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참 많은데요. 그중에 제가 가장 흥미롭게 느꼈던 것은 ‘카타리나’라는 별명입니다. “이 책은 나의 카타리나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향해 이렇게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카타리나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루터의 아내 이름입니다. 즉,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향해 “이 책은 나의 아내이다”라고 표현하며 애정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궁금해집니다. 루터는 왜 이렇게 갈라디아서를 사랑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루터의 시대적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있어서 3개의 시대적 관점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첫째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던 때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하였고 무엇을 가르치고 싶은 것일까? 둘째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던 때의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왜 종교개혁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의 대헌장으로 사용했을까? 셋째는 오늘 지금 이시간 우리에게 전해지는 관점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메시지를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 헬라어 원문에 나오는 이 책의 제목은 ‘프로스 갈라타스’입니다. ‘갈라디아인들에게’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갈라디아인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아야겠죠. 수요바이블 클래스를 듣고 이 설교를 듣는 분들이라면 조금은 쉽게 이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이 시간 처음으로 듣는 분들을 위해 잠시 설명해보겠습니다. 유대인 중의 유대인으로서 구약을 연구하는 학자요, 열심
가득한 유대주의자였던 바울이 회심을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건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뀝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람에서 예수를 전하는 복음전도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수요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이 이방 선교사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게 된 것은 안디옥에서 바나바와 함께 사역하면서부터인데, 그 시기는 그의 회심으로부터 13년이 지난 후입니다. 물론 회심 이후에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지만, 고향에
내려가서 10년 정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되는 훈련의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바울의 장점이 신학을 깊이 있게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인데, 아마도 회심 이후 구약의 말씀들로부터 다시금 신학을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라디아서가 신약성경 중 바울이 가장 먼저 기록한 책인데, 이 책에 그러한 바울 신학의 특징이 잘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세워졌던 초대교회 공동체는 스데반의 박해 이후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왜 로마제국 안에서 기독교가 박해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인정해주는 종교였습니다. 제국들마다 특징이 있는데, 로마도 제국이 워낙 크고 넓었기에 그것을 다스림에 있어서 원칙들을 세웠습니다. 그중 유대교에 대해서만큼은 존중해주는 입장을 취했는데, 왜냐하면 유대인에게 다른 것은 몰라도 그들의 종교를 탄압하면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는 합법적인 종교로서 황제 숭배도 면제되고, 세금도 혜택을 받고, 군 징집도 면제되었어요. 유대교는
로마의 특별관리대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갑자기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라고 하는 ‘기독교’라는 신흥 종교가 생겨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기독교는 유대교의 여호와 신앙을 계승할뿐더러 더 나아가 성취하고 완성한 종교라고 하면서 기독교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허나 유대교 입장에서 보자면, 기독교는 ‘이단’인 것이죠. 그러므로 기독교가 유대교처럼 합법적 종교로서 대우를 받는 것이 싫은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을 자꾸 다른 방식으로 엮어서 괴롭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정치적 지도자이다. 이들은 로마에 반란을 일으키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모함을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만이 복음이다. 로마제국에서 ‘복음’과 ‘주님’이라는 단어는 황제에게 붙여져 있지만, 사실 이 땅의 진정한 복음과 진정한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은 기독교가 ‘로마’의 통치를 거부하는 정치적 운동이라고 모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로마 제국 안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때때로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과 로마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행 12:1) 그 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에서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행 12: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행 12:3)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 기간이라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최초의 순교자가 된 사람은 ‘야고보’입니다. 당시 예수님 제자의 대표는 ‘베드로’인데,
아마도 베드로를 바로 처형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몰라서 ‘야고보’를 먼저 죽인 것 같습니다. 로마의 신하였던 헤롯 아그립바 1세는 자신의 통치 지역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유대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세워갔던 것이죠. 야고보 죽이고 반응이 좋으니, 이제 베드로를 잡아 죽이려 했던 것이 나타납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이러한 기독교 박해가 생기면서 초대교회 공동체가 예루살렘을 벗어나 곳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기독교 박해의 초기에 가장 선두에 서서 일했던 유대인 그룹 가운데 한 사람이 바울이었던 것이죠. 박해는 분명히 우리 모두가 피하고 싶은 사건입니다. 박해받고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물론 간혹 특별한 사람들이 있지요.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리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핍박을 당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며칠 동안 핍박을 당하지 않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회개를 했습니다. 혹시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시게 하고
있어서 이런 것이 아닌지 돌아보며 회개했던 것이죠. 그런데 그때 멀리서 요한 웨슬리를 발견하고 핍박자가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웨슬리는 자신이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사용되고 있음을 감사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게 정상이냐? 물론 우리도 웨슬리의 그런 모습을 보며 도전도 받고 영향도 받아야겠지만... 대부분 우리는 핍박이 오면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느끼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 고민합니다. 그것이 보통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놀라운 역설이 초대교회의 이 복음전파에 담겨 있습니다. 그 박해와 흩어짐이 있기에 비로소 복음이 확장되어 갑니다. 땅끝까지 복음이 전파되는 일의 시작점은 ‘박해’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는 사건과 상황을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이 성숙한 사람은 쉽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닥친 일들을 분명히 바꾸어 사용하실 수 있음을 신뢰하기 때문이죠. 흩어진 사람들이 안디옥이라는 도시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세워지자 그곳에 가서 목회할 목회자가 필요했고, 예루살렘 교회는 가장 믿을만한 사람 중 하나인 ‘바나바’를 그곳에 파송합니다. 바로 이때 바나바가 고향에서 10년 정도 머물고 있던 ‘바울’을 데리고 안디옥으로 가게 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사역하는 중, 안디옥교회 공동체에게 성령의 세밀한 음성이 임합니다. (행 13:2) 그들이 주님께 예배하며 금식하고 있을 때에, 성령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라. 내가 그들에게 맡기려 하는 일이 있다." (행 13:3)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뒤에,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하여 떠나보냈다. (행 13:4) 바나바와 사울은,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실루기아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배를 타고 키프로스로 건너갔다. “성령이 말씀하셨다.” “성령이 가라고 보내시므로.” 대단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그들이 ‘이방선교’를 위한 1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방지역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떠나는데, 첫 번째 목적지는 바나바와 바울의 고향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섬이 고향이었고, 바울은 길리기아 지역이 고향이었습니다. 마침 그곳이 안디옥에서 가까운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1차 전도여행은 먼저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 섬에 복음을 전하고, 그 후, 바울의 고향인 길리기아 근처에 있는 밤빌리아, 비시디아, 루가오니아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 지역의 이름이 조금씩 시대마다 바뀌는데,
통칭해서 신약성경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사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갈라디아라는 표현은 바울의 1차 전도여행의 대상이 되었던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도시마다 다니며 정말로 심한 고난의 상황을 맞이하며 열심히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가 생겨났어요. 그런데 바울은 지역교회를 섬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교회가 어느 정도 세워지면 지역을 옮겨서 다른 곳으로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1차 전도여행 이후, 2차를 출발하면
1차 지역을 한번 순회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가고, 3차 때에는 2차 때 세워진 지역을 순회하고 새로운 지역으로 갑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소식들을 항상 전달받으며, 문제가 있으면 멀리 있으니 ‘편지’를 써서 목회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 ‘바울 서신’으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게 지금 같은 시절이면 ‘카톡’이나 ‘메일’을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정교하게 쓰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너무 사적이라서 자료가 남아있지도 않겠지요. 그러나
편지를 한번 보내는 것도 소중한 기회였기에 편지를 한번 보낼 때, 잘 정리해서 글을 써 보냈고, 또 교회들은 편지를 받으면 자신들이 읽고 주변의 교회 공동체에게 회람형식으로 보내서 함께 교훈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그런 바울의 첫 번째 편지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편지’를 쓰는 것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목회적 이유이죠. 왜냐하면 갈라디아의 교회들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바울이 듣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떠난 뒤 다른 종류의 선교사들이 그들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원래 ‘이단’은 아예 다르지 않아요. 아예 다르면 ‘타종교’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불교를 대하는 자세와 같아요. 그냥 ‘다른 것’입니다. ‘이단’은 무엇입니까? 상당히 비슷한데, 중요한 것이 다른 것입니다. 이 다름은 ‘틀림’이라고 해도 되는 진리에 대한 관점입니다. ‘이단’은 그래서 ‘다를 이, 끝 단’을 써서 끝이 다른 것입니다. 비슷하게 가다가 결정적으로 결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표현으로 ‘사이비’가 있습니다. 사이비 뜻은 ‘같을 사, 접속사 이, 아닐 비’입니다. 같은 듯하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나 그 본질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죠. 여러분, 이단에 왜 빠집니까? 처음부터 ‘우리는 이단이요’라고 드러내놓으면 안 빠지겠죠. 뭔가 비슷한데 신선해 보여요. 심지어 아주 친절해요. 아까 핍박 말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전하다가 핍박을 받아도 화도 안냅니다. 메시아 이야기까지 장황하게 설명해놓고,
결론이 뭡니까? 그래서 “우리 교주님이 메시아이다.” 우리가 봤을 때는 말이 안 되는데, 이미 그들 안에 스며들어 버린 후에는 동화되어있어요. 그다음부터는 문제점을 못 느끼거나 교리적으로 문제점을 좀 느껴도, ‘그것이 뭐가 중요해?’라고 여기며 그냥 살아갑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갈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바로 바울이 ‘다른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울이 떠난 이후 갈라디아 지역에 왔던 선교사들이 전했던 내용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과 이들이 전한 복음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약속된 메시아임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자격은 여전히 ‘유대인들’에게 제한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셨지만, 그들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여전히 모세의 율법에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즉,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이런 내용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런 인종적 차이는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유대인처럼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바울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에게 예수만 전했을 뿐,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거짓된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은 말합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를 메시아로 믿어야 하지만, 다음 단계로 할례도 받아야 하고,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이렇게 가르쳤을 때,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했겠어요? “어?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는 않았는데요. 우리가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요? 모세의 율법을 공부하고 지켜야 한다고요?” 아마도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이런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다른 복음을 가르쳤던 유대주의 선교사들은 이렇게 말했겠죠? “뭐라고요? 바울~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사도라고요? 에이~ 그 사람 사도 아닙니다. 그 사람 원래 기독교인들 잡으러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휙 변했다가 잠적하더니, 여기 와서 이상한 것을 가르치고 갔군요. 바나바는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바울과 같이 다니더니 물들었네, 물들었어! 여러분, 바울이 조금 공부 좀 했다고 자기 멋대로 이상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우리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지금 잘 못 배웠습니다. 바울은 참된 사도도 아니니까, 그 사람 말은 얼른 잊어버리시고, 바울과는 교류하지 마세요.” 정치의 문법 가운데, 메시지를 반박하기보다 ‘메신저’를 공격하라는 말이 있지요. 제가 금요일에도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누구를 믿는다는 것은 그의 말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그 말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게 만들면, 그가 했던 모든 말들도 믿지 못할 것으로 치부되기 쉽습니다. 그들은 사도바울의 과거와 약점을 공격해서
바울이 전한 복음을 ‘거짓 복음’으로 만들어버리고, 자신들이 가진 율법주의 신앙을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갈라디아서를 쓰면서 바울이 반드시 해야 할 설명 혹은 변명이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권’과 ‘그의 복음의 기원’입니다. 여러분이 바울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만약 제가 사귐의교회 공동체를 저기 지방 어느 도시에 전도해서 세웠어요. 이렇게 가정을 하는 이유는 지금 양주에 있는 우리 공동체는 제가 제 삶을 걸고 함께 매일 마주
보며 살아가는 곳이니까 이런 일이 생기면 적극적으로 대처를 하겠죠.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들의 상황을 이해하려면... 지방 어느 도시에 세운 교회라고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그 교회로부터 소식이 들려오기를 “강정규 목사가 가짜래. 사실 목사도 아니래. 신학도 이상하게 공부했다더구만.” 이런 소식이 들려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이런 배신자들. 내가 죽을 고생을 하며 나와 아무 상관없는 땅까지 찾아가서 복음을 전하고 왔더니, 이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해?”
사탄이 아마도 이런 감정의 분노를 막 부추길지도 몰라요.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들을 줄지도 모릅니다. “뭐 내가 안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굳이 구질구질하게 내 과거를 다 설명할 필요 있어? 다른 사람들 말 들으려면 들으라지?” 어쩌면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부추기는 인간의 마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충실하게 해명하고 설명합니다. 왜요? 자신을 믿지 않고, 의심을 보이고, 공격하는 사람들과 한편이 되어버린 그들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그 과정이 귀찮고, 자기를
드러내야 하고, 결과를 장담할 수 없지만... 그것을 하지 않으면 그들이 복음의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교회가 무너지면 또 다른 교회가 영향을 받고, 그러다 보면 많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에요. 저는 목회자로서 바울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내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바울은 설명해야 하고, 해명해야 합니다. 진리를 가르침으로 인해서 내가 좋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하나님 안에서
지키고 싶은 것이죠. 아마도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자라갈 수 있기를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한 사람들이라면, 제가 하는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게 남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사실 평생 남을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는 강정규 목사라는 저의 한 인생이 누군가에게 “내게 신앙을 전해주었던 사람, 내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이 목사로서,
한 신앙인으로서 제가 하나님 앞에 드릴 열매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을 이제 읽어보시면 비로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 말입니다. (갈 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오죽 공격을 받았으면 편지의 시작이 이렇습니다. 내가 사도 된 것은 사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사실 베드로나 요한은 이런 부연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의 편지는 대부분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속상해요.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신 진리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저주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스스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있다면... 내가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고 있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안에서 참 많이 갈등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르지 않으면 참 좋죠. 내가 하는 일이 사람에게도 인정받고 하나님께도 인정받고, 사람에게도 기쁨이 되고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면 말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경우들이
있어요. 우리가 사람의 기준에 맞추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상황.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행하기 위해, 때로는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상황. 바울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갈라디아서 또한 그런 마음 가운데 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중한 백성인 갈라디아 교인들을 잃지 않기 위하여.... (갈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갈 1: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은 자신이 가르친 복음은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서 나온 진리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깨닫게 된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사도’로 인정받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사람을 뽑을 때 이 기준이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함께 한 사람, 제자 공동체와 함께 한 사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 이 사람 가운데서 뽑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목격해야 해요. 부활하신 후 예수님은 40일 동안 제자들을 만나셨죠. 그들 가운데서 사도를 선출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유대교에 심취해 있던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하고, 바울 스스로 그 일에 대해서 고백하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내가 주를 만났노라.” 그렇게 주님의
부르심으로 삶이 변화된 바울은, 성령님과의 충만한 교제와 연합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회심 후 1차 전도여행을 가기까지의 14년은 의미 있는 시간이었던 것이죠. (갈 1:15) 그러나 나를 모태로부터 따로 세우시고 은혜로 불러 주신 [하나님께서], (갈 1:16a) 그 아들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를 나에게 기꺼이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사역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방 사람에게 전하게 하시려는 이유라는 것, 그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찾아오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러한 사명 가운데 이방 선교사로 사역을 하게 되었고,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그 복음을 가르치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 안에 거짓 복음들이 찾아오게 되고 그들이 그 영향 가운데 흔들리게 됩니다. 그 내용은 ‘오직 예수’로 우리에게 구원이 임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 율법’이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그들을 위해 사랑으로 편지를 씁니다. 때로는 하지 않아도 될 자기의 과거를 꺼내어 변론합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그것은 바울이 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누군가 여러분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따스하게 안 물어봅니다. 까칠하게 공격하듯이 관심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런데요. 분명 관심입니다. 감정을 걷어내고 보면 그게 관심입니다. 그들에게 잘 설명해주십시오. 그런 기회들을
사랑으로 사용하십시오. 제가 설교 서두에서 갈라디아서를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한 3개의 관점에 대해서 나눴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과 같이 우리가 오늘 살펴본 것은 ‘그때 그곳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였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그 사건의 배경과 사도권에 대한 공격, 그리고 바울의 반응과 심경에 주목했습니다. 그럼 왜 종교개혁자들은 갈라디아서를 종교개혁의 대헌장으로 사용했을까? 마찬가지로 ‘오직 예수’가 아니라, 다른 것을 복음에 추가하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잘못에 대해서 95개 조항으로 반박을 합니다. 그가 외쳤던 내용의 핵심은, 기독교의 중심은 교회와 성직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 있다는 것이고, 또한 개인의 구원은 교회에 대한 충성도와 어떤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에 있으며, 로마 교회의 사제 제도는 크게 잘못된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제사장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가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솔라 피데 : 오직 믿음, 솔라 그라티아
: 오직 은혜, 솔라 스크립투라 : 오직 성경 그들은 로마 가톨릭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보았던 것이고, 그들이 전하여준 여러 가지 잘못된 가르침과 굴레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갈라디아서는 종교개혁의 시대에 너무나 소중하게 사용된 말씀입니다. 그럼, 이 말씀을 오늘 읽는 우리는 이 말씀의 메시지를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우리의 상황은 전혀 다른 반대의 모습에 직면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쓴
권연경 교수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바울의 질책을 우리 삶에 적용하자면 우선 율법을 열심히 지켜서 의롭게 되겠다는 ‘빗나간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경험하는 대부분의 문제들은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겠다는 갈라디아의 상황과는 정반대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해당 사항 없는’ 편지인 셈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율법주의적 태도’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경험해 본 율법주의자들이란 정말 율법을 잘 지켜서
그것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개 주일성수, 십일조, 새벽기도, 말씀 공부 등의 도드라진 항목들을 놓고 그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삼는 사람들, 하지만 타인들을 향한 따스한 동정심과 사랑보다 엄정한 판단과 냉정한 심판에 더 빨랐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얼핏 ‘행위’를 강조하는 듯하지만, 율법에서 더 중요하게 여기는 정의와 자비와 신실함 같은 ‘행위’들에는 무관심한 사람들. 그런 우리들에게 ‘율법을 지키자’는 갈라디아 교회의 열성은 별세계 이야기다.
오히려 ‘어리석은 갈라디아인들이여!’하는 바울의 꾸짖음이 마치 행복한 비명인 듯 들려 살짝 바울이 부럽기까지 하다. 우리도 한 번 그런 ‘수준 높은’ 문제로 골치 아파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강단에 서서 교인들을 향해 ‘율법주의자라고 절대 비난하지 않을 테니까 제발 제대로 좀 살아보라’ 외치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즉,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갈라디아 교회처럼 예수를 믿으면서 율법도 지키겠다고 나서서 문제가 아니고, 예수만 믿는다는
고백은 항상 머물러 있지만, 많은 경우 그것이 예배당 안에서, 예배 시간 안에서, 우리의 입술에서 멈춰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마음을 가진 자로서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더욱 빠르게 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의로워지기 위한 조건들, 가령 금식, 헌신, 헌금, 고행, 봉사, 구제 등으로 그것을 충족하고자 한다면, 그런 마음들에 우리는 갈라디아서가 주는 말씀의 검을
꺼내어 그 생각을 도려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오히려 추구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주님이 하시는 일이니 나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안 할 거야”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구원받을 사람은 다 구원하실 테니,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물으며, 사도로서, 목회자로서, 복음전도자로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영적 아비로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글을 썼습니다. 저는 그런 최선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 안에 역사하는 그러한 모습들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말씀으로 권면하며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다시 한번 기억합시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 외에 별도로 무엇을 해서 의롭게 되거나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마음에서 완전하게 자유하십시오. 은혜도 구원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장로교인이라서, 감리교인이라서,
성결교인이라서 더 좋은 신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우리를 편 가를 수 없습니다. 나의 외적 어떤 것으로 우리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어디 출신이고, 어디에 살든지, 사회적 배경이 어떠하든지. 그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주의 은혜로 새로워진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우리는 오직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을 얻고, 오직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었으며, 이제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적 조건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을 철저히 고백하며, 오직 주의 은혜를 구해야 해요. 우리는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나를 살리사 구원을 주신 그 예수님의 은혜 앞에 서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그분이 원하시는 삶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까 물으며 나아가십시오. 이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삶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어떻게 하나님의 기쁨이 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좋게 할 수 있을까? 그 초점 가운데 살아가십시오. 그 걸음마다 흔적마다 주님 닮은 여러분의 모습이
새겨질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의 삶을 응원하고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