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 주일

변화입니까? 변질입니까? / 강정규 목사 (2021.10.24) - 1부

2021-10-24 · 출애굽기 32장 · 강정규 목사

아래 글은 유튜브가 자동으로 받아쓴 자막입니다. 사람이 옮겨 적은 것이 아니라 기계가 들은 것이라 잘못 적힌 낱말이 섞여 있습니다. 설교를 찾고 되짚어 보는 데 쓰시고, 정확한 내용은 위 영상으로 확인해 주세요.

출애굽기 25-31장까지 성막을 짓는 법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십계명 돌판을 주신 하나님의 모습을 살펴봤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모세를 시내산 정상으로 부르셔서 대면하여 가르치셨던 것들이지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나라 언약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교육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가 있는 동안, 산 아래 백성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멀리 떠나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것이 출애굽기 32장부터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머문 시간은 40일입니다. 그 시간 동안 산 아래에 있는 백성들 안에 그 시간 속에서 동요가 일어납니다. 40일의 부재.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시간이죠. 여러분이라면 어떠실까요? 자신들을 이끌고 왔던 하나님과 눈에 보이는 지도자 모세.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을 때까지는 하나님도 이들 가운데 역사하셨고, 모세의 모습도 보였는데... 이제는 하나님도 말씀하시지 않고, 모세는 산에 들어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기다림을

견디지 못하고 아론에게 요구합니다. 어떤 요구입니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만약 여러분은 제가 갑자기 하나님께 기도하러 간다고 하고 40일이 되어가도록 연락도 없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경찰에

신고하시겠죠.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기다림에 힘겨워할 수 있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옳지 않았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없는 것 같은 삶을 오래 살다가 이제 막 광야로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교육을 받는 상황입니다. 이제 막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나님의 뜻인 율법을 가르치고, 또 예배하는 법을 가르치고 이런 순간입니다. 신앙의 단계를 3단계로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영적 아이의 때, 영적 청년의 때, 영적 부모의 때가 있습니다. 영적

아이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막 시작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기 시작하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는 것. “아, 내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구나.” 이것이 영적 아이의 특징입니다. 이런 영적 아이의 특징이 있다면, 자기 혼자 잘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혼자 잘 성장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지요. 누군가가 돌보고 도와줘야 합니다. 영적 성장의

시간은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예수 믿은 지 10년 됐어요”라는 물리적 시간이 의미가 없습니다. 10년이 됐든, 20년이 됐든 영적 아이의 특징을 보인다면, 영적 아이입니다. 영적 청년의 때는 무엇일까요? 청년의 특징은 2가지입니다. 1) 자립하기 시작한다는 것, 2) 자아 정체감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독립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살아나갈 수 있는 자립을 배워나가고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갈지를 발견해 나가는 때입니다. 영적 청년이란,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을 통해서 자기가 누군지를 알게 됩니다. 영적 아이일 때는 모호하고 흔들거렸다면 이제 자기정체감이 확실해집니다. “나는 예수님 때문에 이런 존재가 되었다”라고 고백할 수 있죠. 또한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자립의 능력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감격하고, 넘어져도 은혜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이 영적 청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 부모의 때가 있습니다. 부모란 아이를 낳은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돕고, 갓 태어난 영적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도록 돌보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영적 부모란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가는 존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이끌 수 있는 사람들이 영적 부모입니다. 이것은 내 육체적 나이가 청년이라고 할지라도 영적 부모일 수 있고, 장년이라고 할지라도 영적 아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저도 아동부, 중고등부, 청년부, 장년부 사역을 다 해봤는데요. 아동부, 중고등부라고 할지라도 거기에 영적 청년도

있고, 심지어 영적 부모도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부를 맡았을 때, 아이는 40~50명이 되었는데 교사는 아직 잘 갖춰지지 못했던 때가 있어요. 그런데 헌신 된 학생 리더들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2학년쯤 된 회장이 저와 나눠서 애들을 심방하고, 연락하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영적 부모의 마음으로. 그런데 장년부 중에 교회에 오래 다녔는데 아직 영적 아이인 분들도 있습니다. 누군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혼자서 신앙을 지키는 것조차 버거운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오늘 우리의 초점이 ‘변화’에 있기 때문이에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부터 계속 원망하고 불평을 했습니다. 우리 표현대로 말하면, 어지간히 징징거렸어요. 그래도 하나님이 그때까지는 다 맞춰주셨어요. 물 달라고 하면 쓴물도 단물로 바꿔주시고, 반석에서 물을 내기도 하셨습니다. 먹을 것도 해결해주셨어요.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맨 처음에 모세를 부르실 때, 모세의 요구대로 기적도 그 앞에서 경험하게 해주시죠. 출애굽기

4장에 보면, 떨기나무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 앞에 섰을 때, 모세의 나이는 80세인데 아직 영적으로는 나약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서 네가 나를 위하여 바로에게 가라고 할 때, 이 핑계 저 핑계를 댑니다. (출 4:1) 모세는 이렇게 말씀을 드렸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님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하나님이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또 손을 품에 넣어보라고 말씀하시죠.

손을 품에 넣었다가 빼니까 나병이 생기고, 다시 넣어다 빼니까 회복됩니다. 그래도 모세가 또 핑계를 댑니다.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제가 사역을 배분할 때 가끔 듣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나 그랬어요. “목사님, 저는 말을 잘 못 해서요.” 하나님이 이런 모세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내가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자, 이제 모세가 갔을까요? 아닙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아마 우리가 옆에 있었으면 모세에게, “야, 너도 참. 어지간히 해라.” 이렇게 말했을지도 몰라요. 하나님도 이때는 모세를 향하여 노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느냐, 그가 말을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와 함께 가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민족의 지도자 모세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자라갑니다. (출 33:11a)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민수기에 보면 이러한 기록도 있습니다.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 제가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이 표현은 ‘야생마가 길들여지다’라는 뜻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삶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훈련 가운데 성숙해가는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의 너무나 좋은 신앙적 모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는 이제는 백성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 그것을 바르게 인도하여 줄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 영적 부모가 되었음이 나타납니다. 홍해 사건에서 앞에는 물이 가로막았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쫓아오니까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원망합니다.

“우리가 애굽을 섬길 것이라 그랬는데 왜 우리를 여기 데려와서 죽게 하느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난리를 피웁니다. 그때 모세가 그들을 향해 뭐라고 합니까? (출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출애굽기는 이런 모세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드디어 훈련된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계명을 받고, 하나님께 교육을 받기 위해 시내산 꼭대기로 올라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직은 ‘영적 아이’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들이 더 자라나야 했음을 충분히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지금까지 경험한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 재앙, 유월절, 만나, 홍해, 시내산 현현 등 이들이 하나님을 경험해 왔기에, 이들도 이제는 언약까지 맺은 후에는 ‘영적 아이’는 아니라 적어도 ‘영적 청년’으로는

자랐어야 합니다. 여러분. 공동체 안에는 언제나 성숙의 시간이 다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것은 신앙생활 연차랑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일찍 알았으나,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삶을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른 아이. 영적인 ‘어른 아이’입니다. 영적 청년이 되면서 우리가 부모의 일을 돕듯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고, 영적 부모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영혼들을 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의 신앙적 목표는 영적 부모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모세도 40세에는 자기 힘대로 하려다가 실패하고, 80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핑계만 대고 회피만 하려는 시간을 거쳐서, 끝내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영적 부모가 된 것이죠. 어느 공동체나 그 안에는 성숙의 시간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공동체가 좋은 공동체일까요? 영적 아이가 영적 청년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영적

부모들이 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이 공동체에 어떠한 마음으로 오게 되었든지, 초신자건, 상처 입은 성도이건, 그들이 치유되고 자라가서 결국에는 주님 마음으로 다른 영혼들을 돌볼 수 있는 공동체로 자라가는 선순환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나 살아있는 공동체이고 열정과 사랑이 있으면 더더욱 오히려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는 공동체는 움직이게 되고 그 안에서 우린 모두 다르기에 갈등이 생길 수 있어요. 안 그러려면 살아 있으나 죽은. 아무것도

안 하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거예요. 그럴 수 없죠. 교회에는 주님의 비전과 사명이 있는데…. 그런데 그러한 갈등을 맞이했을 때, 그 갈등을 잘 소화해내는 공동체의 특징은 성숙한 신앙인, 좋은 리더들이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도 도표를 보여드렸잖아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중심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그분의 모습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데, 목사의 역할은 그중에 가장 먼저 그런 모습을 보이는 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뿐

아니라 성도님들 중에서도 그런 모습으로 먼저 섬기고, 더욱 사랑하고, 함께 아파하며 기도해주고, 위로하고. 이런 주님 닮아가는 모습들이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영향을 받습니다. 어쩌면 목사가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서 감동이 적어요. 그런데 그런 성도들의 모습이 서로 안에 좋은 전염을 일으킵니다. 만약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이름도 나와 있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면, 애초에 문제들이 생기지도 않았을 거예요. 불평과 원망이 있을 때도 잘 토닥이고.

내가 가진 것을 조금 더 나누어 아직 불평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들의 짐을 들어주고. 위로하고. 힘내자고 이러면 그 불평은 금세 사라질 것입니다. 모세의 부재 가운데 동요할 때도, 괜찮다고. 하나님이 우리 지도자를 지켜주실 것이라고. 우리는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자고. 이러는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 있었다면 적어도 이들의 기다림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여러분. 죄에는 언제나 전염성이 있습니다. 분노도 전염됩니다. 원망도 전염됩니다.

내가 불평을 꾹 참고 있는데, 누가 먼저 불평을 쏟아내면 나도 거기서 이제 불평을 쏟아내죠. 그럼 불평 안 하던 사람들도 불평합니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 우리가 불평하는 것이 당연해.” 저는 여러분이 입 닫고 눈 가리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통함과 마음의 괴로움은 사람에게 쏟아낼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 앞에 쏟아 놓으십시오.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니거든요. 우리가 그분께 가면 그분의 선하심 안에서

위로를 받아요. 우리가 영향을 받죠. 그런데 연약한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안 좋은 것에 영향을 잘 받습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이 금송아지 사건에서 ‘반면교사’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로 모세의 형이자, 모세의 부재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사람. ‘아론’입니다. (출 32: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백성들의 이 요구 앞에 아론이 보여야 할 반응은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이래야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과 얼마 전, 이곳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으며 그분께 약속한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과 법을 따르겠다고 말입니다. 그 율법의 첫 번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두 번째 계명은 무엇입니까?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해주셨음을 우리가 모두 경험했습니다. 우리를 인도할 다른 신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 정도는 말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 잘하는 아론이 백성에게 뭐라고 대답합니까? (출 32: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충격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부모가 되어주어야 할 아론이 우상숭배에 앞장서고 있는 것입니다. (출 32: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출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출 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출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이 출애굽 이후 가장 주도적으로

한 일이 우상 만드는 이 일입니다. 그들이 만든 것이 황금송아지입니다. 소는 고대 근동지역에서 풍요와 다산의 신으로 숭배되었습니다. 이집트의 멤피스에서는 황소의 신 ‘아피스’가 숭배되었고, 온에서는 역시 황소의 신 ‘므네비스’가 숭배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송아지 숭배는 이집트에서 그들이 보았던 것을 토대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형상 만들라고 하면 어떻게 만들어요. 우리가 그분을 본 적이 없는데. 그러니까 그들이 당시에 다 이해할 가장 매력적인

것을 모양으로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중고등부 아이들과 수련회 때, <비전 스케치>라고 내가 꿈꾸는 비전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지곤 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알아서 그리라고 했어요. 10년 전쯤이었어요. 아이들 중의 상당수가 ‘돈’을 그렸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꿈이라는 것입니다. 뭐 그걸로 좋은 일을 하겠대요. 뭘 통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돈 많이 버는 것이 꿈이에요. 작년에 드디어 우리 교회 수련회에서도 비전 스케치를 했습니다.

10년이 지났어요. 우리 아이들이 가장 많이 그린 그림이 무엇인지 아세요? <게이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황금송아지’가 자신들의 로망을 담아낸 것이죠. “이것이 우리를 이끌어 줄 거야.” 지금 우리에게는 ‘돈’의 모양을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게임’일 수도 있겠죠. 우리의 욕망이 빚어낸 신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제단을 쌓고 예배합니다. 번제를 드리고, 화목제를 드리고, 그 앞에서 백성들이 앉아서 먹고 마시다가, 흥청거리며 뛰어놉니다.

함께 자신들의 욕망을 담은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거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안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죄성과 무지와 연약함이 이것입니다. 아니, 연약함이 아니라 악함이겠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잠시 나에게 말씀하지 않으면 마음에서 내다 버리고, 지금 내 눈앞에서 나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것에 기쁨과 안정감을 부여하고 즐거워합니다. 아론은 그 앞에서 그 일을 진두지휘합니다. 그런데 아론의 못난 모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나중에 이 일에

대한 모세의 책망이 이어졌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출 32:22) 아론이 이르되 내 주여 노하지 마소서 이 백성의 악함을 당신이 아나이다 (출 32:23) 그들이 내게 말하기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노라 하기에 (출 32:24)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금이 있는 자는 빼내라 한즉 그들이 그것을 내게로 가져왔기로 내가 불에 던졌더니 이 송아지가 나왔나이다 세상

못난 모습이죠. 백성들의 악함 때문이었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그저 자기는 금 모은 것을 던졌을 뿐이라고 변명합니다. 여러분, 언제나 남 탓을 하고 핑계를 찾는 사람은 자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넘어졌음을 인식했으면 거기서부터 진실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통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다 그러면서 자라가는 것이잖아요. 한국교회의 과거를 이렇게 표현할 때가 있었습니다. “모여라. 돈 내라. 집 짓자.” 모이는 것도 필요하고, 헌금과 헌신도 주의 나라를 위해 필요하고,

공간도 사역을 위해서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우리의 본질적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모이는 것 이상으로 흩어진 삶에서의 사명을 강조해야 하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모든 물질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다룰 수 있어야 하며, 집 짓는 것보다 우리 마음의 거룩한 성전을 온전하게 짓는 것이 더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그 중심을 놓쳐버린 한국교회 중의 상당수는 이제는 회복할 수 없을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걱정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 걱정해주는 교회가 되어버리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빛을 잃어버린 교회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며 이런 짓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눈은 그들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지요. 7절입니다. (출 3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하신 말씀에서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네 백성’이라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나의 백성이라고 말씀해 오셨습니다. (출 3: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출 3: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으로, 바로의 백성을 ‘네 백성’으로부터 구별하셨습니다(출

8:23). 우리가 이번에 하는 구약의 파노라마 모션에서도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하나님의 뜻을 전할 때 “내 백성을 보내라!”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실 때만 하더라도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황금송아지 사건을 보신 후에 그들을 ‘네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신했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금송아지를 숭배한 이스라엘을 ‘네 백성’으로 칭하신다는 점은 멸망에 이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심각한 범죄를 드러냅니다. 둘째는 ‘부패’라는 단어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성숙한 변화를 한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모습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적 아이에서 청년으로, 청년에서 변화로 성숙해가는 변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영적 청년이 다시

아이가 되기도 합니다. 아이에서 하나님을 떠나버리기도 합니다. 저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도 보았지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변질되는 것도 보았습니다. 정말 열심히 사역했던 학생들, 청년들이 어느 순간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들도 많이 경험했습니다. 정말 돌아올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돌아오고 성숙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는 기쁨도 있지만, 정말 아름답게 신앙생활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버리는 것을 보면 너무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 우리의 육체는 나이를 먹지만, 그 시간들 안에서 우리의 영적 상태는 어느 쪽으로 가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고민을 해봐야 합니다. 물론 좋은 공동체가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힘이 될 수는 있겠죠. 그것이 제가 좋은 공동체를 세워가고 싶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가까이 시내산에 머물렀던 백성들도 배교했습니다. 외부에서 나를 변화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 안이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향하여

변화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과 멀어지는 방향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이들에게 심판을 선언하십니다. (출 32: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출 32: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교만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보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신상을

기뻐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불신앙의 모습 앞에 사용되는 표현이죠. 목에 깁스를 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버려 두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식 직후 우상숭배를 자행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 불이행의 원칙대로 진멸하시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비전까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우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1세대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기회 앞에 섰지만, 그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을 때는 2세대를 기다리십니다. 저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사용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귀한 비전에 함께 하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우리가 변질되면 하나님은 다른 사람 혹은 다른 세대를 사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도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세만큼은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셔서 모세를 통해 다른 대안적 나라를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세요. 즉 모세는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모세의 모습에 주목해야 합니다. 모세가 예전의 모세가 아니지요. 만약 예전의 미성숙한 모세였다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모세가 하게 됩니다. (출 32: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출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모세 안에 ‘영적 부모’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존으로 안도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품고 여기까지 함께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판에 대하여 그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아가 스스로 그들 가운데 악을 가려

심판합니다.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드리고 금송아지를 불살라 가루로 만들고 이스라엘에게 마시게 합니다. 학자들은 이 모습이 민수기 5:11-15에 나오는 시험 의례로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의심받는 아내가 쓴 물을 마심으로 진실이 드러나는 내용인데, 우상의 가루를 마신 후에 모세는 레위 지파를 통해 3,000명의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데, 바로 이 물을 통해 우상숭배를 일으킨 주동자가 드러났다고 보는 견해입니다.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3,000명은

우상숭배와 관련되어 심판당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들의 죄에 대해 다스린 모세는 이스라엘 전체 백성들의 죄를 회개할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이때 모세의 간청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출 32: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모세는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모세는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하나님께 간청합니다. 부모라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모든 부모라면 자녀를 향한 그 마음에 공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살려줄게” 할지라도, “차라리 자녀들을 살려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세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 민족의 부모인 하나님은, 모세의 이

모습을 보시면서 흐뭇하셨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이러시지 않았을까요? “오~ 모세. 이제 제법 많이 컸네.” 아마도 모세의 이러한 모습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용서의 마음을 갖게 되셨을 것입니다. 신약에 가면, 바울 사도 또한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이것이 우리가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 바로

그들이 공동체 안의 영적 리더들인 것이고, 영적 리더란 다른 것이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최근 ‘오징어 게임’이라는 넷플릭스 드라마가 큰 유행이지요. 아마도 보신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그런데 저는 목사로서 문화를 해석하고 설명해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기에 30분 정도 편집된 영상들을 찾아봤어요. 이 드라마가 던지는 주제가 하나 있죠. 사람을 믿는가? 거기서 이정재가

연기한 ‘기훈’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 대사가 유명합니다. “원래 사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데가 없으니까 믿는 거지.” 맞습니다. 사람은 믿을만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댈 곳이 없는 것 또한 인간의 한계입니다. 만약 누군가, 저에게 “자네는 사람을 믿는가?”라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사람은 안 믿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나아가는 사람을 믿어주고 싶습니다.” 제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믿을만하지 못한 우리를 변화시키고 성숙시켜서 사용하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일에 전문가이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그렇게 사용하셨고, 바울도 그렇게 사용하셨고, 우리도 그렇게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그럼, 여러분이 그 변화를 위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말씀 한 구절로 그 해답을 드리며 마치겠습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모세 옆에는 그를 따라다니던 부관인 여호수아가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친구와 같이 대면하며 친밀한 교제를 누릴 정도로 성숙한 모세. 그가 하나님과 그렇게 사귐을 누리는 것을 바라보던 사람이 여호수아였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마치고 돌아가지만, 젊은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또한 모세를 보면서 자신도 모세처럼 하나님 안에 성숙한 사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집념이죠. 우리가 알고 있는 여호수아는 한순간에 나타나서 출애굽 2세대의 지도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성숙한 변화를 해나갔던 것입니다. 변화로 하나님께 나아갈 것인가, 변질되어 멀어질 것인가. 이제 여러분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