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하나님의 편으로 살아가는 법 / 강정규 목사

2021-09-19 · 출애굽기 15-16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출애굽기를 오랜만에 다시 설교합니다. 출애굽기의 시작은 이렇습니다. 야곱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요셉이 총리로 있던 애굽으로 옵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를 펴면 70명의 가족에 대한 목록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리고 말씀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출 1:5) 야곱의 허리에서 나온 사람이 모두 칠십이요 요셉은 애굽에 있었더라 (출 1:6)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출 1:7)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쉽게 말해서, 시대가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습니다. 40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제 야곱도, 요셉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후손이 애굽의 고센 땅에 살면서 이제는 번성하여 매우 많은 숫자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애굽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뀐 시대만큼 바뀐 상황이 있었습니다. 8절을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의 정권은 바뀌게 되고, 새로운 왕조에게 애굽의 고센 땅에서 엄청난 숫자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야곱의 후손들은 골칫거리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은 야곱의 후손들, 즉 히브리인이라고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탄압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태어난 남자 아기들을 죽이는 야만적인 민족 말살 정책이 펼쳐집니다. 애굽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생’이 아니라, ‘군림’하기 위해서입니다. 여인은 살려두어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삼아 이득은

얻겠지만, 남자 아기들은 죽임으로써 혹시 모를 후한을 뿌리째 없애고 싶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사건 가운데 ‘모세’가 태어납니다. 그는 이 잔인한 죽음의 위기 가운데 가까스로 살아남게 됩니다. 애굽에서의 박해 속에 오랜 세월 압제를 당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신음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스러운 탄식이 애굽 땅에 울려 퍼집니다. 그러나 애굽의 왕은 그들의 소리에 응답할 마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계신 분이 있었습니다. (출 2:23)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 (출 2:24)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의 언약을 기억하사 (출 2: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까지 이 집안이 믿어왔던 여호와는 애굽으로

이주해서 살아가는 그들의 후손들의 탄식 가운데에도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 때부터 이들에게 주셨던 언약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주며,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을 전하는 통로로 삼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할 것이다”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철저한 보호와 돌봄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에도 그러했고, 세월이 지났지만, 애굽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기억하시고 돌보셨다고 2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탄압하는 애굽, 그곳에서도 가장 위에 군림하는 애굽의 왕 바로를 심판하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사용하시고자 훈련합니다. 때가 되자 그를 통해 애굽의 바로와 대결하도록 보내십니다.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은 모세이나, 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당연히 바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바로는 당시 가장 강대국인 애굽에서도 가장

높은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은 그와는 차원과 존재가 다른 창조주이며 온 땅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할 필요가 있지요. (고전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강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신 하나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군대에서 어느 날 야외에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제가 잘 모르는 가요가 계속 흘러나왔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가사 하나가

계속 반복되는 노래여서 그 가사만큼은 듣다 보니 귀에 계속 박히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나중에 찾아보니 MC 스나이퍼의 ‘Gloomy Sunday’라는 곡이었습니다. 다른 가사는 잘 모르는데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이라는 가사가 지겹도록 반복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그 곡을 듣던 제가 이런 질문을 해보게 되었어요? 저 노래의 가사처럼 ‘하늘이 언제나 나의 편’, 신앙인인 저로서는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하니까,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편이 될 수는 없을까?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잠시 고민을 해본 후 저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내가 언제나 하나님의 편에 서면,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겠구나.” 결국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도, “네가 나를 믿고 나의 편으로 살아가면, 나도 너의 편이 되어줄게”라는 것이고, 그것이 결국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내 존재가 강해지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방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그것을 보여주죠. 에덴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아담과 하와는 부족함이 없기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지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까지도 욕심을 내게 됩니다. 저것만 먹으면 내가 가장 강한 존재인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다는 욕심이 든 것이죠. 출애굽기에서도 가장 힘이 세고 능력이 많아 보였던 40세의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서 세상에서는 강했으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쓸데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신을 쓸데없는 사람처럼 여기던

미디안의 목자가 된 80세의 노인 모세를 하나님은 부르시고 그를 하나님의 가장 강력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가 가장 강력한 도구이자 하나님의 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스스로 연약하다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내어드릴 공간과 틈이 있었다는 것이죠. (고전 1: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결국 하나님은 당시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강하다고 여기던 애굽의 바로를 누르시고, 자기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 시키십니다.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가는 것을 허락하게 된 사건은 열 번째 재앙을 경험한 후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가십니다. (출 13: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출 13: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이끄심과 돌보심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들이 열심히 구름 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가다 보니까 뭘 만납니까? ‘홍해’를 만납니다. 이럴 수가! 하나님 열심히 따라가서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이 되는 삶을 살아가면 정말 좋을 줄 알았는데, 홍해라는 곤란한 상황 앞에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그리로 데려가신 것이죠. 설상가상으로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낸 것을 후회하는

바로가 군대를 이끌고 이들을 다시 잡으러 쫓아옵니다. 여러분,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상황 가운데 피할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피할 길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피할 길입니다. 그분이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홍해 사건에서는 길을 어디에 내십니까? 바다에 길을 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기적’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기적 가운데서 하나님을

누구나 찾을 수 있습니다. 기적이라 부름은 우리의 상식과 자연의 법칙을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이 광야를 통해서 이들에게 훈련시키고 싶은 것은... 기적 속에서만 하나님을 발견하는 초보적 신앙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그러한 수준까지 훈련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광야생활이 가진 그 의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출애굽과 함께 하나님의 훈련 시간, 다른 말로 ‘광야 학교’에

그들은 들어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경험은 홍해입니다. 홍해의 기적에서 우리는 2가지를 기억해야 해요.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2가지가 무엇인지 기억해보셔야 해요.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이고, 다른 하나는 동풍입니다. 바람이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을 사용하셨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 세계를 사용하셨어요. 하나님이 자연 질서도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저는 홍해에 대해 설교를 할 때면, 이 질문을 꼭 던져보길 권면합니다. “왜, 하나님은 홍해로

이들을 인도하셨을까?” 하나님이 이끌어 오신 것이잖아요. 우리의 삶에 찾아오는 고난에 대해서 우리는 같은 질문을 하게 되죠?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 고난을 마주하게 하시는가? 이 질문을 던지고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역으로 질문을 다시 던지면 됩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홍해가 없었더라면...?” 그들에게 홍해는 마주하기 싫은 고난이었으나, 이들은 홍해를 건너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고, 모세를 통해 일하셨기에

백성 가운데 모세의 리더십은 세워지고, 이곳에서 애굽의 군대가 몰살되었기에, 더이상 그들에게 쫓기는 위험이 끝이 납니다. 홍해를 경험한 이스라엘과 홍해를 경험하지 않은 이스라엘을 비교하면, 홍해는 겪고 싶지 않은 것일지 모르지만, 그 경험을 통해 이들은 더욱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 학교는 그렇게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홍해 사건 이후에도 광야에서 계속 ‘기적’이 쏟아집니다. 원래 광야란 곳은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어서 광야입니다. (출 15: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홍해로부터 다시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데, 광야에서 경험하는 실제적 어려움인 ‘식수’에 대한 고민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 15:1-21까지가 홍해에서 이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거든요. 방금까지 찬양하며 예배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뭐 현실에서 어려움에 부딪히니까

별수 있습니까? 이들에게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들과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자 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예배 이후의 삶의 자리에서 고난과 부족을 마주할 때, 원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물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물을 발견합니다. ‘마라’라는 곳이죠. 그런데 물이 써서 먹지 못할 그런 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원망하고 모세는 뭘 했는지 아세요?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 수준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남들이 원망할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길을 만드시는 것이죠. 또 기적을 행하십니다. 쓴 물이 달게 되어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하나님 보기에 의로운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지켜나가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지키고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사는 법입니다. 하늘이 언제나 나의 편이 되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샘이 열두 곳이나 있어서

이들에게 평안한 휴식을 줍니다. 광야에는 ‘마라’도 있고 ‘엘림’도 있어요.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엘림에서만 머물 수는 없지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엘림에서 떠나 이제 ‘신 광야’로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날짜가 1월 15일이고, 신 광야에 도착한 날이 2월 15일이니까 출애굽 후에 한 달이 지났습니다. 아마 이때까지는 가지고 나온 식량 등을 먹으며 지냈을 것입니다. (출 16: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온 회중이 이번에는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출애굽기를 연속적으로 읽다 보면 의아함이 듭니다. (출 12:38)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12장에서 출애굽 당시에 이들이 엄청나게 많은 가축을 데리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벌써 그 가축들을 다 잡아먹었겠는가? 아닙니다. 이들은 유목민입니다. 그들에게 가축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삶의 도구이며 방식이기도 합니다. 함부로

잡아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합니다. 그들은 광야 생활이 길지 않을 것이라 여겼어요. 실제로 애굽 땅에서 가나안까지는 직선거리로 그렇게 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마도 그들은 머지않아 가나안 땅에 입성할 것을 기대하며, 귀중한 재산인 가축을 광야에서 식량으로 축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것은 지키고 싶으면서, 애꿎게도 원망과 불평은 어디로 향합니까? 지도자 모세에게 향합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되면서

가장 많이 각오해야 할 것은 마음을 넓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창하게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품어보시면 꼭 각오하셔야 할 것입니다. 다른 관점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내 옆의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통해서 내 마음을 다듬고 넓히고 개경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러한 경험이 여러분에게 꼭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모세와 함께했던 이 사람들이 보통이 아닙니다. 순 뻥쟁이들입니다. (출 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한 달 전만 해도 지옥과 같아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외쳤던 애굽이 어느새 그들의 기억에 에덴동산이 되어 있습니다. 사악한 거짓말입니다.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매일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구원을 간절히 호소하던 그들이 어떻게 고기를 배불리 먹었겠습니까? 그냥 ‘엘림’이라는 쉼터에 있다가 광야로

다시 나오니 감정대로 막 쏟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 광야 학교로 데려오신 것이죠.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치 군대에 입대하면 훈련소를 거친 후 자대에 배치를 받는 것처럼, 광야의 시간은 약속의 땅에서의 삶을 준비하는 그런 시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다시 ‘기적’과 같은 양식의 공급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출 16: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만나의 법칙은 간단합니다. 매일 아침 나와서 거둬야 합니다. 이때에는 다음날 나오기 귀찮다고 이틀분을 가져가면 다 썩어버립니다. 그러나 안식일 전날에는 이틀분을 가져가도 썩지 않습니다.

대신 안식일에는 만나 거두러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이런 규칙적이지 않은 만나의 특성은 이것이 자연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이라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또한, 이것은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대로 사는 법을 훈련하며, 안식일을 지키는 삶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만나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안식일을 준수하는 삶의 방식을 익혀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6:4 마지막에 보면 이것을 ‘시험’이라고 부릅니다. 원래 안식일을 지키는 것, 지금 우리에게 주일성수는

본질적으로 시험입니다. 세훈 집사님이 자주 예를 드는 것이, 어린 시절 주일 아침 8시부터 방영된 ‘만화 동산’ 이야기입니다. 저도 애청자였습니다. 그런데 끝부분에 재미있는 것을 하거든요. 허나 9시까지 교회에 가려면 뒷부분은 못 보고 집을 나서야 합니다. 어린 시절 큰 시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인이 되면 그 시험의 대상이 바뀝니다. 누군가에게는 다른 약속, 혹은 돈 벌 기회, 혹은 달콤한 휴식과의 싸움이 됩니다.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법칙입니다.

선악과보다도 먼저 생긴 법칙입니다. 그런데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삶을 하나님의 그 법칙에 맞추어 가느냐, 아니냐의 가장 기초적인 훈련이자 시험이에요. 역시나 모세의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출 16: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출 16: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출 16: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하나님 백성의 삶의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훈련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때는 약간 강제적인 훈련이에요.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반강제적인 훈련도 필요해요. 아이들을 키워보십시오. 우선은 가르쳐야 합니다. 무엇이 올바른 삶인지 말입니다. 저는 부모님에게 굉장히 감사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잘 훈련받았다고 느끼는 것인데요. 하나는

위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주일성수입니다. 저는 주일을 안 지키면 정말 큰일이 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어요. 다른 것에는 그렇게 엄하지 않으셨어요. 공부하라는 스트레스도 그리 주시지 않았어요. 그런데 주일만큼은 저희 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초등학교 때 컴퓨터 시험을 보러 갈 일이 있었는데, 주일인 것입니다. 몇 번을 그냥 안 봤어요. 그러다가 한 번은 꼭 가야 할 일이 있었는데, 주일 새벽예배에 참여하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처음으로 교회에 가지 못했던

것이 군대 가서였지요. 자대배치 2주 차. 정말 가고 싶은데 보내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위에서 종교행사를 0명으로 그냥 신고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 저는 내무반 구석에서 성경을 꺼내놓고 혼자 예배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예배하지 않은 첫 예배였어요. 그런데 그 시간도 사실은 훈련이죠. 주어진 환경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는 훈련. 이미 제 삶이 주일은 늘 예배하는 삶으로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주일성수는 일주일의 삶 가운데 하루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며,

내 삶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모님께 받은 두 번째 훈련은 물질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올바른 헌금생활을 통해서 내게 주신 물질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공급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용돈을 계산해서 주셨어요. 첫 용돈은 하루에 200원씩 한 달에 6,000원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은 훈련이었는데, 우선 재정 사용에 대한 훈련에서 좋았어요. 용돈을 하루에 다 써도 그것은 저의 자유였습니다. 대신 나머지

29일 동안 안 쓰고 참을 수 있는 책임을 스스로 감당해야 했어요. 실제로 저는 용돈을 받고 나면 더 달라거나 그런 요구를 거의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어진 돈을 갖고 주어진 시간을 살아가는 것에 지금도 굉장히 익숙한 편입니다. 용돈을 받으면 거기서 헌금을 반드시 직접 해야 했어요. 십일조도 해야 했습니다. 제가 돈에 대한 경제 관념이 생긴 이후로 늘 저에게 강조하셨던 훈련이었습니다. 그 뒤로 제가 경험하는 것이 있습니다. 6,000원에서 600원을

십일조 할 수 있는 사람은 10,000원에서 1,000원을 뗄 수 있게 되고, 더 나아가 10만 원에서 1만 원을, 100만 원에서 10만 원을, 월급에서 십일조를 하기가 늘 쉽습니다. 저는 이것을 여러분이 세금 내듯이, 율법적으로 십일조를 하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 안에 살아가는 훈련이고, 저는 저의 평생을 그 훈련에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약 40년의 삶 동안 경험되었던 하나님의 돌보심이 너무나 강력했기 때문에,

저는 억지와 강요가 아니라 정말로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이 삶을 소개하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나와 안식일 준수를 함께 가르치면서 ‘시험’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 성경의 시험은 2가지 뜻이 있습니다. 사탄이 주는 시험은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시험은 ‘테스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언제나 나에게 ‘손해’처럼 보이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손해 보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가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그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심화반에 발탁이 되어 반강제적으로 주일에도 학교에 공부하러 가야 했어요. 좋은 조건 가운데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에서 배려한 것이지만, 저는 교회에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에 주일에는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금요일에도 야간자율학습을 하다가 허락을 받고 금요기도회 참석하러 나왔어요. 고3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도 간혹 고3이 되면 주일에

예배하는 것도 갈등하는 학생들이 있지요. 특히 완전하게 훈련되지 않았을 때 그렇습니다. 또한 시험 기간에 남들 다 공부하고 있을 때, 교회 가면 내가 손해인 것 같습니다. 네. 손해일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분명히 손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변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린 그 손해는 반드시 내 삶에서 손해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즉, 그 손해는 기꺼이 당해야 하는 손해입니다. 대신 그 손해를 선택함을 통해 내가 하나님의 편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도 중고등부를 교역자를 여러 번 해봤지만, 정말 충격적인 것은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부모님들의 태도입니다. 고3이 되면, 소위 믿음이 좋다고 하는 부모들이 애들이 교회 오는 것을 막기도 합니다. “너 이러다가 대학 떨어지면 그게 하나님 망신이야.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야 하나님께 영광이야.” 제가 거의 확신합니다. 그렇게 해서 좋은 대학을 갈 수도 있지요. 그런데 그러면 그 자녀는 부모에게서 뭘 배우는 것인지 아십니까? “아, 내 인생의 중요한

일들을 위해서는 잠시 하나님은 뒤로 미뤄놓아야 하는 것이구나.” 그 친구는 이후에도 반드시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편에서 세상의 편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녀를 망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교육할 때도 청지기적 사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각 가정에 아이들을 신앙으로 교육할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요즘 교회를 보면, 다음 세대가 교회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저는 우리가 무엇을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는 시간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이요셉 목사님이 쓰신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삶으로 가르치는 것만 남는다.” 다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초청한 광야 학교를 기억해봅시다.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의 기적, 물을 공급하시는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는 기적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라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광야의 이 훈련을 통해 하나님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의

삶의 방식을 훈련시키신 것이지요. 거기서는 더이상 광야와 같은 기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것은 동일합니다. 광야 학교를 통해서 그들은 기적 중에서만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부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신앙이 되기를 하나님은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대표적으로 오늘 살펴본 만나의 기적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양식이 공급되자 바로 중단됩니다. (수 5:12)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 광야에서 매일 같이 하나님이 주셨던 만나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이 들어가고, 이제 농사를 지어서 첫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 그칩니다. 이제 하나님이 이들을 떠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농사를 지어 땅의 소출을 얻으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공급하고 계심을 느껴야 합니다. 이것은 동일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농사를 지었다면 우리는 소출을 얻었을

것이고, 그 후에 산업화를 맞이하며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그를 통해 삶에 필요한 물질을 얻습니다. 그러나 저는 믿습니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이나, 가나안에서 농사로 소출을 주신 하나님이나, 지금 우리의 삶의 다양한 방식 속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지금도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공급하시고 돌보신다는 그 사실만은 변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무엇도 변함이 없습니까?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의

뜻을 지키며,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가르치신 그 삶의 원리 또한 동일한 것입니다. 간혹 십일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묻고 답하기도 합니다. 구약시대부터 시작되었죠. 그런데 여러분. 사실 신약시대에는 십일조가 강조되지 않습니다. 신약시대의 신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십일조가 아니라 십의 십조입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신약의 헌금 개념은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필요와 요청에 따라서

그렇게 행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은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물질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우리의 신앙의 고백으로 십일조를 드릴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여기에 내 전부에 대한 고백을 갖고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세금이 아닌 것입니다. 세금은 납세만 잘하면 나머지는 나의 몫입니다. 그러나 헌금의 정신은 다릅니다. 1/10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는 믿음의 고백을 하며, 9/10는 내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사용하겠다는 우리의 고백이죠. 오늘의

설교를 마무리하며 한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개척목사로서, 담임목사로서 교회의 운영의 책임이 있지만, 저희가 아주 작은 공동체일 때부터 ‘재정부’를 별도로 세우고 저는 한걸음 떨어져 있고자 힘썼습니다. 그래서 저는 세세하게 헌금내역을 알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그것으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은 제 목회가 끝날 때까지 제가 결코 없기를 바라는 모습입니다. 아직 헌금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분들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그것은 성경의 가르침을

듣고 각자가 결단해야 할 문제입니다. 강요로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일부러 헌금바구니를 돌리지도 않습니다. 헌금 명단을 주보에 공개하거나, 강단에서 호명하지도 않습니다. 헌금을 어떤 마음에서도 강요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누군가 헌금을 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께 헌금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쁩니다. 그로 말미암아 제게 어떤 유익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물질의 영역에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는 일은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것이 매우 실제적으로 내 삶의 주권을 고백하는 신앙의 태도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물질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고 싶고...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설 때, 하나님이 언제나 나의 편입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질서와 원리가 우리가 가장 행복하게 하나님의 뜻 안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을 고백하며, 그 고백에 내 삶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나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대대로 간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를 넣어서 대대로 보관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원리가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 간직되어, 여러분과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과 맡겨진 다음 세대에까지... 고백되고 순종으로 열매 맺는 그 아름다운 일을 소망합니다.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