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부터 우리는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한 주제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세 가지를 정리했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구원자’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부활자’이시다. 셋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 한 가지를 더 소개해야 하는데요. 바로 네 번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말인가? 우리는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존재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매우 간단한 질문입니다. 사자의 새끼는 사자이고, 참새의 새끼는 참새이며, 사람의 자식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역시 하나님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성부 하나님의 속성과 품성과 권능을 그대로 공유하신 성자 하나님이심이 당연합니다. 그럼 왜 성경은 예수님이 ‘임마누엘’이심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의 도우심은 완전하고, 근본적입니다. 지난주에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에 ‘공감’하고 이해하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분의 공감과 이해가
근본적으로 우리를 도울 수는 없습니다. 완전한 우리의 회복은 오직 완전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죄와 사망으로 깨어진 그 관계를 완전하고 근본적으로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기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지만, 죄가 없는 참사람으로 살아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태를 통하여 오셨으나 인간의 ‘성’을 매개로 삼지는 않으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죠. 그러므로 예수님께는 원죄,
즉 본질적인 죄가 없습니다. (히 4: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가? 왜 그분을 본받고자 하는가?
그분만이 어떤 흠도 없이 완전한 삶을 사신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가 아니셨다면... 그러므로 인간으로 존재하며 한차례라도 죄를 범하셨다면, 그분은 완전한 진리일 수 없고,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 추구해야 할 의미도 사라집니다. 그분도 죄에 물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로만 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감히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바, 그는 곧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지난주부터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네 가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는 구원자이시고, 그는 부활자이시고, 그는 참 인간이시고, 그는 참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그분을 일컬어 이렇게 표현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이 땅에 오신 인간 중에서 구원자이시며, 부활자이시며, 참 인간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통해서만 다시 아버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어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분이 우리를 위해 하셨던 일을 다시금 정리해봅시다.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 사건을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셨던 구원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월절이 있었던 그 밤에 바로 죽음과 생명의 판결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한 이스라엘 민족은 죽음의 사자가 빗겨 지나갔고, 하나님을 무시하던 애굽과 바로의 집에는 사망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주셨던 명령은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밤에 문에 발라진 양의 피를 보게 되면 그 집은 넘어가셨기에 ‘유월절’이라고 부르는 것이죠. 즉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양이 대신 피
흘리고 죽었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제사’를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에 결코 죄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도록 할 수 있습니까? 죄를 해결해야 합니다. 바로 구약의 제사에 사용된 것 또한 ‘양의 피’였습니다. 죄의 형벌을 우리가 받아야 마땅하지만, 대신하여 양을 잡아 피를 뿌리면,
그 피를 보시고 하나님의 심판이 ‘유월’하게 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이것을 설명합니다. (히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그러나 이것은 완전하지 못한 방법입니다.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흠 없는 짐승을 골라서 제물을 드리는 것이지만,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도, 그리고 짐승도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면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본질적인 죄의 굴레로부터 자유를 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물 제사는 하나의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친히 ‘영원한 제사’를 마련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제사였고, 그 제사의 제물은 흠 없고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완전한 제물이시죠. 그는 제물인 동시에 또한 제사장으로 모든
인간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완전한 제사장과 완전한 제물, 그야말로 완전한 제사를 이루신 것입니다. (히 10:10)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히 10:11)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히 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히 10:13)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히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짐승을 제물로 삼은 구약의 제사 효력은 본질상 일회적입니다. 왜냐하면 제물이 죽으면 그다음 제사 때는 새로운 제물을 갖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제물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깨뜨리고 영원히 부활하셨기에 그분이 드린 제사의 효력 또한 영원합니다. 주께서 오늘도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제사의 효력이 지금도 유효함을 믿어야 합니다. (히 10:17) 또 그들의 죄와 그들의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히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모든 것은 이미 하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 있다면, 인간이 우리의 죄를 완전하고 영원하도록 사하여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 되심으로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예수님의
머리는 가시관으로 인해 찢겨서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왜 그런 잔혹함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머리를 제물로 드림으로, 우리의 머리로 지은 모든 죄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유월’ 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몸이 채찍에 맞아 갈가리 찢어져 피를 흘리심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 짓는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유월’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두 손과 발이 대못이 박히어 피를 흘리심으로 내 손이 마음대로 행하고, 내 발이 가서는 안 될 곳을 향하여
짓던 모든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려 마지막 피와 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심으로, 썩어 문드러질 우리의 몸뚱이로 지은 모든 죄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왜 예수님의 죽음이 이토록 참혹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왜 예수님께서 다른 성현들처럼 고상하고 품위 있게 돌아가실 수 없으셨나요?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사 나의 죄를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하게, 온전히, 본질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대속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던 존경받을 만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통해 아무리 배울 것이 많고 본받을 것이 많다 해도, 우리가 그분들을 구원자로 섬길 의사가 전혀 없는 것은, 그분들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한 방울의 피도 흘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한번 이 질문들에 스스로 질문해봅시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사실과 그로 인해 우리의 죄가 사해졌음을 믿는다면...
오늘도 정말로 그 사실 앞에 믿음으로 서 있으며, 그분을 내 마음에 모시고,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고후 5: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고후 5:7) 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청년부 수련회 때 나눴던 본문이죠. 기억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십니다. 그것을 내가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해야 하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애초에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시작되지를 않아요. 은혜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한 가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서 ‘은혜’를 주셨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데서 믿음 찾지 마세요.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그 사람들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성장해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이 하신 일들을 받아들이는 지경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구원하신 일뿐 아니라, 나를 지키신다는 것, 나와 함께하심 등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해가려면 하나님의 진리를 담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르면... 내가 한 일이 커 보입니다. 나는 그냥 그 엄청난 진리를 받아들인 것뿐이고 붙잡은 것뿐인데...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면 내가 무엇을 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믿음으로 얻는 것이고, 그 결과로 감정이 뒤따르게 됩니다. 감정은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선되지 않습니다. 가끔은 감정으로 구원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그럼 내 감정에 따라 요동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감정으로 구원을 확인하려면 필시 구원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사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입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사실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이제 내게 주어진 삶에서도 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 없는 사람의 삶과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하나 우리는 아는 것이 있기 때문이죠. 말씀을 정리해보겠습니다. ‘에노스’, 본질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은 절대로 우리의 공로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죗값을 치러주신 예수님의 공로요,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거나 교만에 빠질 수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할 것이지요. 그 자랑은 주님의
말씀을 좇아 구원받은 사람으로서의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죄와 벗하여 살겠다고 멀어져간 우리에게 하나님이 다시 한걸음 다가와서 은혜를 베푸시고 손을 잡아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저 우리를 구원하신 것뿐 아니라, 우리의 신분을 바꿔주시고, 죄의 노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어찌 자신을 자랑할 것이 있으며, 이것을 믿는 사람이 자신의
헛된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도구로 이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진정으로 묵상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어찌 주님께 등을 돌리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에 기초한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은혜를 날마다 기억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워진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자요, 죽음을 이기신 부활자요, 참사람이시며, 임마누엘 하나님, 즉 나와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보혈의 피로 씻으시고 새롭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도 그 은혜를 기억하며, 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되기를 다짐하며, 믿음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