장 놀라운 것은 창세기부터, 즉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뜻과, 우리에게 주신 명령, 그 모든 약속은 모든 것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못났다고 그분의 계획이 망쳐지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 놀랍습니다.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혈통적 이스라엘의 실패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실패는 아닙니다. 즉, 그분은 우리의 실패와

실수와 연약함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만 잘하면 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내가 너를 복의 통로 삼아, 너의 후손을 제사장 나라 삼아, 너를 통해 세상 모든 민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계획은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작동하고 있습니다. 헵시바요, 쁄라로 부르신 하나님의 기쁨이며 신부 된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서 땅끝까지 하나님의 구원 소식을 전하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나라가 언제 임할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날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영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에 부활하여 그 나라에 들어갈지, 혹은 살아서 그 나라를 맞이할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살아도 주의 것, 죽어도 주의 것인 줄 믿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꿈을 이루어 주는 내가 원하는 하나님, 내가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의 꿈을 발견하고 그 꿈을 위해 기쁨으로 내 비전을 맞추어, 주께서 보여주신 약속과 그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시는 그분의 능력이 우리에게 날마다 고백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