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누구신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5주간 살펴봤던 1-2과의 주제였습니다. 오늘부터 다룰 주제는 3과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에노스’, 즉 본질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사람들이 ‘에노스’임을 고백하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이름을 찾게 되었듯, 우리의 삶도 자력으로는 죽음과 본질적인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구원자가 필요함을 고백할 때, 그 해답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께서 그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 왜 예수님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가? · 예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서 돌아가셨을지라도, 왜 십자가에서 그토록 참혹하게 돌아가셔야 했는가?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있으며, 주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이 날로 깊어질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믿는 것과 동일합니다. 말씀은 믿지 않고 주님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미신일 뿐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언제나 성경 말씀의 기초 위에 세워져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성경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함께 살펴봅시다. 첫째,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본문은 예수님을 가리켜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와 동의어가 메시아이고, 번역하면 ‘구원자’라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만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분만이 본질적인 죄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원해 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말씀은 마리아가 잉태한 것에 대하여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음을 밝히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4대 성자로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를 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은 이 땅이 시작이 아닌 분으로서, 오직 타인의 죄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가, 타인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너의 죄를 위해 내가 죽는다”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교는 죄의식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도덕만 강조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달라요. 인간이 아무리 도덕적으로 살아도 그것으로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으로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여, 우리의 힘으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죄의 굴레를 끊어내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그 일을 이루셨으므로, 그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해 내는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사형수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버지가 대신 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대신 내 아들은 살려달라고 탄원서를 관계 기관에 보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것이 가슴 뭉클한 부정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들의 죄가 사해지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는 법이 인정하는 속죄양도 아니고, 대한민국의 법은 속죄양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이처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해 “내가 너희 죄를 지고 죽는다”라고 외치며 죽었다고 한들,
그가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인정하는 속죄양도 아닐뿐더러, 죄값을 대신 치를 능력도 없기 때문입니다. (요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속죄양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내 죄값을 대신 치를 자격과 능력을 갖추고 계셨고, 그분의 죽음이기에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오직 그분만 우리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자’이시다. (요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요 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우리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장사 된 지 사흘째 되는 날,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영원한 부활자가 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영원한 부활자가 되셨기에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 영원한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값을 치렀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그것으로 끝나버렸다면 예수님의 구원은 이 땅에 국한된 구원에 불과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근본적인 죽음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죠. 그러나 주님께서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부활하심으로, 우리는 모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예수님께서 영원한 부활자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 있고 앞으로도 영원히 유효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와 동시에 그의 말은 효력을 잃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못하고, 2천 년 전에 지구 반대편에서 죽어버린 인간에 불과하다면 21세기에 진입한 우리가 그를 믿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지금과 영원까지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혹시 믿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객관적 진리와 주관적 경험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도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고자 힘쓰고 생각해볼 필요는 있는데요. 부활의 증거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새 생명을 얻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 역사의 열매들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손길에 의해 오늘도 내가 새롭게 빚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주님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종교나 그 종교 안에서 새로워지고 있다고 고백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좀 더 객관적인 증거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종교는 예외 없이 창시자의 무덤을 왕릉처럼 거창하게 꾸미고 가꿉니다. 그것으로 그 종교의 권위가 더해진다고 믿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무덤이란 죽음의 증거일 뿐입니다. 이런 면에서 공자나 석가모니는 동일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누워계신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의 핵이어야 할 죽음, 즉 시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처럼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오늘날 이스라엘 어딘가에는
왕릉 같은 예수님의 무덤이 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체가 없어졌기에 로마는 그 일에 대해서 예수님이 부활한 것처럼 속이려고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 가고 감추었다고 소문을 냅니다. 이로 볼 때, 시체가 없어진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럼 로마군대의 주장처럼 제자들이 훔쳐 갔거나, 혹은 제자들의 증언처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만약 로마군대의 주장이 맞는다고 생각해봅시다.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며 자기들끼리 시체를 감춰버렸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는 것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그렇게 부활의 약속도 지키지 못하고 죽어서 아무것도 못 하는 시체가 되어버린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며 순교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봤다면 더욱 그렇게 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예수 부활’은 제자들의 입이 맞추어 꾸며낸
거짓말이었을 것이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무식한 어부들이 입을 맞춘 말은 곧 탄로 나 버렸을 것입니다. 그 부활의 복음이 예루살렘을 넘고, 온 세계로 퍼져가며, 제자들이 자신의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예수 부활’을 외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전한 ‘예수 부활’의 증언이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무너지지 않고 살아 역사하는 것은, 그것이 인간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 아니라 그 누구도 허물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 (마
16:13)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르시고, 몇 번씩이나 이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마리아를 통해서 생명을 가진 아기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을 입고 오셨으므로 ‘사람의 아들’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히 2:18) 그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느니라 시이고견!
예수님께서 친히 사람으로 오셔서 인간의 희로애락을 구체적으로, 또한 실존적으로 경험을 하셨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를 위한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기 위하여 그분은 반드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셔야 했던 것입니다. 동물도 인간을 위해 죽습니다. 구약의 제사가 그러했죠.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인간의 대속제물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인간이 아니라 우리와 차원이 다른 신의 몸으로 살아가셨다면,
그는 죄의 유혹과 무관하였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공감할 수 없죠. 우리가 수요일에 ‘장애 감수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중상을 입어서 몸의 불편을 겪다 보면 장애인들의 어려움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저희 어머니를 최근에 뵙고 왔는데, 예전에 사고로 가족을 잃은 한 자매님에게 무조건 복음을 전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그 아픔을 이해하는 것을 충분히 하지 못했는데, 그때 그분이 굉장히
불편해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은 갑작스럽게 남편을 먼저 보내시면서, 지금에서야 그때 그 자매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겠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저에게 누군가 아픔을 이야기하면 때로는 그냥 아무 말 없이 들어주는 것이 필요함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같은 처지에 있음으로써 공유할 수 있는 이해를 갖습니다. 이것을 심리학적 용어로 ‘공감적 이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개를 사랑할 수 있지만, 개에 대하여 공감적 이해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개가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아무리 명견이라도 개 역시 인간사의 고달픔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개가 경제적 위기를 알겠습니까, 취업난을 알겠습니까? 개는 개일 뿐, 개가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까닭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오시지 않았다면 사람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갖지는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육체를 지닌 사람으로 오시어 인생의 애환을 몸소 겪으심으로 사람에 대한 공감적 이해를 지닐 수 있었고, 육체를 지닌 우리의 연약함을 온전히 돕는 구원자가
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끔 어떤 분들은 교인들에게 ‘부자’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며, 예수님도 부유했다는 식의 성경해석을 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이겠죠. 그래야 우리가 부를 누리는 것에 대해서도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눅 2: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눅 2: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눅 2: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레위기의 규정에 따라서 예배하러 간 것인데, 소와 양으로 예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것을 드리지 못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율법은 비둘기로 제사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함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었겠죠.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나사렛이라는 곳에서 자랐고,
그의 제자들 또한 갈릴리 출신이 대부분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류 사회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택하심이 늘 그렇지 않습니까. 또한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말구유입니다. 구유는 동물의 밥통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역겨운 통, 인간이 거할 수 있는 곳 가운데 그보다 못한 출생의 장소가 있을까요? 거지도 자기 자식을 그런 곳에 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리에서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분이 고아와 가난한
자, 과부와 같은 약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삶이 신에서 인간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새신자반>을 쓴 이재철 목사님의 자기 고백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잘 아실지 모르겠지만 ‘신학교’ 중에도 등급이 있어요. 정식으로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학교들도 있고, 그것과 상관없이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있습니다. 또한 그냥 작은 상가 같은데 세워지는 군소교단의 신학교들도 있습니다. 제가 속한
교단은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학교가 하나 있고, 그 외 교단 신학교가 있는데.. 이분이 속한 교단은 장로교 통합측이라서 거기는 교육부에서 인정하는 학교만 5개가 넘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학교들 안에도 서열이 생기는 것이죠. 이분은 그중에서도 가장 좋은 학교 출신이고 굉장히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분은 큰 사업을 했던 사람이기에 신학교의 난립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했다가, 뒤늦은 나이에 신대원을 다니면서 신학교의 난립과 무허가, 무인가 신학교에서
목사가 쏟아지게 배출되는 문제 등에 대해서 비판하는 태도를 갖게 되었고, 그런 신학교의 폐지에 동조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해요. 이분이 신대원에 진학한 것이 1985년이었는데, 그때 어떤 군소신학교의 책임자와 식사를 하게 됩니다. 그 군소신학교는 이분이 평소에 ‘이런 학교는 없어져도 무방하다’라고 여겼던 그런 학교였어요. 마침 그때 평소에 알고 지냈던 그 학교 출신의 전도사님 두 분도 함께 식사했는데, 그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재철 목사님이 충격을 받았다고
해요. 두 분 모두 가난한 동네 출신이고, 신학교 졸업 후 각각 빈민들을 상대로 목회를 하고 있었어요. 한 분은 한 달 사례비가 5천 원인데, 그것이 그가 상대하는 빈민들의 생활 수준이었다고 해요. 또 한 분은 좀 형편이 나아서 한 달 사례비가 15000원. 그분도 매일 쌀밥을 먹을 형편이 아니었지요. 그런데 두 분 모두 자신의 목회지에 대한 큰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었어요. 이재철 목사님이 그날 밤 집으로 돌아와 깊은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본인은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고, 좋은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는데... 빈민촌이나 달동네에 들어가 살면서 그곳에서 목회할 용기를 갖고 있지도 않고, 설령 주님이 보내시어 그곳으로 간다고 해도, 이번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기에는 장벽이 너무 큰 것이죠. 그들과 이분이 살아온 세계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는 그들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에게 맞는 언어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더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빈민촌에서 태어나 단지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필요한
학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목회자가 되고자 할 때,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 학교만 존재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에서 똑똑하고 잘난 사람만 가는 신학교가 아니라, 좀 부족한 사람도 들어갈 수 있는 신학교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실제로 이름 있는 신학교를 졸업한 목회자 가운데 한평생 달동네나 빈민촌에서 목회하고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그 해가 끝나는 마지막 날, S동에 있는 그 전도사님의 교회를 찾아가 송구영신 예배를 드렸다고
해요. 회개의 표시였지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무인가 신학교나 군소 신학교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하였는데, 그곳을 통해서도 신실한 주님의 종이 배출됨을 내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제게도 생각의 전환이 일어났던 일이 떠올랐는데요. 어쩔 수 없이 신학대학교도 신학대학원도 학업을 하는 과정이다 보니, 좋은 성적을 내는 사람들이 엘리트로 인정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장학금을 받고 학교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이나,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비판의식이 많았습니다. 적어도 학교에서는 그런 사람들과 저의 격차가 꽤 커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역지에 나가서 많이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제가 같이 사역을 했던 분들 가운데, 성경을 가르칠 능력이 조금 부족했던 분들도 많았어요. 그래서 사역을 하면서 그런 부분이 드러나면 목회자 망신을 시킨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어떤 면에서는 성도님들보다 더 모르는 그런
부분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사역이라는 것이 단순히 가르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섬기고, 교제하고, 이런저런 달란트로 교회를 함께 세워가는 일이지요. 그 안에서 저보다 그들이 더 잘하는 부분도 많다고 느끼게 되었어요. 특별히 교회 안에서, 흔히 조금 노는 친구들에 대해서는 그들과 나눌 경험과 공감적 토대가 많은 사역자가 더 잘 어루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저의 잘못된 첫 마음들에 대해서 후에 그분들과 나누며 용서를 구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몇 번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배경이,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엘리트 집단으로 꾸려져 있었다면, 특별히 베드로와 같은 인간미 넘치는 분들이 제자 가운데 없었다면... 우리는 이런 나도 초청하고 불러주시는 주님에 대해서 조금은 의심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스스로가 가장 비천한 삶을 사셨으므로,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상황과 마음까지도 이해하시고 돕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여러분이 스스로 작게 여겨지고, 비천하다고 여겨집니까? 이 세상
누구도 여러분의 속마음을 알아주지 못한다고 여기십니까? 그럴 때면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잘 이해하시고, 여러분의 연약함을 돕기 원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여러분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이 단순히 그런 이해를 하는 분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35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요. 사람으로 태어난 자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보다 높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 어떤 천하의 제왕도 그보다
높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권세와 비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낮은 자의 마음만 아시는 분이 아닙니다. 지도자, 또한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고독과 아픔도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0일 만에 가진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이란 자리가 이처럼 어렵고 괴로운 자리인지 비로소 알았다고 실토했습니다. 그는 야당 총재 시절, 역대 대통령의 실정을 쉬지 않고 비판하며 공박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직접 대통령이 되어보니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공감적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되어보지 아니한 사람이 그 고독을 이해할 수 없지요. 재벌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그 괴로움을 알 수 없지요. 한 번도 사장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이 직원들에게 봉급을 주기 위해 자기 집문서를 저당 잡히는 사장의 아픔을 어찌 읽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 그 어떤 높은 사람의 속마음도 공감하고 이해하십니다. 모든 아픔을
속속들이 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백부장 같은 로마의 장교나, 니고데모와 같은 산헤드린 의원이나, 아리마대 요셉과 같은 부자도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복음을 해석하고 정리하여 신약성경의 절반을 쓴 인물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인 바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그분은 높고 부유하고 똑똑한 사람도 온전히 돕고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장 낮고 비천한 구유에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셨을
뿐 아니라, 동시에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그분은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하고 도우실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을 당신 안에서 온전히 통합하실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그리스도 공동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 가난한 자와 부유한 사람,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그 어떤 다른 모습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던지 예수 안에서 하나가 되어 어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눴습니다. 그분은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요, 부활하신 생명의 주이며,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를 공감하시는 놀라운 위로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예수님을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소개하며, 우리 모두가 예수님에 대해 조금씩 더욱 깊어진 이해 안에서 더욱 충만하게 그분과 교제하는 일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