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과의 주제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나누는 세 번째 시간입니다.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범죄’와 ‘죄’입니다. 두 단어는 헬라어로 보나 영어로 보아도 구별되는 단어입니다. ‘범죄’는 드러난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죄’란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은 것은 ‘범죄’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담은 그의 범죄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었고, 그 죄인 된 본질로부터 우리는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본질적으로 죄인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무슨 범죄든 서슴지 않는 비도덕적인 죄인이 있고, 스스로 범죄를 삼가지만 안에서 죄인인 사람의 구별이 있을 따름입니다. 즉 사람들의 기준으로는 이 안에서 범죄자와 일반인을 구분할 수 있지만,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기준으로는 모두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죄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타아’나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양궁을 떠올리시면 됩니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면 그 원인은 과녁을 향한 궁수의 조준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과녁을 벗어난 것이죠. 만약에 누군가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죄의 결과이고, 죄의 원인은 인간 중심의 조준이 과녁에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바라보고 조준하고 따라가야 할 과녁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후예로 태어난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중심의 조준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있고, 자기중심적입니다. 바로 그것을 성경은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은 첫 사람 아담이 죄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창 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창 3: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 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인간이 죄인이 되어버린 과정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이 죄는 불신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최초의 불신은 무엇에 대한 것이었는가, 어이없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2:17을 통하여 아담에게 절대로 선악과를 먹지 말 것과, 만약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을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담이
믿고 따라야 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의 자리를 스스로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죄였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면 그것은 그의 말을 믿는 것입니다. 상대의 말을 믿지 못하면서 내가 상대를 믿는 다는 것은 거짓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말씀을 믿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그것은 자기기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 곧 과녁을 벗어난 것이요,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말씀이셨고, 말씀이 곧 그분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불신은 뱀의 유혹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계 12: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시록은 그 뱀이 곧 사탄이라고 말합니다. 사탄의 유혹은 늘 같은 형태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과녁을 벗어나게 하고 지켜야 할 믿음의 자리에서 이탈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탄의 유혹에 빠진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다. 갑자기 나무의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이는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상하지 않나요? 여자는 그 나무를 그날 처음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는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산 가운데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그 나무가 유독 그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게도 보였을까요? 해답은 간단합니다. 사탄의 덫에 빠진 여자의 중심이 이미 과녁을 벗어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평소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현상, 곧 그 열매에 대한
잘못된 환상이 그녀를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귀중한 교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바로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움에 대해서 말입니다. 먹음직. 무엇을 먹든, 우리는 생각하고 먹어야 합니다. 왜 이것을 먹어야 하는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다보면 결국 먹고 마심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쉽습니다. 한비자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중국 ‘상나라’의 마지막 임금인 ‘주왕’이 어느 날부터 고급진 상아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그의 신하 ‘기자’가 이제 이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며 다음과 같이 탄식을 했습니다. ‘상아 젓가락으로 식사하는 자는 허술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 반드시 산해진미를 먹기 마련이다. 산해진미는 질그릇이나 옹기에 담을 수 없다. 금쟁반이나 옥그릇에 담아야 한다. 금 쟁반과 옥그릇을 사용하는 자는 평범한 옷을 입지 못한다. 늘 비단 옷을 입어야만 한다. 비단 옷을 입는 자는 아무 데나 옷을 걸어두지 못한다. 화려한 가구를 마련해야만 한다. 화려한 가구를 들인
자는 소박한 집에 거할 수 없다. 구주궁궐을 새로이 지어야만 한다. 구주궁궐을 지키려면 엄청난 군대가 동원되어야만 하고 그 모든 것은 군민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짜낼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왕의 사치를 위해 국민의 혈세를 짜는 나라치고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이러한 ‘기자’의 탄식에 대하여 기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주왕은 기자의 예견대로 타락해 갔고, 상나라는 주왕을 끝으로 결국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 시작은 상아 젓가락, 즉 먹는 문제였습니다. 왜 먹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먹는지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 삶에서 의식하지 않는다. 정녕 그것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백해무익한 술과 담배로 우리의 귀중한 생명을 스스로 탕진하지 않으며, 더 많이 먹고 마시기 위해 사람 사랑하기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보암직. 우리가 무엇을 보는지, 누구 보기에 좋은 것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사람
보기에 좋은 것을 따라가느라 하나님과 동떨어지고 멀어지는 삶을 방치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것을 좋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사람 보기에 좋은 삶을 꾸리느라 온 정신을 다 쏟고 있으면서도, 그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도 좋기를 원한다면 그보다 더 큰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는 분입니다. 따라서 중심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안목을 우리 것으로
삼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진정으로 좋은 것과 해로운 것을 가릴 수 있습니다. 하와에게 겉으로 보기에 그토록 보암직하고 먹음직했던 선악과의 중심은 불순종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하와는 보지 못했는데, 그가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탐스러움. 골로새서 3:5에서 ‘탐심이 곧 우상숭배’라고 경고합니다. 인간이 끝내 금단의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도 결국 사탄의 유혹에 의해 부추겨진 인간의 탐심입니다. 탐심의 특징은 이유 없이 소유하고
쌓아 두려는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소유하고 쌓아 두는 사람이 있다면 내 안의 탐심에 대한 경계가 필요합니다. 청년 시절에 ‘want’와 ‘need’를 구분하는 것에 대한 훈련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어떠한 것에 대해서 갖고 싶거나, 내게 있는 소유에 대해서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지, 내게 진짜 ‘필요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었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지혜롭게 사용하기 위해 힘쓰는 것이고, 단순히 원하는 것이라면 절제하거나, 이미 갖고
있는 것이라면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점검한다면 우리는 꽤 많은 부분에서 다시금 고민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새신자반 초반에 언급한 각설이 예수의 저자인 이천우 목사님의 고백이 있습니다. 당시 거지들은 부잣집에서 동냥한 음식은 절대로 그냥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드시 물을 붓고 끓인 다음에야 먹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부자는 대개 쌓아 둔 음식 중에서 상한 것을 주기 때문이랍니다. 그것을 모르는 신출내기 거지들은 부잣집에서
나온 음식을 좋아라 먹었다가 식중독에 걸리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집에서 나온 음식은 아무 걱정 없이 그냥 먹어도 무방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쌓아둘 음식이 없기에 언제가 그들이 먹던 음식을 나누어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무작정 쌓아 두기만 하다가 못 쓰게 된 다음에야 버리듯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이천우 목사님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나를 이렇게 살아 있게 한 것은 부자의 밥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살린 것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의 밥이었습니다.” 넷째, 범죄한 여자가 취한 첫 번째 행동이 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죄를 지은 후, 그녀는 남편을 그 죄로 끌어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죄의 확산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죄는 끊임없이 핵분열을 일으키듯 확산되어 나아갑니다. 다윗 한 사람만 하더라도 그의 죄는 더욱 확산하여 충신을 살해합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전서 5:22은 ‘악은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이
반드시 버리라’고 엄숙히 명령합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모양으로 치장하고 있어도, 죄는 반드시 그 속에 무서운 확산성을 품고 있는 까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범죄한 상황에서 아담에게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성경은 아담으로부터 죄가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주범이 아닌 공범이 된 아담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수도 있겠죠. 그럼 왜 하나님은 아담에게 책임을 물으실까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당신의 말씀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말씀을
주실 때는 하와가 창조되기도 전입니다. 물론 하와도 아담을 통해서 들었겠지만, 최초의 명령을 받은 사람은 아담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에게서 최초로 말씀을 받은 것은 큰 은총이죠.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책임이기도 합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은 사람답게, 하와에게 그것을 잘 가르쳐 지키게 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죄에 동조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 큰 은총입니다. 동시에 아직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어 지킬 수 있도록 하시는 책임도 우리에게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그 범죄의 결과입니다. (롬 5: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범죄의 결과,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과녁에서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그 결과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6:23의 말씀처럼 ‘죄의 삯은 사망’ 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이 의롭다는 것은 불의한 것에 대해서 불의하다고 판결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대로 사망 선고를 내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의롭지 않은 분입니다. 죄에 빠진 모든 인간이 일평생 살아가다가 도달하는 곳이 ‘죽음’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입니다. 그럼 성경은 우리가 죄에
빠지게 된 창세기 3장의 사건에 이어 4장에서는 가인의 범죄가 나옵니다. 죄가 확산되고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럼 인간은 이렇게 죄악과 벗하여 끝나게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창세기 3~4장의 그 죄의 향연에 반전이 일어나는 짧은 기록이 하나 있습니다.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은 ‘에노스’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합니다.
왜 그 이전에는 여호와를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에 그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에노스’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즉,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닫기 전까지 인간은 여호와를 찾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자신이 에노스라는 것을 절감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사망이요, 오직 생명의 근원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 삶에 찾아온 수많은 결핍의 궁극적 결말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크고 작은 어려움 속에 ‘에노스’라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가운데 진정으로 깨달아졌다면, 이제부터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다시금 흐트러진 내 마음 과녁의 조준을 바꿔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난주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교회가 죄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은 정죄감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구원으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본질적인 죄인임을 인식했다면, 그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으로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메시아요, 우리의 죄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신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 자신이 풀잎과 같음을 인식했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복음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바로 만날
수 있고, 그 말씀 안에서만 생명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영원히 동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을 향해 마음 문을 열자”라고 말합니다. 그럼 마음 문을 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것을 오늘 설교의 내용으로 표현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면 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에노스임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겸허하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먼저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향하여 십자가의 구원의 복음으로 말씀해주시고, 성령님을 보내주셔서 그분의 빛으로 인도해 가심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때, 그와 같은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아시고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의사는 병자를 위하여 나아가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며 주님을 찾는 자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런 에노스의
마음으로, 고백으로 우리가 함께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