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예수, 바울 그리고 존귀한 당신 / 강정규 목사

2021-09-12 · 갈라디아서 5-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지난주 설교를 통해서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살펴봤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복음을 들었으나, 그 후에 찾아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교사들에게 휘둘려서 신앙이 다른 길로 빠지게 될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바울에 대한 오해와 의심으로 인해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바울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더 나아가 신앙의 양육이 불가능 할 위기에 놓이게 되었죠. 그러므로 바울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자기의 사도 됨에 대한 설명과

변호를 합니다. 제가 바울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라고 했지요? 사랑하니까. 만약 바울이 거기서 자기 감정대로, 자기를 위한 마음을 지키고자 했다면 아쉬운 소리 안 하고 포기해버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자존심은 세웠겠죠. 그러나 주님이 맡기신 영혼들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즉 갈라디아서는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굉장히 목양적입니다. 내용으로 보자면 치열한 율법에 관한 논쟁이 있는 듯 느껴집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보통 그런 책으로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논쟁까지도 사실은 사랑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담임목회를 경험하면서 느껴지는 새로운 관점입니다. 사실 어떠한 진리를 진리답게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제가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그냥 말씀을 가르치는 것만 해야 한다면... 진리만 가르치면 됩니다. 이 말씀이 이 사람을 살리게 될까, 혹은 낙심하게 할까 이런 고민 없이 가르친다면 편할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는 그렇지 못하거든요. 진리를 진리답게 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외에도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말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말입니다. 저는 요즘에 우리 교회 공동체를 잘 양육하고 건강하게 세워보고 싶어서 매주 수요일마다 한 목사님과 공부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나중에 가르치고자 하는 것을 먼저 배워보는 시간입니다. 벌서 3개월 정도를 고양시로 가거나 ZOOM으로라도 배우고 있습니다. 그중에 최근에 다뤘던 주제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떻게 통치하시는지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에는 중요한 2가지 요소가 있는데,

‘사랑’과 ‘정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조화를 굳이 이루려고 애쓰시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도 ‘사랑’과 ‘정의’를 갖고 있지만, 보통 이것을 조화롭게 갖추기는 쉽지 않습니다. 정의로운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나 대개 정의로운 사람은 조금은 차갑게 느껴지거나, 주변 사람들을 조금 불편하게 합니다. 그로부터 무슨 지적이라도 받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세상에는 이런 사람이 필요하죠. 경찰이 정의가 없이

사랑만 있어 봐요. 큰일 납니다. 사정을 듣고 범인을 안 잡고 다 놔주면 큰 일이 나죠. 정의는 세상을 이루는 중요한 한가지 축입니다. 또 사랑에 좀 더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넉넉하게 품어줍니다. 그러나 때로는 조금은 흐물흐물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원칙과 중심이 없고 늘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도 필요하지만, 이러한 성향만으로는 온전한 세상이 이뤄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정의와 사랑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강하다고 스스로 보십니까? “나는 정의가 좀 더 강하다.”, “나는 사랑이 좀 더 강하다.”, “나는 두 가지가 조화롭게 갖춰져 있다.” 이 조화가 가장 잘 어우러진 것, 최고의 정의와 최고의 사랑이 만난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정의의 심판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죽음으로 치른 곳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향한 최고의 사랑이 새겨진 곳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정의와 사랑이 만난 곳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아도

그 안에는 정의와 사랑이 조화를 이뤘습니다. 제가 담임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바울 서신을 읽을 때, 저에게 바울이라는 인물은 어떻게 그려졌느냐. 정의롭기는 하지만, ‘사랑’은 없어 보이는 조금은 차가운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딱딱하고 경직된 모습이 분명 그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요즘에 바울을 묵상해보면, 바울 안에 있는 사랑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 6월쯤에도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면서 ‘바울의 사랑법’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었어요. 그때

본문에 나온 바울의 이야기가 이것이었어요. (고전 9:20)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면서도,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 있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1)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율법 없이 사는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없이 사는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한 사람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모든 종류의 사람에게 모든 것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 가운데서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 나타난 바울의 고백을 보면 그는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요, 율법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만큼 율법에 충실한 율법에 우선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삶을 살아가는 가치관이 변합니다. 이제는 다른 어떤 것을 해서 의롭다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행하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율법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합니까? 율법에 대해서 입장을 버립니다. 율법? 내가 복음을 전할 사람에게 율법 지키는 모습이 유익이 되면 지키고, 내가 복음을 전할

사람에게 율법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 필요하면 없는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이는 이 모습은 그 중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중적이거나 잣대가 없는 모습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하는 것에는 더 명확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실제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나아갈 때는 정결 예식을 행합니다. 바울 스스로 유대인이니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만나게 될 유대인을 위해 필요하다면 하는 것입니다. (행 21:20)

그들은 이 말을 듣고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바울에게 말하였다. "형제여, 당신이 보는 대로, 유대 사람 가운데는 믿는 사람이 수만 명이나 되는데, 그들은 모두 율법에 열성적인 사람들입니다. (행 21:21) 그런데 그들이 당신을 두고 하는 말을 소문으로 듣기로는, 당신이 이방 사람 가운데서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할례도 주지 말고 유대 사람의 풍속도 지키지 말라고 하면서, 모세를 배척하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행 21:22) 그러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들은 틀림없이 당신이 왔다는 소식을 들을 것입니다. (행 21:26) 그래서 바울은 그 다음날 그 네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정결 예식을 한 뒤에,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 기한이 차는 날짜와 각 사람을 위해서 예물을 바칠 날짜를 신고하였다. 그러나 지금 갈라디아서의 논점은 정반대입니다. 갈라디아 지역은 이방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이 복음 전도의 대상이었다는 것이죠. 그들은 율법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방 사람들은 율법이 없으므로 바울도 그들에게

율법 없는 자처럼 다가갔던 것이죠.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자기들의 주장에 상대방을 맞추려고 합니다. 율법을 들고 와서 율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면서 문제가 터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봤을 때는 그렇게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이방의 사람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러한 잣대를 두지 말아야 한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에서 그의 초점이 크게 달라진 것입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가

그의 삶에 중요했다면, 이제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한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면 지키고, 율법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면 버립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받는 대상을 위해서 자기를 맞춥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갈려요. 바울의 제자 가운데 ‘디도’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이방인이었어요. 그런데 예루살렘 데려갔더니 그곳에 있는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를 했으나,

바울은 끝까지 디도가 억지로 할례를 받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행 16: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 (행 16:3) 바울은 디모데가 자기와 함께 가기를 바랐다. 그래서 바울은 그 지방에 사는 유대 사람들을 생각해서, 디모데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였다. 그것은,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디모데는 할례를 시킵니다. 바울이 직접 말입니다. 디모데의 아버지는 헬라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어요. 유대인들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디모데도 유대인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또한 디모데가 사역함에 있어서도 그런 것이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할례를 시킵니다. 즉, 내가 마주하는 사람, 마주하는 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나아갈 수 있을까? 그것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행동들을 하고자 합니다. 성경 속 많은 인물 가운데 가장 신념이 강했던 것이 바울인데,

그는 상대방의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며 이타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최선의 모습을 다하는 것이 그의 신념이 되었습니다. 그 변화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안에 거하시며 행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의 삶은 자기가 삶의 중심에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를 위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구원으로 나아올 수 있도록 할 것인가? 이것에 모든 초점을 둡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 자신이 추구했던 것들.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서 그렇지 않은 것들은 모두 배설물로 여깁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빌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그래서 갈라디아서가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굉장히 논쟁적이고, 율법을 두고 치열하게 격돌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지만... 사실은 ‘사랑’이 숨겨져 있는다고 저는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분으로 인하여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말입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존재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doing의 종교가 아니라, being의 종교입니다. 무엇을 행하는 것이 초점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고백하는 것이 초점입니다. 존재의 변화는 예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존재가 변했으니 삶의 방식도 변화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단군신화를 예로 들면, 곰이 사람이 먹는 마늘과 쑥을 먹어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그 먹는 행위’가 근거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곰이 그냥 사람이 되었어요. 그럼 당연히 사람의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러면 초점은 ‘사람이 된 것’에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전 삶은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아감을 통해서 율법의 의로 인정받기를 추구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합니다. 그런 그에게 진정한 변화는 어떤 방식으로 일어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삶에 찾아오셨던 다메섹 사건으로 인해 변화가 일어납니다. 비로소 예수 안에서 그가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가 변화된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고 표현합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옷 입기 전의 우리의 모습이 무엇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중요하지 않아요. 왜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면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보십니다. 예수 밖 세상에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예수 안에서는 모두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분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그러하기에 율법을 근거로 유대인처럼 살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의 복음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doing에 집중하죠. 율법을 지켜서 유대인처럼 되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초점 말입니다. 그것에 대하여 바울은 단호하게

‘No!’ 라고 말합니다. 대신 그는 5장부터 이렇게 말합니다. (갈 5:4)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입니다. (갈 5:5)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이미 당신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율법 앞에 자유하십시오. 율법에 구속받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이제부터 완전하게 구속받아야 할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의 변화가 일어난 자들에게 뒤따라오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성령을 힘입은 사람의 삶의 구체적인 열매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굉장히 멋진 표현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이 사랑을

통하여 일하는 것. 그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의 목표이고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정의와 사랑. 금요일에도 배웠지만, 성령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에 가깝습니다. 진리가 아닌 것과 함께 할 수 없지요. 그러나 성령의 충만함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정의’의 결과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을 위해서 ‘정의’로워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의롭게 거짓 교사들과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더 나아가 이방에서 주께 돌아올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갈라디아서의 모든 것들이 ‘사랑’으로 일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했고, 지금도 편지로 그들을 권면합니다. 바울이 율법 없는 자들을 위해 율법 없는 자들과 같이 자신을 맞추었고, 낮추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들에게 권면합니다. (갈 4:12a)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이야기는 너와 내가 같아지자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여러분을 얻기 위해 여러분에게 기꺼이 맞추었듯이, 여러분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다른 누군가를 얻기 위해 내 모습을 기억하며 맞추는 사랑을 보이라는 당부입니다.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울이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요?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이것의 구체적인 모습은 무엇입니까? (고전 4:15)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전 4:16)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여러분.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구원을 위하여 자신을 그 대상자들에게 맞추었습니다. 바울이 그러한 태도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깨달은 놀라운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먼저 그에게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해답이 있습니다.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열심히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낳은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거든 나를 따르십시오.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직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연약한 자들에게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줄게. 너는 나를 따라와. 나처럼 살아보자.” 여러분. 예수님의 삶을

묵상해보십시오. 바울의 삶을 묵상해보십시오. 그들이 무엇을 얻고자 했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을 버렸으며, 어떻게 나아갔는지 보십시오. 우리가 이 시대에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진 수많은 것들을 다 지키면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 사랑이 내 옆 사람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어줄 수 있는 것은 내어줘야 합니다. 바울이 자존심 꺾고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한 것처럼... 바울이 율법에

대한 신념보다 진리가 역사하기를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우리에게 오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저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그 나라를 보여주고 전파하고 초청할 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에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반드시 여러분의 희생과 고난과 포기가 요구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버리고

복음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버릴 수는 없지요. 그것은 타협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버릴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나의 자존심을 버리고 상대방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비로소 내 안에 더욱 중요한 가치가 확고해진 결과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내 안에 단단해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나를 낮출 수 있는 것이 하나님 사랑이고

이웃 사랑입니다. 반면 나의 패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 자존심 지키겠다고 그리스도가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소중하고 좋은 것을 가진 사람은 다른 것이 좀 없어 보여도 괜찮습니다. “누가 너 그거 없잖아.” 해도 괜찮아요. 나는 더 소중한 것을 가졌으니까. 반면 진짜를 가지지 못하면 자꾸 다른 것으로 나를 있어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약함도 보이지 않으려 하고, 그러면 낮아지지도 섬기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진짜를 가졌잖아요.

마음껏 내어주고 낮아지고 섬겨도 됩니다. 그것이 나를 없어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진짜 내 안에 그리스도가 빛나는 길입니다. 그래서 이 치열한 논쟁이 담긴 갈라디아서의 결론이 어떻게 펼쳐집니까?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사랑으로 서러 종 노릇하라. 당연합니다. 결론이 이럴 수밖에 없어요.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으니까. 그런데 그 앞의 내용도

잘 유념해야 해요.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자칫 우리는 그 중심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내가 오히려 끌려가 버리고 중심을 잃고 흔들거리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가끔 술을 마시는 그리스도인과 얘기를 나누면, 술 마시는 친구들 전도하려고 같이 마시는 것이라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한 합리화가 아니라, 정말 복음을 위하여 그렇게 살아간다면 그 삶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습니다. 술 안 마시는

것. 개인적으로 영성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주변에서 한번 잘 보십시오. 술을 마시면서 신앙생활을 할 수야 있겠죠. 그런데 정말 본받고 싶은 신앙인 중에 술 마시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하여, 너희가 삶의 열매를 포기하고, 육체의 욕망대로 살아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율법주의자들보다도 못한 행동일지도 몰라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성령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면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를 따르는 삶의 모습이 무엇입니까?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 나라를 받을 수 없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면 육체가 우리에게 주는

유혹과 탐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르침과 인도를 따라, 성령의 열매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이들의 특징입니다. 세상을 따라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로 했기 때문이죠. 그럼 여러분, 질문하겠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변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데,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드러날 정도로 행하는 사람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실제적인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갈 6:1)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말씀 안에는 우리가 언급한 ‘정의’와 ‘사랑’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죄에 빠진 일에 대해서 방치하지 말고, 동조하지 말고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정의의 측면일 것입니다. 이끌어줘야 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온유한 마음으로’입니다. 사랑 없이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온유함의 한 면모는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피라고 말하고 있죠. 이는 다른 이의 잘못을 다루어야 할 때, 자신 역시 그러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함으로 타인을 향한 동정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한 몸짓이 아니라, 함께 유혹과 시험에서 이길 수 있도록 힘이 되어주라는 의미입니다. 교회는 문턱을 낮추어야 합니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우리만의 잔치가 아니라, 아직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쉽게 드나들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말합니다. 아직 하나님과 친밀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옛 습관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 와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들 있어요. 잘 안내해주십시오. 어색하지 않게. 실제로 제가 우리 교회 첫 번째 수련회를 갔을 때, 흡연자가 2명 있었어요. 식사 후에는 제가 둘이 바람 쐬고 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턱을 낮춘다고 여기서 향락을 즐기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는

더 철저해야 해요. 저는 목사로서 그런 것을 많이 느낍니다. 많은 성도들이 목사님이 자기가 술 마셔도 이해해주길 바라요. 그런데 술 마시는 목회자에게 배우고 싶어 하지는 않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죠? 여러분은 그리스도인다워야 해요. 왜냐하면, 우리는 being(존재의 변화)을 경험했으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품고,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더욱 그리스도를 가까이 따라가고,

아직 그리스도가 멀게 느껴지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를 낮춰서 다가서라는 것입니다. 아직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을 품어주십시오. 져주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죽고, 그 자리에 예수의 흔적은 살아있게 하십시오. 그것이 예수님처럼, 그리고 바울처럼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인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실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고 계신 분들에게, 혹 살기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마지막으로 드릴 소망의 메시지를 읽고 마치겠습니다. (갈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여러분의 그러한 삶을 응원하며 함께 하겠습니다. 저도 부지런히 예수님과 바울 사도를 따라가겠습니다. 우리 함께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