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국 목사님은 <풍성한 삶의 기초>라는 책에서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두 가지 축을 설명합니다. 두 가지 축이란, 하나는 성경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령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객관적인 진리를 알 수 있다면, 성령을 통해 주관적 경험도 누리게 됩니다.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경험의 조화. 저는 이것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이 균형을 추구합니다. 우리의 수요예배가 객관적 진리를 가르치는 것에 좀 더 특화되어 있다면, 금요기도회는 주관적 경험을 갖는 것에 조금 더 비중을
두고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뗄 수 없는 것이 성경이 성령님의 책이고, 성령이 진리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를 공부해가며, 객관적 진리를 여러분에게 설명하는데 많은 비중을 뒀습니다. 일단 이사야서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야,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삶으로 붙잡고 살아가는 것에 성령님의 일하심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이사야서가 여러분 안에 조금이라도 이해되고, 또 하루하루의
말씀이 말하는 바가 조금이라도 새겨지기를 위해 힘썼던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수요일마다 역사적 배경을 공부하며 이사야서의 말씀이 주어진 토대를 알려드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늘이 이사야서 마지막 설교입니다. 그런데 오늘만큼은 제가 설교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꾸어서 설교를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제 설교를 들으며 어려웠던 분들이나 집중해서 듣느라 머리가 아프셨던 분들이라면 오늘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객관적 진리를 가르치기보다,
이스라엘 백성의 경험에 빗대어 저의 주관적 경험들을 함께 나누며 메시지에 다가서 보려고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역사 공부를 굉장히 많이 말씀을 드립니다. 그 이유도 여러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신화 속에 나오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단군신화를 기억하지만, 곰이 쑥과 마늘을 먹으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사실로 믿지는 않습니다. 성경이 신화가 아니라 역사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증언하고 있음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하나님이 지금 내 삶에도 역사해주실 것을 소망하며 믿음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63-66장까지는 이사야서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63장 중반부 이후에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일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회상이 나타납니다. (사 63: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한번 이 부분을 제가 메시지 성경으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열거해 보겠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업적을,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선물들을, 이스라엘 가문에 베푸신 크신 인애, 그 넉넉한 긍휼과 넘치는 사랑을. 그분께서 “정녕 이들은 나의 백성이다. 나를 배신하지 않을 자녀들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다. 그들이 고난을 당할 때, 당신도 친히 함께 고난을 겪으셨다. 누구를 대신 보내 그들을 돕게 하지 않으시고, 그분이 직접 나서서 도와주셨다. 당신의 사랑과 동정에 이끌려 그들을 속량해
주셨다. 그분은 그들을 건지시고 아주 오랜 세월, 그들을 안고 가 주셨다. 그런데 그들은 그분께 등을 돌렸다. 그분의 성령을 슬프시게 했다. 그래서 그분도 그들에게 등을 돌리셨고, 그들의 적이 되어 몸소 그들과 싸우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을 나타내는 ‘레헴’은 자궁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하나님의 사랑이 모성적 자기희생과 일방적 헌신에 근거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자가 되시고, 그들에게 늘 함께 하시며
아주 오랜 세월 그들을 안고 가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등을 돌립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이스라엘은 자격이 없었습니다. 현재도 감히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할 자격이 없지만, 과거 역사를 살펴봐도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셨고, 한결 같이 사랑하고자 다가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이후에 배신과 반역을 일삼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것을 압도하고 뛰어 넘었기에... 그들의 반역이 결국
포로라는 심판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하나님은 언약을 폐기하지 않고 지키시기 위해 힘씁니다. 심판 가운데서 그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러자 그들은 옛 시절을 떠올렸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때를. “당신의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그분,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 속에 당신의 성령을 두신 분,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모세의 오른팔에 당신의 팔을 올려 그들 앞에서 물을 가르신 분, 그를 대대로 유명하게 만드셨으며, 그들을 이끌어
진흙뻘 심연을, 굳은 평지를 디디는 만들처럼 통과하게 하신 그분은 누구신가? 하나님의 영이 그들에게 안식을 주셨다.” 주께서는 그렇게 주의 백성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널리 알려졌습니다! 심판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억합니다. 그분의 사랑에 목마릅니다. 출애굽 사건 가운데 기적적으로 도우셨던 하나님의 승리를 갈망합니다. 홍해도 이기시고, 광야에서도 지키셨던 하나님. 그분이라면 지금 연약한 이스라엘이지만, 이들에게 다시금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주시지 않을까 기대할 수 있는 것이죠.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한 소망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이 너무 바쁘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막상 하는 일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여유롭지도 않습니다. 늘 뭔가에 쫓기듯 살아갑니다. 그런데요, 우리는 우리의 삶의 지난 시간을 가끔씩은 묵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셨고, 인도하셨던 그 시간들을 말입니다. 그 안에서 지금 나를 둘러싼 어려움을 이길
힘을 다시금 깨닫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이 또한 저의 고백입니다. 저희 교회에도 사업도 하시고 자영업도 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뉴스에 나오는 자영업자가 어렵다는 이야기는 제가 늘 마주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모두 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저는 자영업자들이 가끔 나와서 인터뷰하는 그 분노를 깊이 공감합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출구가 어디쯤까지 가야 열릴지 모르는 막막함 가운데 주어진 삶을 살아갑니다. 개척교회 목사님들의 푸념 가운데, “개척 3년이면 까마귀도
안온다”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까마귀는 엘리야의 사건을 말해요.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가 당대의 악한 왕으로 유명했던 ‘아합 왕’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아합왕에 대한 경고와 하나님의 심판의 예고합니다. 그리고 그곳을 떠나서 하나님이 명하신 곳으로 피하여 숨어 지내게 됩니다. 요단 강 동쪽에 있는 ‘그릿 시냇가’입니다. 아합 왕이 엘리야를 죽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릿 시냇가에 숨어서 지내는 동안 식수야 걱정이
없지만 식량 구하는 것이 일입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까마귀들이 아침과 저녁마다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서 인용하는 ‘까마귀’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돌보고 채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개척을 처음에 하면 이런 저런 예기치 못한 도움을 받고, 그것을 까마귀를 통해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3년 지나면 그것도 뜸해지고 없다는 이야기가 ‘이쪽 세계’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그런 푸념을 하지 않을만큼
하나님께서 제 삶과 저희 교회의 여정을 이끄셨음을 저는 지난 4년 반동안 경험했거든요. 참 그 설계가 놀랍고 이끄심이 놀랍다고 여길 정도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다이나믹하게 이끌어주셨어요. 여러분, 저희 교회가 온라인을 통해 찾아오신 분들이 많아요. 그래서 지금은 제가 그 방법들을 다른 개척하시는 분들에게 알려드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온라인 사역을 열심히 잘 준비해서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맨 처음 온라인 사역을 왜하게 된 줄 아십니까?
제 설교가 좋게 표현하면 깊이가 있고, 나쁘게 표현하면 길고 어려워요. 그래서 부교역자 때부터 설교를 하고 나면, 은혜 받았다는 분들 중에 원고를 요청하시는 경우들이 있었어요. 처음에는 제가 설교한 원고를 끝나고 드리기도 하고, 프린트해서 드리기도 했는데... 그냥 온라인에다 설교 원고를 다 올리면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시작을 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교회를 개척하며 자비량 사역을 하기로 마음먹고 독서실을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그 독서실도 우리 청년 중에 상협이라는
친구가 먼저 생긴 지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어요. 제가 심방을 잘 다니는 편이었거든요. 그때 그 독서실로 심방을 갔다가 굉장히 신선하고 좋다고 느꼈어요. 그리고 후에 제가 창업을 알아보다가 그때 그곳이 생각나서 검색을 해보니, 때마침 그때 저희가 도전해 볼 수 있을만한 창업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어요. 그래서 하게 되었어요. 그런데 독서실 일을 하니까 첫해에는 하루에 14시간씩 일을 해야 했어요. 어차피 그때는 예배도 주일밖에 없었으니까 평일에는 5~6일씩 일을
했어요. 그런데 제가 개척을 했는데, 평일에 아무것도 못하고 일만 하다보니까 조금 고민이 생기더라구요. 그래서 평일에는 어차피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일이니까, 온라인 공간에 글도 쓰고, 소통도 하고 이런 일을 많이 했어요. 독서실 홍보를 위해 홈페이지 만드는 법을 익히고, 교회 홈페이지 만들고, 블로그 하는 법도 공부하고. 자연스럽게 온라인 사역으로 이어졌지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제가 자비량 사역을 계속 해나갈 수 있을 만큼, 오히려 초기에 어려웠던 교회의
재정 상황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소득이 필요한 만큼 유지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가 조금씩 사람이 많아지면서 제가 감당해야 할 영역이 많아지는 것이었죠. 때마침 무인 사업이 막 생겨나고 있었어요. 그 중에 독서실이랑 비슷한 업종에 무인 스터디카페가 막 생겨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도 교회 형편상 저희가 일을 계속 해야 할 상황인데, 독서실은 시간이 너무 많이 뺏기고... 결국 무인 스터디카페를 다시 창업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어요.
그래서 스터디카페를 통해서 또 생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어요. 교회가 조금씩 성장해가면서 몇 번 사례비를 계획할까 고민도 했지만, 예배 공간이 부족한 것이 더 고민이 되었어요. 그래서 사례비 지급보다 그 여력을 활용해서 교회 이전을 하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또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결국 지금의 예배당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뭐 그 안에도 세부적으로 많은 놀라움들이 가득히 있었죠. 대표적으로 재민 형제가 갑자기 어느날 교회에 와서 등록을 했고,
그때까지도 교회 이전을 앞두고 인테리어를 어떻게 해야 하나 홀로 고민 중에 있었는데 너무나 큰 지원군이 되어주었죠. 저와 아내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우리가 그때 교회 이전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올 수 있었을까? 코로나 중에 이전을 한 것도 정말 우리 성도님들 모두가 함께 마음 모아서 할 수 있었던 은혜이지만... 어쩌면 그때를 놓쳤다면 이전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올해 드디어 사례비를 편성하게 되었습니다. 작년까지도 사례비 편성을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 시작해보자는 마음을 먹게 되었고 모두가 동의해주셔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해가 정말 자영업자로서 고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월평균으로 보니까 50만원도 못 벌었어요. 당연히 그것으로 생계는 어려웠겠죠.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요즘 제 심정은 사례비가 없었으면 우리 가정이 괜찮았을까?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이 참 놀랍게 이끌어가신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제 눈으로는 어떤 일은 너무 빠르고, 어떤 일은 너무 느리다고 여긴
부분들도 많아요. 이 길이 맞나? 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왜 질문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지나면서 깨닫는 것은 하나님은 정말 놀라운 분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갖고 있으면... 앞으로의 발걸음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안 그래요. 머리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이 이끌어주실 것을 너무나 잘 알지만... 제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매번 확인하지만... 삶의 작은 부분마다 고민하고 염려하는 저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참 싫어요. 그래서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해가 됩니다. 왜냐면 제 삶도 그들 못지 않게 하나님의 일하심이 제 삶의 역사 안에 새겨져 있는데... 까마귀와 같이 먹이시고 입히시고 도우시는 것을 그렇게나 많이 경험했는데... 여전히 믿음으로만 살아가지 못하는 마음들이 제 안에서 불쑥 불쑥 튀어나와 그놈과 싸우는 삶을 삽니다. 물론 분명한 것은 제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의지하는 법을 많이 배웠기에 결국에는 이기는 길을 선택하는 확률이 꽤나 높아졌어요. 그래도 여전히
크고 작은 갈등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일하심과 자신들의 실패를 회상한 후에 이제는 이러한 고백으로 나아갑니다. 하늘에서 우리를 굽어 살펴 주십시오! 주의 거룩하고 장대한 집 창문 밖으로 내려다봐 주십시오! 주님의 그 열정, 주님의 그 높으신 권능의 역사들, 이제 어디로 갔습니까? 주님의 진심어린 동정과 자비하심, 이제 어디에 있습니까? 어찌하여 물러서 계십니까? 주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은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전혀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살아계신 아버지 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이름 높으신 우리의 속량자이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가 주의 길을 떠나 방황하게 하셨습니까? 왜 우리를 냉담하고 완고한 자들로 만드셔서, 더 이상 주를 경외하지 않고 예배하지도 않게 하셨습니까? 주의 종들을 돌아보아 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주의 소유입니다! 이들은 다시 간청합니다. 하나님이 돌아오시는 방법 외에는
자신들에게는 소망이 없음을 이들은 기억하며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굉장히 멋있는 표현이 이어집니다. (사 64:1) 원하건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 앞에서 산들이 진동하기를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오, 주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여러분, 지금 이사야서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기 전 구약이 아닙니까? 하늘의 하나님이 하늘을 찢고 내려와 달라는 요청이 참 멋지긴 하지만 말이 안 되는 과장법 같은데... 실제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습니까? 하늘을 찢고 땅으로 내려오신 것이죠.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하는 이들의 간구가 이어지는데, 그 중에 우리에게 매우 유명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사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자신들을 진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토기장이로 비유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출생과 존재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손의 작품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분께 관심을 가져주길 간구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는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말 안에는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전혀 살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자녀니까 괜찮아” 이렇게 방임하며 하나님 뜻과 멀리 살아가는 자들은 심각한 구원탈락의 경고를 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들이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조금은 걸음이 느리더라도 진심을
다하여 나아가는 삶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일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제가 아버지 밑에서 부교역자 사역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가 맡은 부서가 엄청나게 부흥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마냥 저의 능력으로 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알아요. 왜냐하면 저는 사역을 할 때 기존의 것을 따라가기보다 새로운 시도를 굉장히 많이 하는데, 그 당시에 그것이 좋은 쪽으로 나타나서 결과도 좋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담임목사님들도 있지만 싫어하시는 분들도 많아요. 그래서 저는 담임목사님들에게는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부교역자로 첫 사역을 모교회에서 한 것인데, 새로운 것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내고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이기 때문인 것도 없지는 않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퇴짜를 맞아도 다시 가서 요청하고 설득하고 그럴 수 있었어요. 물론 때로는 혼도 많이 났지만요. 어떤 부분은 아버지와 함께 사역하는 것이 쉽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요. 제가 주일 사역 끝나고 아내를 만나서 차에 타자마자 펑펑 운적도 있었어요. 그래도 분명히 저를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기에, 제가 시도하는 새로운 방향에 대해서 많이 지지해주셨던 것이 큰 힘이 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버지.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니십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이렇게 외치며 다가왔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시고 맞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탕자 이야기도 똑같잖아요. 아들이 그래도 아버지는
나를 맞아서 품꾼으로라도 써주시겠지.... 이런 믿음으로 돌아오지 않습니까? 이사야 65-66장은 이사야서 전체의 최종적 결론입니다. 앞의 두 장에 기록된 백성들의 기도와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주어집니다. 더 길게 보자면 이사야서의 후반부라고 할 수 있는 40~66장까지가 담아내고 있는 키워드는 ‘회복’입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자들에게 주실 약속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이 ‘새창조’입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성경은 창조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창조의 질서가 죄로 말미암아 망가졌습니다. 어린이 찬양 가운데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1. 지으셨네 하나님이 놀랍게 지으셨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네 2. 망가졌네 사람이 완전히 망가졌네 사람이 죄를
지어 완전히 망가졌네 우리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상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죄를 짓기 전, 즉 ‘죄’가 없는 상황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모든 것들을 우리는 알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세상을 만드시며 계획했던 그 모습에서 지금 많이 망가져있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세상도, 땅도..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시 죄가 없는 모습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 새에덴, 새창조입니다. 이사야서 11장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을 하며 그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 11:6)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사 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사 11:8)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자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에덴의 첫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그때는 죽음도 없었어요. 부끄러움도, 아픔도 없었습니다. 죄가 들어오면서 땅도 변질되었거든요. 메시아가 우리에게 오셔서 하시는 일은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그 회복이란 죄가 망가뜨린 모든 것을 다시 고치시는 것입니다. 3. 고치시네 하나님이 새롭게 고치시네 예수님의 보배피로 그 형상 고치시네 이
찬양은 완전한 복음의 고백인 것이죠. 예수 그리스도가 왜 오셨습니까? 다시 우리가 그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앞서 언급했던 11장의 내용이 다시 한번 요약되어 65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창조와 타락, 그리고 다시 새창조를 통해서 이루실 시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샬롬’입니다. (사 65:22)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사 65:23)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타락한
세상 나라, 죄악으로 망가진 이스라엘에 대해서 이사야서가 끊임없이 지적한 것은 무엇입니까? 불공정, 불평등, 착취, 고난, 영원한 가난 등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덴을 회복하시고, 샬롬을 주시며, 우리의 모든 불의를 되돌려 놓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새창조라고 말합니다. 태초의 창조 때에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다면, 새창조 때에는 새하늘과 새땅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역사를 시작하셨고, 우리는 그곳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두 가지를 함께 붙잡아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입니다. 완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부활을 기다리는 소망함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 많은 이 세상이 아니라 나그네 인생임을 기억하며,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함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미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임하셔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현재적 삶 속에서 우리를 도전해야 합니다. 현재가 없으면 미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의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고, 그 결과 우리는 주의 재림의 날에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삶이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모습을 언젠가 일어날 미래의 일로 던져놓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삶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깊이 묵상하며, 그것을 위한 작은
손 짓, 작은 발걸음을 매일 같이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혹시 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할 까마귀의 역할을 맡기지는 않았나? 내가 내 삶에서 불공정과 불평등에 신음하는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말하는 이 시대에 내가 샬롬의 은혜를 아는 사람으로서 샬롬케 할 일은 없을까? 저는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우리가 주어진 삶 안에서 작지만 강력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말씀을 마무리하며 이사야서의 첫 번째
여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참 신기하게도 아이들을 보면 부모를 닮아 있습니다. 저도 가끔 제 아들의 얼굴을 보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리고 또 많은 경우에 부모의 직업을 닮아서 따라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자녀 삼아 주셨지만... 그들은 탕자와 같이 자신의 길을 가고자 아버지의 품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끝에는 후회와 쓰라린 고통의 흔적이 남았습니다.
다시 돌아올 명분도, 양심도 없지만... 그들은 용기를 내어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습을 기뻐하셨고, 그들을 따스하게 안아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저는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를 소망하는 자들에게 완전한 회복에 대해서 보여주시며, 함께 그곳까지 나아가자 말씀해주십니다. 여러분이 성경의 객관적 진리를 믿는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죄와 벗하여 살기를 좋아하고, 내 중심이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추구하며, 내 마음의 가장 귀한 그 자리에는 내가 앉기를 바라는 모습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삶에서 샬롬을 경험하고 계십니까? 혹시 후회와 쓰라린 고통의 흔적만 남겨지고 있다면... 다시 성경이 비추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을 따라서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야 할 때입니다. 구약의 역사와 이사야서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며, 이제는 나아가라. “샬롬을 향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