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깊은예배

옥정 사귐의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 새신자반 5과 / 성경이란 (1) / 강정규 목사

2021-09-24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우리는 지난주까지 9주에 걸쳐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그리고 나(인간)에 대해서 성경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배웠습니다. 오늘부터 다섯 번째로 살펴볼 주제는 ‘성경’입니다. 먼저 말씀을 읽어봅시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를 담은 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우리는 가슴 아픈 지적의 말을 듣기도 합니다.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의 언행을 보면 하나님을 믿기 힘든데, 성경으로 돌아가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궁금증이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합니다. 그럼 왜 그럴까요? 성경이 무엇이기에 성경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에게 성경은 한낱 서가에 꽂혀 있는 장식품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요즘에는 그냥 어플 중 하나로 여겨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을 믿는 것과 같으며, 그런 의미에서 믿음은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쓰셨는가? 또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또한 단번에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약 1500년에 걸쳐 40여 명의 저자에 의해서 기록되었습니다. 분명히 사람이 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 의해 기록된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은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믿고 있을까요? 첫째,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벧후 1: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성경을 기록하는 일에 사람들이 사용되긴 하였으나, 그 사람들은 모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증거라면 무엇이 있을까요? 만약에 성경 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받았다고 증언하여도

여러분이 그것을 안 믿으면 그것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설교를 하는 이 순간, 제가 이곳에 서서 설교하지만, 이 시간 성령께서 저를 통해 우리 안에 말씀하신다고 믿는데, 그것을 과학적이나 객관적 증거로 여러분에게 납득시킬 정도의 증명을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경험하며 우리는 고백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성령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우리는 깨닫고 고백합니다. 성경도 그렇습니다. 성령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성경을 읽을 때마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경험합니다. 그것을 통해 성경이 성령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쓰신 이 책은 다른 책들과 좀 다릅니다. 아무리 뛰어난 책이라도 내용을 알게 되면 이야기가 지루해집니다. 그래서 같은 작품을 열 번, 스무 번 읽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삼국지를 정말 좋아합니다. 삼국지에 관한 이야기를 수십 번은 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종류의 삼국지 시리즈를 읽은 것이지, 같은 장편 소설을 수십 번씩 읽을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가진 삼국지 시리즈 중에 가장 긴 것이 10권 자리인데, 고작 2~3번을 정독해서 읽었을 뿐입니다. 그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매일 읽어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몇 번을 거듭 읽어도 늘 새롭습니다. 평생에 걸쳐 수십 번을 읽어도 감동이 엷어지기는커녕, 더더욱 깊어지기만 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쓰였고, 읽는 사람에게도 성령님께서 계속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둘째, ‘완전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성경 66권은 1500년에 걸쳐 여러 지역에서 전혀 연관이 없기도 한 40명의 손에 의해 기록되었습니다. 우선 대부분이 동시대 인물이 아니고, 서로 정보를 교환한 일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통일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 성령님의 감동이 주어졌을뿐더러, 성경이 지금의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일을 성령님께서 주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엡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엡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만약 성경이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서 기록하고자 했던 인간들에 의해서 기록한 것이라면, 각각 다른 시기와 장소에서 각각 다른 사람에 의해 쓰인 성경은 통일성은커녕 모순투성이였을 것이고, 그것은 읽는 독자들은 대번 그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아마도 그런

성경이라면 이미 폐기처분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 성경을 보급하겠다고 목숨을 거는 일은 결단코 없었겠지요. 셋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두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일차적 독자는 성경을 기록할 당시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능력이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지요. 만약 성경말씀이 기록된 시대에 갇혀있다면, 그 시대를 뛰어넘어 역사하지 못한다면... 이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시대를 초월한 유일신이 아닙니다. 겨우 그 당시의 사람만을

위한 일신(하나의 신)에 불과하죠. (막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경 말씀은 기록될 당시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기록된 지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세계의 도처에서 수많은 인종과 민족과 사람들이

이 말씀에 의해 새로운 영적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 부인하였던 베드로를 부활한 후 주님께서 찾아가신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며 물을 때, 우리 또한 베드로와 같이 그 이야기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느낍니다. 만약 성경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나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2천 년 전 지구 반대편 갈릴리 어부였던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와닿을 까닭이 없을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유명한 종교개혁자 ‘칼뱅’이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한 교인이 일어나 질문을 했습니다. 약간 빈정거리는 말투로요.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만들었다고요? 그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는 무엇을 하셨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에 대한 칼뱅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당신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을 위해 지옥을 만들고 계셨소!”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시시콜콜한 질문들에 답을 줘야하는 그러한 책이 아닙니다. 물론 저는 질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질문하는 성도님들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질문을 위한 질문이나 말꼬리잡기 트집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한 질문이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의 분명한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책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에서 엉뚱한 것을 구하려다 일생을 낭비해 버립니다. (요 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성경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못 박고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랜 기간 많은 사람을 동원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모으시고, 우리에게 전해주신 것입니다.

그 안에 담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카메라는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어떻게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이 관점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답을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성경을 읽으며 맞추어야 할 초점입니다. 성경에서 구원, 영생 등의 표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이러한 외침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막 1: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공생애의 초점도 여기에 맞춰져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구원을 주시는 것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그것을 배우고,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통해 자기 삶의 초점을 하나님 나라에 맞추고,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상의 헛된 유혹을 극복하면서 이중적인 삶에

비로소 마침표를 찍을 수 있습니다. 제가 5~6학년 시절 고민했던 것을 여러분에게 나눴던 적이 있습니다. 아주 간단해요. 성경을 읽으면 우리는 천국 가는 것에 대해서 고대하고 소망해야 하는데, 왜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할까? 이것이 어린 저의 눈으로 설교를 듣고 말씀을 들으며 생긴 기준과, 삶에서 마주하는 모습 사이의 괴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이재철 목사님도 책에서 비슷한 관점으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끔 끔찍한 대형 사고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분들의

간증을 듣게 된다. 함께 있던 사람이 모두 죽은 죽음의 현장에서 혼자 살았다는 것은 참으로 감격적인 일이다. 그래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살아난 것만을 자랑하는 분들은 자신의 간증이 천국보다 이 세상이 더 좋다는 것과, 죽은 사람은 다 불쌍하다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강조했음을 간과하고 있다. 정말 천국을 믿는다면, 그 사고의 현장에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 주님을 믿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날

천국에 영광스럽게 입성했음을 알아야 한다. 오히려 살아난 사람이 그날 그 영광에서 제외된 것이다. 이것을 바르게 깨닫는다면, 이 땅에서 못다 한 무엇이 남았기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남겨 두셨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 경우 그의 간증을 분명히 그 내용이 달라질 것이다.” 성경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기준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약 여전히 내 기준으로 성경을 본다면 성경은 이해하지 못한 이야기 뿐입니다.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은

베드로나 참수형을 당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바르게 알 때 우리는 죽음의 의미도 다시금 되시기며, 죽음을 초월할 때 신앙과 현실의 괴리가 메워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을 믿는다면서도 실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보다 더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일평생 이중적인 태도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탄생 이전부터의 계획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며 구원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딤후 3: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성경을 주신 목적인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구원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나타내는 총론이라면, 이것은 각론인 셈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답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게, 영원한 생명을 얻은 사람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을 이루어가는 삶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경은 주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교훈합니다. 또한 책망합니다. 그리고 교육합니다. 그렇게 훈련을 통해 온전한 사람과 온전한 선행이 우리 안에 완성되어 가도록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은 중단 없는 훈련에 의해 가꾸어지는 법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당신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묻는다면 저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저는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저에게 이미 길을 보여주셨다고 믿고, 저를 그 길로

초청해주셨다고 믿습니다. 제가 이 길을 끊임없이 걸어간다는 것은 바로 이 길 되신 주님을 부단히 닮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냉정하게 저를 보면 제 안에는 그리스도를 닮은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대적하고자 하는 죄악과 욕망과 옛사람의 모습들이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저의 죄악 된 본성과 싸우기를 원하는 것은 제 안에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선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그것이 내가 나아갈 길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머나먼 길이고, 끝내 주님을 온전히 닮지는 못할 수도 있겠으나... 저의 하루하루가 주님을 향한 마음들로 채워지고 그 안에 작게라도 열매들이 맺히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은 나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나의 변화는 다른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사건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통해서 그렇게 주의 사랑을 느끼고 배워왔듯이 말입니다. 오늘

이 설교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기를 원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살기 원하고, 하나님 안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꿈꾸는 분들이 계십니까? 그 답을 다른 것보다 주의 말씀 가운데서 찾기를 꿈꾸십시오. 그것을 다짐하십시오. 성경을 펴서 읽고, 지난 설교를 다시 듣고, 마음에 묵상하며, 그것이 나를 향한 말씀으로 심기어질 수 있도록 마음에 담으십시오. 말씀과 가까워지는 것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너무나 중요한 통로입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주님께 한

걸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