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시편이 어느덧 9번째 시간입니다. [19-11-03] 주일설교 - 시편 1) 주님을 향한 노래가 되어 (시 130-131편) [20-05-10] 주일설교 - 시편 2) 존재감 (시 10.1-18) [20-05-17] 주일설교 - 시편 3)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셨으니 (시 16.1-11) [20-05-24] 주일설교 - 시편 4) 유명(有名)한 시, 그리고 우리 (시 23편) [20-10-18] 주일설교 - 시편 5) 이것이 영성이다 (시 27.1-6) [20-10-25]
주일설교 - 시편 6) 시편이 시라서 좋은 이유 (시 34편) [21-03-07] 주일설교 - 시편 7) 다시 일어서는 법 (시 51편) [21-03-14] 주일설교 - 시편 8) 밑바닥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시 62편) 매일성경 묵상의 특성상 시편은 책이 끝나고 남은 1~3주 정도의 시간에 쪼개서 배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장 흐름을 파악해서 읽지 못하는 책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시편은 그냥 시 모음인데, 흐름을 파악할 것이 있나? 그냥
시집처럼 보고 싶을 때 하나씩 읽으면 되는 것 아니야?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그림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흔히 <포토 모자이크>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인데요. 아마 한 번쯤은 다 보셨을 것입니다. 작은 사진들을 모아서 그것을 배열하여 큰 그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사진 하나씩 서로 보자면 그리 연관성이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배열을 통해서 연관성을 가진 하나의 메시지로 만들고 있는 것이죠. 요즘 학자들은 시편의 구성이
이처럼 배열을 통해 메시지를 드러내는 책으로 이해합니다. 상당히 발전된 이해인 것이죠. 제가 사귐의교회 안에서도 이런 이야기를 가르쳤던 기억이 있어서 찾아보니 2017년 8월 30일. 4년 전에 가르쳤던 내용이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시편의 메시지에 대해서 조금 정리하면서 67편의 메시지를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시편은 150편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저자로는 대표적으로 다윗이 있는데, 그가 73편의 시를 썼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저자들이 있는데, 49편 정도는
작가 미상의 시들입니다. 누가 썼는지가 중요하지만, 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확실하기에 성경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150편으로 묶여서 이것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전수됐기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저자가 있나요? 그냥 우리 민족이라면 다 아는 노래이죠. 시편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안에서 고백 된 시와 노래입니다. 성경이 지금의 형태로 이스라엘 공동체에 전수되고 정리되었던 것은 바벨론 포로가 된 후
어느 시점입니다. 그들 안에 전해 내려오는 고대의 시들이 수집되고 정리가 되었는데, 바로 이 정리가 ‘배열’과 관련이 있는 것이죠. ‘배열’은 곧 또 하나의 큰 그림이 갖는 메시지가 드러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열이 가진 메시지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시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봐야 합니다. 한편씩 보고 싶은 것을 읽을 때는 보이지 않겠죠. 오랜 세월 시편을 연구한 학자들은 시편에 흐름이 존재한다는 것을 찾아냅니다. 특별히 통일성이 존재하는 부분들을 주목해서
보다 보면, 그것에 담긴 의도성을 따라갈 수 있죠.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시편 가장 마지막 5개의 시입니다. 146~150편까지 주목할 특징은 시의 처음과 마지막에 동일한 문구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할렐루야!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끝나요. 의심이 가는 분이 있다면 한번 나중에 찾아서 읽어보십시오. 성경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바로 그러한 ‘의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 150편 마지막 절은
이렇게 끝나요. (시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여러분, 그런데 ‘할렐루야’가 무슨 뜻이죠? 사실 오늘 이것만 알면 설교가 끝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할렐루야는 히브리어인데, 할렐루 = 찬양하라, 야 = 여호와. 그러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어입니다. 이것이 명령어라는 것이 중요하죠. 보통 우리는 어떻게 하죠? 할렐루야~ 아멘. ‘아멘’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할렐루야-아멘’은 우리끼리 하는 인사말이나 암구호가
아니라,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이 명령에 함께 동의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5개의 시편이 모두 ‘할렐루야’로 묶여 있다는 것은, 이것이 시편 전체의 ‘결론’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전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그러므로 우리가 시편을 나누면서 마음속에 항상 있어야 하는 것은 여호와를 찬양한다는 할렐루야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결론의 구성만으로 시편 전체가 하나의 메시지를 가졌다고 말하면 너무 억지죠. 당연히 시편은 그보다 치밀하게
배열되어 있습니다. 시편이 혹시 몇 개의 덩어리로 나눠지는지 아십니까? 다섯 개입니다. 1권 : 1-41편 2권 : 42-72편 3권 : 73-89편 4권 : 90-106편 5권 : 107-150편 누가 다섯 개라고 정했을까요? 바로 시편을 구성한 사람들이 시편 안에 그렇게 나눠서 보도록 표시를 해놨습니다. (시 41:13)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아멘 아멘 (시 72:19) 그 영화로운 이름을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온 땅에 그의 영광이 충만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89:52) 여호와를 영원히 찬송할지어다 아멘 아멘 (시 106:48)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지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 할지어다 할렐루야 특징을 발견하셨나요? 각 권의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은 모두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바로 할렐루야 메시지와 ‘아멘’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별히 ‘아멘’이 나오는 것은 각 권의 마지막 시의 마지막 구절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확실한 표시입니다.
또한 분리 지점에서 저자가 바뀌는 것으로 구분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 시편의 서문은 무엇일까요? 시편 1~2편입니다. 그래서 대다수 학자가 이것을 시편 전체의 서론으로, 146~150편을 시편 전체의 결론으로 이해합니다. 시편의 시작은 여러분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는 사람은 주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토라’입니다. 토라는 모세오경을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고 ‘가르침’이라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편에도 분명한 가르침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평생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러한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모세오경을 통해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만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나아갈 방향을 알 수 없어요. 말씀 없이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욕망의 기도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는 그 순종이 내게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편 2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언약, 즉 다윗의 후손을 통해 이루실 나라에 대한 시입니다. 즉, 시편은 이 2가지를 계속 주제로 삼아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순종’과 ‘메시아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율법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과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그들이 주님 나라에 이르기까지 주어진 삶을 주 뜻대로 살기 위한 기도의 책입니다. 그 안에서 시편 하나하나를 읽어나가면 우리가 어떤 마음이 듭니까? “어? 우리와 다르지 않네?” 시편의 저자들이 마주한 상황, 그 힘겨움, 마음의 갈등들을 읽어가며... 우리는 공감합니다. 특별히 시편의 절반을 썼던 다윗의 삶은 드라마틱하였죠. 그는 인간 세상에서도
가장 낮아서 부모에게까지 외면당하는 삶과 왕의 자리까지 경험합니다. 또 도망자의 삶도 살고, 왕이 되었다가도 아들에게 배신당하여 쫓기는 일도 경험합니다. 그가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내침을 당했다가, 하나님께 회개하여 돌아가기를 힘쓰는 그런 일들도 있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여러 명의 시편 저자, 때로는 익명으로 남아 있는 그 시들까지... 우리는 그들에게 마주했던 삶의 상황 속에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냈는지를 시편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가장 중요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할렐루야!’ 여호와를 찬양하여라! 특별히 5권의 책은 또 주제가 조금씩 달라져요. 1권은 언약에 신실하게 살아야 함을 말하고, 2권은 메시아 나라에 대한 소망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의 통치를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성취될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3권에 넘어가면 메시아 나라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다윗 왕국이 몰락하여
포로가 되는 상황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마소서.’ 그리고 4권이 핵심인데, 바로 포로 상황입니다. 인간 왕의 실패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포로기의 백성들이 그 안에서 발견한 진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요. 자신들의 뜻대로, 자신들의 마음대로 살아가는 삶의 실패 가운데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4권의 마지막인 시편 106편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벗어나 다시
모이게 해 달라는 기도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5권은 포로귀환에 관련된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107편은 다시 모이게 된 것을 성취된 사실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책을 구분하게 된 일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돌아온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포로의 귀환은 눈에 보이는 회복의 일차적 상징이고, 더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궁극적 소망을 노래합니다. 이렇게 시편 전체를 살펴보고 나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얼마 전에 이사야서를
보면서 그 안에 성경 전체가 압축되어 들어가 있다고 했던 것과 같이, 시편에도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부르심과 약속, 실패와 구원 그리고 소망까지 말입니다. 이것이 시편의 큰 그림이라면 그중에 오늘 설교를 통해서 하나의 시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번에 약 2주간 묵상하고 있는 본문이 시편 63~72편입니다. 우리가 아까 나눈 시편의 구조에 따르면 2권에 속해 있는 말씀들입니다. 2편의 큰 주제는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것입니다.
시편의 5권을 차례대로 모세오경과 연결하는 해석도 가능한데, 그 경우 2권은 출애굽기의 신학과 연결됩니다. 출애굽기가 말하는 것이 현재의 고난 가운데서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며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2권에 속한 시로서, 시편 67편이 오늘 우리가 보려고 하는데 7절로 이뤄진 시입니다. 한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시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시 67: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4)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시 67:5)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6)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67:7)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이 시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단어, 처음과 끝에서 계속 언급되는 단어는 ‘복’입니다. 최근에 금요일에 새신자반을 통해 설교할 때, ‘복을 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만 ‘기복주의 신앙’에 우리가 빠지면 안 되는 것이죠. <사귐의기도>라는 책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매우 쉽게 설명하고 있는데요. “몇 년 전 외국 출장을 갔을 때의 일이다. 귀국
준비를 하면서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골랐다. 아이들 선물을 쉽게 고를 수 있었는데, 아내에게 줄 선물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무엇을 사 가야 좋아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나는 선물을 찾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면서 선물을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자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안전하게 돌아온 당신이 선물이지, 다른 선물이 뭐 필요해요.” 나는 이 말에 감동했다. 아직 철이 없는 아이들은 아빠보다 선물을 더 좋아했지만,
성숙한 아내는 남편이 건강하게 돌아온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주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져 줍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선물 꾸러미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그분에게 관심이 있는가? ‘헨리 나우엔’은 우리의 신앙을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태도를 통해 지적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성탄절에 산타클로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산타클로스가 아니라 그가 주는 선물이다. 선물만 받으면
아이들은 산타클로스를 이내 잊어버린다.” 우리가 복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고백 가운데 피조물로서 마땅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은혜와 복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우리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구하는 것도 관계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되어버리고, 하나님이든 누구든 그 목적을 이뤄줄 존재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복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바라보는 신앙인 것이죠. 복을 구하는 신앙은 때로는 하나님이 내게 주지 않으셔도,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 그분을 신뢰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택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이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도 ‘내가 네게 복을 주겠다’는 것이었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에게는 또한 복을 내리고...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사명은 그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복의 기이한 특성과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물질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로또는 많은 사람이 구입을 해서 그렇게 불어난 돈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입니다. 1등도 한 명이 나오면 더 많이 가져가고, 여러 명이 공동으로 1등이 되면 나눠야 합니다. 액수가 줄어듭니다. 물질세계의 특성이 그렇습니다. 독점해야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세계는 그렇지 않습니다. 복은 전하고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받는 복에 대해서 옆 사람과 나눈다고 내가 받는 복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그 복을 누림으로써 더 크게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축복’을 합니다. ‘축’은 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따지면 소원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복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위해 축복합니다. 그러나 복을 우리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는 축복할 수는 있지만, 복을 줄 수는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은 축복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 복을 주옵소서” 기도할 수 있고, 서로를 향해 “하나님 이 사람에게 복을 주십시오”라고 축복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말하는 복이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진정한 사귐, 그분과의 동행, 그분에게 접붙임 되어 살아갈 수 있는 은혜가 복입니다. 그럼 내가 사업이 잘되는 것이 복인가? 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건강한
것이 복인가? 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고 싶은 학교에, 취업하고 싶은 직장에, 준비한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 복인가? 복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은 분명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복이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것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다면 그것이 오히려 복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내가 원하는 것도 잘 이루면서 하나님과도 가까워지면요? 네. 저도 여러분이 그러기를 늘 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성경을 보면 원하는 것을 이루며 승승장구하던 사람들이 대부분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누리는 것에 실패합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은 우리에게 명쾌하게 복에 대해서 몇 가지 실제적인 예로 설명을 해주셨어요.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이 그것인데 그 중 몇 가지는 그리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입니다. 보십시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왜 이것이 복입니까? 가난한 심령 가운데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님의 채우심이 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하나님
나라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많은 것이 뜻대로 되어가면서 평안함 가운데 살아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혹시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없고, 힘겹고, 좌절하게 되는 상황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저는 그 일의 의미를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기 원하신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 상황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면 그 삶이 복된 삶이 되리라는 것은 확신합니다. 또한, 시편 67편은
7절에 불과하지만 매우 정교한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시 67: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셀라) (시 67:2)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시 67:3)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4)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시
67:5)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6) 땅이 그의 소산을 내어 주었으니 하나님 곧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시 67:7)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리니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이런 교차 대칭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키이즘’이라고 부릅니다. 1-2절과 6-7절이 비슷하고, 3절과 5절은 거의 같습니다. 가운데 4절이 위치하고 있어요. 가운데 구절을 제외하고 앞뒤와
중간 모든 곳에 나오는 공통 단어가 하나 있는데 ‘모든’이라는 단어입니다. 모든 나라(2절), 모든 민족(3,5절), 땅의 모든 끝(7절). 이것은 모든 세계가 주께 속해 있으며, 모든 세상이 하나님으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꿈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열려있고, 하나님은 초청하고 계십니다. 창세기가 말해주는 것이지요. 모든 세계가 주께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났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지금은 교회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먼저 복을 주시고, 우릴 통해서 세상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그분을 예배하고 찬송하는 일이 하나님의 비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버지의 꿈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그 꿈에 동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의 구원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을 나누는 것.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배우며 많이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있는 곳곳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곳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67편은 그러한 꿈을 꿉니다. 함께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구원을 누리며 그분을 노래하는 것. 이 일에 땅의 모든 끝을 초청하고 있어요. 땅이 오늘도 소산을 내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시며 복을 주고 계신 증거이니, 땅의 모든 끝이 그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카이즘의 핵심은 가운데 위치한 4절입니다. (시 67:4)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 위의 나라들을 다스리실 것임이니이다 (셀라) 갑자기 복으로 ‘we are the world’ 하며 축복하고 노래하는 분위기에서 그 중심에 있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입니다. 4절의 의미는 주께서 민족들을 공평하게 심판하시고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만약 4절이 없다면, 우리는 이 시를 통해서 ‘만인 구원론’과 같은 생각을 가질지도 몰라요. “하나님은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복 주시기 원하시니까 무엇이든 괜찮아.”
무엇으로 믿어도 괜찮아. 종교다원주의가 그런 것 아닙니까? 모든 민족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그 우산 안으로. 제가 가끔 쓰는 표현으로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에게나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자들이 그분의 복의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소서.” 이런 시인의 기도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온 열방을 향한 기도.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 전까지 구약의 바벨론 포로부터 귀환에 이르는 이야기를 수요일마다 나누면서 저는 그 안에서도 그것을 느꼈어요. 하나님의 사람은 일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고, 그것에 순종하기 위해 삶으로 행하고, 또 그 안에서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다니엘도 그러했고,
에스라도 그러했고, 느헤미야도 그러했습니다. 에스더는 자기 백성의 위기 앞에서 기도만 하고 있지 않았어요. 기도하고 나아갑니다. 죽으면 죽으리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왕에게 요청해서 귀환의 허락을 받고 귀환 백성들과 함께 일합니다. 제가 설교 초반에 시편은 ‘기도’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기도를 하며 주어진 삶을 살아냈다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시편 67편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얼굴빛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사 우리를
복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구원이 나의 구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길 바라요. 하나님의 꿈이 나의 비전이 되어서, 모든 민족을 향해 복을 비추시기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내게 담기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서 땅의 모든 끝이 주를 경외하는 일이 우리의 삶을 통해 경험되고 고백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그 일이 이뤄지기 위해 우리가 이 설교를 마무리하며 품어야 하는 너무나 중요한 한
가지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에게 모든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꿈이 주어졌다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여러분이 머나먼 곳에 있는 그런 민족과 어떤 대상을 마음에 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 사랑을 하자고 말할 때도, 그것이 나와 상관없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그러한 이웃을 사랑함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가장 가까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형제는
친족을 말하기보다 여러분이 자주 마주하고 관계를 맺고, 그래서 여러분도 때로는 아프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바로 그 사람. 교회 안에도 있고, 교회 밖에도 있으며, 내 삶에 마주하게 하신 그 사람.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람이 믿는 사람이라면 서로를 붙들어 하나님 나라까지 함께 가기를 꿈꾸는 것. 그 사람이 신앙이 없거나 잃어버렸다면 끊임없이 그도 복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마음 다해서 복을 나누는 것. 그것이 땅의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오늘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또 그것을 위해서 삶을 사용하고, 그 안에서 다시 되지 않는 것을 위해 기도하고, 또 가서 행하고. 만약 여러분의 삶이 그 모습으로 나아간다면, 오늘의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이 되었다고 감히 저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그 마음을 구하며 함께 시편 67편을 찬양으로 고백하며 나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