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간 이후에 음질이 좀 좋지 않습니다. [휴대폰 녹음 버전] 음질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디오 수정본] 음질은 조금 더 나은 영상입니다. 우리는 이재철 목사님이 쓴 <새신자반>을 기초로 해서 신자로서 배워야 할 것들을 정리해 가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씩 계속 새신자반 책을 언급하는 것은, 저는 설교 표절을 하지 않기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어떤 책을 사용해서 설교하게 된다면, 그 출처와 원문을 밝힘을 통해 저의 양심도 지키고, 이 귀한 설교의
시간도 소중하게 대하고자 합니다. 책을 읽어보면 제가 설교를 풀어가는 방식과 조금 다를 수 있지만, 이 설교의 전반적인 흐름은 <새신자반>의 내용에 기초하여 나아가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큰 흐름과 내용에 동의하기에 전하는 것이고, 중간중간 일부 동의하지 않는 예화나 주장은 생략하기도 합니다. 가급적 제가 다시 소화해서 우리에게 맞는 방식으로 전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오늘은 기도의 두 번째 시간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굳이 소통하실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과 언제 어디에서든 우리의 언어로 대화를 나누고, 또 응답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죠. 우리는 지난 시간에 기도를 다룸에 있어서 세 가지 질문을 던진 바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도라는 엄청난
특권을 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둘째, 정말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될까요? 셋째, 과연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요? 없다면 하나님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실까요? 1. 하나님께서 기도란 특권을 주신 까닭이 무엇인가? 기도의 특권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당신을 위해 인간에게 부여하신 것입니다. 마치 대통령으로서 누리는 특권이 국민과 나라를 위해 주어진 것처럼, 기도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 인간에게 허용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르고 아름답게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인간이 기도의 특권을 계속 자신의 욕망만을 위해 남용하고 오용한다면, 그는 끝내 그 특권을 주신 하나님의 외면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 기도하면 무엇이든 응답 되는가? 아마도 기도를 배움에 있어서 ‘응답’에 대한 궁금증이 가장 많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기도의 시작은 나의 문제를 위해서 무엇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좀 더 발전된 기도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성숙한 기도가 있다면 그야말로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기도입니다. 내가 그분 앞에서 그분의 나라와 뜻을 위해 살기를 힘쓰고 다짐하며 나아갈 때, 동시에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돌보시고 채우십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지난 시간에 나눴던 결론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시는지는 주님께서 더욱 잘 아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 응답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응답이라고 느끼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답이 올 때 응답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내게
좋지 못하다면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방식으로 응답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기도에 대한 예화를 들을 때면, ‘브루스 올마이티’라는 영화를 자주 예화로 소개하곤 합니다. 영화 속에서 신은 ‘브루스’라는 인간에게 자신의 자리를 잠시 맡깁니다. 브루스는 신의 능력을 행하게 됩니다. 신의 능력을 마음껏 행하며 기적을 베푸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신에게는 한 가지 중요한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기도는 읽고
‘Yes’, 어떤 기도는 ‘No’라고 반응을 해줘야겠죠? 어떤 것에는 ‘wait’이라는 싸인을 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브루스는 귀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모든 기도를 다 응답해주면 사람들이 좋아하겠지? 그는 모두 ‘Yes’라는 자동응답 버튼을 누릅니다. 얼마 후 인간세계는 난리가 납니다. 사람들의 이기적인 모든 기도가 응답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서울대를 합격시켜달라는 기도를 모두에게 응답해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까지 다 그 대학에 들어가면 곧 그 대학은 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복권 1등 당첨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를 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고, 모두 1등이 돼버립니다. 그러자 1등 상금은 휴짓조각이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분노하여 폭동을 일으킵니다. 누구나 기도의 응답을 원하지만, 사람들의 기도에 ‘yes’라는 응답을 하는 것이 옳은 응답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예화입니다. 만약 내가 드린 기도에 응답이
없는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때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응답을 하셨거나,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내 삶에 꼭 필요한 응답을 주시기 위해 거절하신 것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시험을 앞두고 기도를 요청하면, 항상 같은 방식으로 기도합니다. “요행이 아니라 준비한 실력을 잘 발휘할 수 있도록 지켜주옵소서.” 저는 기도 받는 사람이 노력한 결과가 잘 나타나기를 바라지만, 노력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나기를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기도의 응답은 그 사람을 망칠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저 돈을 잘 벌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기보다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할 수 있는 지혜와 건강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깨달음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 또한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면서 오늘 설교를 통해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메시지가 온전히 전해지길 바라야지, 아무런 설교 준비도 하지 않고 인터넷에 떠도는 설교 원고를 구해놓고 예배 30분 전에 한번 읽고 올라가서
은혜가 있길 바란다면, 그 기도가 이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새신자반> 책에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J군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고3일 때 그의 주변 친구들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불법적인 과외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J군과 부모나 모두 신앙 양심에 따라 법이 허용하는 학원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또한 매일 30분을 말씀 묵상과 기도에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J군의 어머니는 기도를 많이 하기로 소문난 분이고, 아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했음을 두말할
나위가 없죠. 그런데 그해 대학 입시에서 J군은 낙방했습니다. 재수를 합니다. 그는 재수를 하면서도 여전히 방법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사람들이 말합니다.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현실은 현실이니 비밀과외를 시키라고 부모에게 권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정중하게 사양했습니다. 그저 자신의 아들이 옳은 길을 걸어가기를 기도했습니다. 1년이 지나 다시 시험을 봤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떨어집니다. 이렇게 신실한 젊은이를 하나님께서 합격시켜 주시면
좋을 텐데 다시 떨어진 것입니다. 삼수가 시작됩니다. J군은 여전히 비밀과외를 받지 않았고, 신앙생활도 종전과 똑같이 하였습니다. 그러자 주위에서 부모를 향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는 철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부모가 아이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끝까지 J군의 편에 섰습니다. J군은 삼수 끝에 원하는 대학에 합격했습니다. 부모가 충분히 돈이 있음에도 정도를 걷기 위해 주위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자식의 삼수를 뒷바라지한다는 것은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J군 본인 역시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기도하며 시험을 준비하고, 성실하게 옳은 방법으로 준비해나가는 그들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왜 3년씩 그토록 힘든 과정을 거치게 하셨을까요?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3년이 J군의 삶에, 그리고 그의 부모의 삶에 필요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고비에서도 3년간 정도를 걸은 J군의 삶은 아마도 계속 그 길을 걸어갈 힘을 갖추게 되었을
것입니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도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과 함께한 그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살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입시를 앞둔 자식에게 거리낌 없이 불법 과외를 시켰고, 주일에 교회 가는 것 자체를 말렸다. 그래서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한들 벌써 불법을 예사로 저지르고, 이미 부모와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버린 청년들이 허다하다. 앞으로도 그들은 상당 기간 인생을 허비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 청년들의 삶을 볼 때마다 J군의
삶은 사랑스럽다. 그가 3년을 허비한 것 같으나, 실은 그 3년으로 그는 진리 안에서 일평생을 산 것이다. 돌아간 것 같지만, 하나님 안에서 최선의 지름길을 간 것이다.” 여러분, 저의 삶에도 좋은 결정과 좋지 못한 결정, 때로는 여러 부끄러움이 지난날 가운데 있습니다. 그래도 제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결정해서 지금 생각해보면 잘했다고 여겨지는 것이 있는데요. 목회자 세계에서는 전도사와 목사라는 구분이 여러 차이를 가져옵니다. 마치 연예계에서도 나이보다
‘데뷔 연차’를 따지듯, 목사 세계에서도 목사 안수를 받은 순서가 중요하게 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우 지극히 현실적인 얘기로는 아주 박봉인 전도사보다 그래도 목사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우를 받기도 합니다. 10년 전, 제가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풀타임으로 사역을 하면 전도사 시절에 150만원 정도를 받았는데, 목사가 되면 20~30만원 정도는 더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차이는 되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대학교 시절 선교단체 활동과 훈련 등으로 휴학을 많이
해서 이미 대학원을 진학한 것이 동기들보다 1~2년 늦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목사 안수 자격을 갖추었을 때가 2015년이었습니다. 동기들 중 상당수는 2014년에 안수를 받았죠. 2015년 목사 안수를 받는 것으로 교회와도 다 이야기가 되어 있었고, 안수 후에는 목사의 직책에 맞게 사례비도 인상을 약속받은 상태였습니다. 목사 안수를 기다리며, 서류 준비 등은 다 끝났고, 마지막으로 3일의 안수 교육만 받으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3일 동안 교육이 있는 것은
아니고 마지막 날만 교육이라서 그때만 참여하면 되었는데, 그해에는 첫날부터 참여하라고 공문이 왔습니다. 그런데 제가 첫날이 외부 수련회 설교를 하는 사역이 약속되어 있어서, 혹시 수련회를 인도하고 첫날 저녁부터 참여를 할 수 있는지 문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승인되면 사역을 하고 참여하고, 안되면 사역을 포기하고 가야 하는 일정이었죠. 저는 당시 모교회 소속으로 안수를 받았기에 담임목사님인 아버지를 통해서 문의했는데, “괜찮다”라는 답변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날 사역 마치고 교육 장소인 천안에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목사안수 교육을 담당하는 실무자는 그런 전달을 받지 못했고, 그것은 공문의 내용에 따라 첫날 저녁에 왔으니 안수가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수는 1년에 한 번이니, 결국 이로 인해 1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저와는 좀 이유가 다르지만, 그날 저 말고도 아무 연락도 없이 늦게 참여한 사람들은 원칙대로 안수를 받을 수 없다고 통보를 하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연락을 드려서
사전문의를 했고, 저녁에 와도 된다고 허락을 받았기에...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는데, 알고 봤더니 아버지께서 문의하고 답변을 받은 분은 목사 안수 교육 담당자가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교단 총무님이었습니다. 그러니 제 나름대로 절차를 거쳤다고 하지만, 그것이 의도하지 않게 실무자를 건너뛰고 그 윗선에 이야기해서 승인을 받은 모양새가 되었죠. 그러다 보니 교단 총무님까지 그 자리에 오셔서, 그 실무자에게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고자 ‘그냥 해드리세요’라는 상황이었습니다.
교단에도 나름 직책과 상하관계가 있으니, 그 실무자도 자신은 이것을 해주면 원칙에 맞지 않아서 해주기 싫지만, 또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허용을 하게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그냥 버티면 안수를 받을 수 있는 상황이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제 마음을 가장 고민하게 하는 마음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친분이 있으시던 교단 총무 목사님께 연락해서 승낙을 받게 된 상황인데, 내가 만약 아버지가 목사님이 아니었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분명 고의는 아니었고, 만약 정상적인 소통을 했다면 수련회 사역을 취소하고 왔을 테지만... 이미 상황은 이렇게 흘렀고, 이 상황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은 받을 수 없는 특혜를 누리며 목사안수의 길을 가는 것이 맞을까? 어쨌든 결정은 저에게 넘어와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이 컸습니다. 그러나 실무를 담당하는 목사님과 같이 안수를 받는 동료들에게 부끄러운 상황이고... 제가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 버리면 아버지와 승낙해준 총무 목사님이 조금 난처해지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저는 그날 새벽까지 고민하다가 목사 안수를 그 해 받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후배가 해줬던 한마디가 제 결정이 옳았음을 느끼게 해줬는데요. “그래요. 내가 아는 선배에게는 그 결정이 어울려요.” 물론 그날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미안했고, 무엇보다 아버지께 굉장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컸습니다. 결국 1년 더 늦게 안수를 받아서 2016년에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로서의 시작을 하는 순간인데, 그 시작부터 불편한 마음을 무시하고 그 길을 내디뎠다면,
저는 그 이후로 더 쉽게 많은 부분에 타협하고 흔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그 이후에 마주한 것이 세습에 대한 것이었는데, 제가 그때에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제가 생각하는 더 가치 있는 길을 지켰던 그 노력을 무너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날 제게 주어진 약간의 유익함이 있는 길보다, 마음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원하시는 것에 집중하고자 했고, 그러했기에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 조금은 느리지만 조금은 더 당당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돌아보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선택이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저는 목사 안수를 늦게 받았어도 지금도 잘 목회하고 있고, 세습하지 않았어도 아버지 밑에서 평생을 보고 배운 것을 잘 떠올리며 열심히 목회하고 있습니다. 목사의 아들로 자라며 알게 모르게 많은 훈련을 받을 기회를 가졌던 것 자체가 저는 이미 복을 받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상을 바란다면 그것은 제 욕심이었겠죠. 이 일은 제가 옳은 선택을 했던 것을 나누었지만,
여전히 제 삶에서 순간순간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고, 또 후회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훈련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하나님 마음을 잘 알고, 하나님의 응답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자가 되고 싶지요. 제가 여러분께 J군 이야기와 저의 이야기를 나누며 드리고 싶은 권면은,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 내가 원하던 것과 다를 때... 그 선택으로 잠시간 내게 불이익과 손해가 발생하는 상황일지라도 그 길을 선택해서 가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항상 내 눈에 좋은 길, 더 이익이 되는 길이 하나님이 내 앞에 펼쳐놓은 주님의 길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즉, 주님이 주시는 길은 꽃길이 아닐 수 있어요. 때로는 가시밭길 같아 보이고 남들이 봤을 때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듣는 어리석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선택하면, 그 길을 지나 주님이 진짜 예비해놓으신 길을 걷고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이 정하신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도 응답을 받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 눈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 속에는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주시는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됩니다. 어린아이가 요구하는 것만 주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실상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진짜 그들이 자라면서 필요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지요. 그러므로 나머지는 모두 부모가 알아서 마련해 줍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만을 얻는다면, 그 어린아이는 제대로 자랄 수 없을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구하는 것은 실상 없어도 괜찮은 것들이요, 부모가 미리 알아서 준비해 주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기도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기도함으로 얻는 것은 실은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서도 물과 공기와 태양을 얻습니다.
우리가 미처 이것들이 생명과 직결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돌아보면, 기도하지 않고서도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것들을 모두 얻었습니다. 만약 지금도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한 시간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구하는 것들은 우리에게 없어도 되는 것들이요, 우리의 생명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들입니다. 이 사실을 진정으로
깨닫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함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에 우리의 충성을 다 바칠 수 있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이 책의 초판본을 1994년 외국에서 썼다고 합니다. 1994년은 그분의 안식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식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새신자반’을 탈고하여, 그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보답하려고 계획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상 안식년이 시작되자 더 바쁘기만 했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들 때문에 책을 쓸
틈을 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해 7월 초까지 겨우 제1장을 마쳤으므로, 연말까지 집필을 끝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뜻하지도 않게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로 이재철 목사님을 아름다운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산속. 새들의 울음소리가 아름답게 들리고 산내음은 신비롭기 그지없었습니다. 산봉우리에 둘린 구름과 안개 그리고 파란 하늘과 빛나는 태양, 그 모든 것이 아름다운 예술 작품 같은 곳. 온종일
방 안에 앉아 있어도 창문을 통해서 사람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그때까지 세상에 그토록 글쓰기 좋은 별천지가 있으리라 상상도 못 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루에 20시간씩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치지 않을 장소에서, 또 그분 곁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조금 전에 말한 것과 같이, 그는 세상에 그런 곳이 있을 줄 전혀 몰랐으며, 또한 그런 곳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가 기도하지 않아도 그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이 필요하신지 먼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재철 목사님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대의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분이시다.” 함께 고백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설교를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풍성한 삶에 대한 양육을 시작했습니다. 가뜩이나 바쁨에 있어서는 이미 충만함이 있는 제 삶에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인도하는 저에게도 풍성함이
더해지고 있습니다. 양육 시간 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 있는데, 그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어려운 경우들이 있죠. 때로는 답답함도 있고, “정확하고 세밀하게 말씀하시면 좋겠는데...” 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모든 것을 다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까? 내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까지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까? 매순간 쉬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많은 말씀에도 버거워하는 것이 우리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원하시는 모든 것을 구체적으로 다 말씀하시면 우리가 살 수 있을까? 때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을 알려주시고, 내 삶에는 필요한 순간마다 종종 말씀을 들려주시는 하나님이 참 감사하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인도하심을 받기 원하지만, 그 인도하심이 내비게이션의 방향 알림 같은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인격적 관계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주제를 다시 묵상해보게 됩니다. 기도의 응답이란 무엇일까? 저는 친밀함 속에서의 신뢰함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이제는 청소년이 되어가는 저의 딸에게 세세하게 많은 것을 지시하지 않으려 하는 편입니다. 어떤 지시 전달보다는 제가 응원하고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해주려고 힘씁니다. 어차피 제가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다 말해도 그것이 저 아이에게 유익하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부담이 되거나 혹은 자발성을 빼앗고 통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큰
엇나감이 있다면 그때는 사랑하기에 깨닫도록 말을 해줘야겠지만, 일상적인 삶에서는 그저 아빠와 엄마가 너의 삶이 행복하길 응원하며 언제든 도울 준비를 하고 지켜봐 주고 있다는 마음을 느끼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저는 옳다고 여깁니다. 또한 자녀로서도 부모의 마음을 잘 헤아리며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모습을 향하여 조금씩이라도 나아간다면, 그것이 성숙하여 가는 길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자신을 보이고 계십니다. 말씀을 통해서, 때로는 경험을 통해서. 이미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통해 어떠한 분인지 각자 알고 있습니다. 깊이는 다를 수 있으나 각자가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나를 이끌어 가신다는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 어쩌면 세세한 하나하나에 대한 응답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큰 음성에 기대어 하나님을 믿으며 내가 아는 그분의 성품에 따라 나도 최선을 다해서 그 길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요. 내 마음 가운데 그 하나님 앞에서 버려야 할 것이 있다면 비워내기 위해 힘쓰고, 그 안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다면 붙잡기 위해 힘쓰고, 나의 삶을 응원해주시고 이끄시고 무엇보다 나를 참 사랑해주시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린다면... 저는 언제나 여러분이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 앞으로 함께 나아가 친밀한 기도의 교제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중간
이후에 음질이 좀 좋지 않습니다. [휴대폰 녹음 버전]
