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4과 / 성령님은 누구신가 (2) / 강정규 목사

2021-09-17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지난주부터 우리는 성령님에 대해서 배우며, 삼위일체 교리를 살펴봤습니다. 성부 하나님 – 성자 예수님 – 성령 하나님이 셋이지만 하나로, 하나이지만 셋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이해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와 비밀이지만,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라고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존재적 한계 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성령님에 대하여 예수님은 직접 우리에게 소개해주시기도 했습니다. 그 말씀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분은 보혜사(위로자, 돕는자)입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입니다. 그분은 말씀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 꾸짖어 주시는 분입니다. 끝으로 성령님이 하시는 또 다른 사역은 우리를 진리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저희 딸에게 자전거를 가르쳤던 과정을 예로 들었던 것과 같이... 성령께서는 비틀대는 우리를 잡아주시고 끌어주시다가, 차츰 우리가 그분의 돌봄 아래 자유롭게 나아갈 때,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에게 새로운 비전을 주시고, 우리의 삶에 동행하시는 분임을 나눴습니다. 성령님이 어떤 분인지를 배웠다면, 오늘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변화의 요소가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해 나눠보고 싶습니다. 저는 말씀을 통해 그 사실들을 진리로서 여러분에게 전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이것들을 잘 새겨서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들이 성령님과의 교제 가운데 나타나길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1) 감동 (삼상 16: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성령님이 계시는 곳에는 감동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을 어렵게 생각하면 굉장히 어렵지만, 저는 성령님 안에서 우리 안에 나타나는 모든 일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가 불가능한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예배하겠습니까?

또한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움직이실 것을 알기에, 성령님께서 다른 사람의 마음도 감동시켜 주실 것을 믿으므로 우리는 사람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사람으로 인해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꾸는 성령의 감동은 놀랍습니다. 때로는 전혀 바뀌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한순간에 변화되기도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한국에 복음을 전했던 토마스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타고 온 배가 좌초되고, 그는 복음을 제대로

전하기도 전에 순교를 당합니다. 그는 품고 온 성경을 강변 여기저기에 뿌렸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박춘권에게도 성경 한 권을 주었으나 받지 않자 그대로 모래사장에 던지고, 순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박춘권은 상황이 끝나고 돌아갈 때, 자기 칼을 맞고 죽은 서양 사람이 남긴 책 하나를 주워 집으로 가져갑니다. 그 후 그는 그 성경책을 정독하게 됩니다. 놀랍게도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또한 토마스 선교사가 죽음의 때, 군중 가운데 있던

12세 소년 최치량(崔致良)은 토마스 선교사가 흘린 성경 세 권을 주워서 갖고 있다가 한 권을 박영식(朴永植)이라는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박영식은 그 성경을 한 장씩 뜯어 집에 벽지로 발라 썼다고 하죠. 그러나 후에 그 벽지의 글을 읽으며 변화되고, 후에 박영식의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집니다. 또한 토마스 목사를 죽인 박춘권의 조카 이영태(李榮泰)도 박영식의 집에 들었다 벽에 바른 성경을 읽고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실한 교인이

됩니다. 그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널즈(W. Reynolds, 李訥瑞)의 조사(助事)가 되어 한국인 성서번역 위원의 한 사람으로 성경번역에 큰 공헌을 하게 됩니다. 저는 한국 초기 선교 역사에 관해서 공부할 때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되묻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믿으십시오. 성령께서 작정하신 때가 되면, 우리의 기대와 예측을 뛰어넘어 일하심이 있을 것입니다. 2) 말씀 (마

10:19)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마 10: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행 4: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그를 그저 갈릴리의 무식한 어부로 생각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당연히 이는 성령님께서 베드로와 함께하시며 귀한 말씀을 주신 결과입니다. 제가 벌써 사귐의교회에서 설교자로 5년 정도를 쉬지 않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강의와 달라서 매번 새로운 설교를 작성한다는 것은 적어도 제게는 매우 버거운 일입니다. 저의 지혜로 될 수 없습니다. 요즘에도 그런 괴로움에 부딪혀 허덕일 때도 있습니다. 설교 원고를 쓰다가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모르는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비스럽게도 성령님이 그때마다 돕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쓰다가 중간 새벽 2시 쯤에 괴로워하며 “도와주세요” 기도하며 나아가면, 새벽 4시 쯤에는 환희로 바뀌며 마무리 되는 것도 자주 경험합니다. 또한 그렇게 준비된 설교들이 성도님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볼 때마다 저는 성령님의 놀라운 일 하심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설교자로서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사실 여러분에게도 끊임없이 일하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저런 방법으로 끊임없이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 그것뿐입니다. 3) 위로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성령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성령님의 위로가 함께 합니다. 사람의 위로와 성령님의 위로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해결해 줄 능력이 없거나, 혹은 능력은 있지만 해결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을 때 빈말로 위로를 하게 됩니다. ‘빈말’이라는

표현이 좀 재미있죠. 그런 위로는 아무리 받아도 당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잠시간의 위로일 뿐이죠. 그러나 성령님의 위로는 ‘채움’입니다. 말할 수 없는 큰 아픔과 고통을 당했을 때도, 성령님의 위로함 속에서 굳게 설 수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 파라클레토스, 번역하면 위로자입니다. 그분의 위로를 구하십시오. 거기에서 진정한 채워짐을 얻게 될 것입니다. 4) 사랑 (롬 5: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오, 하나님께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사랑은 작고 유한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근원적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부어주심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받을 때, 이 사랑에 힘입어 비로소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성령을 받은 초대교회 교인들의 행동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들의

소유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필요한 사람을 향해 나누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갑자기 바보가 되어 소유가 모두 쓰레기처럼 가치 없이 여겨진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여러분. 사랑해야 할 자를 사랑하지 못해서 괴로우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겸손하게 구하십시오. 5) 소망 (롬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성령님은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이 넘치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형편이 암울하고 절망적인데 어떻게 소망이 넘치도록 하실 수 있을까요? 바로 성령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시어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내 마음속에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어, 그 말씀으로 내 심령을 가득 채워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끔 설교 때 받은 말씀을 적거나, 프로필에 올려두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소망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씀 한 구절이 절망 가운데서 나를 소망으로 이끌어가는 빛을 비춰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어떤 말씀이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깊이 새겨져서 머물고,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고백할 때마다 소망을 얻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6) 거룩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께서는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그분은 가르치시고 때로는 꾸짖으며 우리를 다듬어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등불이 켜져 있는 사람은 점점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나팔꽃은 줄을 타고 위로 오릅니다. 줄에 매달린 꽃 머리는 줄의 더 높은 곳을 잡기 위해 계속 떨게 됩니다. 이 떨림, 이 흔들림, 이 갈등이 없이는 나팔꽃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이 흔들림이 멈추는 순간, 나팔꽃의 꽃 머리는 자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의 조명 아래, 거룩함으로 나아가기 위한 몸부림, 그 흔들림, 거룩한 갈등이 없거나 멈춰버린다면, 거룩하고 구별된 삶의 꽃은 피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사귐의교회를 목회하면서 제일 고민이 컸던 것이 이런 말을 들을 때였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듣고 나면 너무 고민이 생겨요. 부담돼요.”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전전긍긍했습니다.

나는 우리 성도님들을 사랑하고 행복으로 함께 나아가고 싶은데... 괴롭게 하는 것만 같아서 말입니다. 그런데 제가 계속 함께하며 느끼는 것은 그런 괴로움과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한걸음 더 나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설교를 들어도 어떤 고민도 있지 않은 사람은 고민이 없어서 좋은 것이 아니라, 거룩함을 향한 갈등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거룩함의 갈등을 일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전해야 하고, 여러분은 그 갈등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님에 의해 끊임없이 도전을 받도록 마음의 노크를 당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거룩함으로 초대받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7) 자유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성령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유를 얻습니다. 그 자유란 무엇입니까? 비록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고 해도, 그것이 나를 위한 성령님의 역사임을 알기에 자유한 것입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글을 인용해보겠습니다. 결혼한 다음 날부터 밤낮 울고 살던 신부가 참다못해 친정어머니를 찾아가 눈물로 하소연하였다. 친정어머니 역시 눈물로 딸의 사연을 다 들은 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도 네가 참고 살아야지 어떡하겠니?” 만약 그 신부가 그리스도인이어서 나를 찾아와 상담한다면, 나도 그녀의 친정어머니와 똑같이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녀의 친정어머니가 “네가 참아라” 하는 것은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에 내뱉는 절망의 탄식이지만, 목사인 내가 “참아라”하고 권하는 것은 당면한 상황 속에 성령의 역사가 있음을 믿음으로 자유를 얻으라는 의미이다. 지금 남편이 내 속을 썩이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남편을 통해 나의 모난 성격을 갈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 아내가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아내를 도구 삼아 나를 성숙하게 하고 계시는 것이다. 지금 내 자식이 말썽을 피운다면, 그것은 성령님께서 내 자식을 통해 나의 실상을 보게 하시므로 나를

회개케 하심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령님께서 작정하신 때가 될 때, 성령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아름다운 선으로 마무리 지어 주실 것이다. 이렇게 믿을 때 우리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됨이 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다. 8) 능력 (롬 15: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성령님께서는 오늘도 능력으로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능력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성령의 능력을 보여줍니다. 또 우리 각자의 간증 속에 그런 성령의 능력이 고백 되곤 합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좇는 삶을 살아갈 때, 성령님께서는 바로 그 능력으로 우리를 세우고 붙드십니다. 하지만 인간이 성령님의 능력 자체만을 목적으로 삼는다면, 성령님께서는 단연코 그 사람을 거부하십니다. 성령님의 능력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께서 당신을 좇는 자에게 당신의 필요에 따라 베푸시는

능력입니다. 실제로 한 선교사님이 오지에서 선교하는데,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신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병이 낫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선교사님이 그것이 자신의 능력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안식년에 한국에 돌아와 그것을 써먹고자 기도를 했지만, 어디에서도 신유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병원에도 갈 수 없고, 열악한 선교지의 필요에 따라 그곳에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능력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내 개인의 유익과 자랑을 위해서는 허락하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9) 열매 (갈 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는 성령님의 열매가 맺힙니다. 저희 교회의 분들과는 이제 이런 신학이 공유되어 있습니다만, 간혹 성령의 은사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은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열매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인격의 변화 없이도 받을 수 없습니다. 인격의 변화 없이 방언도 행하고, 병을 고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받은 성령님의 은사를 과신하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일삼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 것도 이런 연유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열매는 인격의 변화 없이는 절대로 맺어지지 않습니다.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등 성령님의 모든 열매는 인격의 터 위에서만 거두어지는 열매입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청년 시절 이름 날렸던 은사

많던 집회의 강사들은 지금 다 어디에 가버렸습니까? 화려해 보이던 그들의 은사들은 잠깐이고 성령의 열매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저는 느낍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격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 아십니까? ‘사귐’을 통해서입니다. 깊은 사귐을 갖다 보면 닮아갑니다. 우리가 인격자이신 성령님과 깊이 사귀어 갈 때 우리의 인격은 성령님의 인격을 닮아갈 것이고 날로 변화해 가는 우리의 인격을 통해 성령님의 열매는 맺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의 인격 속에서

생각하고, 그 인격으로 말하고, 그 인격을 힘입어 행동하는 훈련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오늘 설교의 마지막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에게 이토록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성령님. 여러분은 그 성령님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에 누군가는 확신에 찬 대답을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머뭇거릴 수도 있고, 혹 누군가는 아닌 것 같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대답과 상관없이 여러분에게는 이미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러분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금요일 이 밤에 이 설교를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임하셨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배한다는 것이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임하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예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을 따르는 무당들은 돈을 갖다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해도 못 합니다.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할 것입니다. 나는 회개한 적도 없고, 안수받은 적도 없으며, 성령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게 성령님이 임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이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오직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심으로 인하여 여러분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청년 사울은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박해자였지만, 단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므로 성령님을 그에게 보내 주셨고, 그에게 임하신 성령님의 도우심 속에서 그는 위대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성령님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느냐는 명제는 더는 여러분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분과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집중해야 할 일은, 이미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날마다 의식하면서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령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기도의 삶, 순종의 삶, 말씀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것은 성령님을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임하신 성령님과의 충만한 사귐을 누리기 위함인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성령충만한 삶을 살고자 결단하여, 여러분의 삶에 분명한 획을 긋는다면... 바로 그 순간이 여러분이 성령세례를 받은 날입니다. 그 결단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세례는 일회적 표현입니다. 결혼 예식과 같이 나는 이제 나의 상대에게

충실한 삶을 살겠다는 선언입니다. 성령세례 이후로 성령충만은 매일 이뤄져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지내며 서로의 의무를 다함으로써 사랑이 지속되고, 깊어지듯이, 여러분에게 자신의 의무를 다하시는 성령님의 빛 속에서 우리도 반응할 때, 우리의 성령충만한 삶은 날마다 심화될 것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성령충만한 삶을 살 것인지 아닌지는 전적으로 각자의 선택이고 자유입니다. 그 선택이 자유인만큼, 그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 또한 온전히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로서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흔히 너무 사랑하는 사람을 늦게 만나면 그것에 대한 깊은 아쉬움과 후회가 남듯이... 저는 여러분이 성령님과의 진정한 동행에 대해 빨리 깨닫고, 삶의 변화가 시작되는 일이 조금이라도 더 그분 안에서 많은 꿈을 꾸고 살아갈 수 있고, 건강한 지금 일어나길 바랍니다. 적어도 제 눈에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살아생전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 채 살다가, 죽기 직전에 죽음 이후의 구원만을 구하려 하는 어리석은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죽음 이후의 세계 또한 소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현재의 삶을 소중하게 여기십시오. 사귐은 깊어지는 시간이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성령님과의 진정한 교제가 깊어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참된 신앙생활을 경험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그 깊어짐이 시작되고, 또한 발전되는 그런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